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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무상”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이 수시로 변하기에, 아무 것도 보장받을 수 없음으로 덧없고 허무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삶이지만, 이 속에서도 예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오히려 현실 너머의 영원이라는 속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삶의 자리에서 경외하고 예배하는 자는, 영원 전부터 시작하여 영원까지 소멸되지 않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여러분, 꺾이고 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지만, 그 삶이 꺾이고 진 자리를 하나님으로 채운다면, 그곳은 더 이상 실패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총으로 인한 성공의 시작점이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끝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소설가인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의 책 “모히칸 족의 최후”를 보면, “데이비드 가무트”라는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는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시편을 음악으로 만들어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는 성도였기에, 하나님은 좋을 때뿐만 아니라 위기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분이란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언제어디서든 또, 어떤 상황에서든 그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 권능, 그리고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며 살았습니다. 비록, 소설 속의 주인공이지만, 그로 인해 펼쳐지는 환경은, 우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되돌아보면, 들판의 풀이요 시든 꽃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가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며,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변치않는 유일한 것은, 하나님과의 1:1교제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2대 왕이었던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패권국의 왕으로 세상 부귀영화를 다 누리던 그가 어찌 본문 15절에서,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라는 고백을 했을까요? 다윗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제국의 왕이었으나, 그의 삶을 속에서 보면, 그리 행복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조차, 다윗은, 자신에게 임하고,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하는 시편을 썼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것은, 다윗은, 모든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돌보심과 통치에 감사하고 경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숱한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그랬기에, 본문을 통해, 유한한 인생과 달리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권면합니다. 여러분, 성도인 우리 역시, 본문을 기록한 다윗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까지나 하나님을 찬양하며, 송축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5 - 16절을 보시면,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라고 합니다. 성도인 우리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해야 합니다.
본문 15절은, 덧없는 인생을 들의 풀과 꽃에 비유함으로 우리가 잘 아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느껴지는 인생의 무상함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극단적으로 대조가 됩니다. 본문의 “인생”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에노쉬”입니다. 이는, “병들다, 부패하다”의 의미이기에, 여러 히브리어 중에서도 인간의 연약함에 초점이 맞춰진 단어입니다. 또, 모세는 이러한 인생의 연수를 70세요, 강건하면 80세라고 했습니다. “에노쉬”나 모세가 말한 “인생의 연수”나 모두가 천 년의 시간을 하루같이 느끼시는 하나님께 비할 때, “경각”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짧은 시간입니다. 또, 본문 16절을 보시면, 인생을 바람에 비유함으로 이 역시, 인생의 덧없음을 의미합니다. 마치, 아라비아 사막에서 불어오는 열풍에 의해, 아름다웠던 잎사귀가 한 잎 두 잎 떨어지고 마른 가지가 되는 것을 연상케 합니다. 그러므로, 그 아름답던 꽃과 같은 영광일지라도, 뜨거운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그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는 것을, “에노쉬”를 통해 강조합니다. 다윗은 바로 이러한 인생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찬양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생을 살면서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위로 오르려고 합니다. 위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끊임없이 상승하려고만 합니다. 정작, 그렇게 오른 곳에 얼마 있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그러기에, 비전을 향해, 전진하며 노력하는 것은, 공연한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이 없는 비전은 공허할 뿐입니다. 그래서, 영원하지 못한 것에 인생을 걸기보다 오직,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목표와 지표로 삼는 것이 지혜입니다. 다윗은 본문에서,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라고 함으로, 인생에 있어서, 아무리 젊은 날이 화려하고 건강할지라도, 강물처럼 흐르는 세월 속에 인생은 낙엽처럼 떨어질 뿐임을 말합니다. 이는 우리 모두의 삶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결국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삶 속에서 희망을 포기한 염세주의적 사고와 같지만, 본문이 있는 시 103편 전체를 볼 때, 다윗은 염세주의적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러한 삶을 통해, 영원하고, 불변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선포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의 말씀이며 소망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은, 쇠하거나 소멸치 않습니다. 이는 단순히 말씀을 아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당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말씀 위에 세워진 신앙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인생의 화려함과 영광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이 자신의 삶과 기억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러므로,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에 우리의 삶을 올인 할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불변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영원히 찬양하며, 우리 삶의 푯대로 삼아, 영원토록 하나님만을 찬양하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7 - 18절을 보시면,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라고 합니다.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자녀에게까지 전해야 합니다.
본문 17절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라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인자하심을 나타냄으로, 하나님의 영원불변을 말합니다. 아무리 오래 산 사람도 천년을 살지 못합니다. 요즘에도 100년을 살면 정말 오래 사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인생은 유한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왜 굳이, 하나님의 인자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른다고 했을까요? 그것에 대한 대답을, 본문 후반부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보시면,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다윗은 이를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받는 놀라운 축복이, 자신만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그의 후손이 자신과 동일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릴 것이라 믿었던 겁니다. 이러한 다윗의 믿음은 실제로, 그의 후손에게 이어졌습니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자녀들이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 있는 자라면, 누구든 누릴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의 자리에 있었던 겁니다. 그러기에, 성도인 우리 역시, 이러한 다윗과 그의 후손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축복을 보며, 우리 역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자녀에게 상속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본문 18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 대하여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라고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익히는 것에 열심으로 살아가지만, 정작 그 열심의 열매인 행함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TV를 통해, 인터넷을 통해, 세계의 유명한 목회자와 신학자의 강의를 듣고 또, 성경의 명쾌한 주해를 읽고 지식으로 습득하지만, 그의 삶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그들의 머릿속에 잡다한 지식 중 하나로 치부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목회자의 설교나 교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비판만 할 뿐, 자기 자신은 그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사는 무책임한 비판가들만 양성되는 겁니다.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은, 우리만큼 심오한 말씀의 깊이를 가지지도 못했고, 훌륭한 설교를 듣지도 못했고, 다양한 말씀 연구와 접근 방법을 경험하지도 못했지만, 그들은 이 세상을 뒤집고, 바꿀 수 있는 넉넉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비록 많은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알고 있는 기본적 진리만큼이라도 철저히 지키고 행하였기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래서, 마 7: 21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제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대로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에서 영원까지 이르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자손 대대에 이르게 하십니다. 곧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되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과 사랑을 바라보며, 오늘을 인내하며 살아가는 겁니다. 이제 성도된 우리는 다윗이 행했던 것처럼, “지키고, 기억하고, 행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며, 이 삶을 자녀에게도 전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은 19 - 22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합니다.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을 송축하며, 찬양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생명을 가지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마땅히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함으로 찬양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확신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도된 우리는, 만 입이 있어도 하나님의 은혜에 다 감사할 수 없고, 찬양하기에는 부족할 뿐임을 압니다. 하지만, 우리를 성도로 불러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적은 정성이라도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할 때, 하나님은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찬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께 대해, 세상의 모든 사람들 뿐 아니라, 모든 천사와 피조물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충만한 만물을 통해 복을 주십니다. 이처럼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하는 것은, 성도된 우리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입술에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바쁠 때나 틈날 때나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끊어져서는 안 됩니다. 사 43: 21을 보시면,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며,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임을 명시합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참된 목적이, 하나님을 송축하며 영광 돌리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질투 그리고, 분노의 말로 하나님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도 벗어나는 행위입니다. 여러분, 참된 지혜를 원하십니까? 참된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지혜의 근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본문의 끝절인 22절에서,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외침을 되내어 보면, 그 곳에서 계속하여 샘 솟듯이 우러나는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벅찬 감격과 환희가 내재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이처럼 벅찬 감격과 환희에 빠지게 하였을까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하도록 했을까요? 그것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었습니다. 죄를 죄로 갚지 않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십자가에서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씻고, 우리가 천국을 바라보는 희망의 삶을 살도록 부활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을 모두 꽤뚫어 안다고 하여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소망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수 없다면, 성경을 아는 지식은, 울리는 꽹과리요, 뜨거운 햇볕으로 말라버리는 풀과도 같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본문의 끝에서,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강조하고 강조한 것처럼, 하나님을 영원히 찬송하며,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심으로, 우리와 우리의 후손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