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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 즐거워 하느니라 말씀/ 로마서 5:1-11 요절/ 로마서 5:2 | 2023. 7. 8 | |
여름수양회 제 2 강 |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는 항상 즐겁게 살고 싶습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즐겁게 지내고 싶습니다. 특히 우리는 신앙생활을 즐겁게 하고 싶습니다. 예전에는 안그랬는데 하면서 추억을 먹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전과는 달라진 현재의 모습에 벗어나고자 고민도하고 토론도 하고 변화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변화지 않는 현실에 낙심합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어떻게 하면 즐거움을 회복할 수 있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우리가 즐거운 신앙생활을 하려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과 화평할 때 삶이 즐겁습니다. 직장동료들과 화평하지 않으면 직장생활이 즐겁지 않습니다. 집에서도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가 화평하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는 싫고 즐겁지가 않습니다. 그럴 때 남자들은 야근이 있다하면서 늦게 들어갑니다. 자녀들도 밖으로 돌게 됩니다. 집에 들어와도 자기 방으로 들어가고 남편들은 자기만의 동굴로 피신합니다. 세상에서도 이럴진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떠 하겠습니까?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으면 결코 즐거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과 화평하지 않으면 우리가 삶이 진정한 즐거움을 누리기 못하게 됩니다. 늘 공허하고 갈증나고 즐거움을 주는 대상을 찾아 방황하게 됩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과 화평해야만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삶이 행복하고 즐거움이 넘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안에 하나님만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17세기 철학자 파스칼은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하나님만 채울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것으로 채우려다 보니 공허감이 생긴다” 전도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전3:11) 하나남과 화평을 누릴 때 만이 빈 공간이 채워지게 되고 참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특별히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기 위해 힘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찾고 두드리고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10절을 보면 ‘원수 되었을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을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늘 정죄감과 심판에 두려움가운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범죄한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할 수 길은 우리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바울은 1장부터 4장에 걸쳐 하나님은 오직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셨음을 말하였습니다. 의롭다 칭하는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오직 우리의 믿음만을 보시고 의롭다 인정하십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를 보고 환경을 볼 때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없습니다. 죄악된 자신의 모습이 보이고 힘든 현실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볼 때 죄악된 자신의 모습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힘든 현실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려운 복음역사, 위태로운 삶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구원의 은혜, 죄사함의 은혜, 말씀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슴이 뜨거워지고 하나님께 다시금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드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은혜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은혜 위에 서 있습니다. 나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은 내가 은혜위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은혜위에 서 있지않다면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믿음이 있습니까? 그러면 은혜위에 서있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믿음이 겨자씨만큼 작게 보일지라도, 믿음이 있다는 것은 내가 은혜의 세계에 들어감을 얻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얻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얻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이미 얻었다고 하십니다. 이미 얻었다고 하시는데 왜 아직 얻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믿음으로 이미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 하시겠습니까? 심히 슬퍼하시고 안타까워 하십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사랑을 주고 모든 것을 주었는데 자녀는 아직 못 받았다고 생각할 때 부모의 마음은 심히 슬프고 안타까울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돌아온 탕자를 보고 형은 분하였습니다. 자기는 평생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듣고 열심히 일을 하였는데, 재산을 다 허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베푸시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누15:31). 다 네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얻었는데 왜 못 누리고 있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큰 아들과 같을 때가 많습니다. 이미 은혜위에 서 있는 데 누리지 못하고 원망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의 즐거움을 회복하고 삶의 즐거움을 회복하는 것은 이미 들어와 있는 은혜의 세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미 은혜위에 서 있는 우리의 즐거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우리는 바라보는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세상에서는 출세하고 권력을 잡고 모든 것을 가질 때 영광을 얻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경쟁에서 승리할 때 영광을 얻었다고 합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영광의 금메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지니는 본질적인 영광입니다. 출애굽한 모세와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을 때 그 영광에 두려워 떨었습니다. 감히 근접할 수 있는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또한 우리가운데 표현되어 나타납니다. 출애굽기 33장 18,19절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은 선한 것 은혜 긍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의 역사, 구원의 역사, 변화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또한 자연만물과 예배하는 자를 통해 나타나기도 합니다. 시편 19편에서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일을 나타내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만나 모세의 얼굴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올때에 피부에 광채가 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할 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은혜받은 사람을 볼 때 얼굴이 빛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3,4절을 보십시오.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인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달을 , 연단을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는 이제 환난 중에서 즐거워합니다. 환난은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환난중에 즐거워하고 있다면 사람들은 사이코패스나 스트레스로 정신이 어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환난을 만나면 고통하고 슬퍼하고 번민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환난 앞에 자포자기하고 인생을 포기하기도합니다. 술을 마시고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운동이나 등산 음악으로 이겨내고자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거듭난 우리는 환난중에도 즐거워하게 됩니다. 환난를 통해서 내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 알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결국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 쉬운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환난이 인내를 낳고, 또 인내는 연단된 인품을 낳고, 연단된 인품은 소망을 낳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환난을 통해 인내하는 힘이 생깁니다. 화초속에서 곱게 자란 사람은 작은 고난에도 쉽게 꺽이게 됩니다. 그런데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은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는 힘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일어서는 힘을 얻게 됩니다. 인내의 과정을 거쳐서 우리의 인격은 연단되어집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격을 소유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을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연단된 인격을 가진 사람은 소망을 낳게 됩니다. 아무 소망이 없던 사람이 소망을 가진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장차들어가게 될 하나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시편39편7절에서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27편4편에서 시편기자는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 되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환난을 통해서 우리는 이런 사람으로 빚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한는 삶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5절을 보십시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소망이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의심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소유하게 됩니다. 소망이 결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소망이 결코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속에 부어졌기 때문에 조금의 의심도 갖지 않습니다. 여기서 부어졌다는 넘치도록 쏟아졌다는 것입니다. 장대비가 대지에 쏟아지듯이 하나님의 사람도 우리마음속에 부어졌습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강렬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넘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이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이 계속해서 우라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고 계십니다. 성령의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며 감격하며 살아가고 있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간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성경지식이 많다고 하더라도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않으시면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애쓰고 시간을 투자하여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랑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입니다. 요한복음3장16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독생자를 죄인들을 위해 내어주신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 연약하다는 것은 스스로 구원할 힘이 없는 상태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이런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는 혹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이것은 기약대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우리가 주신 하늘나라의 소망, 재림의 소망도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은 부끄럽지 않은 것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을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의 피입니다.
오르티즈 목사님은 심한 편두통으로 고생을 했습니다. 일주일에 몇 번씩 편두통이 생겼는데 심하면 기절할 때도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말과 행동에 신경써야된다고 생각하며 조심하고 조심하였습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에 의해 교회의 부흥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리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자책하며 살았습니다. 자신이 무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날 말씀을 읽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너의 문제는 내가 용서하고 받아들인 너를, 너 자신은 받아 들이고 있지 않다는 것이야” “나는 너를 받아 들일 때 예수의 피가 충분하고 만족스러웠는데, 너에게는 그것이 불충분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 문제야”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이후 자신의 말과 행동이 아닌 오직 예수의 피로만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마음의 평안이 찾아왔고 편두통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때문입니다. 다른 것이 없습니다. 10,11절은 말씀합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 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고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안에서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계속해서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단어입니다. 1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2절 “또한 그로 말미암아” 5절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말미암아” 9절 “그의 피로 말미암아, 더욱 그로 말미암아”10절“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11절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즐거워 하느니라말이 뒤이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즐거워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즐겁게, 인생을 즐겁게 사는 길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죽으심과 부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즐거워하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앞에 나옴으로 즐거워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원수되었던 자인데 구원하시고 주시고 자녀삼아주신 놀라운 은혜임을 보게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소망을 갖지 못하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충분하다고 완전하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삶속에서 이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살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염치가 없어서 어떤 때는 나의 노력이나 열심히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하였을 때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보게 되고 찾게 됨을 보게 됩니다.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제가 날마다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하나님안에서 즐거워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