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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 설립 41주년을 맞았습니다. 1983년 3월 첫 주일에 2층에 있는 선교1실에서, 20여명의 20대 청년들이 모여서 처음 예배를 드린 것이 벌써 41년이 되었습니다. 저마다 미래에 대한 꿈이 있었고, 신앙적인 이상과 우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본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신앙의 연조도 짧았고, 혹은 여러 가지 청춘의 고뇌와 갈등도 가진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교회를 세운다고 하는 발상은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한 용기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동안, 시행착오도 많았고, 실수도 많았습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시련과 시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흔들리고, 교회를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울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한결같이 우리 교회를 지키시고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어떤 조직이나 단체든, 그 역사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그 단체만의 전통이나 관례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전통이 있어서,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가는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그 전통이 자칫하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새로운 과제를 수행해 나가는데 있어서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기억과 전통들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되, 오늘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 정신을 잘 적용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일 먼저 베푸신 기적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기억하실 줄 압니다. 예수님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는데,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이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은, 처음 것보다 훨씬 더 맛좋은 이 포도주가 어디서 났느냐고 놀라워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님의 첫 번째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오직 요한복음만 기록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가 담겨있을까요?
지금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기쁨이 넘쳐나야 할 삶의 자리에 기쁨이 사라지고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하고 의미있는 축제가 중단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 집에는 결례에 쓰는 돌 항아리 6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20 내지 30갤론이 드는 큰 돌항아리였지만, 그 큰 항아리들도, 거기에 담긴 물도, 축제를 이어가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유대인이라면 그 어느 집이든, 항아리를 대문 옆에 놓아두고 거기에 물을 담아 두었습니다. ‘결례’를 위해서입니다. ‘결례’라는 말은 정결케 하는 예식이란 의미입니다. 이 항아리에 물을 담아 두어서, 우선 밖에서 들어올 때는 이 물로 발을 씻었습니다. 식사하기 전에도 여기 담긴 물로 손을 씻었습니다. 이러한 정결 예식은 단순히 위생 차원으로 행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약 율법서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전의 회막과 제단 사이에 놋으로 만든 물두멍을 두고, 제사장들은 회막에 들어갈 때 그 물두멍의 물로 손발을 씻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제단에서 화제를 드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발을 씻어 자신을 깨끗게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장로들은 스스로를 정결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켜야할 구체적인 규례들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기도를 드리거나 제사를 드리기 전뿐 아니라, 외출에서 돌아오거나 식사하기 전에도 먼저 손을 씻어서 스스로를 정결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발을 씻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단순한 위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나가기 전에 반드시 가다듬어야 할 마음과 영혼의 정결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단순히 손을 씻는 그 형식적인 행위로 인하여 자신이 정결케 되었다고 믿은 것입니다. 하지만 외출에서 돌아와 발을 씻고, 식사 전에 손을 잘 씻는다고, 그의 영혼이 깨끗해집니까? 그렇게 손을 씻는 그 행위는 일상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내면과 믿음을 살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손발을 씻는 규례의 결과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깨끗하고 거룩한 삶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교의 결례에는 형식과 관습이라는 껍데기만 남아 있을 뿐, 거기에 진정한 의미의 정결이나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믿음은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비어있는 항아리가 나타내는 상징인 것입니다.
그 돌 항아리의 숫자는 여섯 개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서, 일곱이 완전수입니다. 그런데 일곱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여섯은 불완전한 숫자입니다. 아무리 20 갤론, 30 갤론이 들어가는 큰 항아리라도 소용없습니다. 손을 씻고 발을 열심히 씻는다고 해서 그 영혼이 깨끗해지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아무리 많은 물을 담아둔다 해도, 잔치의 기쁨을 되살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때,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잔치는 계속되고 잔치의 즐거움이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포도주는 기쁨입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성령이 충만한 곳에 기쁨이 넘칩니다. 포도주는 생명이며 사랑입니다. 주께서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면서 포도주로 잔을 베푸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포도주는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입니다. 그 희생과 사랑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얻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진정한 기쁨과 구원과 삶의 의미는 형식적인 제사나 결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할 때 진정한 삶의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포도주도 떨어지고, 돌 항아리가 상징하는 형식과 껍데기만 남은 우리들의 신앙이 아닌지, 우리는 항상 우리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물론 경건의 형식을 상징하는 그 항아리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결례를 위해 놓여있는 그 항아리가 ‘쓸모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치우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우리의 예배나 기도, 봉사나 찬양이나 전도와 같은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에 진정한 우리들의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자녀로서 우리들의 감사와 기쁨이 거기에 담겨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기적 사건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마침 유월절이 다가와서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에 거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헤롯 대왕이 재건한 것입니다. 헤롯은 에서의 후손인 이두매 출신었기 때문에 야곱의 후손인 유대인들에게는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백성들의 환심을 얻기 위하여 성전 재건에 착수하였고,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46년 공사 끝에 마침내 완공되었습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성전이었습니다.
성전 경내로 들어가면 우선 소나 양들이 우는 소리, 비둘기 날개짓 소리, 동물을 사고 팔며, 동전을 바꾸는 사람들의 소리로 언제나 소란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만나는 성전이 시장바닥이나 노점상 같은 소란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순례객들에게 이러한 가축 상인이나 환전상은 꼭 필요했습니다. 우선, 성전세를 내는데 시장이나 세상에서 쓰이는 화폐는 더럽혀졌기 때문에 그런 화폐로 성전세를 드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화폐 또한 거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사용되는 일반 화폐를 성전에서 사용하는 성전 세겔로 바꾸어주는 환전상들이 필요했습니다. 제물로 드리는 짐승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동물제사를 드리려면 반드시 흠이 없는 동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순례객들이 동물을 집에서부터 끌고 온다면, 오는 동안 여물도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먼 길을 걷느라 피곤해서 바짝 야윈 동물로 제사를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깨끗하고 기름진 동물을 살 수 있다면 그것이 훨씬 더 편리하고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 안에서 동물을 팔고 환전을 해 주면서 상인들은 큰 수익을 남기고 있었고, 그 수익은 그대로 상인들의 후견인 역할을 하는 제사장 가문으로 돌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노끈으로 만든 채찍을 휘두르시며 동물들을 다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의 집입니다. 백성들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교와 지도자들은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동물 제사는 계속해서 드려졌지만, 그러나 제사는 완전히 형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사무엘은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살지고 기름진 소나 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 의미를 잘 말해 주었습니다.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제사만 잘 드리고 성전세만 잘 드리면 축복받는다고 하는 것은 헛된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드려서 부끄러움이 없는 거룩한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찾아와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전에서는 제물로 쓸 동물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세계 각 지역에서 온 순례객들이 환전을 하여 성전세를 바치고, 겉으로는 성전이 충실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성전에 사람들이 찾아오고 제사가 활발하게 드려지고 있기에, 이스라엘의 신앙에 아무 문제가 없는듯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은 그 본래적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제사는 형식만 남았습니다. 형식적인 제사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다 준다고 하는 잘못된 신앙에 젖어있었습니다. 제사가 현세적인 축복만 추구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장이 되어버린 성전 안에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다 성전에서 쫓아내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행하십니까?” 당신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정말 여기가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면, 당신이 그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러자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이 성전을 짓는데 사십 육 년이나 걸렸는데, 어떻게 당신은 삼 일만에 세운다는 말입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우신다고 하는 성전을 문자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건축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당신의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요한복음은 21절에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육체가 곧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이해하지 못한 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에야 이 말씀의 의미를 깨닫고 믿게 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흘만에 다시 지으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성전은 바로 당신의 육체였습니다. 성전이라고 하는 곳은 백성들이 나와서 하나님 앞에 희생의 제물을 드리고 하나님의 용서와 죄사함의 은총을 덧입고 구원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새 힘을 얻는 곳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육체가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당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려, 단번에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동물 제사를 반복해서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죄를 단번에 사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리셨기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하고 죄사함을 받으며 기도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희생의 제물로 돌아가신 예수님은 장사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내가 성전을 삼일만에 다시 세우신다고 하는 말씀은 바로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나를 위한 희생의 제물로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우리는 죄사함과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몸으로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또한 성전입니다. 고전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복수형입니다. 너희들입니다. 즉, 교회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너희들 곧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어떤 집단이나 모임처럼 인간적인 자기 만족이나 구하고, 자기 욕심이나 구하는 그런 장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가고 자신을 드려 하나님께 예배하고 헌신하는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 해 한 기독교연구소에서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하여, 우리나라에서 교인의 39.5%가 ‘명목상 교인’의 범주에 속한다는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명목상 교인’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하는 고백이나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지도 않습니다. 신앙의 성장을 위한 규칙적인 교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교회와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헌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명목상의 교인들이 열 명 중 네 명이나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삶의 기쁨을 얻지 못하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커다란 항아리로 위안을 삼은 채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성령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다시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형식화되고, 어느새 자기 만족의 수단이 되어버리지 않았는지, 우리 자신을 살피고, 만약 우리가 명목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다면 그 낡은 신앙의 틀을 허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몸이, 그리고 우리의 교회가 진정한 성전 되기 위하여 먼저 우리가 거듭나야 합니다.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을 믿으며, 삶의 구원과 기쁨을 회복하고, 이기심과 물질중심의 옛 인간성과 낡은 가치관과 낡은 구습을 벗어버리고, 우리 몸으로 주님 앞에 거룩한 산 제사를 드리기를 다시 한 번 결단하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고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는 늘푸른 교회의 모습은 주보에도 실려있습니다.
우리 늘푸른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체험하는 예배공동체입니다.
우리 늘푸른 교회는 힘써 그리스도를 배우며 그리스도의 젊은 제자들을 양육하는 제자공동체입니다.
우리 늘푸른 교회는 함께 떡을 떼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사랑과 믿음의 교제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늘푸른 교회는 <다락방>의 선교정신을 따라서 이 땅의 잃은 자를 찾으며 작은 자를 섬기는 증인공동체입니다.
우리 늘푸른교회는 우리들 영혼의 늘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