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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비판
----외디프스의 운명
반 경 환
1
시는 삶 이상도 아니고 삶 이하도 아니다. 시인은 온몸으로 온몸으로 그 자신의 삶의 내용을 쓰는 것이며, 그 온몸의 실천 속에 자기 자신의 삶의 형식을 완성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시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을 분리할 수가 없듯이, 시인의 삶의 내용과 형식도 분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시는 문화적 장식품도 아니며, 공허한 말장난도 아니다. 시가 시인의 삶의 내용이 되고 형식이 될 수 있을 때, 그 시인의 시적 기교는 하나의 우연이나 기적처럼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이 훌륭한 시인의 외적 출현의 전모이며, 한 천재가 탄생한다는 시중의 속설의 전거가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적 기교는 진정성의 문제이지, 두뇌 속의 가짜 기교의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한 천재는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만고풍상을 겪으며 오랜 기간 동안의 뼈를 깎는 듯한 수련의 과정을 거쳐 왔을 뿐인 것이다. 우리는 그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마치 그것을 돌연한 탄생처럼 이해하게 된다. 시적 기교는 삶의 진정성의 문제이고, 삶의 진정성의 문제는 고통을 향유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문제이다. 어떻게 이글이글 생살을 태우는 고통이 없이 하늘을 찌를듯한 삶의 환호가 가능할 수가 있겠는가! 또한 어떻게 온몸에 식은 땀을 흘리는 고통이 없이 아름다운 삶으로서의 진수를 펼쳐 보일 수가 있겠는가!
삶의 향유는 고통의 향유이며, 차라리 고통, 그 자체일는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쾌락과 고통은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로 이루어진 하나의 밧줄이다. 우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 밧줄을 건너가야 하는 것이지, 마치, 땅을 짚고 헤엄을 치듯이, 가짜 곡예를 펼쳐 보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복은 어느 누구보다도 한 편 한 편의 서정시로서 서사적 총체성을 완성해나가고 있는 시인인 것처럼도 보인다. 편의상 그 하나의 시적 도정을 네 개의 시적 도정으로 정리해본다면,
1, 우리들의 아버지를 부정하는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의 첫 번째 도정과;
2, 치욕의 주체인 어머니- 누이들과 연애하는 {남해 금산}의 두 번째 도정, 그리고;
3, 그 연애 과정 끝에 육적 동일화(결혼)를 이루고 있는 {그 여름의 끝}의 세 번째 도정과;
4, 마침내 아버지가 되는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의 네 번째 도정 등으로
설명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시집의 시적 화자는 ‘완벽한 허위, 완벽한 범죄’([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의 세계에서, “아버지, 아버지...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그해 가을])라고 아버지를 부정하고 있는 ‘정든 유곽’의 한량이며, 두 번째 시집의 시적 화자는 치욕의 주체인 어머니와 누이들----“오늘도 화장지 행상에 지친 아들의 손발에, 가슴에 깊이 박힌 못을 빼는 어머니”([어머니 1])라는 시구가 그것이고, “누이는 낮게낮게 소리쳤다, 오빠, 치욕이야!”([자고나면 龜甲같은 치욕이])라는 시구가 그것이다----에게 더없이 따뜻한 사랑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화장지 행상에 지친” 아들이다. 세 번째 시집의 시적 화자는 “그대와 나의 길은/ 통곡이었네// 못다 간 우리 길은/ 멎어버린 통곡이었네”([길])라고 노래를 부르면서, 그 어머니--누이들과 육적 동일화를 이룩한 남편이며, 네 번째 시집의 시적 화자는 ‘어머니와 아내’를 ‘한몸’([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7])처럼 생각하면서, “아이들 이불을 덮어주고 불도 꺼주어야 할 텐데”([높은 나무 흰 꽃들은... 20])라고 걱정하는, 마침내 아버지가 된 시적 화자이다.
첫 번째 시집의 아버지는 한국 사회를 병든 유곽의 구조로 이끌면서, 그 가족 구성원들에게 치욕적인 삶을 강요했던 아버지이며, 네 번째 시집의 아버지는 그 치욕적인 삶의 주체가 되어 모든 시적 화자들과의 관계를 따뜻한 사랑의 관계로 변용시킨 아버지이다. 하지만 전자의 아버지와 후자의 아버지는 ‘완벽한 범죄’와 ‘완벽한 사랑’의 주체자로서 상호 대립적이면서도,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인물의 다른 두 모습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모든 시의 밑에는 그 시대의 사회적 현실이 작용하고 있으며, 모든 시는 동시대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반영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어쩌면 이성복 시인은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로부터 살해를 당해야 할 아버지의 길을 매우 아슬아슬하게 건너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2
외디프스 콤플렉스는 프로이트식의 성적 욕망을 나타낼 수도 있고, 르네 지라르식의 모방 욕망을 나타낼 수도 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침하고 싶다는 욕망은 프로이트식의 성적 욕망일 수도 있지만, 현대 사회의 문화적 맥락에서는 타인과 경쟁자(아버지)들에 의해서 야기된 우발적인 모방 욕망일 수도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식의 외디프스 콤플렉스는 우리들의 성적 욕망의 전거가 되고, 르네 지라르식의 외디프스 콤플렉스는 우리들의 모방 욕망의 전거가 된다. 하지만 외디프스 신화에 초점을 맞추어 그 개념을 정리해 본다면, 외디프스의 범죄가 뜻밖의 어떤 것이라는 점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회복하려는 나의 ‘정체성 회복 욕망’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성복의 콤플렉스는 외디프스 콤플렉스이며, 그의 콤플렉스는 매우 복합적인 울림을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어머니--누이에 대한 편향은 첫 번째에 해당되고, 아버지를 경쟁자로 인식하는 경향은 두 번째에 해당되며, 완전한 존재에 대한 욕망은 마지막 세 번째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그의 시세계에 있어서 외디프스 콤플렉스를 단일한 의미로 환원시키지 않고, 여러 의미가 중첩되는 콤플렉스로 읽어내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
아버지는 모든 권력이 집중된 통개인적인 어떤 인물이며, 아들은 아버지의권위에 도전하는 아들로서의 통개인적인 어떤 인물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들의 모든 권력 관계는 잠재적으로라도 하나의 투쟁 전략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행복은 일류 학교 뱃지를 달고 일류 양장점에서/ 재단”([다시, 정든 유곽에서])된다는 아버지의 권위가 그것이고, “아버지, 아버지...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라는 극단적인 부정이 그것이다. 아버지의 권위는 범죄적이고, 아들의 권위는 모독적이다. 이러한 싸움에서 힘이 약한 아들은 주변적인 유곽으로 도피하게 되지만, 정의 사회를 언제나 부르짖고 있는 아버지에게는 그러한 사실이 참을 수가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싸움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부단히 학대받고 짓밟힌 자들에 대한 아들의 노래가 더욱 더 폭넓은 울림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복의 초기시의 위대성은 이러한 풍자적인 언어로써 아버지의 언어를 해체하고 재구성했다는 데 있다고 보여진다.
이성복의 네번째 시집인 {호랑가시나무의 추억}은 이제는 그 반대의 입장에서 아버지의 언어를 그의 아들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보수와 진보는 우리들의 두 얼굴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이성복의 시에서는, “아침에 갑자기 아내에게 전화가 온다 어머니가 몹시 아프다고”, “어머니, 내리세요, 그 차가 아니예요!”([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6}라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여기 와서 제일 허전한 순간은 잠잘 때이다 아이들 이불을 덮어주고 불도 꺼주어야 할 텐데......”([높은 나무 흰 꽃들은...20])라는, 자식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연스러운 운명의 순간마저도 인위적으로 막아보려는 시적 화자의 안타까운 노력이나 자식들에대한 쓸데 없는 걱정은 보수주의자의 시선이지, 그러한 사실들을 순리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진보주의자의 시선은 아닌 것이다.
그 아버지는 훌륭한 아들이면서도 훌륭한 남편이고, 훌륭한 남편이면서도 훌륭한 아버지이다. 이러한 일인삼역의 어려운 역할 속에 우리들의 아버지의고민이 담겨 있고, 그 쓸쓸하고 허전한 의무 속에 과감하게 떨쳐버릴 수 없는 우리들의 삶의 밧줄이 매여 있다. 이성복의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은 이러한 일상인의 삶의 세목이 사실 그대로 자연스럽게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 더 다행스러운 것은 아내와 자식과, 그리고 아버지의 삼각 관계 속에 매여 있지만도 않고, 그 시집의 후반부에서는 자기 자신의 이웃들과 타인들에 대한 사회학적인 관심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는 점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이 고전적인 수신제가의 덕목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보수적일 수도 있지만, 그의 시는 전복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9]라는 시라고 생각된다.
나의 아이는 언제나 뭘 물어야 대답하고 그것도 그저 “응” “아니요”라고만 한다 그때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저 아이가 딴 아이들처럼 자기 주장을 하고 억지도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때로 나의 아이가 무작정 울면서 들어오지만 아무리 물어도 제가 왜 울었는지를 모른다 나의 아이는 그 마음이 따뜻하고 나름대로 고집과 욕심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무언가 마저 주지 못한 것 때문에 늘 마음이 답답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지만 또 잊어버리곤 한다 나의 아이를 내가 늘 잊지 못하는 것은 저러자면 저는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생각이 가끔씩 들기 때문이다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9]에서 아버지는 자상한 아버지가 되려고 하지만, 아이는 그 아버지의 자상함에 어떤 위화감과 거리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언제나 뭘 물어야 대답하”는 아이가 그것이며, 그 대답마저도 ‘응’ ‘아니요’라고만 짧막하게 대답하는 아이가 그것이다.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애증이 겹치는 관계이다. 아버지의 수신제가적인 덕목은 늘 시혜적이지만, 아들에게는 그 시혜적인 사랑이 하나의 부담으로만 작용한다.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전략)은 “자기 주장도 하고 억지도 썼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지만, 아들은 그 아버지의 전략을 벗어나서 ‘나름대로의 고집과 욕심’ 속에서 묵묵부답으로만 대꾸한다.
이때의 묵묵부답은 아들의 전략이지, 속수무책의 어떤 것이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범죄적인 물음에 맞서서 모독적인 묵묵부답으로 대꾸한다. 그 결과, 안달과 광기에 사로잡힌 것은 아버지이지, 그의 아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답답한’ 것은 수신제가적인 모범답안만을 갖고 있는 아버지이지, 그 모범답안을 벗어난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사랑도 미움으로 변모되고, 아버지의 간섭을 바라지 않는 아이의 사랑도 미움으로 변모된다.
시인의 보수적인 성향과 시의 진보적인 성향은 양립할 수가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시의 기원에 잔인성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아버지의 사랑의 기원에도 잔인성을 두지 않으면 안 되고, 아이의 사랑의 기원에도 잔인성을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애증이 겹치는 관계이며, 언제나 그 잔인성을 실천하는 투쟁의 관계이다. 아버지의 위상은 가부장적인 권위에서 출발하여 노쇠한 불명예로 귀착되고, 아이의 위상은 주변적인 복종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위대한 지배자(신성모독자)로 귀착된다.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모범답안(수신제가적 덕목)이란 있을 수가 없다. 또한 바람직한 정상과 비 정상의 관계도 있을 수가 없고, 이성과 광기의 바람직한 관계도 있을 수가 없다. 오늘의 아버지는 살해당해야 할 외디프스에 불과하고, 오늘의 외디프스 역시도 내일이면 살해를 당해야 할 아버지에 불과하다. 아버지의 사랑의 이면은 모든 것을 허용해주면서까지도 자기 자신만의 권위를 쌓아가는 잔인함이며, 아들의 사랑의 이면은 어떠한 시혜적인 사랑마저도 거절하는 신성모독적인 잔인함이다. 우리는 이러한 엄연한 사실 앞에서 기뻐해야지,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시인의 보수적인 성향과 시의 진보적인 성향은 바람직한 관계가 아닌 것이다.
3
이성복 시인은 외디프스처럼 슬기로워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듯이,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그 아버지들을 상징적으로 살해하고, 한국 시사에 길이길이 남을 만한 불멸의 시들을 남겼다. 1980년대 한국 시단이 풍요로웠다면, 나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이성복을 꼽을 것이고, 그 다음으로 황지우와 박남철, 그리고 최승호 시인 등을 꼽을 것이다. 하지만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의 시들은 그의 명성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외디프스적 운명의 문제도 아니고, 후배들의 거세어진 도전 때문만도 아니다. 이성복적 위기 상황은 어디까지나 시인의 문제이지, 불가피한 외부조건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는 훌륭한 아들이면서도 훌륭한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타자의 주체성마저도 동일화하려는 잔인한 아버지이기도 한 것이다. 시인으로서의 이상적인 전형은 아폴로적 유형에서 디오니소스적인 유형으로 걸어 나가야 하는 것이지, 디오니소스적 유형에서 속물 교양주의자의 전형인 희극의 주인공으로 걸어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의 시적 화자들은 희극의 주인공은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고 보여진다. 그 시집에는 무엇보다도 이글이글 생살을 태우는 시적 화자의 고통도 없고, 한 뛰어난 시인의 사회학적 상상력의 깊이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삶의 깊이가 차츰차츰 엷어져 간다는 것, 이것은 단순성의 깊이도 아니고, 진보의 결과도 아니다. 메마르고 건조한 문체가 그렇고, 짧은 단시들이 그렇다. 이성복의 시적 목표는 한 편 한 편의 서정시로서 서사적 총체성을 완성해나가는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의 두뇌 속의 기교에 불과할 때, 그것의 실패는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일 것이다. 시는 문화적 장식품도 아니고, 공허한 말장난도 아니다. 또한 시는 시적 기교의 문제도 아니고, 후 세대를 두려워하는 보수주의자의 문제도 아니다. 위대한 진보주의자는 자기 자신의 비극적인 삶마저도 어떠한 시적 기교도 필요치 않은 세계로 만들어 버린다.
이제 이성복을 칭찬함으로써 자기 자신들의 이익과 특정 집단의 이익을 챙기던 시대는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칭찬은 시인에게도 독이 되고, 그 자신들에게도 독이 된다. 그리고 한국 시문학사는 더 큰 중병을 앓게 될 것이다. 누가 이성복의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의 세계를 ‘자아의 확대와 상상력의 심화’라고 칭찬할 수가 있겠는가? 또한 누가 이성복의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의 세계를 훌륭한 아버지의 초상으로서 칭찬할 수가 있겠는가? 나는 그들과 반대 방향에서, 마지막으로, [높은 나무 흰 꽃들은 燈을 세우고 1]의 시를 인용해두기로 한다.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의 시세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이성복 다운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시라고 생각된다.
노오란 꽃들이 종아리 끝까지 흔들리고 나는 식당으로 밥 먹으러 간다 발정난 개처럼 알록달록한 식욕을 찾아, 지름길을 버리고 여러 개의 정원 같은 세월의 골목을 돌아 나는 추억의 식당으로 간다 내가 몸 흔들면 송진 같은 진액이 스며나오고, 발길에 닿는 것마다 조금씩 슬픈 울음을 울기 시작한다 언제 와도 좋은 길을 나는 처음인 듯 이렇게 걸어보는 것이다 으으으 벙어리의 입 모양을 지으며
모든 시인들에게 있어서 수신제가적 덕목은 불필요한 감정의 낭비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비극의 주인공들은 모든 인문주의자들의 교양을 ‘발정난 개처럼’ 물어뜯어 버리고, 어떠한 ‘슬픈 울음’마저도 ‘으으으 벙어리의 입 모양’으로 향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위선적인 인간의 탈을 벗으면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아버지의 유덕이 조건없이 성화되는 한 그 아들의 삶은 끝장이 나게 마련이다. 어찌 살해를 당할 외디프스의 운명이 행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시는 온몸으로 온몸으로 삶의 내용을 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