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초, 경찰과 국군은 충북 청주 청원지역 보도연맹원 700여 명과, 청주형무소 재소자 300여 명 등 1,000여 명의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집단학살한 후, 충북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 일대에 암매장하였다. 2007년 7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사건 발생 57년 만에 공식적인 유해 발굴 사업을 실시하였으며, 당시 분터골 일대에서는 70여 구의 희생자 유해와 수십 점의 탄피, 옷, 단추, 고무신 등 다수의 유품들이 수습되었다.
□ 아래 청원분터골,오창양곡창고 민간인학살사건자료는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조사한 자료입니다.미흡한 조사였기떄문에 실제발생한 민간인학살사건과는 동떨어진 조사결과에 불과합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고 7월 2일에서 8일 사이 북이면 주민들이 북이국민학교 교실에 감금되었다. 소집 당일 저녁, 경찰들은 간부를 제외한 주민들에게 ‘밥 먹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며 내보내기도 했는데, 도망갈 기회를 주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순진하게 다음 날 다시 집결한 주민들은 7월 9일 청원군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 등에서 희생되었다.
청원군 오창면 오창창고에는 진천과 청원 오창면에서 연행된 500여 명의 주민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7월 10일 오창지서와 오창창고 등에 갇혀 있던 진천과 청원 오창지역 주민 10여 명이 수도사단(사단장 김석원) 헌병대에 의해 사살 또는 폭행치사 당했다.
이날 저녁에 군인 2명이 창고에 와서 군인가족을 나오라고 한 뒤, “동생하고 싸우려고 빨갱이 짓을 했느냐”며 총 개머리판으로 주민 3명을 때려 죽였다. 이어 밤에는 헌병과 경찰이 지서 유치시설에 별도로 갇혀있던 주민 10~15명을 끌고 가 한 명씩 권총으로 사살했다.
이들은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마을의 책임자급으로 판단된 주민들이었다고 한다. 이날 밤 수도사단 헌병들은 오창창고에 주민들을 가두어 둔 채 오창지서장에게 이들을 인계하고 후퇴했다. 당시 창고에 갇힌 주민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10일 밤을 지새웠다.
7월 11일 새벽 2시경 오창에 도착한 6사단 19연대 헌병대 10여 명은 창고에 감금된 주민들이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관총과 수류탄까지 사용하며 주민들에게 살해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총 쏘기를 일시 중단한 군인들이 ‘산 사람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앞으로 나오라’고 소리치자 생존한 주민들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걸어 나갔다. 그러자 군인들은 이들에게 다시 총을 쏴 살해했다. 이날의 희생자는 400여 명에 달했다.
같은 날 오전 8시 30분 인민군이 진입했다며 수도사단이 폭격을 요청했으므로 이에 미 전투기가 오창창고를 폭격하였다. 한편, 7월 10일에 진천전투가 있었으며 인민군은 7월 11일 오후에 오창에 진입했다.
한편, 인민군 점령 후 7월 20일경 이로 인해 의용소방대장 김씨가 인민재판에 의해 처형되는 일이 발생했다. 인민재판 당시 김씨의 죄목은 ‘수도사단의 후퇴 후 주민들을 풀어주려는 오창면장의 열쇠를 빼앗아 이를 막았으며 그 결과 주민들이 모두 죽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한다.
『한국전쟁사』에 의하면, 국군은 7월 12일 청원군 오창읍 화산리와 오근장의 인민군에게 포격을 가했으며, 13일에는 미호천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7월 14일부터 17일까지 청원군 남일면에서 전투를 치르고 보은으로 후퇴하였다.
<부역혐의 피해>
청원의 수복은 1950년 9월 29일 가덕면에 진입한 국군 1사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국군은 가덕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가덕면내 31개 마을과 이웃인 남일면 문주리 등에서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 100여 명을 색출하여 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행정리 주민 남상열은 마을 앞마당에 모여 있는 동안 군인들에 대한 태도가 나쁘다며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나머지 연행된 주민들은 병암리에 있던 가덕지서와 가덕국민학교로 집결되었다가 지서 앞 방공호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국군에 의한 학살은 10월 2일까지 계속되었다.
<미군폭격 피해>
국군의 후퇴와 함께 인민군의 점령이 동시에 진행되던 지역에서는 미군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대규모로 발생했다.
미군은 1950년 7월 12일 조치원 북방에서 패전당한 미 24사단을 금강선으로 집결시키고 있었으며 국군 수도사단은 7월 13일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와 국사봉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인민군은 7월 14일 청주를 점령하였고 그 선발대는 청원군 남일면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7월 14일 청원군 현도면 하석리 강변에서 피난민들과 수도사단 7연대(김석원부대) 병사들을 싣고 건너던 배들과 인근의 피난민들이 1시간에 걸친 미군 전투기 4대의 네이팜 폭격과 기총사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100여 명이 사망했는데, 목격자들은 당시 희생자들대부분이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내려온 피난민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배에 타고 있다가 공격을 받았던 생존자 증언에 의하면, 당시 미군은 이 날 12시 이후부터 뱃길을 끊을 것이며 배를 띄울 경우 폭격한다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퇴하던 국군 2명이 배를 띄우라고 명령했고 이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배를 띄우게 된 것이라 한다.
한편, 폭격을 당한 배들은 군인들의 후퇴를 위해 군인들에게 징발당한 것이므로 사건 당시 상당수의 수도사단 군인들이 이 배들에 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보아 사건 당시에 군인들은 정작 이 배에 타고 있지 않았다. 군의 후퇴작전 보다 더 급했던 민간인들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폭격당할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던 군인들이 피난민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상 청원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은 다음과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9.
북이면 옥녀봉
1,000
괴산과 중복
보도연맹
1950. 7. 10.
오창창고
20
수도사단
보도연맹
1950. 7. 11.
오창창고
400
6사단
폭격
1950. 7. 11.
오창창고
미군
폭격
1950. 7. 14.
현도면 하석리 강변
100
미군
부역
1950. 9. 29.
가덕면 방공호
100
1사단
○ 청원 오창창고 보도연맹사건
청원군 오창면 성산 1구에 살던 26살 청년 김상근씨는 인근 마을 사람 400여 명이 사살됐던 양곡창고에서 시신에 덮여 생존했던 그 순간을 56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사건은 6.25 발생 한 달여 뒤인 7월 10일경 청원군 오창면, 진천군 문백면, 진천읍 사석리 등지에서 김씨 등 민간인 370여 명이 좌익활동 세력으로 몰려 양곡창고에 감금된 채 마을에 들이닥친 국군에 의해 모두 학살됐다는 것이다.
오창 양곡창고 민간인 학살사건의 생존자 김상근(82)씨는 16일 청원군 오창면사무소에서 열린 진실규명을 위한 증언대회에서 한 맺힌 56년의 세월에 대해 털어 놓았다.
김씨가 기억하는 당시 양곡창고 학살현장은 유태인 학살현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지옥'과 다름없었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좌익 활동 경력이나 사상과는 전혀 관련없는 농민들이 어떠한 법적 절차와 재판도 없이 무차별 학살됐기 때문이다.
"마을주민들에게 비료와 농자재를 배급해준다고 보도연맹단체에 가입하라고 하더군요. 며칠 뒤 경찰에 의해 끌려가 양곡창고에 4~5일간 감금됐습니다. 마을을 찾은 국군들이 총과 수류탄으로 창고에 있던 사람들을 몰살했습니다. 저는 시신에 덮여 가까스로 살아났습니다."
김씨 처럼 양곡창고에 감금됐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현재 진천과 오창지역에 4명만이 거주하고 있다. 생존자들과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400여 명 중 30여 명이 생존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희생자 노창우씨 사위인 한성종(68)씨는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네에서 쫓겨나다시피 이사를 간 집이 많았다. 장인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협박에 못이겨 보도연맹에 가입했으나 며칠뒤 경찰에 의해 오창 창고로 끌려간 뒤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지난해 5월 3일 '과거사법'이 제정돼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에 대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으나 아직까지도 생존자를 비롯한 희생자 유가족들은 한 맺힌 삶을 이어가고 있다.
[결정사안]
1950년 6월 30일-7월 8일 충북 청원군 오창면과 진천군 진천면 일대에서 400여명의 주민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는 등의 이유로 헌병대와 군인, 지역 경찰 및 의용소방대원에 의해 소집-구금 되었고, 1950년 6월 30일 진천지역에서 10여명이, 1950년 7월 10일 오창지서에서 10여명이 주동자 및 도주자라는 이유로 사살당했으며, 이후 1950년 7월 11일 새벽 오창창고에 구금된 나머지 구금자 중 최소 304명이 6사단 19연대 헌병 및 수도사단 소속 군인에 의해 총격 살상당했고, 그 몇 시간 뒤 오창창고 인근에 발생한 미군 폭격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건에 대하여 진실을 규명한 사례
[결정요지]
1. 1950년 6월 30일에서 1950년 7월 8일 사이 당시 충북 청원군 오창면과 진천군 진천면 일대에서 400여 명의 주민들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등의 이유로 헌병대와 군인, 지역 경찰 및 의용소방대원 등에 소집되어, 오창양곡창고, 오창지서,진천경찰서 사석출장소 등에 구금되었다.
2. 1950년 6월 30일경 진천지역에서 보도연맹원 중 주동자로 분류된 10여 명이 진천군 진천면 성석리 소재 할미성에서 총격 사살당했다.
희생자 중 홍백학외 2명과 생존자 2명의 신원이 확인되었으며, 가해자는 진천경찰서 사석출장소 경찰로 판단된다.
3. 1950년 7월 10일경 오창지서와 오창양곡창고 구금자 중 주동자 및 도주자로 분류된 10여 명, 도주자 1명과 군인 가족인 구금자 3명이 오창지서 창고 및 오창양곡창고 내외에서, 사살 또는 폭행치사 당했다.
희생자 중 박승하 외 5명의 신원이 확인되었으며, 가해자는 수도사단 헌병대 등의 순인들로 판단.
4. 1950년 7월11일 새벽, 오창양곡창고에서 최소 304명의 구금자들이 창고 앞을 지나가던 헌병대와 군인에 의해 총격 살상당했고, 그 몇 시간 후인 1950년 7월 11일 08:30분경 미군 전투기에 의해 창고 인근이 폭격을 당해 살아남은 사람도 마저 피해를 입었다.
희생자 중 전종설 외 213명의 현장 사망자와 함께 최영복 외 89명의 부상자를 포함한 현장 생존자의 신원이 확인 되었다.
가해자는 제6사단 19연대 헌병대 등의 군인들로 판단.
5. 조사결과, 사건과 관련하여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 수는 총 223명, 현장 생존자 수는 총 92명이며, 신원이 확인된 피해자 수는 총 315명이었다.
6. 희생자들은 대부분 보도연맹 가입자였으나 일부는 가입여부가 확인되지 않았으며, 신청인. 참고인. 증언에 의하면 보도연맹 가입자라 해도 강제 가입자, 또는 단순 추종자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희생자들은 희생 당시 비무장-무저항의 상태였다.
7. 비교전 상태에서 비무장-무저항의 민간인을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무차별 살해한 행위는 당시의 실체법이나 절차법을 위반한 행위이며 국제인도법에도 위반한 행위이다.
또한, 이는 헌법에서 규정한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은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등의 이유로도 침해할 수 없다.” 라는 법치국가의 최소한 원칙도 위반한 행위로 판단된다.
8. 이 사건은 비록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 국군이 급히 후퇴를 하던 급박한 상황에 발생한 것이기는 하나, 비무장 민간인을 적법 절차 없이 소집-구금하고 임의로 사살한 가해 군.경에게 책임이 발생하며 이런 행위를 묵인하고 비호한 국가에게도 책임이 발생한다고 판단된다.
9.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건 관련 희생자와 유족 및 국민들에게 사과할 것과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한다.
1950. 7. 25 저녁영동읍 임계리에 모인 피난민 (임계리, 주곡리,타지역주민)
500~600명을 미군이 남쪽 (후방)으로 피난 유도
1950. 7. 25 야간영동읍 하가리 하천에서 미군에 의해 피난민 노숙
1950. 7. 26 정오경4번국도를 이용 황간면 서송원리 부근에 도착한 피난민 (미군의
유도에 따라 국도에서 철로로 행로 변경)
1950. 7. 26 정오경미군 비행기 폭격 및 기총 소사로 철로위 피난민 다수
사망
1950. 7. 26 오후 ~ 7. 29 오전노근리 개근철교(쌍굴)에 피신한 피난민에 대해
미군의 기관총 사격으로 다수의 피난민 사망
노근리 사례(老斤里事例, 영어: No Gun Ri Case)은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침공을 막고 있던 미국 1 기병 사단7 기병 연대 예하 부대가 1950년 7월 25일 ~ 7월 29일 사이에 충청북도영동군황간면 노근리 경부선 철로와 쌍굴다리에서 폭격과 기관총 발사를 시작하여, 민간인 피난민 속에 북괴군들이 잠입했다고 보고받고 처리한 사건
군인1994년연합뉴스, 한겨레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하고 있는 미군작전기록을 수집하여 노근리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1기병사단이 노근리학살을 일으켰던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확보하고 노근리사건에 대한 역사학 논문과 국제법 논문도 발표하였다
AP통신의 탐사보도
노근리 미군 민간인 학살사건 대책위원회의 정구도 대변인이 중심이 되어 노근리 사건 홍보를 4년간 끈질기게 펼친 결과 문화방송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미국 CNN방송 등에서 보도되고 사건이 점점 알려졌다. 그 결과 노근리 사건에 관심을 갖게된 AP취재팀이 1998년 4월에 취재에 착수했고, AP통신의 최상훈어린이전쟁범죄주한미군이 현지조사를 실시하였으나 지금도 노근리 학살이 고의적살인을 부정하고있다.
노근리 사건 피해자들은 끈질긴 노력으로 2004년에는 사건의 희생자의 명예를 회복하는 법안인 노근리 사건 특별법이 의회에 참여한 국회의원 169명 전원의 찬성으로 국회이 사건이 일어났던 경부선 노근리 쌍굴다리는 2003년6월 30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9호로 지정되었으며, 충청북도에서도 노근리 학살 사건 희생자들의 신원을 위해 2008년에 조성되어 미군 총격으로 숨진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위령탑, 사건 관련 기록·문서·사진인권·평화·역사유가족들도 매년 미군의 폭력으로 죽은 민간인들의 한을 위로하는 제사를 노근리 학살이 일어난 쌍굴에서 지내고 있는데, 미군의 노근리에서의 민간인 학살로 다섯살난 아들과 세살배기 딸을 잃고 부인마저 중상을 입은 노근리 사건 피해자 가운데 한 사람인 정은용 노근리 사건 대책위원장은
“
저곳 철로 위에서 폭격과 기총소사와 지상군의 소총사격으로 님들은 마구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곳, 쌍굴 안에서 60시간을 갇힌 채 기관총전쟁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이 땅에 올라온 미군이 무자비하게 죽일줄 누가알았겠습니까
”
증언
“
소대장은 미친 놈처럼 소리를 질렀습니다. "총을 쏴라.모두 쏴죽여라."라고요. 저는 총을 겨누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이 있었습니다. "목표물이 뭐든지 상관없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
— 제7기병연대 참전군인, 조지 얼리
“
할머니:왜 눈이 그렇게 되신 거예요? 생존자 할머니(당시 11세): 미군의 폭격으로 눈을 잃었지. 거울을 본 적이 없어.
”
그 외에도 다른 생존자는 미군의 폭력으로 얼굴의 반을 잃어 바깥출입을 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68년 전 오늘 세계를 경악시켰던 민간인 학살사건이 발생했다. 6·25전쟁이 한창이었던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무려 4일 동안 참혹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무더운 날에 철로 위와 다리 밑에 고립되어 미군의 폭격과 사격으로 수백 명이 사망했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인 1999년 AP통신의 노근리 사건 보도가 나가면서 이 참혹한 학살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이 발생했던 현장 주변에 노근리 평화공원이 건립되었다. '평화'와 '인권'의 소중함을 알리기 위해 건립된 이 공원은 현재까지 약 13만 명의 사람들이 방문했다. 기자는 노근리 평화공원에서 학살사건 당시 10살이었던 양해찬 노근리사건 희생자유족회 회장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음은 7월 12일에 진행한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것.
- 본인의 소개를 부탁한다. "나는 노근리 학살사건의 당사자이자 그 사건 현장에서 생존한 사람이다. 현재 노근리사건 희생자유족회 회장과 노근리 국제평화재단 이사를 맡고 있다. 과거에는 민선 1기와 2기 지방선거에 출마해서 영동군의원을 두 차례 역임했다."
-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당시 10살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사건 현장에서 목격한 것에 대해 설명을 부탁한다.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남침을 하고 7월 23일부터 대전과 영동 인근까지 인민군이 몰려왔다. 미군들이 인민군을 막기 위해 영동에 왔는데 지리를 몰라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 옛날에 유생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지나다니던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이 임계리다. 옛날에 쓰던 지적도를 살펴보면 이게 길로 나와 있다. 북한군의 차량 이동을 막기 위해 임계리 부락 입구에 대전차 지뢰를 가득 묻어뒀다. 미군들이 이 길을 차가 다니는 도로로 착각했던 거다.
임계리 부락 입구에 대전차 지뢰를 가득 묻어두고 마을에 와 보니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당시에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는 7월 23일에 미군이 영동에 주둔하고 소개령을 내렸다. 북한군이 대전까지 내려왔기 때문에 영동 근방은 전투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임계리가 골짜기였기 때문에 영동의 중심지에 살던 사람들이 전부 피난을 와 있던 상태였다. 23일과 24일에 피난민들이 들어와서 임계리 부락에 600~700명 정도가 모였다. 미군이 임계리 부락입구에 대전차 지뢰를 묻어놓고 와서 보니 부락에서 사람들을 이동시켜야겠다고 판단하여 24일 해가 질 때쯤 피난을 시켜주겠다고 사람들을 독려했다. 피난을 가기 위해 짐을 싸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주곡리에 도착하기 전에 밤이 되어서 더 이상 이동하지 못하고 하가리 입구의 강변에서 노숙을 하며 밤을 보냈다. 24일 밤에 우리가 노숙을 하는 동안 미군은 대전 방향을 향해 밤새도록 포를 쐈다. 사거리가 40km정도 되는 포를 밤새도록 쐈다는 건 인민군이 대전과 옥천 근방에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 와중에 미군이 우리 피난민들의 이동을 막았던 이유는 대전과 옥천 사이에서 미군의 딘 소장이 이끄는 사단이 인민군에게 패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군 사단이 패배한 이유가 인민군 정규군이 피난민 복장을 하고 들어와서 미군을 갑자기 공격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패배한 시점이 바로 우리들을 마을에서 데리고 나오는 순간이었다. 피난민으로 위장한 인민군에게 당했기 때문에 상부에서 피난민들의 이동을 통제시킨 것이었다.
미국 군인들이 노근리 쌍굴다리 인근의 철로 위로 우리들을 올려 보냈다. 땡볕에서 철로 위에 서 있다 보니 사방에서 미군들이 다가와 몸수색을 했고 보따리 검사를 했다. 그런데, 노약자와 부녀자와 어린이들 밖에 없어서 수상한 물건이 나올 리가 없었다. 피난 가는 사람들이니까 칼과 부식, 숟가락밖에 없었다. 칼은 미군들이 수거해 갔다. 꼼짝 말라는 말을 해서 우리들은 가만히 있었다. 수색을 마친 미군들이 어딘가로 무전을 하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정찰기가 지나가더니 나중에 폭격기가 와서 철로 위에 있는 피난민들을 향해 반복적으로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폭격기 1대가 와서 한 차례 폭격을 했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한 대가 한 차례의 폭격을 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폭격기 몇 대가 와서 반복적으로 폭격을 했다. 철로 위에서 반복된 폭격으로 인해 700명 정도 되는 피난민들 중에 절반 이상이 그곳에서 사망했다. 살기 위해 움직이면 어딘가에서 총알이 날아왔다. 이미 자리를 잡고 우리들을 표적으로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더니 갑자기 조용해졌다. 미군들이 다가와서 착검을 하고 사람들을 찌르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은 반응이 없겠지만 살아있는 사람은 아프니까 반응을 할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미군이 쌍굴다리 밑으로 들어가라고 손으로 가리켰다. 내가 철로 위에서 있었던 일이 더 기억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우리 어머니와 누나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가 폭격을 할 때 튄 파편이 박혀서 하반신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고 누나는 폭격의 굉음 때문에 한 쪽 눈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나도 다리에 파편을 맞았는데 그 당시에는 너무 놀라서 다리가 다친 것을 알지도 못했고 고통도 없었다. 내가 다친 어머니와 누님을 부축해서 쌍굴다리로 내려가면서 참혹하게 죽어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물이 빠지는 작은 수로가 있었는데 그곳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있었다. 아마도 폭격과 기관총 사격을 피해서 도망치려다가 죽은 것 같았다.
쌍굴다리 속에서 3박 4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숨어있었다. 작은 움직임만 있어도 미군은 쌍굴다리로 사격을 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기를 달래기 위해 먹을 것을 찾았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철로 위에 버리고 온 식량을 가지러 가다가 미군의 총격에 사망한 사람들이 많았다. 노근리 사건 현장에 가보면 쌍굴다리의 한 쪽은 도로가 생겼고 나머지 한 쪽은 물이 흐르고 있는데 그 당시에는 도로가 없었다. 우리 피난민들은 그 도로가 있었던 쪽에 모여 있었다. 그 당시에도 도로가 있던 곳은 물이 흐르지 않았고 한 쪽은 물이 흘러서 우리는 물이 안 흐르는 쪽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들이 모여 있던 곳에 도로가 생겨서 조사하기가 어렵다. 당시 그곳에 있었던 미군이 상관의 명령이 있어서 총을 쏘긴 했지만 차마 사람을 향해 쏠 수는 없어서 쌍굴다리 천장을 겨냥해서 쐈다고 한다. 나중에 가서 보니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쌍굴다리 안에서 있었던 사건들 중에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피난민 중에 임산부가 있었다. 쌍굴다리에 고립되어 있는 와중에 아기가 태어났다. 태어난 아기에게 젖을 먹이려다가 그 어머니가 총을 맞아 죽었다. 이제 아기 혼자 남아서 울고 있는데 아기의 아버지가 와서 달래보려고 아무리 노력했지만 배고픈 아기를 안 울게 할 방법이 없었다. 인기척만 나면 미군이 총을 쏘아 대니까 같이 있던 피난민들이 아기를 빨리 없애던지 아니면 데리고 나가라고 했다. 당시 자기 아내는 총 맞아 죽고 아기는 계속 울고 있는 상황에서 피난민들까지 닦달하니까 그 아버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미군의 총격을 멈추게 하기 위해 아기를 물에 집어 던졌다. 자기 아기가 물에 빠져서 발버둥 치면서 죽어가고 있는데 미치지 않을 아버지는 세상에 없을 거다. 그걸 지켜보고 정신이 이상해져서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미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그건 꼭 기억해야 한다고 해서 노근리 평화공원에 흉상을 만들었다. 정말 비극적인 일이다. 비극도 그런 비극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을 마시러 가다가 총을 맞아 죽고, 총을 맞은 상태에서 물을 먹다가 죽고 그런 일들이 반복되었다. 물가로 가다가 총에 맞아 죽으니까 나중에는 사람의 몸에서 나온 피를 마셔 가면서 살아남았다. 그곳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은 그렇게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다. 7월 29일에 미군들은 29일에 철수했다. 700명 정도 되는 피난민들 중 노근리 쌍굴 다리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은 20명 정도에 불과했다.
7월 29일에 미군이 철수하자 그날 인민군들이 쌍굴 다리에 들어와서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이 나쁜 놈들. 민간인을 이렇게 많이 죽였어."라고 말하면서 이제 평화가 찾아왔으니 안심하라고 말했다. 그때 동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평화로워졌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서 나가려고 하니까 인민군들이 우리를 막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낮에 가면 비행기가 폭격해서 죽을 수도 있으니까 어두워지면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밤이 되어 어두워지니까 살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세상 어디에도 군인들이 민간인을 죽이는 법은 없다. 그런데 그 당시에 상황이 급박하니까 상부에서 피난민들은 전선을 통과시키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대전과 옥천 사이에서 피난민으로 위장한 인민군에게 당했던 것 때문에 노근리 학살사건이라는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 노근리 학살사건이 발생하고 50년 정도가 지나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50년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설명해달라. "군대에 가기 전에는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해 말하지 못했고 군대를 다녀온 후에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1968년에 경찰서에 불려간 적이 있었다. 사상적으로 의심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1970년에 또 한 번 경찰서에 불려갔다. 그 당시에는 친구들끼리 얘기했던 것인데 어떻게 경찰이 알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새마을 지도자나 이장은 무슨 일에 연루되어도 좀 봐주는 게 있었는데 그 당시에 내가 어떤 직책을 맡고 있어서 처벌받지 않고 풀려나왔다. 그리고 1973년에 세 번째로 경찰서에 갔다. 세 번째에 왔을 때는 경찰이 직접 와서 나를 데려갔다. 경찰에 갔더니 나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여 사상범, 즉 빨갱이로 몰아가려 했다. 그래서 잘못했다고,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고 싹싹 빌어서 간신히 풀려났다. 당시 내가 이장을 했기 때문에 일종의 특혜를 받아 풀려난 것이었다.
당시에는 노근리 학살사건의 진상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언젠가는 꼭 밝혀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4년에 정은용씨가 찾아왔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노근리 학살사건을 배경으로 한 실화소설을 출간해서 학살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왔던 것이었다. 그분이 오면서 노근리 학살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1999년에 AP통신에서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한 보도가 나가고 미국 정부에서 배상을 해주겠다면서 접촉해왔다고 알고 있다. 배상과 관련된 진행 과정과 결과에 대한 설명을 부탁한다. "엄밀히 말하면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한 배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는 미국이 배상을 제안했을 때 받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노근리 사건에 대한 배상이라고 정확히 지정해서 배상을 해주는 거라면 그 제안을 받아도 되겠지만 우리 대한민국에 미국 군인들이 와서 살상한 거 전체를 다 포함해서 배상해주는 거라면 그건 받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6·25전쟁 때 죽었던 모든 사람들을 다 포함해서 위령비를 만들고 장학금을 지급해준다는 제안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국민들을 생각하면 그건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내가 했던 그 말을 노근리 사건 유족들이 다 들었을 때 모두가 미국 측의 제안을 받으면 안 된다고 했다. 노근리에 국한되어 배상금이 지급되는 거라면 우리가 못 받을 이유가 없으며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 전체에 대한 배상이라면 미국 측이 제안한 그 정도의 금액으로는 충분하지도 않을 뿐더러 다른 대한민국 국민들을 생각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고 다른 조건을 제시했지만 끝내 미국 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우리는 6·25전쟁뿐만 아니라 5천년 동안 수많은 외침을 받고 살아 왔다.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젊은이들과 학생들이 우리나라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역사는 역사대로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을 통해 우리 민족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 정확하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