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우려됐던 러시아와 유럽 간의 '가스 전쟁'이 본격화할 조짐이다. 러시아 국영 가스업체 가즈프롬은 27일 폴란드와 불가리아에 천연가스의 공급을 끊었다. 또 폴란드·불가리아가 자국 영토를 지나는 가스관에서 타국행(폴란드는 독일,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와 헝가리) 가스를 불법으로 빼낼 경우, 가스 공급을 그만큼 줄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가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 군사작전을 개시한 이후 유럽 국가를 상대로 가스 공급을 중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러시아는 지난 1월 가스 대금 연체를 이유로 몰도바에 가스 공급을 중단하기로 한 바 있다.
폴란드와 불가리아는 우선 급한 대로 이웃 유럽연합(EU) 국가로부터 가스를 융통할 계획이다. 유럽 국가들도 이날 긴급 가스 조정 관련 회의를 열고 공동 대응 방안 논의에 들어갔다. 겉모습 만으로는 공급자인 러시아와 소비자인 EU간의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가스프롬, 불가리아의 불가르가스와 폴란드 PGNiG측에 가스 공급 중단/얀덱스 캡처
현지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가스프롬은 27일 "폴란드와 불가리아가 이달치 가스 대금을 러시아 통화인 루블화로 결제하지 않았다"며 "루블화 결제에 동의할 때까지 불가리아 국영 '불가르가스'와 폴란드의 PGNiG사에 대한 가스 공급을 계속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 가스 전쟁의 전말
러시아의 가스 대금 루불화 결제 요구는 지난달 23일 푸틴 대통령이 '비우호적인 국가 48개국'에 대해서는 가스 대금을 루블화로 받도록 지시하면서 시작됐다. 이 조치는 4월 1일부터 시행됐다. 다만, 과도기적으로 가스프롬뱅크에 유럽의 가스 구매자 이름으로 외화 예금과 루블화 예금용 특별 계좌를 각각 개설해 구매자들이 계약서 대로 외화(달러 혹은 유로화)로 입금이 가능하도록 했다. 구매자들이 외화 계좌에 가스 대금을 입금하면, 가스프롬방크는 그 대금을 루블화로 바꾼 뒤, 구매자의 루블화 계좌에 입금하고, 가스프롬방크가 루블화로 대금을 받아가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유럽은 이 같은 편법 지불 방식마저 원칙적으로 거부했다. EU의 대러 제재조치와 충돌한다는 이유에서다.
그 결과, 폴란드와 불가리아가 가장 먼저 러시아로부터 가스 공급 중단이라는 철퇴(?)를 맞았다. 계약서상으로 4월치 가스대금의 납부 시점이 가장 먼저 돌아왔기 때문이다. 유럽 국가들과 가스프롬 간의 계약에 따르면, 4월분 가스 요금은 4월 하순, 혹은 5월에 지불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가스프롬의 가스관 시설/사진출처:가스프롬 VK계정
푸틴 대통령이 가스 대금의 루블화 결제 요구에 나선 이유는 간단하다. 러시아가 계약서에 따라 유럽의 구매자(가스 회사)에게 가스를 공급했고, 가스 회사는 유로화로 가스 대금을 정상적으로 은행에 납부했으나, 정부(EU)가 그 은행 계정을 동결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러시아는 가스 대금을 못받는 꼴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와 불가리아는 러시아 측이 내놓은 편법 가스비 납부 방안도 거부하고 "가스 공급 중단이 계약 위반"이라며 법적 투쟁을 선언했다. 계약서는 전쟁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는 일방적인 변경을 허용하고 있다고 러시아 측은 주장할 게 분명하다. EU는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유로 러시아 외환보유고의 절반 가량인 3천억 달러를 동결시킨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를 '전쟁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볼 것인지 여부가 관건이다.
알렉산더 니콜로프 불가리아 에너지 장관은 "4월치 가스 대금을 모두 지불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그 돈을 은행에서 찾지 못한다. 예금 계좌가 동결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가스가 정치·경제적 무기로 활용되는 것이 분명하다"는 불가리아 측 주장에도 러시아의 절박한 선택에 이해가 가는 이유다.
◇ 가스 전쟁서 누가 우위에?
이번 '가스 전쟁'에서 명백하게 불리한 쪽은 폴란드와 불가리아다. 양국은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가 매우 높다. 러시아 우랄지역에 있는 '시나라 투자은행'(инвестбанк Синара)의 분석가인 키릴 바흐친(Кирилл Бахтин)에 따르면, 가스프롬은 폴란드에 연 97억 입방미터(㎥), 전체 소비의 50% 가량을, 불가리아에는 23억 입방미터, 약 80%를 공급하고 있다.
이웃 국가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준다고 해도, 또 가스 소비의 성수기(겨울철)가 지나고 있다고 해도, 양국이 러시아의 가스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지난 1월 몰도바는 가스프롬의 가스 공급 중단 통고에 서둘러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특별 예산을 편성해 '몰도바가스'사로 하여금 연체 대금을 갚게 했다. 유럽의 가스 가격은 가스프롬의 이번 조치로 이날 20% 이상 폭등했다.
유럽의 10개 가스 수입업자, 루블화 결재를 위해 가스프롬방크에 특별계좌를 열었다/얀덱스 캡처
가스프롬방크/사진출처:트윗 @ABC_GROUP
러시아의 편법 루블화 결제 방안을 수용하는 유럽 가스 회사들도 하나 둘씩 나오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새로운 방식으로 러시아에 가스 대금을 지불하기로 한 기업은 10개사(사실상 10개국)이며 이미 4개 기업은 루블화로 지불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가 루블화 결재를 요구한 유럽의 '비우호 국가' 23개국 중 절반 가까이 러시아 요구를 들어준 셈이다.
크렘린 측이 루블화 결제에 동의한 유럽 가스회사들의 공개를 거부했지만, 비교적 러시아에 우호적인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우선 꼽힌다. 레오노레 게베슬러 오스트리아 에너지부 장관은 가스프롬의 가스 공급 중단 발표 이후 현지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가스 공급을 중단할 것 같으냐"는 질문에 "없다"고 답변했다. 시야르토 페테르 헝가리 외무장관도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러시아의 가스 공급이 일정대로 진행 중"이라고 올렸다.
가스프롬의 주요 고객중 하나인 독일의 가스회사 유니퍼(Uniper)는 전날 "유럽의 대러 제재를 위반하지 않고 러시아 가스 대금을 적절하게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독일 정부와 긴밀히 접촉하고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편법 루블화 결제 요구를 수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대목이다.
◇ EU의 거센 반발에도 러시아는..
우르줄라 본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가스 공급 중단을 용납할 수 없으며, 에너지 자원을 무기화하려는 러시아측 의도"를 규탄하고, 도미닉 라브 영국 법무 장관이 "러시아가 받는 손해도 엄청날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단기적으로는 공허해 보인다. 당분간은 가스 재고로 버틴다고 하지만,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기시작하면 유럽 전체가 '가스 대란'에 빠질 게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가혹한 시나리오:유럽의 가스대금 루블화 결제 거부가 몰고올 결과/얀덱스 캡처
우크라이나 전쟁에 가장 비판적인 국가중 하나인 폴란드와 가스프롬 간의 충돌은 이미 지난 2월 초에 불거졌다. 올해 말로 계약이 완료되는 폴란드 PGNiG사가 러시아와 새로운 장기 계약을 맺지 않을 것이라고 공표한 것.
피오트르 나임스키 폴란드 에너지안보 장관은 "2027년 완공 예정인 액화천연가스(LNG) 터미널 공사를 2025년으로 앞당기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LNG 터미널을 활용해 러시아산 가스의 대체 공급자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인데, 그때까지 러시아에서 가스를 공급받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다. 폴란드는 이미 가스프롬과 러시아의 민간 LNG 가스회사인 노바텍(자회사 노바텍 그린 에너지)에 재재를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