친구 나리의 UPS 단감 / 김영교
추수 감사절 전날이었다. 우리 집에 커다란 UPS* 상자 하나가 배달되었다. 미션비에호(Mission Viejo)에 사는 대학동창 친구 나리한테서 온 겹으로 잘 포장된 단감 상자였다. 지금은 단감 철이다. 들여다보니 배 보다 배꼽이 더 큰 송료라 고마운 마음에 미안한 마음이 왈칵 겹쳤다.
감동이었다. 전화선 저편의 목소리는 그저 정으로 먹으라는 말만 되풀이해댄다. 뒤뜰 감나무에서 남편이 땄단다. 하나씩 둘씩 차곡차곡 조심스레 싸고 사이사이 신문지를 켜켜이 넣어 상하지 않게 잘 포장한 솜씨도 남편의 것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마음을 함께 싸서 Ups 회사까지 운전하고 가서 UPS로 배달시키기 위해 줄을 섰을 친구 남편의 그 기다림을 생각하며 감을 먹으려니 목이 메듯 싸해 왔다.
우리 집 뒤뜰에도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올해도 그 나무 가지 끝에 감이 송알송알 달려다. 낮 동안 남가주의 푸른 하늘과 이마를 맞댄 감나무는 햇볕으로 옹골지게 속살을 찌워왔다. 나무 가득 달린 수확의 풍성함을 자랑하려던 무렵이었다. 한 해 동안 보살핀 수고를 맛 좀 보자는 듯 그즈음 새들이 몰려와 익은 쪽부터 쪼아 먹어댔다. 그뿐인가, 다람쥐 부대의 습격은 허망한 감 농사의 비애를 안겨주었다. 이참에 나리의 UPS 단감은 속상한 내 마음을 달래기나 하듯 그래서 그 정성이 더 고맙게 다가온 것 같았다. 나리네 동네는 다람쥐도 없고 새들도 없는지 어쩜 이토록 아삭대는 육질의 단물 가득 속살 익은 건강한 단감을 수확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어릴 적 고향의 홍시 감나무가 떠오른다. 마을의 대를 이어 오면서 백 살짜리 감나무에 천 개의 감이 달린다하여 감나무의 고목을 자손의 번창과 득남을 비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효(孝)를 상징하며 서리를 이기고 늦가을까지 버티고 있으니 절(節)이 있는 과일로 쳤다. 그토록 탐스러운 주홍빛을 발하며 위로는 푸른 하늘의 지혜를, 땅에서는 흙냄새를, 저렇게 높이 의연해 있는 모습은 감히 다른 과일이 근접하지 못할 월등한 품격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 감은 주황색일까? 왜 익을수록 껍질도 속살도 같은 색깔일까?
채소와 과일이 다 사라진 늦은 가을철에도 인간은 여러 가지 영양소를 공급받으며 살아왔다. 통통하게 살찐 감 몸집 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어있는 단감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조주의 생태계 조절 솜씨는 과연 인간을 향해 주기만 하는 사랑의 극치라고 깨닫게 된다. 그저 놀랍고 감사할 뿐이다.
내 나름대로 동양의 감이 기독교적인 과일이라고 굳이 믿게 되는 이유는 감나무야말로 그 목수처럼 완전히 주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생 걸로 먹고, 말려서 먹고, 익은 다음에 먹는데 바로 단감이, 곶감이, 또 홍시의 단계가 그렇다. 요새는 감 장아찌로도 먹는다. 어느 과일이 이런 재롱을 피우는가? 새순 돋는 잎은 말려 감잎차를 끓여 마신다. 떨어진 낙엽은 애절한 마음을 적어 연서로 책갈피 속에, 감나무가 연수를 다하면 땔감으로 사용된다. 감을 갈아 짠 즙 액체는 천을 물들이는 물감원료가 되기도 했다. 그뿐 인가! 감나무 장롱은 단단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가구이다. 그야말로 완전 희생을 실천하는 나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기막힌 비밀은 감 씨를 아무리 심어도 감나무는 안 나온다는 것이다. 싹이 터서 나오는 것은 도토리만큼 작고 떫은 고욤나무다. 이때 감나무에 접목해야만 감이 열리는 진짜 감나무가 되는 비밀은 엄청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감 씨를 심어 고욤나무가 나오면 삼사 년쯤 기다린다. 그 줄기를 대각선으로 째고 기존의 감나무 가지에 접을 붙이는 것이다. 완전히 접합되어야, 인내와 기다림 속에서 새 생명인 <감나무>의 발아가 시작된다. 거기엔 생가지를 찢는 아픔이 있고 본 가지에서 떨어져 나가는 떠남의 슬픔도 있다. 그것이 <감나무>란 새로운 생명체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 아닌가. 자기부인(自己否認)의 철저한 떠남 없이는 인간 구원의 도(道)도 없다는, 예수와 접 부처야 믿음 나무에 영생의 열매로 맺히는 유일한 구원의 법칙이 여기서도 명백하게 적용되고 있다. 바로 은혜이며 복음인 것이다. 이 깨달음이 가슴 서늘하게 한다.
계시처럼 비타민의 모체인 베타카로틴이 풍부한 감은 항암과실로 인기가 높다. 주고 또 주는 마지막 혼신의 즙과 액까지 준다. 바로 감식초가 그렇다. 나의 투병 기간 동안 첨가물을 넣지 않고 민간전래 방법으로 숙성시킨 이 식초를 많이 애용했다. 유기산이 많아 항암, 성인병 예방과 피로 회복에 높은 치료 효과를 믿어왔다. 감잎차는 순환기 질환 등 감기 예방에 좋다고 해서 하루에 한두 잔으로 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했다. 나는 아직 살아있고 글도 쓰고 매일 걷기도 한다. 나의 결핍을 충족시킨다고 믿게 만드는 이런 고마운 자연 처방이 어디 있을 꼬!
냉장고에 잘 간수되어있는 나리의 단감은 우리 두 내외에게 건강 대로를 펼쳐줄 게 확실하다. 나리의 단감은 극상품이었다. 보기에도 크고 색깔 또한 곱다. 맛깔스럽게 잘 익어 윤기 자르르 흐르는 정말 탐스럽게 잘생긴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로만 골라 많이도 보내준 나리 내외 마음이 더 극상품이었다. 이런 기독교적인 과일 감 농사를 나리는 자기 뒤뜰에 어떻게 이토록 잘 수확할 수 있었을까. 금 년 감 농사가 흉작인 멀리 사는 나 같은 친구와 UPS로 나누어 먹을 생각을 했는지, 정으로 먹으라는 나리의 음성이 귓가를 맴돈다.
우리 집 감 농사가 잘되어도 나는 UPS로 내 주변 친구들과 내 뒤 뜰 감을 나누어 먹을 생각을 했을까? 다람쥐와 새들과 개미 떼에게 자기 살을 나누어 주는 우리 집 단감나무가 이기적인 내 좁은 생각을 부끄럽게 했다. 나리의 UPS 단감소포는 한 수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
*UPS :United Parcel Service 유피에스는 국제 화물 운송을 주로 취급하는 세계적인 기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