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5월, 설악에는 다시 에델바이스가 만발하는 사랑의 계절이 찾아왔다. 설악에 에델바이스가 고귀한 모습을 드러내면 나는 늘 설악과 사랑에 빠졌다. 1967년 5월 범봉과 첫사랑을 나누었고, 1968년 5월 석주길과 첫사랑에 빠졌다. 에델바이스처럼 청순하고 고귀한 사랑이었다. 1968년 여름에는 칠형제봉 연봉과 첫사랑을 나누었지만 에델바이스가 피는 계절이 아니라서인지 신통치 않아 이번에는 계절을 맞춰 연봉으로서의 첫사랑을 웅장한 범봉 연봉과 제대로 나누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범봉 연봉과의 첫 대면은 범봉 초등 당시 정상에서였다. 외설악을 바라볼 때 범봉에 붙어서 외설악 한가운데로 마치 외설악의 척추처럼 거대하게 내리뻗은 암릉이 바로 범봉 연봉이었다. 그것은 다시 석주길 등 여러 갈래의 암릉으로 나뉘어 외설악에 뿌리를 박는다. 그때는 그것을 그냥 석주길의 연장 암릉으로만 보았을 뿐이었다.
달빛 아래 요정처럼 밤하늘 거니는 멋진 등반 기대
두 번째 만남, 즉 석주길 초등 당시 마지막 봉에서 보았을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석주길에 이어진 암릉이 아니라 석주길과 완연하게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형성된 거대한 암릉으로 위로는 범봉에 이어지고 밑으로는 석주길 외에도 여러 개의 암릉을 거느리고 있어 마치 외설악의 척추 같았다. 당시 나는 그 위용에 압도되어 계속 오르지 않고 마음에 담아둔 채 마지막 봉우리에서 석주길을 마무리 짓고 설악골로 내려섰다. 그래서 범봉 연봉은 당시 내게 남은 마지막 숙제였다.
- ▲ 범봉 연봉 등반.
- 범봉 연봉은 그 규모 및 어려운 접근성 등으로 해서 하루에 해내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비박 장비와 식량 등 무거운 짐을 지고 미지의 암릉을 등반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고 도중에 베이스캠프로 내려와서 자고 다음날 다시 오르는 방식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궁리 끝에 나만의 새로운 등반방식을 생각해 냈다. 암벽장비와 최소한의 비상식만 가지고 24시간, 즉 무박 2일 동안 등반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야간등반 시에는 한 손에 손전등(플래시)을 쥐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한 손을 사용할 수 없다면 미지의 개척등반에서 두 손과 두 발 중 3개로 3지점 확보를 하면서 나머지 손이나 발로 전진을 도모하는 클라이밍 행동철칙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헤드램프라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고민하다 해결책을 찾아냈다. 손전등 대신 보름달빛을 이용해 등반하는 것이었다. 암릉 위로는 밤새도록 보름달빛이 비춰져 시야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봉산과 북한산에서 음력 보름밤에 아무런 조명장치 없이 달빛만으로 암벽을 올라본 경험에 의하면 충분히 가능할 걸로 확신이 섰다.
따라서 낮 동안에 암릉 기점까지 접근하는 계곡 등반과 첫 번째 봉우리까지 오르는 암벽 등반을 하고, 밤 동안에는 달빛이 잘 비춰지는 고도에서 암릉을 등반한 다음 다시 날이 밝아 어둠이 사라지면 계곡으로 내려서는 하강 등반을 하는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야간 특공작전 같은 무섭고 긴장된 등반이지만 나는 반대로 생각했다. 밝은 달빛 아래 밤의 요정처럼 하늘 위를 거닐어보는 그런 멋진 등반이 될 것이라고.
이렇게 주야간에 걸친 긴 시간 동안의 암릉 등반 시 또 다른 위험요소는 밤만 되면 무섭게 변하는 외설악 날씨였다. 특히 봉우리나 능선에서는 계곡과 달리 몰아치는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끼 없이 깨끗한 바위는 비에 젖어도 마찰력이 여전해서 등반에 지장은 없지만 문제는 우리 몸이다. 한여름에도 몸이 비나 이슬에 젖으면 몇 시간 내에 동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군용 방수 파카가 있었지만 심한 비에는 아무 소용없었다. 그렇다고 암벽등반 중에 거추장스러운 우비나 판초를 입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몸통을 둘러쌀 만한 비닐을 속옷과 겉옷 사이에 집어넣는 것이었다. 비닐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집어넣고 가슴과 등을 덮은 후 겉옷을 입으면 우리 몸 중 심장 부분은 완벽하게 방수방풍 처리가 되기 때문이다. 가슴 부위만 젖지 않으면 암릉 등반 중 폭우나 이슬에 노출되어도 추워서 동사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음을 이미 여러 차례 우중 암벽등반을 통해 입증했던 터였다.
- ▲ 범봉 연봉 접근 등반.
- 우리는 음력 보름에 맞추어 자즌바위골로 올라 범봉 발치에서 비박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암벽등반장비와 이틀간의 먹거리와 마실 물을 챙겨 작은 배낭에 메고 범봉 연봉의 하단부로 가기 위해 범봉을 남동쪽으로 끼고 돌았다. 그것조차도 쉽지 않은 바위 길 개척이었기에 시간이 꽤 걸렸다. 등반 기점인 V 안부에 이르기까지 거의 반나절 이상이 소요되었다.
우리는 안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본격적으로 암벽등반을 시작했다. 바위의 형상과 질은 범봉처럼 장년기의 화강암으로 다채로운 형상이고 또한 피부가 단단해서 등반하기에 이상적이었다. 기대했던 대로 바위 틈새마다 고고한 꽃 ‘에델바이스’가 줄지어 피어 있었다. 범봉과 석주길에 이어 그 연봉에서도 다시 한 번 에델바이스 꽃길을 오르며 설악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오르는 걸음걸음 놓인 에델바이스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오르는 호사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잠시 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생각했다. 설악 보기가 간절해 오르는 내 발길에 설악은 진달래 대신 더욱 고귀한 하얀 에델바이스 꽃을 곱게 깔아놓은 것이다. 그 꽃을 즈려밟지 않고는 오를 수 없도록.
그렇다면 나의 설악에 대한 사랑과 설악의 나에 대한 사랑은 같은 것이고 또한 소월의 사랑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다만 사랑이라는 거대하고 신비로운 봉우리를 서로 다른 쪽에서 보았기에 얼핏 달라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마치 앞모습, 옆모습 그리고 뒷모습처럼.
우리 모두 범봉 연봉의 첫 번째 봉우리에 올라섰을 때는 이미 어둠이 계곡들을 암흑으로 메우고 있었다. 어둡기 전에 저녁을 먹기로 했다. 그 사이 어둠은 우리 발아래 펼쳐져 있던 외설악 전체를 뒤덮어 마치 죽음의 바다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 암흑의 바다 위에 섬처럼 떠 있는 높은 암릉들은 여전히 석양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며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세상을 펼치고 있었다.
암릉의 뾰족한 바위 끝을 통해 마지막 석양빛이 창공으로 사라지자 드디어 동쪽 하늘에 또 다른 태양이 나타났다. 보름달이었다. 우리는 암릉 위에서 마른 고사목 가지들을 주워 모아 모닥불을 피우고 저녁을 먹으면서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저 달이 서편 하늘로 지고 동편 하늘에서 어제의 태양이 다시 떠오를 때까지 암릉 등반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었다.다시 등반을 시작했을 때 설악산은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펼쳐졌다. 그날따라 보름달이 유난히 크게 보였다. 휘황찬란한 달빛을 받아 신비한 색채와 형상으로 어둠 속에서 고고하게 솟아 있는 수많은 침봉과 암릉들. 그것은 우리가 익숙한 그런 밝음의 세상도 아니고 해가 뜨고 질 때의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세상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우리를 옥죄는 어둠의 세상도 아니었다. 암흑의 바다 위에 솟아 있는 전혀 새로운 신비한 세상이었다. 모든 것이 창백한 은빛으로 은은하고 무겁게 빛나는 요술의 세상이었다. 그 속에서 암릉을 오르고 내리는 우리의 모습은 바로 밤의 요정이었다.
- ▲ 범봉 연봉.
- 예상했던 대로 손전등은 켤 필요가 전혀 없었다. 달빛만으로 모든 것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암릉 위에서 밤을 희롱하는 밤의 요정들까지도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암릉을 조금만 벗어나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흑의 공간이기에 나는 자일을 모두 이어서 전 대원이 하나의 자일파티가 되어 등반하도록 했다. 불시에 발생할 수 있는 한두 명의 실수를 전체의 힘으로 커버해 주기 위해서였다. 즉 모두 함께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자칫 어느 한 명의 실수(줄 처리 미숙, 확보점 미설치 등)로 자일파티 전체가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한두 명의 사고가 전체를 사고로 끌어들이는 이른바 물귀신 작전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유형의 등반사고가 국내외적으로 적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자일파티 내에서 확보점 설치가 불가할 경우는 차라리 자일을 매지 않고 각자 행동하는 것이 사고의 파급효과를 최소화하는 훨씬 현명한 등반방식이 되는 것이다.
이런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일파티 전체에 걸쳐 등반자와 이웃 등반자 사이에 반드시 한 개 이상의 적절한 확보점을 설치하면서 등반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순간의 실수로 암흑의 공간으로 떨어지는 경우 앞뒤의 등반자에 의해서 확보점을 통한 확보가 이루어져 구조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주 어려운 등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구간은 시간 절약을 위해 그냥 안자일렌 상태로 모두 같이 움직이는 연속등반 방식을 취했다.
물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서로 적당한 거리(7~8m)에서 줄은 어느 정도 팽팽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했고, 등반자 3~4명마다 서로 능선의 반대쪽 면에 있게 함으로써 불시 추락 시 줄이 능선에 걸려 자동 확보가 되도록 하면서 전진했다. 특히 톱인 내가 불시에 추락할 경우를 대비해서 세컨드는 우리 팀 중에서 가장 체격이 좋은 요델 1기의 임청규가 맡도록 했고 선등자인 나와의 거리는 대충 자일의 중간 길이(약 18m)를 유지하도록 했다.
암흑 속에서의 추락, 나를 잡아준 11mm 나일론 로프
달빛만으로 선등해 가면서 전혀 새로운 산의 아름다움과 신비함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달빛 속에서 암릉은 새로운 모습과 향기로 나를 매혹했다. 손과 발과 몸으로 느끼는 촉감까지도 새로웠다.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고 마냥 즐겁기만 했다.
이런 처녀 암릉에서 선등 시 가장 두려운 것은 잡거나 딛고 있는 바위가 빠져버리든지 아니면 조금만 힘주어도 부셔져버리는 썩은 바위들이었다. 나는 달빛만으로도 이런 것들을 충분히 식별해 가면서 위험스러운 바위 조각들은 미리 떨어뜨리면서 전진했다. 때론 타고 오르고 때론 타고 내리고 때론 끼고 돌면서 암릉 등반을 마음껏 즐기면서 무난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 ▲ 키슬링 배낭을 메고 범봉 연봉 하단부로 접근하는 대원들.
- 그러다가 암릉 중간쯤에서 아름드리 크기의 둥그런 바위가 우뚝 서서 앞길을 막아섰다. 바위를 살펴보았다. 그리 어려울 것 같지도 않고 덩치도 충분하게 커서 안전해 보였다. 세컨드에게 특별확보를 요청하지도 않은 채 그냥 바위를 타고 올랐다. 두 팔로 꺾고 바위 위에 올라서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 순간 내가 올라타고 있는 바윗덩이가 움찔하면서 송두리째 옆으로 움직였다. 그 바람에 몸의 균형이 깨어지는 것을 금방 느꼈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 바위 위에 서 있었기에 내 두 손으로 잡을 것은 허공밖에 없었고 두 다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오직 바윗덩어리뿐인데 그 바윗덩이 전체가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내가 오르고 있는 산 전체가 몽땅 무너져 내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잡고 있는 홀드나 딛고 있는 스탠스가 빠지든지 부서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일반적으로 등반 시 4지점 중 1, 2지점이 무너져도 나머지 2, 3지점으로 확보가 되어 추락을 면할 수도 있지만 이 경우는 4지점 모두 동시에 무너져 버린 것이기에 추락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바위가 옆으로 기울며 넘어지기 시작했다. 그 위에서 내 몸을 굳건하게 지탱해 주던 두 발이 미끄러지면서 첫 번째 추락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4~5m 아래 턱진 곳이 있었고 두 발로 떨어지면서 주저앉아 내 추락은 멈췄다. 그러나 황급하게 위를 쳐다보아야 했다. 내가 올라타고 있던 바위도 나처럼 추락할 것이 분명하고 그것이 바로 내 위로 떨어지면서 나를 깔아 으깨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위를 쳐다보는 순간 덮칠 듯이 떨어져 내리는 거대한 바윗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바윗덩이가 커서 무너지는 속도가 비교적 느렸기 때문에 나와 바위의 추락 사이에 약간의 시차가 있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면서 반사적으로 움츠리고 있던 두 다리를 힘껏 걷어차면서 마치 번지점프를 하듯 등 뒤로 펼쳐진 시꺼먼 계곡 낭떠러지로 날아갔다. 그 순간에는 내 몸에 자일이 매어 있는지 아닌지 또는 내 뒤로 죽음의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는지 아닌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그저 바윗덩이에 깔리지 않으려는 오직 단 한 가지 생각에 찰나적으로 일어난 무의식적 반사작용이었다.
시꺼먼 공간 속에서 한참을 뒤로 자빠진 자세로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날아 떨어졌다. 떨어지는 동안 정신을 잃지는 않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공중에서 허우적거리기만 했다. 아마도 그때 나는 허공에서 자세를 바로 잡기 위해 본능적으로 죽을힘을 다해 허우적거렸을 것이다. 마치 공중으로 던져진 고양이가 땅에 부딪치기 전에 자세를 바로 잡으려고 허공에서 반사적으로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한참을 허우적대다가 출렁하면서 추락이 잡혔다. 수평으로 길게 뻗쳐 있던 나와 세컨드 사이의 줄(10여 m 정도)이 수직선상에서 팽팽해지면서 저절로 걸린 것이었다. 그리고는 줄의 장력 때문에 상하로 출렁이고 동시에 회전력 때문에 마치 시계추처럼 좌우로 흔들리면서 시꺼먼 공간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비로소 추락하던 내가 확보줄에 걸려서 살아났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출렁거리는 진자 운동 후에 내 몸의 움직임이 멎었다.
- ▲ 연봉 마지막 봉에서 한밤 중의 대추락. 필자.
- 나는 시꺼먼 공간 속에서 허리에 묶은 한 가닥 자일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의 팔과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완전한 암흑 속에서. 고개를 치켜들어 위를 쳐다보니 내 몸을 잡아 준 생명선인 자일이 뻗어 내린 저 위 능선은 여전히 달빛을 받아 신비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천국처럼 느껴졌다. 바로 그 좁은 공간이 이승인 것이고, 그 밑으로 펼쳐진 광활한 암흑의 공간이 바로 저승인 것이었다. 나는 저승과 이승 사이 암흑의 공간에서 혼자 한 가닥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단 한 가닥의 자일이 저승의 긴 나락으로 떨어지던 나를 낚아채어 구해 주었다. 직경 11mm밖에 되지 않는 나일론 밧줄 한 가닥이 나의 엄청난 추락을 잡아준 것이다.
선인봉 추락사고 이후 자일을 소중하게 다뤄
자일이 신의 손이었음을 새삼 느끼는 순간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얼마 전 도봉산 선인봉 박쥐코스 날개 위 소나무에서 밑으로 떨어지던 요델 후배의 추락장면이었다. 당시 나는 표범길을 오르고 있었다. 1피치 끝 지점에 올라 하켄에 확보줄을 통과시키자마자 별안간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놀라서 위를 쳐다보는 순간 내 시야를 꽉 채우면서 끔찍한 장면이 전개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자빠진 자세로 공중을 허우적거리며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는 장면이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이 클로즈업되는 것처럼 커지면서 순식간에 내 시야를 꽉 채웠다. 그리고는 바로 내 코앞에서 출렁하면서 추락이 멈추고는 한 가닥 줄에 매달려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등반자일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20m 정도의 자유낙하 추락 충격에도 끊어지지 않고 견뎌 내는 믿을 수 없는 진실을 바로 코앞에서 목격한 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추락자는 요델의 3기 대표주자인 박창희였다. 그때까지 나는 바위에서 미끄러지면서 떨어지다가 줄에 걸리는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고 나 또한 여러 번 당해 본 바 있었지만 그토록 긴 거리를 공중으로 날아 떨어지다가 줄에 잡히는 장면은 본 일이 없었다. 그것도 바로 코앞에서.
그 장면은 내게 자일의 위력을 처음으로 실감케 해주면서 내 뇌리에 깊게 새겨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등반용 자일을 항상 경배하는 마음으로 소중하게 다루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후배가 박쥐날개를 마지막으로 올라서서 소나무에 도달하자 그를 빌레이 보던 친구가 그의 확보줄을 확보용 카라비너 고리에서 빼냈는데 그걸 모르고 줄에 의존했다가 균형을 잃고 뒤로 자빠져서 올라온 거리만큼 자유낙하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나 자신이 바로 그런 모습으로 그만큼을 떨어지다가 한 가닥 자일에 걸려 살아난 것이다. 그때는 대낮이었고, 이번에는 완벽한 암흑의 공간이란 것과 추락자가 나 자신이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암흑의 공간이고 미답의 공간이라 나의 추락을 아무도 볼 수 없었지만 나 자신이 나의 기억을 통해서 나의 추락을 생생하게 목격한 셈이었다. <계속>
필자소개 백인섭 산악인(요델산악회)
학력경력 서울 출생, 경복고, 서울대 공대(전기공학), 한국과학기술연구소(선임연구원), 카이스트(전산학석사), 프랑스 IMAG(전산학박사), 데이콤(초대연구소장), 아주대 정보통신대(교수).
등반경력 개척초등 등반(도봉산 : 양지길, 허리길, 표범길 등.
설악산 : 범봉, 석주길, 칠형제봉, 자즌바위골 등)
등반외 취미활동 스키, 테니스, 윈드서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