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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의 봄
오래된 것들은 골목이 되어갔다 직선의 도로 날에 잘려 나간 마을 안쪽
윤색된 기억의 빛깔은 늘 찬란한 봄이었다
생애의 비밀 문자 주름살로 위장하고 자벌레 걸음으로 시간의 경계를 넘는 할머니 뒷모습에도 나른함이 따르고
여기서 거기까지 몇 생을 돌아야 할까 작아지던 골목이 한 점 한 점이 될 때
터질까 사라져버릴까 꽃망울 만개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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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사이클링
맞짱은 맞짱으로 지천명의 이 봄날
징검돌 두어 개 놓고 문득 길이 끊겼나요 바람이 흔드는 대로 손을 놓아도 좋아요
긴 머리 시니어 모델 당당하던 워킹처럼
떨어질 땐 고딕풍으로 타협 없이 가세요
두 번째 꽃을 피우는 낙화들의 업사이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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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거기였을까
고 작은 알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다섯 살 계집애처럼 종알종알 맺혀있다 환하게 손을 놓으며 물속으로 뛰어들던
거슬러서 거슨새미 오른쪽으로 노단새미 주어진 이름대로 흐를 만큼 흘렀는지 물 긷던 새벽별마저 물동이를 버리고
저 모퉁이 돌아서면 새가 날아오를까 아버지 근육 같은 나무뿌리 한쪽을 베고 작은 새 작은 날개를 파닥이고 있었지
여기가 거기였을까 줄거리 띄엄띄엄 풀숲에 길을 지우고 이끼 앉은 시간도 지우고 저 홀로 눈물에 젖어 무너지는 그때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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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그림 스케치
빨간색 우체통 안에 그리움을 데생해 설렘을 터치하는 손바닥 문패도 달고 명도는 봄 햇살만큼, 휘파람도 그려봐
자연산 색채마다 자연산 추억이 돋아 백살된 팽나무와 돌도 안 된 백일홍이 마당의 평상에 앉아 별을 찾고 있었던
오밀조밀 오조리* 비 그친 수채화 속 장화 신은 고양이가 삐뚤삐뚤 길을 묻다 담쟁이 이파리 사이 숨은 그림이 되었다
* 오조리: 서귀포시 성산일출봉 아래 있는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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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이 있는 풍경
가을이 지나가는 바닷가 둥근 안쪽
그 흔한 연줄도 없이 혼자 남은 닻 하나
기우뚱 바닷속으로 화살표를 꺾는다
닻 내린 지점을 어부는 잊었을까
파도의 호흡 아래로 드러났다 잠기는
쓸쓸한 풍경이 되어 녹이 슬어가는 기억
빈 몸으로 살아도 아직 남은 부끄러움
계절마다 다 떠난 섭지코지 뒤편에서
바다의 얇은 이불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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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굽는 여인
관광지 경계선을 잠시 빠져나간 여인
불판 위에 소라 몇 개 꽃처럼 올려놓고 그 꽃 다 피기 전까지 눈을 떼지 않는다
플라스틱 의자가 깔 맞춤으로 나앉고 안줏거리 같은 날 먹기 좋게 익어갈 때
바람은 예의도 없이 낯선 말투로 불었다
곱게 핀 꽃과 바꾼 계산서 반을 접어
또 옵서, 고맙수가. 허리 굽힌 수평선
다목적 인사말 하나를 영수증처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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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 팽나무
피사체 노을 속에 흑백의 미학인가요
차렷 자세 세워놓고 나를 찍지 마세요
겨누어 나를 향하던 총구들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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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구를 만나다
그 사람과 나 사이 숨은 길을 찾았다 새로 돋은 나뭇잎에 햇살 듬뿍 내려도 아직은 미덥지 못한 듯 입술 꼭 깨무는 봄에
앞서 누운 조릿대 다시 밟고 오른다 칡 감발 슬픔 위에 내 발자국 겹치면 초록색 바람이 분다. 스물아홉 청년 같은
보급품 구하러 나간 동지들은 돌아왔을까 꺾여도 빛이 나던 그 남자 의지처럼 백골의 사금파리가 돌담 위에서 더 희고
감자 몇 개 삶아내던 무쇠 솥도 깨지는 시간 일흔 번째 꽃이 피고 일흔 번째 꽃 지는 동안 그 자리 나를 기다린 한 남자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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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의 띠
낮과 밤의 문턱은 어디쯤이었을까 악몽처럼 뒤집힌 해맑은 영혼들이 잔잔한 포말이 되어 사그라든 그 지점
천 일 동안 비 내리고 천 일 동안 물에 잠겨 목젖 더 깊숙하게 가라앉던 네 이름 종잇장 하나를 두고도 들리지가 않았지
어느 뱃길을 따라 다시 여기 왔을까 멈춰 선 자리에서 시간의 결 헤쳐보면 한 바퀴 세상을 돌아온 영혼들이 있었다 ----------------------------
묘의 급
바람도 무장한 채 문틈을 엿보던 밤 덜컥덜컥 동백꽃 영문 없이 떨어진다 만발한 낙화 위에서 울음들이 꺾이고
서론 본론 구분 없이 한 세상이 쓰러지고 떠돌이 작은 별들 일흔 번째 떠도는 동안 이념의 붉은 입자들 한 점으로 뭉쳤을까
묘에도 급이 있었다 돌계단 층이 지듯 버려진 시간만큼씩 등허리 더 굽히고 사는
충혼묘 현의합장묘* 속령이골 골이 깊다.
* 충혼묘, 현의합장묘: 1949년 1월 12일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서 국방경비대와 무장대의 싸움으로 희생된 국방경비대, 민간인, 무장대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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