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터 동인 제 11집 출간
명당明堂, 좋은 자리. ‘터’라는 말은 참 좋다. 정겹다. ‘터’라 하면 사전적으로는 궁궐터, 절터, 우물터 등 건물이나 구조물이 들어서야 하는 맞춤한 자리(땅) 또는 어떤 일을 이루는 밑바탕이나 그 근간을 일컫는 말인데 써놓고 봐도 소리를 내어 읽어봐도 참 정감이 가는 마음 든든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시터’-시의 밑바탕, 시의 고향, 시의 근간, 시가 편안히 머무는 곳, 시가 있을, 있어야 할 맞춤하고 좋은 자리(땅)! 윤경재, 이명, 이미산, 정영숙, 진란, 최금녀, 최도선, 한이나, 황상순, 신명옥, 신원철, 열한 명의 긴 숨비소리를 세상 밖으로 내놓는다. 15년 째 시의 터를 야무지게 다지고 있는 시터 동인들.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의 나선 같은, 시작도 끝도 없는 시의 길 위에 매년 열정으로 빚은 붉은 벽돌 한 장씩 얹고 있다. 책을 펼치면 붉게 빛나는 창문마다 초록빛 나무들이 고개를 내밀고 색색의 빛깔로 춤추고 있으리라.
시터 동인지는 이번에 11집을 기념호로 발간한다. 동인 11명이 모여 각자의 시 세계를 펼친다. 십여 년 세월과 함께 시터도 많은 변화 과정을 거쳤다.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시터는 시쓰기가 발효되는 장독대이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모였기에 ‘글 수선’ 시간도 서로 흥으로 받아들인다. 늘 더 좋은 결과를 도출하는 자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의 놀이마당이다. 시 세계에 神이 계시다면 지혜를 구하고 싶다. 그러면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나에게 오기 전에 먼저 사람에게 가라. 거기에서 길을 찾으라. 시터 동인들이 탐구하는 시 세계는 다양하다. 넓고 깊은 세계가 펼쳐진다. 다음 작품이 궁금해지는 몰입성이 있다. 각자 시 세계를 지닌 모든 동인이 내게는 각별한 스승이다. 어디서나 푸른 우물물을 긷는다. --[서문]에서
그 사람이 왔군요
마음 모서리에 밀봉한 유리병을 열고
우려낸 맑은 매화차
흔들리는 물결 사이로 가라앉으며
마른 몸에서 고요히 꽃잎을 피워가는,
엄동설한을 견디고 숱한 나날을 덖었던
못 다한 이야기
그윽한 차 향기로 말하네요
그. 사. 람. ---윤경재, [매화차를 우리며] 전문
주인은 나를 차에 태우고 먼 길을 와 산기슭에 두고 갔다
몇 번을 짖으며 쫓아갔지만 끝까지 따라가지 않았다
나는 주인을 알고 있다 주인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
더 크게 무위자연이 되라는 주인의 마음이 읽히기 때문이다
산은 높았고 나는 산을 지키기로 했다 --이명, [개] 전문
붓 끝에서 피어나는 묵향
저 만연체의 붓꽃, 가만 한 손을 들었다 놓고 살랑 남색 치마 아래 외씨버선 코 보일락 말락 마음절벽에서 써내려 가는 붓글씨
슬픔의 내장량 하나 드러내지 못하고
느릿느릿, 새가 되어 날아가는 울음
산 하나 옮겨 적는다 --한이나, [붓꽃 춤] 전문
나무들아,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잠시도 너희들 잊지 않았다
강물들아, 울지 마라 우리가 한 몸 되는 좋은 시절이 오고야 말 것이다
바람아, 우리 언제 모여 밥 먹으러 가자 한 솥 밥, 남과 북이 한데 모여 먹는 밥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
그날이 오고 있다 뒤돌아보지 말고 흘러 흘러만 가자. --최금녀, [바람에게 밥 사주고 싶다] 전문
빗방울들이 투닥투닥 문 열어라 문 열어라 다투고 다니는 새벽 네 시 눈알은 따갑고 머리 속은 얼기설기 불면을 서성이는 엉덩이는 뜨겁다
다시 태어날 일이 생기면 수포가 피는 왼쪽 엉덩이는 버리고 와야겠다 봄밤을 견디는 유령들이 꽃가지마다 걸린다
꽃들의 밤이 개장하자 꽃잎을 날리는 심술궂은 봄, 비 여전히 피느라 소란한 봄, 밤
그러므로, 그러니까, 그래서 화닥화닥 피어나는 꽃들의 엉덩이는 뜨겁고 --진란, [대상포진] 전문
작은 나라나 큰 나라나 잘 사는 나라나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나 아침 점심 저녁 세끼 밥 먹는 일이 제일로 큰 세상사였다 칸트도 베토벤도 반 고흐도 괴테도 가우디도 검은 베레모의 체게바라도 다들 세끼 밥 먹기 위해 평생 애쓴 사람들이다 비문마다 다 그렇게 씌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까마득한 하늘 위 비행기 안에서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아 비장한 마음으로 꼬박꼬박 밥을 챙겨 먹었다 --황상순, [세끼 밥] 전문
--시터 동인 제 11집, 도서출판 지혜, 값 12,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