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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를 위한 4박5일 온라인 명상수련 2일째
“바른 가르침인지 구분하는 방법”
안녕하세요. 오늘(2020.12.24.)은 초심자 온라인 명상수련 2일째 날입니다. 스님과 600여 명의 참가자들이 온라인으로 연결된 가운데 새벽 4시 20분에 명상을 시작했습니다.
“자세를 바로 합니다. 가부좌를 하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지그시 감습니다. 마음을 콧구멍 끝(입구)에 주시해서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립니다. 놓치면 다시 알아차립니다. 긴장하거나 애쓰지 말고, 편안한 가운데 꾸준히 해나갑니다.”
탁, 탁, 탁!
죽비 소리와 함께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했습니다.
40분간의 명상수련을 마치고 이어서 천일결사 기도를 함께 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6시 20분부터 다시 30분 간 네 번의 명상수련을 연달아 한 후 밖으로 나오니 어둠이 걷히고 해가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오전 9시부터 아침 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참가자들은 자신의 상태 보고를 작성해서 제출했습니다.
“졸리고 피곤하여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졸음이 쏟아져서 제대로 명상을 못 했습니다.”
“다리가 너무 아파서 명상에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졸음에 빠지는 중에 꿈처럼 나에게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이 떠오릅니다.”
“다리가 아파서 풀고 싶은데, 풀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긴장을 하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과거에서부터, 미래의 생각들까지 떠오릅니다. 호흡에 집중이 안 됩니다.”
스님은 참가자들의 상태 보고를 꼼꼼하게 읽어본 후 오전 명상수련을 시작했습니다. 다시 30분 간 네 번의 명상수련을 연달아 한 후 오후 2시에 낮 법문 시간을 가졌습니다. 초심자들은 하루 종일 명상수련만 하게 되면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낮에도 스님이 법문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참가자들이 제출한 상태 보고에는 힘들다는 아우성이 많았습니다. 스님은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다독여 주었습니다.
“오늘이 명상수련 2일째인데 여러분들 힘드시죠? 오늘과 내일이 제일 힘들 때입니다. 등산에 비유하면 이제 3부 능선으로 접어든 거예요. 계곡을 타고 쭉 올라가다가 이제 계곡을 떠나 산등성으로 올라가기 위해 비탈진 오르막길을 만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힘들게 느껴지는 겁니다. 정상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절대 포기만 하지 마세요
초심자가 명상수련을 할 때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졸음, (다리 허리 어깨) 통증, 망상, 이 세 가지입니다. 호흡을 놓쳐도 괜찮고, 계속 졸아도 괜찮아요. 다 필요한 과정입니다. 포기만 안 하면 돼요. ‘아이고, 힘들어서 못하겠다’ 이러면서 명상수련 자체를 포기한다든지, 앉기는 앉았는데 ‘에라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한다든지, ‘힘드니까 그냥 망상이나 피우자’ 한다든지, ‘다리가 너무 아프니까 다리를 뻗고 앉아있자’ 한다든지, 이렇게 포기만 안 하면 됩니다.
졸면서라도 어쨌든 호흡을 알아차리려고 계속 시도해봐야 합니다. 통증이 일어나더라도 억지로 참으면서라도 해봐야 합니다. 망상이 일어나서 끌려갔더라도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는 연습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되고 안 되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어떻게 운전을 처음 배우는 사람이 곧바로 운전을 하겠어요. 안 되는 것이 정상이죠. 그러나 포기해 버리면 못하게 되는 거예요. 잘 안 되더라도 어쨌든 계속 시도하면 결국은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어서 스님은 왜 수행이 사회운동이 되어야 하는지 강조했습니다.
수행이 사회운동이 되어야 하는 이유
“미래사회는 인공지능이나 사물인터넷 등 4차 산업혁명을 통해 온갖 기술 발전이 이뤄지는 신사회가 될지 몰라도, 빈부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인간의 정신적 고통과 스트레스는 더 커질 겁니다.
동남아 사람들이 밖에서 한국을 보면 천국처럼 느낍니다. 한류가 생길 만큼 영화나 문화산업이 발전했고, 교통이나 음식, 배달 문화 등이 발달해서 생활도 아주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공항에 와 봐도 시설이 아주 잘 갖추어져 있고, 월급 수준도 높습니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 와 보면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죽겠다고 난리인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니 앞으로 아무리 사회가 발전해도 여러분들이 자기 치유를 안 하면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수행을 통한 자기 치유를 안 하면 미래에 인류는 공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계속 마약을 찾듯이 각 부분에서 그런 중독 증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좋게 말하면 취미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중독에 가깝습니다. 마약만 중독이 아니라 차(茶) 동호회에서 1억 원 하는 고급차를 찾는다든지, 몇 만 불 하는 와인을 찾는다든지, 이런 것도 중독입니다. 신체적으로만 중독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중독된 것입니다. 커피, 명품, 골동품 이런 것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니 삶의 문제가 어떻게 끝이 나겠어요. 좋아하는 것에 집착이 되어서 편집증을 보이는 거예요. 밖에 사람이 볼 때는 ‘이거면 어떻고 저거면 어떻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거기에 집착되어 있는 사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집착하고 편집되어 있는 상태로는 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의 고통은 더하면 더했지 줄어들지 않습니다. 차를 마셔도 되고, 커피나 와인을 마셔도 됩니다. 그걸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편집된 상태, 사로잡힌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자유로워진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마음만 바꾸면 다 해결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회보장제도를 발전시키는 등 사회적인 개선이 필요해요. 그러나 제도를 아무리 개선해도 수행을 통한 의식의 혁명적 변화 없이는 행복해질 수가 없습니다. 의식의 변화 없이 계속 중독된 상태로 가면 결국은 공멸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150여 년 전에 청나라가 아편에 중독되어서 아편전쟁으로 망했듯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건전한 의식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생각이 편협되어 있거나 상처를 받아서 트라우마를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수행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편협된 생각과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해서 건전한 시민의식을 갖게 되면 사회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수행은 단순히 개인의 정신을 개발하는 문제에 국한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지구 환경을 보전하는 환경운동, 인류의 절대빈곤을 퇴치하는 구호활동, 계급, 민족, 성, 인종으로 인한 갖가지 차별을 해소하는 인권운동, 갈등을 해소하는 평화운동 등 이런 운동들만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격으로 개인의 정신을 개발해서 바른 지혜와 바른 사랑(자비)과 마음의 평화와 행복을 가져오는 수행 역시 커다란 사회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수행을 불교라는 종교 안에만 가둬놓을 것이 아니라, 종교나 민족에 관계없이 누구나 다 이 가르침을 통해서 삶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수행을 얘기할 때 종교적인 용어를 가능한한 쓰지 않고 생활 용어를 쓰고 있고, ‘행복학교’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누구나 다 참여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이 약은 스님이나 불교인들만 낫게 하는 약이 아니라, 누구나 이 약을 먹으면 병이 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향으로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거예요.
명상수행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체험하는 것
아무리 좋은 약도 여러분이 직접 먹어봐야 병이 낫듯이, 수행도 여러분이 직접 해봐야 ‘수행이 내 삶에 좋구나’ 하는 걸 알게 됩니다. 직접 안 해보고 그냥 머릿속으로만 ‘좋구나’ 하고 있으면, 조금만 힘들어져도 포기해 버립니다.
같은 공간에 모여서 명상수련을 한다면 제가 억지로라도 밀고 가겠는데, 각자 집에서 온라인으로 참여하고 있고, 여러분 대부분이 초심자이기 때문에 제가 이렇게 말로라도 간곡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오늘과 내일이 가장 큰 고비이기 때문에 힘들어지면 그냥 벌렁 누워서 명상수련을 안 해버리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전화를 하거나, SNS를 들여다볼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이왕 참여했으니까 여러분들이 자발적으로 욕망을 제어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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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동안 법문을 통해 힘을 북돋워 준 후 오후 공양 시간을 갖고 5시부터 다시 명상수련을 시작했습니다. 30분간 네 번의 명상수련을 연달아서 했습니다.
그사이 해가 지고 산 너머로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저녁 8시가 되자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을 설명하면서 명상수련의 원리를 알려주었습니다.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연습을 하는 것이 명상수련입니다.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계율을 지켜야 하는 이유
첫째,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욕구를 따라가면 만족감을 느끼게 되니까 지금은 기분이 좋은데 나중에 큰 손실이나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욕구는 무조건 멈춰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욕구를 따라가는 것이 큰 손실로 예견될 때는 멈출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이익을 보호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명상수행을 자꾸 기술적으로만 접근합니다. 욕망대로 실컷 먹고 실컷 자면서 앉아서 명상수행할 때 손을 어떻게 하고 호흡을 어떻게 하는가 이런 것에만 신경을 씁니다. 이렇게 접근하는 것은 정신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하나의 일시적 놀이에 불과합니다. 이런 명상수행은 나를 해탈(진정한 자유, 완전한 자유)과 열반(진정한 행복, 완전한 행복)으로 이끌어주거나 내 삶을 변화시켜주지 못해요. 잠시 술 한 잔 먹고 기분 좋은 것에 불과합니다.
명상수련 시간이 끝나면 다리 아프다고 벌렁 누워서 ‘아이고 다리야’ 하고 누워 있고, 배가 고프니까 때가 아닌 데도 음식을 막 찾아서 먹다가, 종소리가 나면 그제야 ‘가서 명상수련해야지’하고 앉아 있고, 이런 식으로 명상수련에 참여하면,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명상수행의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참여하는 건 시간 낭비예요.
바른 가르침인지 구분하는 방법
그런데 요즘 명상수행이 유행하면서 이렇게 명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술 먹고 노래하면서 즐거움을 추구하듯이 음악을 틀어놓고 명상수행을 하거나 춤 명상수행을 한다고 하면서 즐거움을 추구합니다. 전생 체험을 하기 위해 명상수행을 하는 것도 다 즐거움을 찾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지금 행해지는 대부분의 명상수행 프로그램이 상업화되어 있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걸 겁니다. 즐거워야 사람들이 돈을 내고 또 신청을 하니까요. 힘들면 누가 돈을 내고 또 하겠어요. 그래서 정법(正法)이 아닌 삿된 가르침에는 계율이 없습니다. 사법(邪法)은 계율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계율을 지키기 위해서는 욕망을 어느 정도 자제해야 하는데, 이게 없으면 벌써 그것은 해탈의 길이 아닙니다. 이걸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계율을 지킨 다음 해야 할 일
그렇다고 계율만 지킨다고 해탈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러면 굳이 명상수행을 할 필요가 없죠. 계율을 지키는 것을 바탕으로 깔고 그걸 울타리로 한 다음, 둘째 선정(禪定)을 닦아야 합니다.
선정을 닦는 방법은 '알아차림(사띠)을 한 가지 대상에 고요히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선정을 닦는 수행을 정행(定行)이라고 합니다. 빨리어로는 ‘사마타(Samatha)’라고 불러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사마타의 집중 대상(까시나)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호흡(아나빠나)입니다. 부처님은 여러 가지 집중 대상(까시나) 중에서 호흡(아나빠나)이 가장 수승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부처님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명상수행’(아나빠나사띠 수행)을 통해서 선정을 닦는 방법을 가장 추천하셨습니다.
<각주 : 상기 문단(수정본)에 대한 ‘정토회(지도법사 법륜스님) 포스팅 원본'은 아래와 같습니다.
선정을 닦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위빠사나 명상입니다. 한문으로 번역된 표현으로는 ‘관법(觀法)’ 수행입니다. ‘관(觀)’은 있는 그대로 비추듯이 보는 것을 뜻합니다. 반야심경에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조견(照見)’이 비추어 본다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가 ‘관(觀)’이에요. 어두운 밤에 서치라이트로 비춰보듯이 법을 확 비춰본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알아차림을 뜻하는 관법 수행입니다. 빨리어로는 ‘위빠사나(Vipassanā)’라고 불러요.>
참고로, 사마타(Samatha)는 '알아차림(사띠)을 한 가지 대상에 고요히 집중시키는 것'이고, 위빠사나(Vipassanā)는 '사마타 수행으로 계발된 고요집중의 사띠능력을 사용하여 신수십법身受心法(달리 말하면, 자신과 세상)의 여러 가지 대상을 관찰(이어서 사띠)하는 것'입니다.
몸(신身), 느낌(수受), 마음(심心), 진리(법法), 이렇게 '4(四)가지에 대한 사띠(念)를 확립 정착(處)하는 수행'[‘사념처(四念處) 수행'이라고도 함]은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지止•관觀(사마타•위빠사나) 겸수兼修(상호의존兼 수행修) 방식의 수행법입니다. 부처님은 스스로 이 수행법을 처음 발견하셨고, 이 방법이 해탈과 열반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중 가장 기초이면서 기본인 것이 ‘호흡(아나빠나)에 대한 알아차림(사띠)의 확립 정착’입니다. 호흡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몸의 감각을 알아차리는 거예요. 미세한 호흡을 알아차리면 우리 몸에 있는 미세한 감각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미세한 감각이 알아차려지게 되면 느낌도 알아차릴 수 있고, 마음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각각에 대해 더 터득해야 되지만,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 정착하면 나머지는 쉽게 터득해 나갈 수 있습니다.
참고로, 부처님 설법에서 신수심법身受心法은 다음과 같은 뜻으로 사용됩니다
• Kāya(身) : 몸, 신체; 물질. 색온色蘊(물질/사대色 작용 무더기蘊)
• Vedanā(受) : 감각(또는 느낌; 특히 ‘몸에 나타나는 현상, 물질감각’). 수온受蘊(감각 받음受 작용 무더기蘊)
• Citta(心) : 마음, '수상행식' 작용 무더기의 통칭
• Dhamma(法) : 부처님 가르침(法) 또는 진리(法), 또는 실상(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의 통칭. <대념처경(마하 사띠 빳타나 숫따)>에서 부처님이 설하신 다섯 가지의 법(오개, 오온, 육내외처, 칠각지, 팔정도를 포함한 사성제);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생각, 기억, 감정 등의 정신감각). 또는 마음(찟따心, 마노意, 윈냐냐識)의 대상(法)으로서의 세상(우주자연)의 일체 모든 것(法). 물질 정신적인 일체 모든 현상(法)
셋째,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이어서 지금 하고 있는 명상수행법이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인지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 속 내용을 읽어주었습니다. 초심자들이다 보니 왜 이런 방법으로 명상수련을 하는지 의문이 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꾸루 지방에 있는 깜마사 담마라는 꾸루들의 성읍에 머무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 도는 유일한 길이니.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한다. 옳은 방법을 터득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이라고 하는 사념처이다...” (이하 생략)
스님이 읽어준 경전은 대념처경입니다. 사념처관을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이 자세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일 저녁 법문 때 설명할 내용도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이번 명상수련을 하는 데는 이 정도만 알면 됩니다. 지식을 많이 아는 것보다 하나라도 자기가 직접 경험해 보는 것이 더 중요해요. 하루 종일 가만히 앉아 있다 보니 자꾸 마음속에서 ‘이래서 뭐가 되나’, ‘호흡 알아차리면 뭐해 다리만 아프지’ 이런 의심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하기 싫기 때문에 이런 의심이 자꾸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왜 이런 연습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와 필요성을 반복해서 설명해주는 겁니다.
오늘은 계율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고, 내일은 어떤 원리에 의해서 우리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거기에 선정을 닦는 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하겠습니다.”
초심자를 대상으로 한 수련이기 때문에 평소보다 명상수련을 하는 목표와 자세, 방법에 대해 아주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취침 안내 방송이 나가고 참가자들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초심자 온라인 명상수련 3일째 일정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출처 : 정토회(지도법사 법륜스님) 포스팅, ‘https://www.jungto.org/pomnyun/view/83002?p=2&k=‘ (일부 수정 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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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대념처경(大念處經)의 고대인도어 원본 경전인 《마하 사띠·빳타나 숫따(Mahā大 Sati念·Paṭṭhāna處 Sutta經, 大念處經; 사띠를 확립 정착하는 수행에 대한 부처님 설법을 기록한 긴 경), DN 22》에 보다 충실한 한글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캄마사담마라고 하는 쿠루족의 마을에 머무셨다. 그곳에서 세존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 길은 중생(뭇 생명)들의 삶을 정화시키고, 근심과 슬픔과 한탄과 울분과 번민을 극복하게 하고,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바른 길로 이끌어 마침내 무상정등각(위 없이 평등하고 완전한 바른 깨달음; 줄임말로 정각)을 증득하게 하고 열반(닙비나nibbana; 완전한 행복)에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ekayano maggo; only path)이니, 이름하여 '네 가지(cattāro; 四)에 대한 사띠sati(마음챙겨 알아차림; 念)의 빳타나paṭṭhāna(확립 정착; 處)'[한문 번역경전식 표현으로 사념처四念處]이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네 가지인가?
그것은
(1) 몸(身)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 [한문 번역경전식 표현으로 신념처身念處]
(2) 느낌(감각; 受)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 [수념처受念處]
(3) 마음(心)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 [심념처心念處]
(4) 법(法)에 대한 사띠의 확립 정착 [법념처法念處]이다. ..." (이하 생략)>
<각주 : 『대념처경大念處經』의 원문은 갠지스강(항하恒河) 유역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고대인도 민중어인 빠알리어로 기록된 『마하Mahā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 숫따Sutta』이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 '마하mahā는 대大'로, '사띠sati는 념念'으로, '빳타나paṭṭhāna는 처處'로 번역하였다.
붓다께서는 소수 지배계층이 사용하던 산스크리트어가 아니라 당시 붓다께서 활동하시던 갠지스강 유역에서 가장 큰 국가였던 마가다국의 대중들이 사용하던 고대인도 민중어인 마가다어로 설법을 하셨다. 그러나 마가다어는 사장되었고 마다다어와 가장 유사한 고대인도어로 가장 널리,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고대인도 민중어가 빠알리어인데, 이 빠알리어를 사용해서 후대 제자들이 붓다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모음집이 니까야다.
붓다께서 입멸(빠리·닙바나, 무여열반)하신 직후 얼마 동안은 제자 아라한들이 붓다의 말씀을 합송으로 후대에 전달했다. 합창을 하면 한 사람이 틀린 것을 바로 알 수 있는 것처럼 합송으로 후대에 전달하는 것이 붓다의 말씀에 대한 변질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수록 아라한의 수가 줄어들고 전쟁 등의 장애요소가 생기고 붓다의 말씀(설법, 가르침)을 전파하는 지역이 넓어지면서 문자로 기록하여 전달할 필요가 생겼다.
사띠sati는 붓다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전념함, (되)새김, 기억함, 전념하여 또는 정신차려서 또는 마음챙겨서 알아차림, 삼·빠자나sam·pajāna(대상에 대한 바른 알아차림, 빤냐로 봄/앎), 깨어있음, 자각함'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는 '념(염念), 억념憶念, 기억記憶' 등으로 번역한다. 영어 경전에서는 'mindfulness(주의깊음, 마음챙김), awareness(자각함), memory(기억함), recognition(알아차림), consciousness, intentness of mind, wakefulness(깨어있음) of mind, alertness, lucidity of mind, self-possession, self-consciousness' 등으로 번역한다.
사띠sati는 대개 빠자나pajāna(알아차림)를 포함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강조하기 위해서 마음챙김(사띠sati)과 알아차림(빠자나pajāna)으로 분리해서 사용하기도 한다.
참고로 삼·빠자나sam·pajāna에서 삼sam을 빼면 빠자나pajāna인데, 빠자나pajāna의 동사형이 빠자나띠pajanati다. ‘삼sam’은 흔히 삼·붓다, 삼·보리, 삼마·사띠, 삼마·사마디 등등에서처럼 단어 앞에 붙는 접두어로 ‘바른’이라는 뜻이다. 빤냐paññā(혜慧, 지혜; 반야는 빤냐의 한문 음사)의 동사형도 빠자나띠pajanati(알다, 이해하다)이다.
념念은 '지금(今)+마음(心)'의 합성어로 고대인도어 사띠sati를 중국어(한문)로 번역한 것이다. 사띠를 우리말(한국어, 한글)로 번역하면, 지금(현재순간)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또는 작용)을 ‘전념하여(바르게 기억하여 또는 바르게 새겨) 마음챙겨서 알아차림' 정도로 표현하면 부처님이 설(설명)하신 의미와 유사하다.
빳타나paṭṭhāna는 부처님 가르침(설법; 법法을 설명함)에서 ‘드러냄, 세움, 확립, 정착, 확립하고 정착함’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한문(중국어) 경전에서는 '건립建立, 주립住立, 처處' 등으로 번역한다. 영어 경전에서는 'setting forth, putting forward’ 등으로 번역한다.
『마하Mahā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 숫따Sutta』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사띠를 확립하고 정착하는 수행에 대한 부처님 설법을 기록한 긴 경』 정도로 표현하면 그 의미가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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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_()_
성불하세요 _()_
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May all beings
following the Buddha's samma Dhamma
be happy.. be peaceful.. be liberated(모든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벗어나기를, 해탈하기를)...
감사합니다_()_
성불하세요 _()_
명상에 대해 이제야 눈을 뜨는 것 같습니다.
스승님께 감사합니다 ()
명상수행이란
본래(본성)으로
살기위해
사색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