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있는 두려움을 내어쫒기 원한다면(요14:25-27)
-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는 이유③ -
2024.6.9, 김상수목사(안흥교회)
두려움(Fear)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올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다른 사람들 보다 더 잘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있다. 죄인, 미래가 불투명한 사람, 가진 것이 많은 사람, 욕심이 많은 사람,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사람, 죽음 준비되지 않은 사람 등이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두려움 중에서도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어른들이나 죽음을 앞둔 분들만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어린이들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얼마 전에 어린이들에게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고, 대답을 듣는 동영상을 본 적이 있다. 그 동영상을 보면, 어린아이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 어린이들에게 죽음에 대하서 질문과 대답을 들은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PmD4FpW4ptw&t=3s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들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더 나아가 우리는 어떻게 하면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 일단 디모데후서 1장 7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라고 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의 마음에서 행복을 빼앗아가고, 온갖 염려 근심들을 유발시키는 두려움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속해서 다 같이 요한일서 4장 18절 말씀을 읽어 보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이 말씀을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쫒나니”라고 했다. 어떤 두려움인가 하면,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다(“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이 형벌은 죄에 대한 책임의 형벌이다(=죄책에 대한 두려움). 성경은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했고(롬3;23),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 받는 대가는 사망이다(롬6:23). 여기서 말씀하는 사망은 단지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는 육체적인 호흡이 끊어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육체적 죽음 이후에 영원한 지옥의 불 못에 떨어져서,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것까지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러한 형벌의 두려움을 내쫒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여기서 말씀한 두려움을 없애고 내쫒는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에서 우리(나)의 죄를 대신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의미한다.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라는 말씀은 곧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온전히 거하면, 두려움이 더 이상 내 마음을 지배할 여지가 없어진다는 뜻이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가 죄에 대한 책임을 용서를 받았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환대이다.
예전 설교시간에 언급했던 영화들 중에 “버디칼 리미트”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 속에 보면, 수직암벽을 등반하다가 사고를 당한 아들과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희생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온다. 바로 이것이 우리(나)를 살리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두려움 속에 휘둘리지 않고, 평안을 유지하는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온전히 거하는 것이다.
** 버디컬 리미트 영화 : 암벽에서 떨어지는 장면 - https://www.youtube.com/watch?v=WNDexC_AU-8&t=2s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 안에 어떻게 온전히 거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온전히 거하기는커녕 우리들은 1초 전에 생각난 아이디어를 메모하려고 하면 그 짧은 사이에도 잊어버리는 존재들이다. 그것뿐인가? 얼굴 펴고 웃으면서 살아보려고 하다가도, 작은 돌부리 같은 문제에도 너무 쉽게 상처받고, 넘어지고, 흔들린다. 나도 남들처럼 잘하고 싶고, 잘 믿고 싶고, 한번 사는 인생 정말 잘살아보고 싶은데, 마치 가지 많은 나무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듯이, 각종 크고 작은 염려근심들로 인해서 쉼 없이 마음이 흔들린다.
그래서 이러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들 도울 수 있도록 주님이 보내주신 분이 있다. 그분이 바로 보혜사 성령님이다(요14:26-27). 보혜사(파라클레토스)라는 단어는 대언자, 변호자, 돕는 자, 카운슬러 등의 뜻이다(참고 : 이단집단인 신천지의 이만희 교주는 자신도 보혜사라는 반성경적인 주장하지만, 성도들은 이러한 이단집단에 현혹되면 안 된다. 성경은 이단 교주들을 포함한 모든 창조물들을 보혜사나 어머니 하나님 등과 같은 개념으로 말씀한 적이 없다. 이러한 이들의 이름은 성경에 거명된 적도 없다).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6-27)
주님이 보내주신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가르쳐주시고, 생각나게 하신다. 또한 우리 안에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참된 평안을 주신다. 더 나아가 성령님은 우리에게 각종 은사들도 주신다. 은사란 교회의 덕을 세우고, 믿음을 굳게 하며, 복음을 힘 있게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주시는 신령한 선물들을 말한다.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들이 온전한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우실 뿐 아니라, 순교의 자리에까지 설 수 있도록 붙들어 주신다.
우리들은 성령님이 계속해서 내 안에 내 마음의 핸들을 잡고, 내 삶을 운전해 가시도록 마음의 운전석을 내어 드려야 한다. 이처럼 성령님께 내 마음의 중심을 내어 드리고, 그분의 인도하심 앞에 나를 복종시켜나가는 것이 성령충만한 성도의 모습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행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성령님까지 우리 안에 보내주셨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구하는 자에게 주님은 성령충만을 주신다(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그러므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우리 마음속에서 염려 근심의 노예로 살아가게 하는 두려움을 내쫒고,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과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 성령충만을 간구하자. 이것이 성령충만을 받아야할 중요한 이유이다.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