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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제주방 7명, 경기방, 서울방, 또 대구경북방에서 와 30여 명과 미사 드리고 있습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이 말에 동의하십니까?
하루에도 수없이 선택하죠.
또 인생이라고 하는 여정 중에도 얼마나 많은 선택을 하는지 모릅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여기까지 올 때도 본인은 모르지만 적어도 4~50번은 선택했을 겁니다.
일단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날 거냐 하는 것부터 선택했죠.
알람을 5시로 할까 5시 반으로 할까?
나는 오늘 아침 선택부터 실패했어요.
8시로 자명종을 맞춰놨는데 몸이 힘드니까 계속 꺼버려요.
내가 은퇴하고 나서는 아침을 못 먹는데 일요일은 미사 때문에 먹어야 해요.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부터 선택이고 옷을 뭘 입을까, 어떤 색을 선택할까?
선택 아닌 게 없어요.
하다못해 미사 때도 신부님을 계속 쳐다보면서 미사 할까, 아니면 눈을 깔고 할까.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또 신부님 사진을 찍어도 되는가 아닌가.
앞에 있는 자매는 세례명이 뭐예요?
마르타는 인생의 수많은 선택 가운데서 제일 성공한 선택이 뭐예요?
(답) 하느님이요.
왜 그렇게 거룩한 얘기를 해요?
(답) 진심입니다.
그러면 제일 실패한 선택은 뭐예요?
(답) 없습니다.
자매들에게 물으면 ‘없어요’ 하는데, 속으로는 ‘남편이에요.’
다시 태어나면 저 남편 절대 선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80%는 넘습디다.
나도 뒤돌아보면 수천 번 선택을 잘못하고 살았고, 성인들조차도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많이 했는데,
잘못된 선택이 없이 무결점일 수는 없죠.
‘잘못된 선택한 게 뭐 있겠습니까?’ 물을 때 제일 현명한 대답은 뭘 것 같아요?
‘수없이 많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잘못된 선택이 있었지만, 하느님 안에서 그 선택이 아름다운 선택으로 바뀐 것도 많습니다.’
진짜 뒤돌아보면 순간순간마다 선택이 아닌 게 없어요.
옛날에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한다는 말이 한참 유행했었어요.
LG 선전에서 나왔던 것 같아.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가장 잘 선택한 것이다.’ 맞는 얘기죠.
주일에도 교중미사 갈까, 특전 미사 갈까, 저녁 미사 갈까, 귀찮은데 그냥 김웅렬 신부 유튜브 강론 텔레비전으로 들어볼까?
그런데 오늘 여기 올 때 신부님 선물을 뭘 사서 갈까, 이것을 고민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이런 선택은 잘 안 해요.
하지만 미사예물에 얼마를 넣어야 할까, 헌금은 얼마를 해야 하나.
하다못해 성물방에 가서도 우리는 되게 망설이죠.
요놈이 좋나 요놈이 좋나?
그런데 또 성모님 앞에 촛불 봉헌할 때도 하나 할까 두 개 할까?
내가 분명히 강론과 피정 때 ‘한 영혼에 한 초’라고 가르쳤거든, 식구가 넷이면 초 4개를 봉헌해야 한다.
그런데 초 하나에 사돈의 팔촌까지 다 쓸어 집어넣고 기도하죠.
옛날에 성모님께서 기억력이 좋으실 때는 젊으셨을 때는 초 하나에 100명을 집어넣어도 다 알아들으셨는데,
이제는 연세가 많으셔서 수십 명을 한 초에 집어넣고 ‘성모님 우리 가족 전체를 위해서 봉헌합니다.’라고 하면 안 돼요.
기억나세요?
정확하게 ‘한 초에 한 영혼’이라는 건 내가 만드는 얘기가 아니라고 그랬죠.
성녀 소화 데레사가 하신 말씀이죠.
그래서 내가 성지에 있을 때 ‘초 팔아먹으려고 머리 굴리는 거 아니다. 본당에서든 어느 성지에 가든지 명심해라’ 했었죠.
아무튼 의식을 못 해서일 뿐이지 매 순간순간이 선택입니다.
처음부터 ‘이것은 아주 완벽한 선택이다’하고 선택한 사람도 있겠고, 또 결과를 보고 ‘내가 선택 잘했네’ 하는 사람도 있어요.
선택을 잘해서 하루가 행복할 수 있고, 인생이 행복할 수가 있고, 죽은 다음에 영원히 행복할 수가 있어요.
맞죠?
선택을 다른 말로 ‘분별’이라고 얘기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선택이라고 하지만 우리들은 분별이라고 얘기해요.
분별은 두 가지가 있죠.
세상 이치를 분별하는 세상 분별이 있고 영의 이치를 분별하는 영의 분별이 있어요.
세상 이치의 분별은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선택하게 돼요.
그렇지만 영의 이치를 분별하는 것은 본인의 지식이나 의지가 아니라 성령이 도와주셔야만 영의 분별을 할 수가 있어요.
오늘 제1독서에는 어떤 이야기가 나왔어요?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제1독서에는 여호수아가 등장하죠.
여호수아는 모세의 직계죠.
모세가 가나안 땅 입구에 서서 여호수아에게 모두 맡기고 사라졌어요.
그 후에 모세는 성경 어디에도 안 나와요.
그런데 여호수아가 데리고 간 그 가나안 땅은 사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에요.
게다가 수많은 민족이 살아서 우상숭배와 별의별 신을 다 섬기고 있었죠.
자칫 잘못하면 유대인들이 전부 다 하느님 배반하고 그쪽으로 갈 형편이야.
여호수아는 자기의 죽음을 내다보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택과 결단을 내리라고 하는 얘기가 나와요.
모세도 죽었고 자신마저 죽을 때 과연 이 백성이 하느님을 끝까지 섬길 것인가?
당연히 여호수아 입장에서는 너무 큰 걱정이었죠.
그건 마치 내가 열심히 사목하던 곳을 떠나고 후임 신부가 왔을 때 과연 내가 있을 때처럼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이런 분위기가 지속될지 하는 걱정, 당연히 하겠죠.
개판으로 살던 신부들은 떠날 때는 반대 마음일 거예요.
‘나보다 더 개판으로 사는 신부가 와야 내가 개판으로 산 것 표시가 안 나는데.’
나보다 잘난 신부가 오면 내가 엉망으로 산 게 표시가 나는 것도 똑같은 거예요.
이 강론 듣고 찔끔한 신부들도 있겠죠. 은퇴 신부가 하는 말이니 잘 듣고 앞으로 잘 사세요.
여호수아한테는 너무 큰 걱정이 있는 거야.
자기 죽을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
왜? 40년 동안 같이 헤매면서 이 백성들이 어떤지 다 보았죠.
틈만 나면 광야에서 금송아지 만들어 우상 숭배해서 속 썩였던 일부터, 배고프면 배고파 죽겠다,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던 때가 더 좋다고 모세한테 삿대질하고 농성하고, 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고 했던 백성들,
선배였던 모세가 얼마나 생고생했는지 알고 있었죠.
그런데 이 사방이 다 우상 섬기는 족속들이야, 걱정되는 거예요.
당시 이스라엘이 정착했던 가나안 땅 안에는 이방인들 우상 숭배자들 참 많았어요.
그런 이방인들과 함께 살면서 당연히 유혹에 빠질 유대 민족에 대한 걱정이 당연히 많았겠죠.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스켐(세겜)이라는 곳에 다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소위 지도자들에게 선택의 길을 하라고 촉구하죠.
‘선택해. 나와 내 가족은 하느님을 선택할 거야. 너희들은 어떡할 거냐?’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건지 지금 이 자리에서 선택하라고 얘기해요.
담판을 지으려고 온 거예요. 담판을 내기 위해서 다 불러 모은 거예요.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결판을 내고 싶었던 거죠.
그리고 유대인들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 말을 하긴 해요.
‘우리가 야훼를 져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다니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 우리는 야훼를 섬기겠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말과 똑같은 얘기를 했어요.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 버리고 다 떠났어요.
왜? 지난주 복음이 뭐였죠?
예수님이 해괴망측한 얘기만 해.
‘이 빵이 자기 살이다, 포도주가 피다, 그리고 내 살과 피를 먹어야만 산다.’
‘저거 미친놈이구나. 우리 괜히 쫓아다녔네. 알아들을 수가 없어.’
오늘 복음에 보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떠났죠.
열두 제자 너희도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고 예수님께서 그랬잖아요.
그래도 베드로는 급한 성격 때문에 예수님한테 혼도 많이 났지만, 기본적인 믿음이 있었어.
오늘 뭐라고 그랬죠?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렇죠. 여호수아가 유대인들한테 물었을 때와 똑같은 얘기를 한 거예요.
‘우리가 야훼를 져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다니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 우리는 야훼를 섬기겠습니다.’
항상 독서와 복음은 연관이 돼 있어요.
구약 안에 신약이 숨어 있고 신약에 의해서 구약은 완성이 되는 거죠.
유대인들의 이 말을 듣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여호수아는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어요.
오늘 복음으로 잠깐 다시 돌아와 봅시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뭐라 그래요?
‘선택’하라고 하죠.
당신의 몸이 빵이요. 피가 포도주라고 하고, 몸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하니, 인간들은 어리둥절해서 질겁합니다.
그래서 많은 제자가 떠납니다.
그들은 세속 욕심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적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떠난 겁니다.
기복으로만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복을 원해서 성당에 왔는데 복이 안 와? 수백 번 냉담해요.
세례받은 지 1년도 안 돼서 떠나요.
세례받고 나면 뭐가 해결될 줄 알았는데 해결이 안 되고 일이 더 꼬여,
그러면, ‘이거 잘못 왔구먼, 여기 오면 뭐 좀 되는 줄 알았는데.’
세속 욕심. 다시 말하면 세상 복만 바라는 사람들은 주님의 ‘영의 말씀’을 절대 못 알아듣죠.
그렇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제 마지막으로 열두 제자에게 물었죠.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겠느냐? 선택해.’
제자들이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고 어리둥절해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누가 나섰다고요?
원래 어디든지 큰형이 총대를 메야 해. 그렇죠?
집안에 일 터지면 해결하고 나서는 건, 그래도 큰형이야.
베드로가 총대를 메고 한마디 합니다.
고기 잡는 것밖에 몰랐던 어떻게 보면 배운 것도 없던 베드로 입에서 군더더기 하나도 떼어낼 것도 없는 답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베드로는 많은 약점을 지닌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아주 분명하고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었죠.
그렇기 때문에 세 번이나 배반했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첫 번째 교황에 앉히신 거예요.
‘네가 이렇게 실수하는 것은 네 성격 때문에 그런 거야. 그렇지만 그 실수하는 네 마음 밑에는 큰 바위가 하나 들어가 있어.
반석이 있어. 뭐가 와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있어.’
그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 문을 여는 열쇠를 주신 거죠.
인간은 신앙을 절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없다 이겁니다.
한평생 말씀을 선포했던 나도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못 깨달아요.
왜냐면 볼 때마다 다르게 얘기하셔.
내가 한 달 전에도 이 복음을 읽으면서 무지하게 고민하며 ‘아 이 복음의 뜻이 이거였구나’ 너무너무 좋아했는데
1년 후에 그 복음을 읽으면 다른 그림이야.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보물이 이 안에 묻혀 있을까?
우리는 죽어서 하느님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을 적어도 비슷하게 전할 수 있는 사도들을 선택하셨죠.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을 선택하셨어요. 그분들이 사제들이에요.
사제들의 제일 중요한 첫 번째 일은 성당만이 짓는 게 아니에요. 말씀 선포예요.
일주일 내내 한 달 내내 설교 준비해야 해요.
본인이 체험하지 못한 것은 간접 체험을 인용해서라도 훌륭한 강론으로 만들어 내야죠.
아무튼 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어요.
알려고 노력할 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먼저 선행이 되어야 할 것이 뭐냐?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는 것’입니다.
신덕의 핵심인 ‘순명’도 따지는 게 아니죠.
말도 안 되는 거지만 일단 믿는 거예요.
인간이 앞을 내다봐야 얼마나 앞을 내다보겠습니까?
한 치 앞도 모르는 건데 내일 일도 모르잖아요.
지금 이렇게 미사 중에 은혜롭게 평화스럽지만, 이따 아파트 문 열고 들어서면서 남편과 한바탕 싸울지도 모르는 거죠.
성체성사에 대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났죠.
‘내 살이요 내 피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도 떠났어요.
오백 년 전에 또 떠났죠. 그래서 프로테스탄트가, 개신교가 만들어졌어요.
‘성체성사 이해 못 한다. 그 안에 무슨 주님의 몸과 피가 들어가 있느냐?’
2천 년 전에 예수님을 떠났던 제자들과 똑같은 현상이 1500년 후에 일어났죠.
이게 역사예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뭐라 그러세요?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이 아니면 나에게 올 수가 없다. 떠나갈 수밖에 없다.’
여기 있는 여러분들, 또 유튜브 방송을 듣고 있는 분들은 일단 선택을 오늘은 잘하신 거예요.
아마 유튜브 방송 들으시는 분들은 휴대폰으로 차에서 보시는 분도 있고 거실에 앉아서 텔레비전으로 보시는 분들도 있겠죠.
또 외국에서 보시는 분도 있을 거예요.
김 신부님 유튜브 미사 볼 것인가, 명화 극장을 볼 것인가 망설이다 일단 선택 잘한 겁니다.
아까 자매님이 하느님 선택한 것이 제일 잘한 것이라 하셨는데, 진정으로 그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말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선택을 잘못한 것도 없다는 것도 진심이길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하느님을 선택했고 영원을 선택하신 분들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선택에 따른 한 가지 넘어가야 할 산이 하나 있어요.
선택한다는 것은 뭐냐? 포기를 뜻해요.
이게 힘든 거야.
누구나 선택은 할 수 있어.
그런데 선택은 다른 것을 포기함을 뜻해요.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선택을 제대로 못 하는 거죠.
선택만 해놓고 세상 것 아무것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면, 오늘 예수님 버리고 떠난 제자들.
재물 포기 못 해 떠난 부자 청년과 똑같아요.
예수님이 뭐라 그래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
이 말씀을 섬기고 살아야 합니다.
양다리 걸치고 살면 안 돼.
우리는 유혹을 많이 받아요.
선택한 것에 대해서 포기하고픈 마음이 들 때가 많아요.
하느님도 포기하고 싶고 어떤 때는 정말 나쁜 마음도 들잖아요.
사는 것조차도 포기하고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어요.
약까지 사다 놓고 그냥 마시죠.
그럴 때는 애들 생각도 안 나고 그냥 이거 먹으면 편해질 것 같다.
또 선택한 것에 대해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 동시에 포기한 것에 대해서 다시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이것이 바로 관속에 들어갈 때까지 싸움이죠.
그래서 우리는 자꾸 되뇌어야 해요. 자꾸 반복해서 암기해야 해요.
다른 생각 안 들도록 구호를 외쳐야 해요.
군인들이 연병장에 나와서 아침마다 똑같은 구호를 외치잖아.
내가 선택한 모든 것을 우리는 사랑해야 하죠.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천주교를 사랑해야 하고, 내 가족들을 사랑해야 하고, 내 남편, 내 아내를 사랑해야 해요.
이것이 오늘 제2독서의 말씀이에요.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 포기하지 말아라.’ 그 뜻이에요.
순명하라는 얘기가 남편의 종이 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내가 선택한 내 아내, 남편에 대해서 포기하지 말아라. 사랑해라.
그래서 우리 아침에 눈 뜨면 이렇게 구호를 한번 외칩시다.
따라 하실래요?
‘성령께서 선택해 주신 모든 것을 사랑할 것입니다.’
아침에 눈 뜨면 그 기도도 같이하세요.
거기에 하나를 더 붙이세요.
‘오늘 성령께서 선택해 주신 모든 것을 사랑할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실수를 덜 하게 될 거예요. 잘못 선택함이 줄어들 거예요.
무슨 얘기인지 이해가 되셨죠?
오늘 내가 나쁜 목소리로 강론했지만, 굉장히 중요한 강론이고 이건 피정이에요.
유튜브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겁니다.
집에 가서도 차 타고 가면서 다시 요즘은 차 안에서 다 들을 수 있죠.
목쉰 것, 그것은 제외하고 내용만 잘 듣도록 하세요.
♣2024년 연중 제21주일 (8/25)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