岱宗夫如何 (대종부여하) 태산(대종), 그 어떤 산인가?
齊魯靑未了 (제로청미료) 제나라 노나라에 걸친 푸르름 끝이 없네.
造化鍾神秀 (조화종신수) 조물주가 신비로움과 빼어남을 모아서
陰陽割昏曉 (음양할혼효) 음과 양을 어두움과 밝음으로 나누었네.
盪胸生曾雲 (탕흉생증운) 가슴이 요동치듯 구름이 생겨 피어나는데
決眥入歸鳥 (결자입귀조) 눈길 모아보니 새가 산속 둥지로 돌아가네.
會當凌絶頂 (회당능절정) 언젠가 반드시 저 태산 꼭대기를 걸으며
一覽衆山小 (일람중산소) 천하의 산들이 작다는 것을 보아야겠네.
李太白과 함께 중국 역대 최고의 詩人으로 불리는 두보(杜甫:712-770)가 1200여년전 태산 곁을 지나며 지은 <望岳>이란 제목의 五言律詩(仄韻)이다.
언젠가는 저 산에 올라, 자기보다 1200여년전의 성인 孔子(BC 552-479)께서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게 보인다:登泰山而小天下>>고 한 말을 스스로 확인해보고자 작심하고도 끝내 오르지 못했던 泰山이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 >> 라는 시를 남긴 조선 중기의 문필가 楊士彦(1517-1584)도, 실제로는 태산에 올라 보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위의 두 문호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필자지만, 시절을 잘 만난 덕에 태산을 두번이나 오를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4년전 여행 때는 케이블카(纜車)로 오르고 내렸기 때문에, 단지 泰山의 정상을 밟아 보았다는 것 만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수천년간 천하의 역사를 주름잡던 황제와 성현들이 오르내리던 7400개 돌계단 주변에 남겨진 글씨 등 유적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언젠가 그 돌계단을 밟으며 그분들의 발자취를 확인해 보자고 다짐했었다.
마침 泰山을 걸어서 내려오는 中國文化探訪團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마음에 들어 동참하기로 했다.
태산관광을 위해서는 근처 제남(齊南)에 우리 인천공항과의 직항편이 개설되어 있으므로, 비용이 더 들더라도 비행기로 짧은 기간에 다녀올 수 있겠지만, 여객선 여행도 나름대로 재미가 있다.
인천에서 오후 1시경에 출발하는 칭따오(靑島)행 배를 타면, 인천항 특유의 갑문(閘門)을 빠져나가는데도 3시간 이상 소요된다. 짜증이 날만도 하지만,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갑문시설과, 앞 뒤의 閘門을 열고 닫으며 수위를 조절하면서 선박이 출입하는 것을 보는 것 자체도 좋은 구경꺼리가 된다.
배가 일단 갑문을 빠져 나가면 멀어져가는 항구를 바라보며 애인과의 이별을 노래한 ‘라 파로마’ 같은 노래를 불러보는 낭만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주변 바다에서는 갑문 안쪽 부두로 들어가기 위해, 항로 주변에 2열로 늘어서 있는 대기묘지(待機錨地)에 닻을 내린채 기다리고 있는 각종 대형 화물선들을 볼수 있다. 해군제독의 관함사열이 별건가?
오른쪽으로는 영종도 신공항의 높은 관제탑 등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송도 신도시를 지나 더 남쪽으로 가면, 바다 가운데에서 파이프관으로 연결되어 있는 평택항 LNG 부두 그리고 아산만의 西海大橋 등을 볼수 있는데, 몇 번쯤 보아도 좋은 경관이다.
더구나 뜻이 맞는 사람들과 맥주잔을 들고, 시원한 바다 바람을 맞으며 담소하다 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하늘의 별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볼수 없는 밤을 맞게 된다.
밤새도록 항해한 배는 다음날 9시경 중국 칭따오(靑島)항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 시간에 맞추어 일어나는 자는 선박여행의 맛을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나 볼수 없는 <西海日出>의 장관을 모르는 자들이다.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것은 아니고, 서해 바다 한 가운데 떠있는 배 위에서 동쪽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일출의 장관을 보는 것이다.
새벽 4시경부터 잠못이루고 갑판을 들락이며, 하늘의 별을 보고 일출을 볼수 있다는 기대감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마지막까지 반짝이는 모습을 보여주려 하면서도 할수 없이(?) 점점 희미해져가는 샛별과, 서서히 붉은 색으로 변하기 시작한 점점이 떠있는 검은 구름의 모습을 감상하면서, 행여 순간적인 일출의 장관을 놓칠까봐 화장실도 못가고 버티었다.
조그마한 구름층이 약간의 훼방을 놓는 바람에 마지막까지 마음을 조리던 끝에, 드디어 60평생 처음 西海日出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뭇 선인 문필가들도 다 표현하지 못하던 그 광경을, 둔재인 내가 어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 이란 말은 이럴때 써먹는 말이 아니겠는가?
백여년전 독일 사람들이 건설한 이래, 중국 최고의 아름다운 항구, 휴양도시로 정평이 있는 칭따오(靑島)에 상륙하여, 상징적인 곳 몇군데만 둘러본 후, 준비된 전세버스로 태산 관광의 거점이 되는 泰安을 향해 달렸다.
泰安은 칭따오(靑島)에서 고속도로로 5시간 정도 걸린다.
난 이미 4년전 이맘때 이 길을 지나면서, 몇시간 동안 山이라는 것은 볼수 없는 허허 벌판의 연속에, 보이는 것이라곤 수확이 거의 끝난 옥수수밭과 볼품없는 주변 마을 뿐이었기에, 서해일출을 보려고 설친 잠이나 자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황량하던 벌판의 모습이 바뀌어 있었다. 그 끝없는 벌판이 온통 <비닐하우스>로 덮여있는게 아닌가!
정말이지, 중국에서 바뀐 곳은 上海 포동지구 뿐만이 아니었다!!
현지 가이드 말에 의하면 저 비닐하우스 속에는 日本과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야채로 채워져 있다 한다. 아니, 일본·한국은 커녕 전 세계 사람들이 먹어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던 나는 농산물 개방반대를 외치고 있는 우리 농민들이 안쓰럽게 생각 되었다.
泰山은 변함없이 그 모습대로 솟아 있었다. 하긴 오늘의 중국이 아무리 변하고 있다 하여도, UN에서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태산이 변해서도 안되고, 수천년간 형성되어온 그 모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어야 될 것이다.
泰山은 예부터 岱宗,東岳 등으로 불리다가, 春秋時代부터 泰山이란 이름이 되었는데, 해발 1545m이다.
이 정도의 산은 중국에는 고사하고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으나, 옛 중국문화 발상지인 황하유역의 끝없는 평지 한 가운데에서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산의 모습은 가히 신비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옛부터 천하를 평정한 황제들은, 기왕의 천우신조에 감사하고 계속적인 도움을 기원하는 뜻에서, 이곳 하늘과 잇다은 泰山에 올라 소위 <봉선제:封禪祭>를 올렸다 한다.
역사상 <봉선제> 의식을 행한 황제는 진시황이나 한무제, 당현종 등 내노라 하는 황제 72명 만이 그 의식을 행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의 수도 長安 등지에서 이곳까지 수행원 수만명을 데리고 와서 봉선제를 올리고 돌아가려면, 몇 개월간 수도를 비워야 하는데, 언제 누가 황제 자리를 넘볼지 모르는 불안한 시절의 황제는 엄두도 못했던 것이다.
태산에 오르는 길은, 옛부터 남쪽 태안 시내로부터 오르는 길과, 북쪽 桃花谷에서 오르는 길, 두가지가 있었다.
황제들이 오르던 길은, 태안시내의 대묘(垈廟**)에서 봉선의식을 치르고, 그 뒤쪽의 일천문과 중천문, 남천문으로 통하는 7400여 돌계단을 오르는 길이다.
1983년 중천문에서 남천문 근처(월관봉)까지의 케이블카가 개통되면서, 龍潭水庫 댐에서 중천문까지 차도가 생겼는데, 이것까지 포함하면 세군데서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일행은 中天門까지 버스로 올라가서 케이블카로 바꾸어 타고 월관봉까지, 그리고 도보로 남천문을 거쳐 정상인 옥황봉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남천문에서 돌계단 길로 걸어내려와, 중천문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내가 가장 보고싶던 경석욕(經石峪---> <山+谷>“산골짜기욕”字, 이하 谷으로 표기함) 이란 곳이, 우리 단체일정에서 제외된 中天門과 一天門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지도를 보니 중천문에서 한참 내려가서, 다시 왼쪽 계곡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경석욕(經石谷)이란, 당나라 시절 인도에서 불경을 갖고온 어느 스님이, 이곳 계곡 넓은 반석 위에, 글자 하나가 50 cm 정도의 크기로 金剛經을 새겨놓은 곳이다.
당초 2500여자를 새긴 것이었으나, 천년 세월에 마모되어 현재는 1000자 정도 밖에 볼수 없지만, 세계제일 규모의 金石文이며, 굳이 書藝家가 아니더라도 한번쯤 보아야할 중요한 곳으로 소개되어 있는 곳이다.
내가 태산의 7400개 돌계단 길을 걸어보고자한 것은, 등산으로 단련해온 내 다리도 시험해볼겸, 돌계단 주변에 남겨진 經石谷의 금석문 등 수천년간의 각종 유적을 직접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일행과 함께 가다가는 또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으므로, 나 혼자서 經石谷을 찾아보기로 작심하고 인솔 책임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렇게 해서 중천문에서 일행과 반대 방향으로 한시간쯤 내려가 經石谷을 보고 왔는데, 예상보다 쉽게 다녀왔고 못보고 오래도록 후회할 일도 없어졌으므로 마음이 후련해졌다.
내려온 길을 되돌아 올라가며, 수천 그루의 측백나무 고목군락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柏洞과, 신선세계로 올라간다는 뜻의 호천각(壺天閣), 步天橋 등을 다시 한번 보면서 2000여 계단을 거의 단숨에 올라, 일행과 약속했던 中天門에 되돌아와 보니 아무도 없어서, 다시 산 정상쪽 南天門을 향해 올라갔다.
도중 모택동 특유의 흘림체로 紅軍을 찬양한 磨崖碑文이 있는 곳과 雲步橋 등을 지나 五大夫松 근처에서 하산하던 일행과 만나 함께 내려왔다.
거의 모든 일행이 남천문 아래쪽의 가파른 2000여개 돌계단을 내려오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는데, 비슷한 수의 돌계단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고도 멀쩡한 내 모습을 보고 입을 벌리며, 별난 사람 다 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남천문에서 정상인 옥황봉까지 1Km 정도의 완만한 경사지에는 <하늘 위 마을>이란 <天街>가 있어서 각종 기념품 가게와 식당, 여관까지 있고, 정상 부근에 玉皇上帝의 딸로서 태산의 女神으로 받들고 있는 벽하원군(碧霞元君)을 모신 碧霞祠와, 공자님의 태산등정을 기념한 사당인 孔子廟 등이 있다.
좀더 오르면 금빛으로 빛나는 당현종(*)의 紀泰山銘이란 제목의 磨崖碑를 비롯해 한무제의 거대한 無字碑, 근세 郭末若의 碑文 등이 있는 <唐磨崖>를 지나면 곧 1545 m 표시가 있는 泰山의 정상 <玉皇峯>에 다다르게 된다.
그 옥황봉은 玉皇上帝를 모신 玉皇殿 건물로 거의 덮여있기 때문에, 천하명산 泰山의 정상에 올라섰다는 기분은 별로 느낄수 없게 된다.
옥황전 뒤쪽 전망이 확 트인 바위에 걸터앉아, 그 옛날 맑은 날엔 동쪽 바다 멀리 일본까지 보였다는 믿지못할 이야기를 상기해보며, 손을 이마에 대고 휘돌아 보았으나,
일본이나 우리 한국은 커녕 바다인지 먼지구름인지 분간할수 없고, 간단히 목을 추기며 근처 산들이 작게 보일것이라는(一覽衆山小) 두보의 싯귀만을 생각하다가 내려왔었다.
** 대묘(岱廟) : 일명 泰山行宮이라 하는데, 역대 황제들이 태산에 오르기 전 행궁으로 이용햐며, 봉선의식을 행하던 곳으로 유명. 황제의 정전과 똑같은 양식으로 지었고, 북경의 故宮(자금성), 곡부에 있는 大成殿과 함께 중국 고대 3대 궁전건축물이라 함] (묵호, 0211)
첫댓글 의미있는 여행을 하셨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瑞香님, 제글이 너무 길기만 해서 읽기 힘드시죠? 중국 이야기라 한자도 많고...더위에 건강 조심하싮요.
귀한 경험을 상세히 기록해 주셔서 잘 읽었습니다. 애쓰셨고 대단하십니다. ^^*
좋은곳에 다녀 오셨네요!
예원님, 수국님.. 모두 좋은 이름을 쓰시는군요. 태산은 경치도 경치지만 역사적으로 너무나 의미 있는 곳이어서 한번 다녀올만 한 곳입니다. 그때 참고가 되실런지... 고맙습니다.
저도 동행한 기분이 듭니다.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안개꽃 같은 멋진 분이 정말로 동행했더라면 더 좋은 글을 쓸수 있었을텐데...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청난당님 제 글 찾아다니며 읽어주시는 것 같아 감사드립니다.
ㅋㅋㅋㅋㅋㅋ~~~ 제가 이 기회에 한자 공부좀 해야 겠어여~~~~
유구한 역사에 땅 한없이 넓고, 가는 곳마다 다른 나라 같은 중국 몇번 다녀오면, 저절로 한자 공부하게 됩니다. 이렇게 첫걸음 하셨으니 님도 한자와 친해지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