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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 최후공세 3단계 : 7월공세
제 1 절 공산군의 공격계획과 아군의 배치
1. 개요
중공군의 6월 공세는 금성돌출부 우견부의 금성천-북한강선(아이슬랜드선)에 설치된 새로운 방어선에서 저지되었지만 선우고지 등 일부지역은 7월 초까지도 전투가 계속되었다. 항미원조사에 의하면 그들은 6월 23일까지 6월 공세를 종결하고 24일부터 7월공세(7.13부) 준비에 들어갔다.
이는 중공이 "이승만 대통령의 6. 18반공포로석방"에 의해 6월 군사작전의 효과가 무색해 지고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선전효과가 퇴색됨에 따라 한국정부에 휴전협정을 준수하도록 군사적 압력을 가하는 한편, 휴전을 앞두고 주도권을 행사하려는 기도에서 이미 6월 19일에 "한국군 부대에 대해 새로운 공세를 펴야 한다'는 모택동의 지령이 하달된데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이번 공세에 금성돌출부에 배치된 국군 4개사단(수도사단, 제3.6.8사단)을 섬멸하기로 목표를 결정하였다. 그 이유로 첫째, 전선이 돌출되어 공격에 유리하고 둘째, 1차전(전초전)과 2차전(6월공세)을 통해 이 지역에 익숙하고 셋째는, 국군 방어선의 특징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열거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이유는 방어선의 개선과 더불어 화천을 점령하여 수력발전소를 되찾으려는 전략적 기도가 깔려 있는 것으로 판단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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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반공포로 석방에 관련된 중공군측 홍학지 부사령관의 기록]
6월 18일, 즉 군사분계선이 확정된 지 3일째 되던 날, 한국정부는 돌연 '현지 석방'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민군 포로 2만 7청여 명을 포로수용송에서 국군의 훈련소로 옮겼다. 전쟁포로 송환에대해 쌍방이 합의한 결과를 완전히 무시한 행동이었다. 당연히 한국정정부 행동은 국제적을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군 수뇌부에서는 "이대로는 안된다."는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실력으로 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53.6.20일 팽 사령관이 모주석에게 전보를 보냈다.
"모 주석, 20일 새벽 안동에 도착했음. 조선 남북에 골고루 비가내리고 있음. 그래서 대낮에 승용차로 대사관에왔음. 이극농.등화와 전화 통화를 했음. 현재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정전협정 조인을 월말로 미루는게 좋을 듯함. 상대의 내부모순을심화하기 위해 또다시 타격을 가해 국군 1만 5천 명을 살상할 계획임.(등화 말로는 6월 보름 동안에 국군 1만 5천 명이 인명피해를 입었다고 함) 이 뜻은 이미 등화에게 주도면밀하게 처리하라 알렸음. 내일 21일 김 수상을 만나고 22일 지원군사령부에 가서 휴전 후 각종 조치사항을 준비할 생각임. 가부간 지시를 바람."
이에 대해 모 주석은 답전을 보내 동의를 나타냈다.
"6월 20일 22시 전보를 받았음. 휴전협정 조인은 반드시 늦추어야 함. 언제까지 미룰지는 상황전개를 보아 결정할 수 있음. 국군 만여 명을 살상하는 것이 급선무임."
모 주석의 회신을 받은 지원군당위는 팽사령관이 직접 주재한 가운데 회의를 열어 전선 전반에 걸쳐 제3차 공격을 즉각 시작하기를 결정했다. 이에 각 병단은 각 군에 다음과 같은 지지를 내렸다. "미군과 기타 외국군대를 주공의 대상으로 삼짐 ㅏㄹ것. 단 아군에 공격해 오는 상대는 누구를 막론하고 철저히 응징할 것"
24일 제20병단이 지원군사령붕에 보고해 왔다. 5개 군의 강력한 병력으로 금성 이남, 북한가에서 상소리 사이에 25km 구간에서 공격을 실시하는 한편 돌출된 금성 이남 전선을 밀고 내려가 국군 수도사단. 국군 제6.8.3사단 타격을 전역의 목적을고 삼았으면 한다는 건의였다. 7월 상순에 전역 준비를 끝내고 7월 10일 전후 공격하겠다는 것이다.
6월 25일 지원군 사령부는 제20병단의 작전계획을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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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중공군의 작전계획과 부대 배치
팽덕회는 주공부대인 제20병단(제60.67.68군)에 제21군의 배속을 비롯해 전차. 포병. 공병 등 전투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제20병단은 금성 정면에 82mm 박격포 이상의 지상포 1,100문(km당 44.4문)과 전차 20대를 보유하여 병력은 3 :1, 화력도 1.7 : 1로 우세하였다.
공산군은 7월 10일에 공격명령을 하달 하였다. 2단계로 구분하여 제1단계는 금성 서남쪽 이실동-북정령-배선골과 금성천 이북의 적을 공격 섬멸하며 전선을 직선으로 만든 다음 그후 상황을 보다 제2단계로 삼천봉-적근산-장고봉-흑운토령 및 백암산으로 공격해 나가며 작전이 성공한 이후에는 아군의 반격을 격퇴할 준비를 하되 이 기간중에 디시 대량의 아군을 섬멸한다는 것이다.
(1)서집단(제68군(-1), 제54군 130사단) : 금성돌출부 좌견부 외야동-회고개에서 1단계로 이실동-북정령-월봉산-개야리로 공격, 제2단게로 중집단과 협조하여 배선골 서쪽과 서북의 아군 공격
(2)중집단(제67군,제54군 제135사단, 제68군 202사단 1개연대) : 관대리-교암산간에서 공격하여 동산리,상산리 진출하여 지대내 아군 격멸, 제2단계로 동.서집단과 협조하여 배선골 서쪽 및 서북의 아군 격멸
(3)동집단(제60군, 제21군(-1),제33사단,제68군 제605연대) : 제60군이 송실리-용호동에서 공격, 광대골,세현리 방향으로 공격하여 금성천 교량과 나루터를 점령하고 금성-화천간 도로를 장악하여 아군의 반겨과 증원을 차단한다. 제2단계로 서. 중집단과 협조하여 배선골의 아군을 섬멸한다. 제21군은 제60군의 북한강 동쪽 임무를 인수하여 방어에 주력하다 적을 적을 적극적으로 견제.
이를 위해 중공군은 제20병단을 지원하기 위해서 좌인접 제9병단 제24군으로 하여금 양지-행정간에서 국군 수도사단 제26연대를 공격하여 섬멸하고 상구정과 하구정 간의 도로를 통제하여 김화방향으로 아군의 증원을 저지하도록 계획하였다.
공격개시일은 '53. 7. 13일로 하고 그밖에도 철원-김화의 중부전선에는 제9병단(제16, 24군)이, 서부전선에는 제19병단(제46, 1군)이, 문등리 동족 동부전선에는 북한군 2개 군단(제3, 7군단)이 합세하여 '51년도 춘계공세에 비견되는 대규모 공세였다.
나. 유엔군의 작전계획과 부대 배치
한편 당시 유엔군은 공산군의 이동에 관한 정보를 통해 적의 공세가 임박했음은 물론 주공지역으로 화천저수지 방향으로 지향 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당시 기상불량으로 적의 정확한 동태를 파악하지는 못한 가운데 각 군단장들에게 방어태세를 강화하라 경고하는 한편 국군 제2군단의 우익 방어선의 강화에 주안을 두고 부대배치를 단행하였다.
군은 그동안 부대정비를 완료한 국군 제5사단('53. 1.29에 351고지전투를 제15사단에 인계하고 간성에서 부대훈련 후'53. 4. 10일 북한강 동안의 제3사단('52. 4. 9일 949고지 전초선으로 들어와 전투를 하고, '53.4. 10일 제5사단에 인계(제22연대는 제5사단에 작전배속)후에 미 제8군 예비로 있다가 화천 상리에서 동송으로 이동하여 6.15일 제5사단. 제8사단 작전지역을 일부를 인수하여 529관망산 전투 수행후 화천 동막동으로 철수)인수하여 6.10~14까지 883-973-949고지 전투를 실시 및 후퇴하여 신아이슬랜드선으로 후퇴, '53. 6. 26일 제2군단으로 복귀하여 제8사단과 제3사단 사이로 들어옴)
문등리지역을 방어하고 있는 미 제10군단 좌익인 국군 제7사단의 우익을 미 제7사단(선우고지)이 인수하여 방어정면을 좁혀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일본에서 정비중인 미 제24사단을 '53. 7월 12일 한국으로 이동시켜 후방지역 방아와 포로경비에 투입하였다.
제 2절 조공과 양공
공산군은 금성돌출부에 대한 공격에 앞서 6월 24일부터 이 지역에 대한 탐색공격과 다른 지역에서 조공 및 양공을 실시하였다.
1. 조공
(1) '53. 6.24 ~25일, 저격능선과 관망산 공격
국군 제9사단 제28연대가 방어중인 김화 서북 북진능선에 중공군 제24군 제70사단이 공격을 해 왔으나 700명의시체를 남기고 후퇴했다. 저격능선에는 제9-29연대가 방어중이였으며 중공군의 공격으로 1개 소대 전초 X고지가 피탈되었으나 또다른 전초 A고지는 240명의 손실을 무릎쓰고 방어하였다.
관망산지역은 금성천 도하에 전진기지가 될 수 있는 중요한 감제관측 고지였다. 당시 국군 제3사단의 좌일선 제23-2대대는 폭우속에서 중공군 제68군 제604연대의 공격을 받아 6월 26일 피탈된다.
제3사단는 군단 명령으로 북한강 남안을 제5사단에 인계하고 제22. 23연대를 교대로 투입하여 7월 3일까지 7차례의 역습을 실시했으나 실패하고 1,776명의 손실을 입었고 중공군은 2,962명의 손실을 입었다
제8사 제3사 송실리 중공군 181사
*535 중공군180사 북한강
*485 용호동
여문리 제22연 제23연 *529 관망산 북한강
*445 여문리 금성천 북한강
제23연 제35연
금성천
제3사= 제5사 *324 *462 집실리 금성천
금성천
양지촌
등대리 금성천
광대골 *472 금성천
[유해발굴 관련 탐사 및 탐문결과] 참전용사 증언으로 기록
●정인규(제3-22-2-5중) : '53. 6월 경, 여문리 지역 전투에 참가했다. 휴전이 임박하여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하여 보유하고 있던 모든 무기와 장비를 활용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그 당시 부상자들이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쓰러져가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동준(제3-18-1-2중) : '52. 4.29일 입대하여 소총병으로 3사단에 배치되었다.'53.6월 경 529고지 전투에서 아군 제22연대와 제23연대가 전방에 제18연대가 예비로 전투했다. 전방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고 트럭으로 전사자를 화장터로 싣고 가는 것을 목격하였다.
●왕태여(제3-공병대대) : 화천 구만리 댐 부근에서 많은 전사자를 목격했다. 특히 휴전 직전에 949고지 전투 당시 지뢰 매설차 전투현장에 투입되었을 때 전사자가 많이 있었으며, 구덩이에 전사자 50여 명을 넣어 둔 곳을 직접 목격하였다.
●손담(제3-26-3대?) : '560.8.31일 학도병으로 지원하여 통신병으로 선발되어 통신학교에서 교육받고 3사단에 배치되었다. 대대장 통신병으로 수도고지 전투에서는 99일간 중공군과 교전하여 아군 전사자가 많이 발생했다. 일부 유해는 수습하여 후방인 춘천 봉의산 부근서 영현대가 처리 하였다. (※제26연대는 수도사단이고, 제26연대가 '52. 7.8~10.25일까지 수도-지형능선 전투)
●이기야(제3-23-1-2중) : '50.7.20일에 입대하여 3사단에서 전투했다. 휴전 임박하여 '53.6월 경 949고지 좌측 529고지 전투에서 아군 전사자가 많았다. ☞3사단은 이곳 여문리의 529고지와 949고지 일대의 증언자가 많았다.
●최학병(제3-10포병대대) :'50.1`1우러 말 경 학도병으로 지원 입대하여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고 포병이 되었다. 금성지역 수도고지 전투에서 수도사단이 전투시('52.7-10월 중) 이를 지원하던 제10포병대대가 대대병력 500여 명이 중공군에 포위되어 대대장 이하 대대가 전멸했다고 들었다.
(2) '53. 6. 26일, 북한강 동안 제5-36연대지역, 938(선우고지)고지 공격
중공군 제60군 제189사단이 1개 연대로 북한강 동안의 국군 제5-36연대 진지를 공격하여 연대는 1.3km 뒤로 물러나게 되다.
한편 중공군 제189사단은 또 다른 1개 연대로 미 제10군단 우익 국군 제7사단 제8연대의 938고지를 공격한다. 이 고지는 지난 6월 16일부터 제7사단이 제20사단으로부터 인수한 이래 확보해 왔으며 가장 중요한 1220고지에 이르는 발판으로 중요한 고지였으며 1220고지는 제5연대가 방어중에 있었다.
중공군이 '53.6.26일 21:45에 집중 포격에 이어 공격해온 중공군에 제8-2대대장 선우 소령은 탄막사격과 백병전으로 맞서 혈투를 벌였다. 결국 유무선망이 두절되고 전방 병력이 대대지휘소 쪽으로 몰려들었다.
"철수하지 말라, 현 전선을 고수하라"
결국 선두에서 지휘하는 선우 용 대대장은 수류탄에 전사하고 938고지는 피탈되었다. '53. 6. 27일 세차레나 자체 역습을 감행했으나 실패하자 사단장 김용배 준장은 예비인 제3연대를 투입하여 한 때 역습에 성공하지만 바로 적의 역습에 무너지고 결국 미 제10군단장의 지시로 7월 1일 탈환작전을 중지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제7사단은 1,347명의 손실(전사와 실종 포함)되고 적의 손실은 1,323명으로 추산되었다. 후일 이 고지는 대대장의 감투정신을 기려 "선우고지"라 칭하였다.
용호동 북한강
금성천 북한강 *949 *973
광대곡 *324 북한강
금성천 *462 북한강 *883 *938 *1220
양지촌 ,선우고지
외성동 구대 북한강
*780 황병동 백석산
내성동 후동 제5-36연 광석교 제7-5연
장재동 *538 북한강
제35연 제36연 제5사 제7사
백암산 1179 북한강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 당시 연대장 이병형 대령(예)중장)의 증언 : 이 선우고지 피탈의 주요원인은 대대장이 통신 두절로 중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였고, 그때 공교롭게도 연대장이 전쟁피로로 불면증에 시달려 잠시 연대 지휘소를 부사단장에게 위임하고 연대 후방지휘소에 있음으로 인한 지휘공백이 있었다
2. 양공
(1) '53. 6. 25~29 : 임진강-역곡천 합류지점 국군 제1사단 전초진지 공격
공산군은미 제1군단지역 역곡천 인원의 전초진지에 공격을 가했다. 이곳 진지들은 '51. 10월에 코맨도 작전과 '52. 6월 카운터작전으로 확보한 이래 몇번의 쟁탈전이 전개 되었다.
중공군은 '53. 6.25~29일에 국군 제1사단 전초 250고지(퀸고지)-199고지(박고지)를 공격하고, 7월 6일에는 미 제7사단의 포크찹고지(234)를, 그리고 미 제2사단의 화살머리고지(281)를 공격하였다.
이중에 퀸고지(250)와 박고지(199)는 임진강과 역곡천 분기점 바로 남족 계호동-정동에 위치한 고지들로 이 당시에 구군 제1사단은 임진강을 중앙에 두고 그 좌측에 제11연대(고왕산서측-노리고지), 우측에 제15연대(중사리-어적산리)로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제12연대를 예비로 보유하였다.
중공군 제19병단 예하 제1군 제1사단이 '53. 6. 25일 22 : 00시에 사단의 우전방 전초고지인 퀸고지, 박고지를 비롯해 1고지, 3고지, 마이크고지 등 5개 전초와 좌전방 노리고지 일대를 포격후, 주공을 박고지로, 조공을 퀸고지로, 양동은 노리고지였다.
국군 제1사단은 국군 해병 지1연대(-)까지 배속받아 사단 좌전방에 투입하여 중공군과 전초고지 쟁탈전을벌여, 결국 박고지는 29일 피탈되고 퀸고지에서는 고전이 계속되었다.
임진강
*117 역곡천
*대노리고지 정동
고장리 *소노리고지 임진강 개호동
*69 박고지(199) 퀸고지(250)
*닉키고지
*텟시
고양대 *밥풀고지 임진강
*165 *베티고지
마량산315 태풍전망대
임진강
고왕산355
●김영선(제1-12-1-3-3소) : 임진강 북방 노리고지 점령간 노무자를 지원받아 강 건너 철책을 보강하던 중 지뢰가 폭발하여 노무자 및 현역 다수가 전사하였으나 현지에 방치되었다. 본인도 지뢰폭발로 인쪽 골반을 다쳐 후송되엇다. 이 고지 전투에서 많은 피해가 있었다.
●박천보(제1-15-3대) : '53.2.16일에 논산훈련소에 입대하여 교육 수료 후 '53.6월 말에 제1사단 15연대 3대대 본부에 배치되었다. 대대 서무계로 근무 중 노리고지 전투에서 당시 300여 명이 보충되어도 거의 부대가 전멸하다시피하여 취사병도 다 참가할 정도였다.
●임준철(제1-11-근무중대-2소) : '53. 7월 경 본인은 노리-베테고지 전투에서 제11연대 근무중대 소속으로 아군 전사자를 운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근무중대는 노무자 6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사자를 많이 운반했으나 미수습된 아군이 교통호와 능선 상에 상당히 많이 있었다.
●김격옥(제1-15-3대) : 본인은 '48.1.30일에 군에 입대하여 1사단에서 많은 전투를 했다. '52.12월 초순경 노리고지 전투에 투입되어 진지를 보강하던 중에 수많은 전사자를 목격했다. 전사자 중에는 중대 씨름선수도 있어 동료들과 수습했다. 중대 병력으로 사주방어를 하였는데 대대규모의 적이 공격을 해와 개인호 속에 병사들이 사격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이에 격분하여 소총을 빼앗아 직접 사격을 하다 적의 박격포탄에 부상당하여 후송되었다. 이후 상황은 잘 모른다.
●조윤호(제1-15-수색중) : 본인은 '52. 12월경 연천 북방 노리고지 전투에 투입되엇다. 당시 중공군이 벙커 전체를 폭파하는 통에 우리 아군 1개중대가 전몰. 전사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는데 미처 단 1구의 유해도 수습하지 못했다.
●강신한(제1-11-2-6중) : 나는 베티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에서 수많은 전우들이 전사했다. 베티고지 전투에서 아군과 적군사이에 개울이 있는데 이 개울 주변 개활지에 집중적으로 포탄 사격이 이어져 공격을 위한 기동이 어려워 많은 피해를 입었다.
※고양대부근 전투: '52.10.6-109까지 국군 제1사단이 중공군과 전투. 임진강부근 전투(노리-베티고지) :'52.12.11-13까지 국군 제1사단이 중공군과 전투, 베티고지 전투 : '53.7.15-16까지 구군 제1사단이 중공군과 전투
(2) '53. 7월의 역곡천 일대 전초고지 전투
(가) 포크찹고지전투 : 피탈
중공군이 '53. 7. 6일 공격한 포크찹 234고지는 미 제1군단 우익사단인 미 제7사단이 방어중이었다. 이고지는 역곡천 지류의 바로 북쪽 하사골에 위치한 독립고지로서 지난 3월 적에게 피탈당한 불모고지(275)와 더불어 서부전선의 격전지로 알려져 있었다.
중공군 제23군 제67사단은 아군 전선에서 외따로 떨어진 234고지로 올라와 미 제17연대는 전초지역에서 4일간이나 역습을 반복하며 쟁탈전을 벌였고 중공군은 3개 연대를 교대로 투입하여 격전을 벌였으며 군사령관 테일러 대장이 미 제7사단 전방지휘소에서 무리한 인원 손실을 강요하면서 지킬 가치가 있느냐에 의문점을 나타내며 적에게 넘겨주었다.
*효성산
*395백마고지
역곡천
내석교 역곡천 *281화살머리고지 역곡천
역곡천
*290 티본고지
*265 *324
*191아시널
역곡천
*255포크찹고지 *187 *에리고지 *야월산
역곡천 *천덕산477
*275 *347
불모고지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 불모고지 :유주일(미 제7-31-F중) : 본인은 '52.9.2일에 입대하여 훈련송에서 훈련을 받고 미 제7사단 31연대 F중대 경기관총 분대 소속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특히 '52년도 백마고지 옆 불모고지 방어전투에서 한국군과 미군이 많이 전사했다.
●네바다전초군 : 권영구(미제25-14-3대) : 본인은 '52. 1월에 제주도에서 6개월 훈련받고 7월에 미 제25사단에 배칟되어 철원 금화지구에 배치되었다. 당시는 소강 상태였다. 이후 임진강 상류 고랑포지역의 무명고지에 터키여단 병력이 전투 중 많은 피해가 발생하여 제14연대 3대대가 전투에 투입되었다. 적의 강력한 공격으로 결국 후퇴하여 인원파악을 하니 미군 및 카츄사 등 대대 병력이 50%가 전사 및 실종되었다.
※'53.3.28-30 : 미 해병 1사단 5연대가 중공군과 전투, '53.5.28-29 : 미 제25사단에 배속된 터키여단이 중공군과 전투, 이어서 미 제25-14연대 가 역습중 철수
●백마고지 : 박재덕(미 제3사단 제23연대) : 방위군 시절 노무자로 군생활을 시작하여 노무사단 소속으로 당시 미 제3사단 제23연대와 동행하여 식량, 탄약 운반 일을 하고 있었다. 특히 백마고지 아래로 기억하는데 당시 동료 노무자 및 군인 전사자들이 많이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노무자 활동 후에 '53.6월에 군에 입대하였다.
※'51.11.3-6: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과 전투, 하지만 이전에 미 제3사단이 먼저 진출한 후 국군 제9사단이 진출, '52.106-15 : 국군 제9사단(배속 제51연대)이 중공군 제38군과 전투
● 화살머리고지전투 : '52.10.6-10 : 미 제2사단(배속 프랑스 대대)이 중공군 113사단과 전투, '53.6.29-7.11 : 국군 제2사단이 중공군 제73사단과 전투
●불모고지 : 이옥용(제101노무사단 제101-2-7중) : '51.5월에 노무사단에 배치되었다. 전투 당싱에 전우들에게 주로 식량을 운반하는 임무를 하고 있었으며 당시 노무자 전사자들이 많았으며, 불모고지 일대에 미군 전서자가 많이 있었다.
(나) 화살머리고지 (281)전투 : 방어
좌측 미 제7사단이 포크찹고지에서 전투를 하던 7월 6일, 국군 제2사단이 방어중인 역곡천 북방 화살머리고지(281)에 중공군 제23군 제73사단이 공격을 해왔다.
이 고지는 '51. 가을에 코맨도 작전시 확보한 진지로서 백마고지(395)와 더불어 역곡천 북안에 위치한 요충지다. 국군 제2사단은 지난 '52.12. 29일에 철원지역(281-중강리)에 투입되어 6개월째 이 지역을 방어하고 있었으며 지난 '53. 6. 29~30에도 중공군 제73사단이 공격해와 방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전투에서 401명의 손실을 입고 물러간 중공군 제73사단은 7월 6일, 1개 대대 병력으로 281고지를 공격하였다. 이곳을 방어중인 제2사단 제32연대 제2대대가 설치한 2개의 소초가 피탈되자 사단 역습이 개시되어 30시간이 넘는 사투끝에 회복하였다.
'53. 7. 8일 야간에 적은 6,500발의 야포와 박격포탄을 퍼부으며 재삼 공격을 가하여 혈전이 벌어져 1개 소초가 피탈되었다. 사단은 7월 11일 역습으로 다시 회복하여 끝까지 지켰다.
이 전투에서 국군 제2사단은 500명의 손실을, 적은 750명의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정선재(제2-17-2-7중) : '51.10월에 입대하여 제2사단 제17연대에서 전투했다. 휴전이 임박하여 철원 북방 활촉고지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했다. 아군 전사자들이 당시 교통호 안에 있었으며, 계곡에도 상당한 수의 아군 전사자가 많이 있었다.
(다) 임진강변 베티고지 전투 : 부분 방어
중공군이 주공으로 금성돌출부에 대헤 공격을 취할 때인 '53.7. 13일에 중궁군 제1군 제1사단이 임진강 서안 고양대 부근 국군 제1사단 제11연대 전초인 베테고지에 공격을 가해왔다.
베티고지는 마량산 동쪽 능선상 니키고지 하단부의 무명고지로 바로 앞이 임진강이고 그 너머에 동북 쪽이 박고지다. 당시 최초 방어임무를수행하던 제11연대 제7중대 1개 소대가 적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고 교체되었다.
7월 15일 제6중대 제2소대(김만술소위)로 교대되었으며, 야간에 다시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유개호에 의지하여 강력하게 저항하여 적의 공격을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경사자를 포함하여 12명이 생존하였고, 적은 764명이 살상되었으며 아군 김만술 소위가 태극무공훈장, 미국 십자무공훈장 등 여러명이 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임진강
*117 역곡천
*대노리고지 정동
고장리 *소노리고지 임진강 개호동
*69 박고지(199) 퀸고지(250)
*닉키고지
*텟시
고양대 *밥풀고지 임진강
*165 *베티고지
마량산315 태풍전망대
임진강
고왕산355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박고지 일대의 전쟁후 강력사고 (집단 사살후 월북 등)
●하병렬 소대장의 증언(제1-11-1-3중) : 본인은 '53.7월 중 순 소대장으로 노리-베티고지전투에 직접 참여했다. 전투 중 이문세 상사를 포함해 모두 11명의 소대원을 지금 밥풀고지에 직접 매장했다. 태풍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보인다.
※나는 용사님이 살아 계실 때에 몇번 직접 만나서 인터뷰하고 태풍전망대에서 있는 추모제에서도 만났다. 김만술 소대장과의 여러 얽힌 비화도 들었다. 내가 과천 집으로 찾아뵙고 난 후 운명하셨다.
●박천보(제1-15-3대) : '53.2.16일에 논산훈련소를 마치고 6월에 휴전 1개월을 남기고 제1사단에 배치되었다. 대대 서무계로 있었는데 노리고지 전투에서 당시 300명이 보충되어도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여 당시 취사병가지도 전투에 참가할 정도 였다.
●임준철(제1-11-근무중대-2소) :'53.7월경 당시 27세로 당시 연천에 위치한 노리-베티고지에서 아군전사자를 운반하는 임무를 했다. 당시 근무중대는 충북출신 노무자 6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전사자를 많이 운반했으나 미수습된 아군도 교통호와 능선 상에 많이 있었다.
●조윤호(제1-15-수색중) : 본인은 '52. 12월경 연천 북방 노리고지 전투에 투입되엇다. 당시 중공군이 벙커 전체를 폭파하는 통에 우리 아군 1개중대가 전몰. 전사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는데 미처 단 1구의 유해도 수습하지 못했다.
제 3 절 금성돌출부 전투('53. 7.13)
중공군의 최후공세는 금성돌추부 양익과 임진강변 및 역곡천 변의 전초진지에 대한 조공과 양공에 이어 7얼 13일 야간에 금성돌출부로 지향되었다.
중공군은 동서 양작전 집단이 수도사단과 제3사단(제5사단 좌익 포함)을 돌파함과 거의 동시에 제6사단과 제8사단 전면에 압력을 가하면서 이들부대의 퇴로를 차단하여 포위섬멸을 기도하였다.
1. 금성돌출부 좌견부 붕괴
성산 금성
직목동 금성천
*487 회고개 *468
*473
중치령 770
*512 *552 금성천 *교암산 지형능선
*522
26연 1연
*477 *419 월봉리 수도 제6사
수태리
이청동 *월봉산482
*오성산저격능선
*424 *462 간진현
하소리 삼현
계웅산 북정령
삼천봉 승암고개 적근산
금성돌출부 좌견부는 수도사단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다.
[수도사단 전투경로]
전쟁초기 의정부-한강/시흥지구-평택-진천-청주-보은-안동으로 철수, '50.8.9~9.20가지 안강.기계전투 후에 반격작전간 영양-춘양-영월-평창-속사리-서림-양양으로 진출, 양양-간성-양구-화천-신고산-안변을 거쳐 '50.10.10에 원산 점령, 영흥-함흥-성진-길주-청진-부령까지 진출, 철수간 흥남에서 '50. 12.17일 묵호로 철수(이때 제3사단 제26연대가 함께 옴, 제18연대는 다음에 제3사단 따라 구룡포로 상륙), 묵호에서 다시 서림-양양선으로 진출하여 제9사단 방어선 인수, 중공군 신정공세로 삼척까지 철수하였다가 다시 재반격으로 삼척-강릉-하진부리-속사리 진출, '51. 3.26일 38선 돌파 4. 15일 캔사스선 진출. '51.5.7~13일가지 설악산일대 점령, 중공군 5월 공세로 밀려서 대관령까지 후퇴. 다시 '51. 5. 25일부터 재반격으로 '51. 6. 3일 향로봉 진출, '51. 8. 16~23까지 서화리 동북 924고지 점령, '51. 10.12~15가지 제1기갑연대가 월비산 탈취. '51. 11. 19일에 제11사단에 인계하고 속초-마산-여수로 이동하여 '52. 3.14까지 백야사에 배속하여 호남지구 공비토벌작전. '52. 3. 17 화천이동(미 제40사단지역 인수), '52. 7.7~10.14까지 지형능선 및 수도고지 전투 후 국군 제8사단에 '52. 10. 25일 인계. 양주에서 교육훈련 후에 . '52. 12.10에 미 제9군단으로 배속되어 양주에서 사창리로 이동. '53. 1.1 부터 금성지구 전투(국군 제9사단지역 인수)
수도사단은 하소리에서 회고개까지 주저항선에 좌측에 재26연대와 우측에 제1연대(배속, 제1기갑연대 제3대대)를 배치하고 기갑연대(-)를 예비로 확보하였다.
사단은 좌측의 제26연대는 남대천 북안에 진지를, 제1연대는 남안에 진지를 편성하였으며 중대단위로 동굴형의 거점을 편성하고 그 공간에 지뢰. 철조망으로 보강하였다.
중공군은 서작전 집단의 제68군 204사단, 203사단과 제54군의 130사단이 '53. 7. 13일 21 : 00시에 수도사단 전역, 특히 제26연대 지역에 포사격을 가하면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사단은 지난 7. 11일에 생포한포로를 통하여 중공군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다.
[주저항선 붕괴]
사단은 제26연대 지역에서 "적이 새까맣게 밀려온다"는 보고에 적의 주공을 좌측 지역으로 판단하여 화력의 우선권을 제26연대에 부여하였다.
그런자 적은 30분이 지나면서 사격방향을 우익 제1연대 지역으로 전환하여 중치령과 회고개 방향으로 주공을 투입하였다. 그들은 국군의 동굴전술("적이 공격하면 동굴에 은폐하였다가 진내사격으로 대응")을 역이용하여 소규모 부대로 아군을 동굴에 집어넣고 주력이 부대공간 지역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아군이 진내사격을 요청하는사이에 이미 적 주력이 부대간 간격을 이용하여 제2선의 전방대대 OP와 예비대 지역까지 밀고 들어와 예비대 운용도 쉽지않게 되었다.
제1연대장이 예비대인 기갑연대 제3대대를 중치령 접근로의 적 돌파를 저지하기 위해 522-512고지 저지선으로 투입하였지만 이미 전방대대를 돌파한 적과 조우하여 대대장이 전사하면서 전투력이 와해 되었다. 이에 따라 회고개지역의 제2대대가 증원을 요청했지만 예비대 운용이 어렵게 되고 제1대대도 대대 OP가 적의 파괴통으로 박살나고 병력이 연대 지휘소족으로 철수하게 된다. 다만 좌측의 제3대대는 남대천의 천연적인 절벽으로 인해 적의 접근이 어려워 지탱하고 있었다.
좌익의 제26연대는 우익의 제1대대가 적 1개연대 규모의 공격을 받아 무력화될 위기에 처했다. 때마침 군단의 전투지경선 조정으로 좌익의 제3대대가 제9사단에 진지를 인계하고 제1대대 좌반부를 인수하라 명령하여 이동 중에 있었다. 그러나 이미 중공군이 부대간격을 이용하여 깊숙이 침투함으로서 증원이 불가하였고 이에 제1대대 좌단 제1중대의 전초 2소대는 소대장 황신주 소위외 모두가 포위되어 결사항전하다 모두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리하여 좌익의 제26연대는 첫날 밤 3개 대대가 모두 남대천 남쪽으로 철수를 하게 되었다.
결국 수도사단은 13일 자정까지 전방 대대가 모두 유린되고 14일 새벽에는 전방대대의 OP가 공격을 받음으로서 주저항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제1연대지휘소 피습]
사단장(최창언 준장)은 제1연대장(최세인대령)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고 적의 주공이 직목동-이천동-간진현 방향으로 판단하고 사단 역습을 위해 예비인 제1기갑연대장(육근수대령)에게 1개 대대는 이천동 부근으로 출동시켜 제1연대를 지원하고 나머지 1개 대대는 제26연대를 지원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하고 부사단장 임익순대령을 제1연대 지휘소로 보내어 역습방안을 조정하도록 하였다.
기갑연대장은 제2대대를 제궁동-방동-북정령을 경유 이천동으로 오도록 명령하고 자신은 먼저 제1연대 지휘소에 도착하여, 제1연대장은 정면 역습을 기갑연대장은 우측방에 역습을 주장하여 의견이 엇갈렸다. 결국 제2대대가 도착하자 우측방에서 역습을 하기의해 제6사단 지역인 월봉리 쪽으로 진출시켰다.
[3인 3색의 작전 방향, 적은 이미 연대 지휘소를 포위했다] [기갑연대장, 포병대대장 전사, 부사단장 포로]
이때 바로 사단 부사단장 임익순 대령이 도착하여 연대장 의견을 듣고 다시 정면으로 역습하는 안이 결정되어 부대를 되돌려 이천동 방뱡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역습부대가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중공군이 연대 지휘소를 포위하여 기습을 감행하여 연대 지휘소와 제10포병대대 지휘소가 숙밭이 되어버렸다. 부사단장이 포로가 되고 포병대대장과 작전장교가 전사하였다.
이순간 기갑연대장(육근수대령)도 먼저 도착한 기갑중대의 대오를 수습하는 한편 늦게 도착한 제2대대장으로 하여금 제5.6중대를 지휘하여 포위망을 탈출하던 중에 전사하였다.
제2대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고 포위망을 벗어나 우측 제6사단지역 462고지에서 부대를 수습하였다.
사단장은 제1연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나머지 예비인 기갑연대 제1대대와 배속받는 제59전차중대를 14일 02:00시에 제26연대를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이것은 좌익 제26연대가 상황을 가장보고함에 원인도 있고 제1연대는 지휘통신이 마비되어 제대로 현장상황을 알지못하는 가운데 발생했다.
14일 04:00에 상황이 잘못된 것을 파악한 사단장은 기갑 제1대대를 제1연대를 지원하도록 명령을 바꾸어, 제1대대는 117A도로를 타고 06:00시에 간진현에 도착하였다. 여기사 대대장은 제1연대의 피습상황을 파악하고 북정령 북족에 부대배치를 하고 찰수부대를 엄호하였다. 이때 제1연대와 기갑연대는 승암고개 부근으로 집결하여 재편성에 들어가고제26연대는 큰 손실없이 철수하여 방동 남쪽에서 재편성 하였다.
[돌파 저지]
수도사단장은 기갑연대 제1대대(윤흥정 중령)가 다행스럽게 북정령에서 저지선을 형성하고 철수부대를 엄호할 때에 14일 06:00시에 미 제9군단장이 지휘소에 도착하자 1개 연대의 지원을 요구하였다. 이에 군단장이 예비인 미 제3사단의 제15연대(배속, 그리스대대)를 지원하여 12:00부로 북정령의 수도사단 방어선을 인수받도록 하였다.
14일, 10:00시경에는 미 제8군사령관 테일러 대장이 사단지휘소에 도착하여 적의 돌파구 확장을 저지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사단은 이때까지 수습된 제26연대와 제1연대(기갑연대, 하사관교육대, 제59전차중대)로, 제1연대는 117A도로 도로 북쪽 능선의 우반부를 공격하고 제26연대는 좌반부를 공격하였으나 중공군의 공격으로 원위치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공격으로 적의 진출을지연시켜 미 제15연대의 투입을 보장하였고 철수부대 일부도 구출하였다.
15일, 사단은 다시 12:30분에 양개 연대와 한.미군의 포병과 항공지원을 받으며 공격을 개시하여 15:00경 117A도로 북쪽 능선을 점령하였다. 이 시간에 미 제15연대는 도로 남쪽능선에 저지진지를 구축하였으며 바로 중공군의 역습이 진행되면서 수도사단은 미 제3사단 후방으로 철수한 후에 일동으로 내려와 재편성하게 된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참전용사 전00님(기갑연대 제2대대): 나는 연대장의 죽음을 지켜보며 살아야 하기에 웅덩이에 엎드렸다. 죽어가는 전우들의 울부짖음이 들리고 흐르는 것은 빗물이 아닌 빨간 피가 전 몸에 엉켜 붙었다. 뭐라고 지금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죽어있는 상태로 그냥 웅덩이에 머물렀다.
내 눈앞에서 죽어가는 연대장을 바라보고 움직이지 못하는 육체다. 수류탄 파편이 몇개 몸에 박혔다. 손등에서는 피가 흐를는데 먹물처럼 퐁퐁 솟아 올랐다. 그 덕택에 중공군들의 확인사살에 살아났다. 얼마가 지났을까 지원병력이 도착했다. 난 핏물 속에서 일어낫다. 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후송되었다. 내 눈앞에서 연대장님이 죽어갔다.
[나의 고등학교 동창생의 아버지다. 직접 만나서 증언을 들었다. 부상당해 후송을 가서 복귀하여 전역하게 되는데 전혀 참전용사 혜택을 박지 못하고 있었다. 절차를 알려주어 운명하기 전에 일부 당연하게 받아야할 대우를 받으셨다.]
2. 금성돌출부 우견부 전투(제3사단)
교암산 *770 지형능선 수도고지
제6사=제8사 여호고개 747 *572
북한강
*585 용호동
송동리
*485 관망산
여문리 8사=3사 22연= 23연 *529 북한강
연대CP/박격포 금성천 23연=35연 36연
= 3사 = 5사 *324 *462 *629
금성천 북한강
집실리 제22연대지휘소 양지촌
*551 등대리
금성돌출부 우견부는 국군 제3사단과 제5사단에 의해 방어되고 있었다. 제3사단은 지형능선 좌측으로부터 등대리까지 금성천 북쪽을 방어하였고, 제5사단은 그 우측 양지촌으로부터 낡은터-후동-748고지까지 북한강 서안과 북한강 동안에 방어선을 편성하였다.
[제3사단의 주저항선 위기]
중궁군 제60군은 이미 '53. 6. 25~7. 3일까지 관망산을 점령한바 있으며, 그후에도 적의 정찰활동은 우전방 23연대지역에 집중되었다. 중공군은 '53. 7. 13일 21 : 00시에 집중포격을 시작으로송동리-용호동 일대에서 적과 교전이 벌어졌다. 제23연대장은 적의 주공이 여호고개에서 별우지구로 이어지는 제1대대 지역에 지향되리라 판단하고 예비인 제2대대를 제1대대 후방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적은 예상과 달리 좌측 제22연대를 2개 대대로 공격하였다. 적은 이 당시에 제23연대 지역은1개 중대만을 투입하여 견제 공격을 하고 제22연대 우전방을 돌파하려 하고, 일부 부대를 우인접 제5사단 좌측방 금성천 돌출부로 침투시켜 제23연대 후방을 차단하여 포위하려 기도하였다.
결국 7. 13일 자정경에 우전방 제22연대는 좌전방 제2대대가 고립돤 채 진지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우전방 제3대대는 돌파되었고 역습지원차 올라가던 제1대대도 도중에 적의 기습으로 분산되면서 통신두절로 포병지원도 받지못한 상황에서 연대 지휘소인 집실리 방향으로 철수하게 되고 지형능선의 제2대대는 고립. 포위된 채로 적과 혈투를 벌이게 된다.
한편 제23연대 지역은 좌인접 제5사단 지역으로 침투한 적의 일부가 금성천을 324고지에서 등대리로 도하하여 전방중대를 지원중인 4.2" 박격포 진지를 유린하고 연대지휘소를 기습하여 연대후방을 혼란에 빠드렸다. 동시에 전방 주저항선에 적이 압력을 가중하여 무너지고 있었다. 적의 주공은 용호동-송실리 방향이 아니고 용호동-등대리쪽, 제3대대 방향으로 지향하고 있었으며 대대는 네이팜탄을 폭파시키며 전차소대의 지원하에 방어선을 고수하였다.
[사단역습실패]
사단장(임선하소장)은 13일 22:00시에 상황을 분석결과 적의 주공 방향이 좌측 전방에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 이에 대한 역습 준비로 사단 예비대에 출동준비를 갖추도록 명령했다.
14일 02:00시에 사단은 돌파된 좌측 485고지를 회복하기 위해 제18연대(박경원 대령)는 제1대대를 551고지에 배치하여 제2전선을 유지하고 제2.3대대를 551고지 좌우로 기동시켜 여문리 방향으로 진출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미 551고지 우측으로 기동하는 제3대대는 이미 적이 진출하여 격전이 벌어지고 있어 연대장은 역습보다 침투한 적을 격퇴하자 건의했으나 사단장은 485고지 탈환을 명하여 제3대대는 적과의 접촉을 단절하며 우회하여 07:00시경 여문리에서 제2대대와 합류하여 485고지로 공격을 개시할 무렵 철수하고 있는 제22연대 병력과 뒤섞이고 적의 포격으로 혼란이 가중되었다.
이때 적의 주력으로 판단되는 대부대가 485고지 동쪽을 돌아 남하하고 있음이 목격되었고 후방 제1대대가 적과 교전하고 있어 연댁 포위 직전에 있음을 사단에 보고 후역습을 중단하고 철수를 단행하였다.
이와같이 중공군 3개 사단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14일 새벽 좌전방이 돌파되고 우전방은 주저항선을 지탱하고 있으나 우후방으로 돌파 및 침투한 적에 후방이 위협받는 상황에 역습마저 실패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적이 깊숙히 침투하여 제18연대는 제22연대와 임무를 교대하려 했으나 적이 제8사단과의 전투지경선을 이용하여 적 2개 대대규모가 남하하고, 우측의 제23연대는 적 2개 연대의 공격으로 부대를 수습할 겨를도 없이 병력이 무작정 금성천을 건너기 시작하여 금성천 북안에 구축하려던 제2방어선도 붕괴되었다.
이 무렵 사단은 군단으로부터 14일 14:00시까지 금성천 남안 여내곡 부근에 신방어선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따라서 제18연대는 신진지를 점령하고 , 제22.23연대는 신진지 남쪽에서 부대를 수습하려 했으나 적의 포격으로 여의치 못했다.
한편 좌전방에 고립된 제22연대 제2대대는 14일 오후까지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고 진지를 고수하다 실탄이 바닥나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14:45분 포위망 돌파를 시작하여 좌측 제8사단 지역으로 우회하여 적진을 탈출해 우군 전선으로 복귀했다.
[참전용사 증언]
●박진우(제3-23-2-6-1소) : '53.1.19일에 입대하여 3사단으로 갔다. 분대장으로 휴전이 임박한 '53.6월 경 금화지구 529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국군제8사단과 5사단이 3사단 좌우측에서 전투했다. 당시 냇가에 질퍽한 땅에 아군 전사자가 150여 명이 있는 것을직접 목격하였다. 아군 전사자도 많았지만 중공군 시체가 더 많았다.
●임동석(제3-23-2-5중) : '51.9.11일에 제주도에서 훈련을 마치고 3사단으로 갔다. '53.6월 말경 금화지구 529고지 전투에서 전초 공격시 중대원 중 생존자가 9명밖에 안되었다.
3.금성돌출부 우견부, 제5사단의 금성천.북한강 합류지점 철수
'53. 7. 13일 중공군 제60군 주력이 제3사단을 공격하는 동안 일부 부대는 금성천과 북한강 합류지점으로 침투히여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 후방에 위치한 지휘소와 지원부대들을 포위하여 제3사단을 포위하려 하였다.
이 포위기동의 성공으로 제3사단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중공군은 여세를 몰아 7월 14일 00:45분에 금성천 동안 돌출지역에 배치된 국군 제5사단 제35연대 제1대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제35-1대대는 324고지와 462에 1개 중대씩 배치하고, 배속된 1개 중대는 북한강 남안에, 그 직후방 689고지에 예비로 1개 중대를 배치하였다. 사단은 적이 도섭이 가능한 금성천과 북한강 합류지점을 경유하여 백암산으로 공격할 것으로 판단, 사단장(김종갑 소장)은 사단포병과 미 지원포병을 이곳으로 집중하여 적의 공격을 파쇄하려 했다.
적은 14일 02:00시에 도하를 개시하였다. 이에 제35연대장은 에비 제3대대(-1)를 후방 780-낡은 터로 추진하였으며 14일 08:00에 제1대대는 462고지를 피탈당하고 양지촌 남쪽으로 밀려났다.
교암산 *770 지형능선 수도고지
제8사 제3사 여호고개 747 *572
북한강
*585 용호동
송동리
*485 관망산
여문리 22연 23연 *529 북한강
연대CP/박격포 금성천 23연= 35연 36연
3사 5사 *324 *462 *629
금성천 북한강
집실리 제22연대지휘소 양지촌
*551 등대리
외성동 수곳지 *780 황병동
내성동 후동 북한강 광석교
장제동 *538
*백암산 1179 *1051 *876 제35연 북한강 제36연
수동령
이에 사단장은 적이 백암산 방향으로 남진할 것을 우려하여 주파령 남쪽 어두운 골에 위치한 예비인 제27연대(-)를 14일 08:00시에 파수골로 이동시키고 제36연대에 배속된 수색중대를 백암산 동측으로 전환하여 적의 진출에 대비하였다.
결과적으로 금성돌출부 우견부는 14일 08:00시경 제3사단은 금성천 남안으로 밀리고, 제5사단 제35연대의 금성천과 북한강 합류지점 남안인 324-462고지가 피탈됨으로서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유영복(제5-27-3대) : '52.8월에 입대하였다. '53.6월 휴전이 임박할 무렵 금화지구 전투에서 적의 포사격으로 아군피해가 컸다. 당시 아군들이 매몰되는 광경을 목격하였으며, 본인도 이때 포로가 되어 강동 승호리의 인민군 수용소. 함남 단천의 검덕. 동암 광산에서 35년간 생활하다 2000년 7월 27일 탈북하여 귀환하였다.
4. 금성돌출부 선단지역 전투
중공군은 금성돌출부 양견부를 돌파하여 선단지역 부대의 측후방으로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선단지역은 금성 남쪽과 교암산-지형능선-612고지를 연하는 전선으로 이중 회고개 동쪽에서 교암산까지는 제6사단이, 그 동쪽으로부터 지형능선 분기점 690고지를 지나 612고지까지는 제8사단이 방어하였다.
적은 이 선단지역에 4개 사단 이상의 전투력으로 밀어붙였고, 국군 양개 사단은 이들 고지를 상실하고 양인접 사단의 전선 붕괴로 금성천 이남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6사단의 교암산 부근 전투]
제6사단(백인엽 소장)은 제7연대가 회고개-사천리를, 제19연대가 사천리-교암산을 방어하고 제2연대를 예비로 보유하고 있다가 7월들어 적의 활동이 빈번해지자 예비인 제2연대에서 3대대를 제19연대로 배속하여 교암산지역을 방어하도록 한다.
금성천 금성 117번도로
117번도로
회고개 *407 17번도로
*418
금성천
*374 *395 능동 *394
*369
금성천 *442
*하고개 사천리 *교암산 770
제1연 제11-9연 제7연대 제7연 제19연 제19연 제2연
가학리 금성천
상산리
* 월봉산
죽대리 능동 금성천
*729
큰들 제6 금성천 제8사
배선골(어선동) 노동리
진현리 삼현
'53. 7월 12일, 사단은 적의 공격이 명확해지자 제2연대 전체를 교암지역에 배치하고, 13일 밤에 군단 예로 들어온 제11사단 제9연대를 금성 남쪽 전선에 투입하였다. 따라서 사단은 예비가 없이 4개 연대 전방으로 방어에 임하게 되었다.
[교암산 전방 전초에서 9시간 지연]
적은 '53. 7. 13일 21:00시에 교암산 전초지역에 공격을 시작으로 전 전선에 무자비한 포격과 동시에 전면 공격을 개시하엿다. 당시 교암산 지역은 제2연대 제1대대가 담당하고 있었으며 3개 중대로 전초진지를 운용하고 있었다. 결국 교암산 전방 전초인 제6중대는 당일 밤에 6차례의 적의 공격을 맞아 분전하여 중대장 김교수외 모두가 전사하고 10명만이 14일 아침에 탈출하였다. 제5중대도 무전기의 고장으로 아무런 지원없이 혈전을 벌이다 새벽에 일부가 탈출해 나왔다.
사단 전초진지를 돌파한 적은 사단 좌단 하고개, 중앙 능동, 우단 교암산 방향으로 주저항선을 공격하여 먼저 17번도로를 끼고 있는 제19연대가 먼저 돌파되었다. 이에 제19연대는 적의 인해전술에 농락되어 교암산을 피탈당하고 결국 금성천을 건너 노동리에서 병력을 수습하였으며, 좌단 제11사단 제9연대는 제2대대가 하고개 북방에서 제6-7연대의 주저항선을 인수받아 14일 새벽까지 고수하였으나 적이 수도사단과의 전투지경선으로 침투하여 월봉산, 죽대리 등 후방지역을 강습함으로서 결국 11:00시에 철수하여 좌인접 수도사단과 연계하여 진현리-삼현선에서 저지선을 형성하였다.
제7연대는 전방 대대인 제1대대를 노동리로 철수시키고 연대(-)는 금성천 남쪽의 729고지-배선골-큰골에 저지진지를 편성하여 전방부대 철수를 엄호하였다.
이로써 제6사단은 14일 오전, 지현리-삼현-배선골-큰골에 저지진지를 편성한 제11-9연대와 제7연대(-)의 엄호하에 금성천을 건너 노동리에서 부대수습에 분주하였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김흥기(제6-2-1-통신소) : '50.11.30일에 입대하였다. 통신학교 교육 수료 후에 무선가설병으로 보직 되었다. 휴전을 앞두고 교암산전투에서 아군 전사자들이 많이 발생하였으나 수습할 겨를이 없었다.
●연봉희(제6-2-1-2-1소) : '51.7.13일에 입대하여 소총병이 되었다. '52.6월 12일에 금성지구 열차 터널 옆 돌고지 8부 능선에서 적과 전투했다. 당시 중대원 87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다고 후송된 뒤에 들었다. 본인은 이전투에서 부상당하여 후송되었다가 전역했다.(※'52.6.11-19일에국군 제6사단이 중공군 제31사단과 전투, 돌고지. A. B고지)
●황덕관(제6-2-1-3-3소) : '52.7월에 갑종장교 제28기로 임관하였다. 휴전직전 교암산 인근 금화역 앞 돌고지에서 소대장으로 임무수행했다. 야간 전투중 생존인원이 1/3 밖에 안되었으며 소대원 부상자 3명을 후송중 적 포탄에 전사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으나 상황이 수습할 여건이 안되었다.
●이경도(제6-2-1-3중) : '53. 7월 휴전이 임박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 되었다. 금성지구 교암산에서 국군과 노무자들이 많이 전사했다. 전투가 끝난 후 중대원 생존 인원이 몇 명 안되었다.
5. 금성돌출부 선단 제8사단의 지형능선 전투
2연 10연
교암산 770, *765 지형능선 690
제10연 제16연
제6사 = 제8사 *612
제10연 제16연
금성천 *606 제16연 제22연
상산리 금성천 *585
*535
여문리
금성천 집실리 22연 23연
제8사 = 제3사
*479
*504
*551
금성천
세현리 *472
별우 금성천 금성천
밤성골
*596
돌출부 선단 우반부는 제8사단이 방어하였다. 사단장 (송효찬소장)은 제10연대를 교암산 동단 765-지형능선 정점 690고지에, 제16연대를 612고지 일원에 배치하고 제21연대를 예비로 확보하였다.
'53. 7. 13일 22:00시경 사단 정면의 중공군이 공격준비사격을 시작했고 사단의 유선이 모두 두절되었다. 지형능선 전바의 제10-10중대 제1소대는 적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하지만 14일 아침 적이 전초간격을 이용하여 후방으로 침투하여 포위가 됨으로써 생존자들은 탈출을 기도해야했고 다른 전초들도 상황은 같았다.
전초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에 우회한 적들의 공격으로 지형능선 690고지가 23:30분에 피탈되었다. 또한 교암산 동단 765고지에 제10연대 관측소도 기습을 받아 연대장 작전주임 등이 부상을 입고 철수하게 되며 '7.14일 01:30분 경에 피탈되었다. 그러나 제10연대는 예비 제2대대로 역습을 실시하여 765고지 등 주 저항선을 모두 회복하였다.
제10연대 우전방 제16연대는 제3대대(수색중대 배속)를 주저항선에 배치하고 제1대대를 전초로, 제2대대를 예비로 확보했다. 연대는 계속되는 적의 공격을 물리치고 있었으며 일출 후 제8사단 제16연대 상황은 소강상태로 접어든 반면 우인접 국군 제3사단의 제22연대 지역이 무너져 여문리, 집실리가지 적이 출현하고 있는 상황에 연대 예비지역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53. 7.14일 11:00시에 군단으로부터 15:00시까지 금성천 남안으로 내려와 신방어선을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단이 철수를 개시할 때에 중공군이 제3사단 좌측방을 돌파하여 그 일부가 17번도로를 차단하려 별우지구로 치단고 있는 징후가 포착되고, 적이 집실리에 출현하고 있었으며 후방지역의 중요 감제고지인 504고지를 점령하여 사단의 철수를 위협하였다.
사단의 철수는 우전방 제16연대 예비의 엄호하에 제10연대가 먼저 철수하고, 다음 사단 예비 제21연대의 엄호하에 제16연대가 철수하였다. 제10연대는 주파리로 향하였고 제16연대는 596고지에 저지진지를 편성하기 위해 밤성골로 집결하였다. 마지막으로 제21연대가 18:00시경 금성천을 도하한 다음 주파령으로 남하하였다.
한편 밤성골에 집결중이던 제16연대는 저녁 식사중 적의 기습을 받아 분산 됨으로써 사방거리로 철수하게 되었다.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이상희(제8-10-2-6중) : '52.3월에 이대하여 8사단에서 전투했다. '53.7월에 김화지역 지형능선 전투에 밤 11:00시에 교통호에 들어간늗데 지면에 발을 내딛으면 스펀지와 같이 푹푹 들어갈 정도로 피아를 구분할 수 없는 많은 유해가 방치되어 있었다. 7월 13일 16:00시경 적이 공격해 오면서 벙커형 호에 엄페중에 김종배 소대장 등 5명이 매몰되어 한명만 구출되고 나머지 4명은 매몰되어 전사했다.
●곽재돈(제8-21-3-9중) : 휴전 직전 수도고지 우측 능선에서 대대원의 피해가 컸다. 중대원도 59명만 생존했다. 노무자들도 피ㅐ가 컸다. 이 전투에서 부상당해 후송후 전역했다.
●김흥곤(제8-110-3-9중) : 휴전 직전 지형능선에서 중공군과 전투했다. 노무자들의 피해도 컸다. 지형능선 옆 난초고지에서 중대원중 생존자가 20명 밖에 안되었다. 당시 일등병이 중대장역활을 해야 했다.
●김종술(제8-분부중대 부관부) : '53.2.4일에 8사단에 입대하여 수도고지와 지형능선에서 전투하였다. 6월경부터는 노무자 지원이 없어서 사단본부 및 신병 중 병력 40명을 차출하여 포탄 운반 지원에 나갔다가 적 포탄공격으로 전멸했다. 이후 40명씩 지우너나갔는데 약 절반인 20명 정도만 살아 돌아왔다.
●※박시노(제8-1--1대) : '50.7.22일에 입대하여 북한지역 진격간 중공군이 내려와 후퇴하였다. 철수중에 다리에 관통상으로 포로가 되었다. 당시 대동강 물에 더내려 가는 국군 전사자를 많이 보았다. 나와 같이 포로로 50여 명이 그 해 겨울 대동군 마을 민가에 잠시 머물던중에 40여 명이 전사했는데 앞마당에 눈으로 덮고 말았다.
제 4 절 신주저항선 구축
1. 개 요
제8군 사령관 테일러 대장은 정확한 상황보고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공군 6개 사단이 돌출부 양견부를 돌파하여 깊숙히 침투한 것으로 판단하고 국군 부대가 중공군의 양익 포위에 들어서는 안된다고 판단, 14일 06:00시에 이들 부대들(수도사. 제6.제8.제3.제5)로 하여금 돌출부의 기저선인 금성천 남안으로 철수하여 신방어선을 형성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제2군단장(정일권 중장)은 14일 11:00시에 금성천 남안 신방어선을 형성하도록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금성천
신주저항선
진현리
*633 금성천 북한강
신주저항선
*602 삼현
103번도로
주파리 신주저항선 북한강
*541 신주저항선
미3사 11사 *백암산 1179 *876 제5사 미45사
송동 *삼천봉 살구령 *1051
*적근산1073 백암동
제9사 미3사 제11사 제8사 제5사
*장고봉830 *주파령 645 고둔골
고비운리
*895
*1048 *915 *782
수리봉 가는데
대성산1175 사방거리
그러나 수도사단과 제2군단 예하 부대들이 금성천 남안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적의 추격이 계속되어 금성천 남안에서의 신방어선 편성에 실패하였다.
수도사단(최창언 준장)은 미 제3사단 제65연대가 117A번 도로 남쪽 능선에 투입되어 저지선을 형성하는 가운데 그 북쪽 능선의 쟁탈전을 벌이다 철수하였다.
제6사단(백인엽소장)은 배속된 제11-9연대가 진현리-삼현 선에 저지진지를 형성하였을 뿐, 제2. 19연대는 노동리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주파리로 집결중이고, 제7연대는 배선골-큰골에서 전방연대를 엄호하다 전방연대에 휩쓸려 추동을 거쳐 주파리로 철수하였다.
제8사단(송효찬소장)은 주파령을 향하여 철수중에 있었고, 제16연대가 밤골 596고지일대에서 저지진지 점령에 실패하고 분산되어 사방거리 남쪽 부촌리에서 수습할 정도였다.
한편제8사단의 우익 제3사단(임선하소장)도 제18연대만 신진지에 진입하고 제22. 23연대가 적의 포격으로 분산되어 소성동-흑운토령을 넘어 주파리 동쪽 동막동에서 병력을 수습하였다.
제5사단(김종갑소장)은 북한강 좌익이 돌파되어 103번도로를 타고 백암산으로 진출하려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군 제2군단은 14일 11:00시를 기해 군단장 명으로 금성천으로 철수했으나 중공군의 근접 추격과 철수시의 혼란으로 삼현-금성천-북한강에 연하는 신방어선, 아이슬랜드선 형성에 실패하고, 중공군이 계속 추격하여 특히 제3사단을 후속한 적이 내성동리와 흑운토령을 넘어 백암산으로 목표로 추격해 왔다.
이에 제2군단은 금성천 방어를 포기하고 지현리-633-주파리-백암산-수백암산 선에서 적을 저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유엔군 사령관은 일본에있는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을 급히 한국으로 공수하여 국군 제9사단의 일부를 인수시켜 수도사단의 좌익을 강화하는 한편, 15일 12:00시부로 미 제3사단으로 하여금 수도사단지역을 인수시키고, 수도사단은 군단예비로 전환되었다.
또한 군예비인 제11사단을 제2군단에 배속하여 제6사단과 교대시키고, 미 제10군단의 국군 제7사단을 제2군단으로 배속전환하였으며, 제8사단과 제5사단으로 제3사단 지역을 분담 방어토록 하여 전방전선을 정비하고 제6사단과 제3사단을 예비로 전환시켰다.
이에 따라 제2군단은 제11사단이 진현리-주파리, 제8사단이 주파리-백암산 서던에, 제5사단이 백암산-1051-876고지에서 적을 저지중이었다.
그러나 제5사단이 중공군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53. 7. 15일 18:20분에 백암산을 피탈당하여 백암산과 소백암산선에서 물러나 백암산남쪽 수동령에서-고둔골-수상리 남족 고지군에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결과적으로 제2군단은 '53. 7. 15일 저녁까지 와이오밍선(삼천봉-적근산-주파령-1048-782-재안산 북단 가는대)북쪽의 진현리-삼현-주파리-수동령-고둔골-고비운리-전석-748고지를 잇는 선에서 새로운 저항선을 형성하였다.
2. 제2군단의 반격
*수도고지
평강 회고개 *690지형능선 북한강
*교암산770
*오성산1062 월봉리 개야리 금성천 송실리 *572 이청동 *482월봉산 피의고지 여문리 *529 북한강
남대천 *462 *602삼현 금성천 *462
*819 등대리
흑운토령* *662 *832
주파리
*적근산 *백암산 *소백암산 1073 1178 1048
주파령
'53. 7. 15일 국군 제2군단이 와이오밍선 전방의 신방어선에서 적을 저지하자 미 제8군사령관은 16일에 반격적전으로 금성천을 확보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중공군은 공세 종말점에 도달해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공세 종말점에 도달해 점령한 진지에 대한 방어선을 구축하며 사상자처리 등 재편성에 착수하였다.
이에 제2군단장(정일권 중장)은 적을 저지 중에 있는 3개 사단을 반격으로 이전시키기로 결심하고 공격명령을 7월 15일 12:00시에 하달하였다.
가. 국군 제11사단은 진현리 633고지-삼현리 602고지선을 점령하라
사단은 제9연대가 제6사단에 배속되어 철수할 때 진현리 633고지를 이미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우전방 제13연대로 삼현 602고지를 점령하고 나아가 별우지역의 425고지, 406고지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제20연대(-)는 예비로 후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우익의 제13연대는 7월 15일 16:00시에 공격을 개시, 제2대대가 삼현 602고지 방향으로진격했으나 중공군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이어서 16일 06:00시에 제3대대가 700고지를경유하여 602고지 동측고지를 공격하고 , 이날 제2대대가 다시 602고지를 공격하여 17일 04:00시에 점령하게 되었다. 제1대대는 425고지를 점령했다.
한편 좌익의 제9연대는 사단에비 1개 대대를 배속받아 진현리633고지 서측 462고지를 점령하여 미 제3사단과 연결하였다.
그러나 제13연대는 18일 02:00시에 중공군의 역습으로 602고지가 피탈되어 제13연대는 사단으로부터 1개 대대(제20연대 3대대)를 배속받아 19일까지 역습을 실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53. 7. 19일 제11사단은 제13연대를 예비로 전환하고 제20연대로 602고지를 공격하였다. 미 제5공군의 항공지원과 사단포병 및 미 제461중박격포 대대의 화력지원 속에 2개 대대 병진으로, 무려 5차례의 돌격으로 602고지를 점령했다. 당시 제1대대 1중대는 이 고지를 점령했을 때에 중대장을 포함하여 8명뿐이었고, 제3대대도 42명의 전사자와 249명의 부상자를 냈다.
그러나 다시 7월 20일 03:25분에 적의 역습으로 피탈되어 회복하지 못했고, 제9연대가 602고지 공격을 위해 점령했던 602고지 서측의 552고지도 함께 빼앗겨 회복하지 못했다.
나. 국군 제8사단은 흑운토령(851)을 공격하여 탈환하고 금성천을 확보하라
흑운토령은 851고지로 전방 모든 고지를 감제하는 중요지형으로 사단장(송요찬소장)은 동막골에서 수습된 제21연대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연대는 제2대대로 흑운토령을, 제3대대로 고지 서측 652고를, 제1대대로 17번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406고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53. 7. 15일 19: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서측 406고지는 점령하고, 16일 다시 주간공격으로 흑운토령을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동측의 감제고지를 적이 점령하고 있어 사단은 제16연대를 투입하여 백암산 서측의 1118고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금성천 남안의 고지를 확보하여 흑운토령을 고립시켜 놓고, 제21연대가 흑운토령 북쪽의 569-625고지를 점령하여 배후를 차단한 가운데 제16연대가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사단은 7.18~19일 금성천 남안으로 진출하여 거리실~성동리까지 금성천을 방어하였다.
다. 제5사단은 백암산을 탈환하고 금성천을 확보하라
반격작전 개시전에 제5사단은 백암산-소백암산선을 상실하고 백암산 후방 수동령-고둔골-748-수상리에서 적을 저지하고, 제36연대는 북한강 동안을 방어중이었다.
새로 부임한 사단장(장도영소장)은 2개연대로 백암산(11179)-소백암산(1051)-876고지선을 회복하고, 이어서 좌익의 제27연대는 백암산에서 819-689고지로 뻗어내린 능선을 확보하고, 우익의 제35연대는 876고지에서 833-780고지로 뻗어내린 능선을 확보하여 금성천과 북한강을 확보할 계획이었다.
'53. 7. 16일 06:00시에 제27연대가 백암산, 제35연대가 소백암산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때 우익의 제35연대가 876고지에서 측방공격으로 소백암산을 점령했으나 모두 적의 역습으로 실패하였다.
이에 군단장은 좌인접 제8사단에 배속되어 백암산 서측 1118고지를 공격중이던 제6사단 제7연대를 제5사단으로 배속전환시켰다. 이어 17일 제6-7연대와 제5-27연대가 백암산을 제35연대가 소백암산과 876고지를 공격하게 하였다.을 우회하여 그 북방의 고지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53. 7. 18일 제6-7연대가 백암산 사측 1118고지로, 제27연대는 백암산을, 제35연대는 소백암산으로 다시 공격을 재개하여 결국 제6-7연대가 118고지를 탈환하고, 제27연대는 항공기와 전차의 지원하에 18일 제2대대가 백암산을 탈환하게 되고, 제1대대는 계속 진격하여 북한강변의 662,642고지를 점령하고 제7연대도 금성천 변의 819고지를 탈환하게 된다. 이어서 제35연대는 소백암산도 탈환하여 사단은 금성천-북한강변을 확보하게 되었다.
라.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참전용사 증언]
●안기식(제5-통신대) ; 공산군의 최후공세가 펼쳐진 화천 북방의 백암산부근에서 전투했다. 당시 본인은 중공군의 동태를 파악하여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 당시에 5사단은 1개 대대만 남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전사자들이 강으로 떠 내려와 갈고리로 건져내었을 만큼 그 숫자가 많았다고 한다. 당시 GMC로 전사자를 나르고 화천 발전소 북쪽 약 8KM지점에서 화장을 했다.
●지상락(제5-35-3-9중) : '53년도 휴전 직전, 화천발전소 위(강물 끝자락) 무명고지에서 피해가 컸다. 하후저녁 150-200명의 병력을 받아서 전투하면 1/2이 손상된다. 화천 발전소 강물에 미군 박격포 중대원(1개 중대 병력 수준)대부분이 익사하였다.
●최월성(제6-7-수색중대) :'53. 7월에 휴전되기 전에 제5사단에 배속되어 백암산 전방 818(내성동리)고지에서 전투를 했다. 진지 주변에 피아 포병에 의한 포탄이 낙하되어 인명피해가 컸다. 전사자중에 일부는 수습되지 되지 못하고 전투현장에 방치된 채 교전하던 중에 휴전이 되었다.
●박성범(제8-16-3-11중) : 중공군의 '53년도 7월 공세에[, 제8사단은 3.5.8사단과 합동으로 백암산을 공격하였다. 당시 중대가 공격한 후 전투가 종료되어 중대원을 확인하면 생존자는6-7명 밖에 안되었다.공격 간에 피아 전사자들이 많아 시신을 밟고 고지에 올라갈 정도였으며 산이 핏빛으로 물들 정도로 치열했다. 중공군 시신에는 빼주라는 중공군 특유의 술냄새가 많이 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용규(제11-9-2대) : '53.7월 13일 교암산전투에 6사단과 교대되어 전투했다. 부대 교대를 눈치챈 적의 공격으로 3일간 잠도 자지않고, 식사도 거른 채 치열한 전투를 했지만 열세로 패잔병이 다수 발새하면서 후방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후방지역에도착하니 금화 말고개 일대에 많은 보급차량이 파손되어 있었고 국군 전사자가 고지마다 방치되어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우리는 현지에서 쌀로 식사를 하고 화천에서 재집결하여 다시 전방에 투입되엇다가 7월 27일 휴전을 맞이했다.
●길상선(제11-13-3-11중) : '53.7월 13일 중공군 최후 공세시 김화지구 마현리 말고개에서 당시 5사단과 6사단이 큰 피해를 입는 것을 목격하였다. 당시 우리가 교대되어 투입되어 전투 했으며 특히 3소대에서 전사자가 많이 발생했다. 새벽에 공격할 때는 소대원이 33명이었는데 공격 종료후에 생존자는 13명으로 20명이 희생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신두순(제8240부대) : 본인은 '52.7월에 공작원으로 입대하여, 달 없는 밤에 밀물과 설물을 이용하여 모선으로 연백지구 봉화감이 포구와 백석 포구 사이에 소사라는 갯벌가까지 이동한 후 무동력 자선으로 갈아타고 이동하였다. 당시에는 방파제가 없어 소사 갯벌을 이용하여 나진포 등 내륙으로 진입하기 용이하였다. 자선을 타고 은밀하게 이동 중에 적에게 발각되어 집중 사격을 받아 6명이 전사하였다. 썰물 때에 강화 삼산면 서검도리까지 떠내려온 시신은 인근 언덕에 매장하였다. 휴전 이후에 시신을 찾으러 노력했는데 그 위치에 해병대 1개 소대가 주둔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서검도 지역주민의 증언이 유해 40여 구를 매장된 장소 확인이 가능하다고 함)
●※최병현(타이거여단(8240부대)) : 본인은 6.25전쟁이 발생하고 난 후 연백중학교 재학생 약 2,000여 명과 동시에편입되어 옹진군으로가서 군사교육을 받고 유격대원으로 임무를 수행하여 왔었다. 옹진군 내륙일대 까치산 부근에서 동료 학도병들이 이무 수행 중에 적과 교전하면서 많은 인원이 전사했으나 후퇴중이라서 수습을 못하고 현지에 방치한 채 철수하였다. 그곳 야산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우리부대 본진이 주둔해 있던 연평초등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그 주변 야산에 당시 교전 중에 부상당하여 전사한 전우와 교전 중에 수습한 전사자. 훈련 중 동사 등으로 전사한 전우들을 매장하였다.
●장병기(제6-2연) : 본인은 백암산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중공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후퇴하다 재탈환하면 교통호등 진지가 모두 파괴되었고 전사한 전우들의 시신도 흩어져 버렸다. 당시 교통호는 사람의 키를 넘길 정도로 깊이 팠다.
●최상규(수도사단 공병대) : 본인은 휴전을 앞두고 금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했다. 당시 노무지들이 말고개 개울 밑에 위치한 화장터에서 전사자들을 화장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당시에 기갑연대와 1연대가 몰살당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최상헌(해병대 근무중 증언) : 본인은 '53년 휴전 이후에 파주군 탄현면 법흥리에서 해병대 2연대에 편성하여 근무했다. 당시에 순찰 근무중에 6대대 담당구역인 법흥리 동네 절벽에 피아 전사자가 많았다고 들었다. 당시 동네 주민들이 말하기를 원래는 절벽이 깊었는데 전사자가 하도 많이 묻혀서 안 깊어졌다고 말 할 정도였다고 한다.
●※탁현숙(국민방위군 제5교육대) : 본인은 '51.1.4후퇴시 사천으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큰섬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큰 학교에 주둔하였는데 장티푸스가 유행하여 20여 명이 사망하였다. 시신은 마을 이장의 협조를 통해 배로 30분 거리에 위치한 무인도에 나무로 만든 묘비를 만들어 매장하였다. 굴토하기 편한 땅이었고 무릎 높이 정도의 깊이로 매장하였다.(창선도 동남쪽 두미도로 추정)
●배석규(제1-15-1-2중) : 본인은 '53.6월에 퀸고지 백막지전투를 했다. 적은 공격준비사격이 끝나는대로 진지하단부에 설치한 개인호로부터 공격을 실시하였다. 아군도 개인호를 크게 구축하여 준비했으나 전투 중에 아군의 피해가 많았다.
※박고지.퀸고지 공방전 : 통상 제1사단의 전투는 노리-베티고지전투가 전부인 것으로 인식된다. 제1사단은 '51.10월의 미 제1군단의 코만도 작전간 사미천 서안에서 전투를 한다. '51.12-'52.1월의 동계작전간은 두매리 전투를 실시하고 '52.3월에 미 제1해병사단에 작전지역을 인계하고 파주로 이동하여 교육훈련 및 부대정비를 하다 '52.4월 20일에 미제 3사단의 제임스타운 선인 고양대지역으로 들어가 미 제3사단 지역을 인수 받는다. 그러다 7월에 다시 미 제3사단에 지역을 인계하고 남부지역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제11/12연대는 남원. 지리산 일대를, 제15연대는 경남지역의 밀양.운문산.천황산.신불산지역의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한다. 이후에 다시 부대정비를 실시한 다음 '52.10월 초에 미 제3사단지역의 작전지역을 인수, 제임스타운선 방어지역인 고양대 부근에서 전투를 했다. 다시 '52.11월 초에 영연방 제1사단의 신촌-상고왕리 지역까지 인수하여 임진강 동서안 지역에서 전투를 하게 된다. 노리-베티고지 전투는 '52. 12월 중순에 실시하고 진지보강공사를 한다. 이어서 '53. 3월에 317고지 전투를 시작으로 중공군 6월 공세시는 박고지와 퀸고지에서, 중공군 7월 공세시는 베티고지 일대에서 공방전을 벌이다 휴전이 된다.
53.6월의 박고지와 퀸고지 일대 전투에서 국군 제1사단은 전사 245명 부상 1,167명 실종 14명이 발생하고, 적사살 1,472명 생포 106명의 전과를 올렸다. '52. 12월의 베키-노리고지 전투는 전과 기록이 없다.
●김향종(제2-17-의무중) : '51년도에 입대하여 제2-17-의무중대에서 의무병으로 전투에 참여했다. '53. 7월에 사단이 백마고지-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많은 전사자를 목격했다.
●유판성(제2-17-2대) : 백마고지-화살머리고지 전투에 참가했다. 당시 중대원 대부분이 전사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특히 노무자들 피해가 많았다. 당시 노무자들은 실탄통에 식사를 담아 추진하고 있었는데 적 포탄에 희생이 많앗다. 당시에 노무자들은 1개 부대에 200여 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남찬우(제11-0-통산중) : '53년 휴전에 임박하여 화천북방 금화지구 602고지 전투에 가설병으로 참가했다. 602고지 골짜기에 전사자 유해가 많았으며 중공군이 더 많았다. 전투 중에 노무자들이 부상자는 후송하였으며 나도 이 전투에서 부상으로 춘천으로 후송된 후에 3일 후에 휴전이 되었다.
※화살머리-백마고지 공방전 : '51. 6월의 와이오밍선 진출에 따라, 국군 제9사단이 대화-하진부리(미 제10군단 배속)에서 미 제1군단으로 배속전환 되어 '51. 6월 초에 하진부리-황성-이천-서울-의정부-포천으로 이동하여 보개산-고대산을 공격 점령한다. 이당시에 미 제3사단이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국군 제9사단은 '51.6월 중순에 작전지역을 캐나다 제25여단에 인계하고 김화로 이동하여 미 제25사단 지역인 계웅산지역을 인수하여, 터키여단의 진지를 초월하여 계웅산을 점령하게 된다. 다시 '51.8월에 작전지역을 미 제25사단에 인계하고 포천으로 이동하여 교육훈련 및 부대정비를 하고 철원으로 이동한다. '51.10월 중순미 제1군단의 우익인 미 제3사단의 작전지역을 인수하여 281고지(화살머리). 395고지(백마고지)일대에서 전초고지 쟁탈전을 수행한다. '52.4월에는 미 제1군단에서 미 제9군단으로 배속전환이 되어 동 작전지역에서 계속 전초진지 쟁탈전을 수행한다. '52. 10.6-15일까지 그 유명한 백마고지 쟁탈전을 수행한다. '52.10.26일 작전지역을 미 제3사단에 인계하고 사창리로 이동하여 부대정비를 한다(이때 제30연대는 국군 제2사단에 배속전한 되어 저격능선 전투에 참여). 부대정비 후에 '52.11월 23일에 국군 제2사단의 저격능선을 인수하여 휴전시까지 계속 공방전을 계속한다. '53. 5월 12일에는 미 제3사단으로부터 북진능선 지역까지 인수하여, 이 지역일대에서 휴전시까지 전투를 하다 '53.7월의 중공군 최후 공세시 저격능선에서 철수하여 계웅산-442고지간을 방어하게 된다.
한편 국군 제2사단은 '50.7.24일 황간지역에서 부대해체 후에 , '50.11.7일 제17.31.32연대를 기간으로 서울에서 재창설되었다. 이후 포천-평강지역의 후방지역 잔적소탕작전을 수행한다. 1.4후퇴로 미 제10군단으로 배속되어 일월산-보현산 일대 공비소탕작전을 수행한다. '51.4월까지 주로 경북일원에서 공비소탕작전을 수행하다 '51.4.28일에 미 제9군단에 배속되어 경기 양평으로 이동하여 미 제24사단 예하 제21연대 작전지역을 인수하여, 청계산-백운산-광덕산-대성산-삼천봉으로 진격한다. '51. 8월초 부터 9월초까지 삼천봉 전방 734고지 전투를 한다. 10월에는 492고지(삼천봉 전방 3.5km) 실시. '52. 3월 30일에 작전지역을 미 제40사단에 인계하고 사창리로 이동하여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 후에 다시 '52.6월 28일 전선에 복귀하여 미 제40사단 지역을 인수하여 10.14-11.24일까지 저격능선 전투를 실시한 후에 사창리로 이동하여 미 제9군단 예비로서 부대정비 후에 '52.12.27일에 철원지구로 이동하여 미 제3사단의 백마-화살머리 고지를 인수하여 휴전시까지 계속 진지 쟁탈전을 실시한다.
[탐사결과]
●홍순용 참전용사 증언(제2-17-수색중대) :본인은 734고지 전투 이후 '51.10월 중순 적근산 북방 김화지역 전투에 참여했다.치열한 전투에서 공격작전으로 많은 전사자가 발생했다. 당시 부탁을 받고 전사자 시체 처리작업을 진행했는데, 적근산 거들목(고개 넘어가는 곳) 부근에서 최로 24구를 화장하고 나머지는 상황이 급박하여 여러 구의 신원미상 유해를 현지에 방치하고 후퇴하였다.
이 증언과 일치하는 곳이 마현리 말고개 바로 위다. '00년 당시에 포병부대 대대지휘소가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유해발굴 작전을 시행했다. 실제 그 당시의 화장을 한 화장병이 증언을 항여 함께 현장에서 발굴작전으로 부대 취사반 공사시 나온 무명 유해 26구를 2차 가맹장한 장소에서 26구를 발굴했다. 그리고 실제 화장터가 대대장 바로 지휘소 앞 작은 연병장인데 이곳을 장비를 동원하여 발굴했으나 장교와 병으로 구분하여 화장한 실체는 확인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유품만 몇 점 발굴 되고 유해는 없었다.
●내성동리 818고지 탐사결과 및 유해발굴('11년부터 500여구 발굴) : "미확인지뢰지대에서 많은 유해 발굴", 이 지역 발굴은 처음 해당지역 부대에서 수색활동간 진출입로에 유해가 목격되었다는 제보에서 시작된다. 그때까지는 전사연구에 의해 주요 전투지역이라는 사실과 일부지역 탐사(지뢰라는 매복병때문에 진입 제한)를 실시하여 많은 개인호가 식별되었다. 백암산 정상에서 한 능선을 지용하여 내려오면 쉽게 접근이 가능했다.
책임부대의 신고에 의해 유배노출지점을 화긴결과 산악기동로상이었다. 마침 조사하고 싶은 터에 잘되었다고 좀더 안으로 들어가 확인해 보기로 하고 혼자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다 결국 개인호의 엄청난 분포에 말려들어 깊숙이 들어가 탐사를 하다 나의 안경(다초점 안경으로 꽤나 돈이 들어간 것임)을 떨어뜨렸는데도 그걸 모르고 약 2km 정도를 탐사하고 나왔다. 그리고 사단에 요구했다. 발굴해야 되니 미확인지뢰를 확인해 달라는 요구다. 818고지는 종격실과 횡격실로 이어지는 중앙지점으로 누가 봐도 전투가 있을 곳이었다. 당시에 확인된 개인호 숫자만도 2,000개가 넘었다. 안전조치를 하고 발굴해야 하며, 분명 유해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조사팀은 그후에도 2~3회 더 추가적인 집단 탐사를 진행하여 발굴지역으로 결정한다.
●백암산 탐사 결과 : 백암산지역은 '51년도 재진겨간에 국군 제6사단이 수리봉에서 백암산을 거쳐 금성천 넘어로 공격하는 과정에 점령하였고, 이어서 '53년 중공군 최후 공세시는 국군 제5사단이 일시적 방어중에 피탈되었다가 제5.6.8사단이 탈환하여 다시 금성천에 이르면서 휴전이 된다.
따라서 백암산지역은 아군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좌우로 연결되는 능선길이만도 25km나 된다. 동으로는 소백암산을 거쳐 북한강가에 이르고, 서로는 신둔지 626고지-백암동-주파리에 이른다. 북으로는 서북방향으로 내려서면 흑운토령-금성천지역이 나오고, 동북방향으로 내려서면 818-462-북한강가에 이른다. 나으로 내려서면 915.895-웃방골.수리봉-919-643고지로 이어진다. 소백암에서는 북으로 내려서면 662.832-등대리780-북한강가에 이르고, 남으로 내려서면 수상령과 북진령-함묵령-해산-동촌링에 이른다.
앞에서 언급한 것은 모두 탐사와 발굴이 진행된다.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발굴이 흑운토령일대와 818고지 일대다. 이 일대는 개인호의 규모는 말로 표현이 어렵다 한 2만개는 된다고 보면 된다. 온통 백암산 줄기 전체가 개인호 덩어리고 전쟁터다. 그리고 미확인 지;뢰지대라서 접근이 제한되지만 우리 현지 점령부대의 수색정찰로만 따라서 탐사해도 능선주변은 모두 개인호로 70년 세월을 맞이한다.
지금 백암산 정상은 케이불카가 안착하도록 하여 누구나 쉽게 올라서서 북측을 관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유해발굴은 쉽지 않았다. 이미 고지 일대는 진지공사로 대부분 훼손되어 남아 있을 유해는 대부분 파쇄되어 던져지는 흙속으로 안겨지고 말았다. 다행히 훅운토령이나 818고지같은 곳은 진지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대로 보전된 지역이다. 지금 북한강변 고지나 금성천 남방 고지군에는 분명 많은 유해가, 중공군이었던 국군이든 상당 수가 남아 있음이 분명하다. 그동안 GP공사간에도 수많은 유해가 훼손되었다. 그 당시 공사를 진행한 사람의 제보, 또한 직후에 근무한 군인들의 제보는 "발에 걸리는 것이 유해였다. 하지만 그때는 그렇게 밟고 지나다녔지 누가 정중하게 처리하지는 않았다. 일부 인원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기도 했다"는 제보는 많다. 그런지 지금 GP지역이나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고지군은 얼마든지 개인호 속에 유해가 잠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 아니 6.25전쟁 당시에 최후의 보루였으니 피이간에 얼마나 많은 군인이 투입된 곳일까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흑운토령(태백기지)일대 탐사 및 발굴결과 : 이 지역은 '11년도에 이곳 일대에서 근무했던 군인(박삼도/66세)이 당시에 테ㅐ백기지 주변 진지공사 중에 유해와 철모. 탄약류 등이 발견되었다는 제보에서 정확한 위치가 식별된다. 특히 이곳은 제8사단이 최후의 공방전을 전개한 곳이다. 많은 참전용사들이 증언도 했다. 하지만 철책에 근접하여 미확인 지뢰지대란 이유로 발굴을 지연하였다. 하지만 명확한 제보와 그동안 전방부대들이 홈코트 작전을 전개하여 주 기동로 주변은 많은 곳이 안전하게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런 곳에서만 발굴작전이 가능했다.
'11년부터 시작하여 한 곳에서만 발굴이 진행되는데 주로 국군 8-16연대. 21연대 소속이 실제 인식표로 신원확인이 10여 명으로 많이 되었다. '11년도에에만 5명(고,최성준(21연). 빈원식(21연). 이필수(16연). 유광연(21연). 손현수(21연)이 발굴된다.
●한명희 교수님 증언 : "백암산 동북방 지피에서 근무했다. 금성천을 바라보며 북한강을 바라보며 당시, 212.214지피에서 근무하던 때에 많은 전투유품을 목격했다. 계곡속이나 산야에 뒹구는 이름모를 백골이 많았다."
나는 실제로 교수님을 모시고 그 지피를 직접 방문했다. 절차를 거쳐 본인이 근무한 지피를 찾아 비무장지대안에 들어간 것이다. 우리는 방탄헬멧과 조끼를 착용하고 지피에 올랐다. 지피 입구에 바로 그 옛날 북파공작원들이 드나들던 철책문이 그대로 있엇다. 진입로 공사를 했지만 한 눈에 보아도 전쟁싱에 많은 사연이 묻어 있을 지역이다. 비록 기초 굴토나 발굴을 해 볼 수는 없었지만 최후의 보루로서 지켜져야 할 장소였다. 지금 제7사단이나 15사단 전방 지피지역을 포함하여 전선의 지피내 고지는 모두가 격전지라고 보면 된다. 물러설 수 없는 곳이였으니 전사자는 발생했을 것이다. 물론 그 대상이 중공군이나 북한군인지 국군인지는 확인이 어렵다.
●익명의 증언 : "나는 휴전시 배를 이용하여 비공식으로 중공군 지역에 들어가 유해 송환을 협의 했다"
전쟁의 비화는 수없이 많을 것이다. 여기소개하는 내용도 그중 하나다. 휴전 당시에 북한강지류를 이용하여 배를 타고 들어가 황병동 일대와 금성천 지류의 성산리에 들어가 쌍방간에 동 수의 유해를 바꾸기로 구두 합의하고 적진에 들어가 실태를 확인햇다는 것이다. 당시에 북측도 시신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있었다. 그들 대표도 백암산 북방 금성천 지류에 들어와 죽어간 중공군을 확인했다.
[산계곡에 집단으로 죽어간 중공군 시신들]
중공군 최후 공세인 7월 공세시 그들은 금성천을 도하하여 한때 백암산까지 점령한다. 그러나 바로 아군의 반격과 유엔 공군기들의 폭격에 전투종말점에 도달하여 후퇴해야 되는데 갈 수가 없었다. 우리가 조기에 북한강 다리를 폭파하여 수 많은 군인들이 물속으로 뛰어들어야 했고, 미군의 박격포 대대도 무기를 모두 파괴하고 각자 도생해야했던 아픔이 있듯 이번에는 중공군이 그런 신세가 되었다. 휴전 발표는 되어가는데 강을 넘지 못하고 엄청난 인원이 계곡 속에서 총도 없이 우글거리는데 아군은 보복작전으로 그들을 모두 죽여야 했다. 여기 저기 시체더미가 난무했다.
●화천발전소 위 무명고지 탐사결과 : 바로 댐 우측 고지는 많은 개인호가 남아 있다. 우리는 몇군데 기초굴토를 해보았으나 만족할 만한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 참전용사님이 증언한 고지는 댐위가 아니라 댐건너 북쭉이 해산(일산)으로 1194m이고, 그 해산을 오르기전이 상호음둥 호음고개일대로 600m고지군이다. 동쪽으로는 동촌에 이르는 길을 중심으로 여좌동에 460m 고지군이, 좀도 들어가면 430고지의 두류봉이 있다. 우리는 동촌리에서 '09년도에 지역주민 제보에 의해 2구의 유해를 발굴한 적이 있다. 여기서 동쪽으로 북한강변에는 더이상 들어가지 못한다.
하지만 고지군마다 그렇게 많은 전투흔적이 없다. 해산은 포병사격장이 있어 현역시절에 산불방지를 위한 방화방지선 작업을 위해 들어간 곳이다. 또한 호음동이란 동네이름이 호랑이 울음소리를 의미하여 많은 자연 생태계 탐사팀들이 찾아들기도 하는 곳이다. 해산아레에 해산 터널이 있고 굴을 빠져나가면 평화의 댐이다. 해산 너머는 바로 재안산(965)이 이어져 당거리 가는대로 내려선다.
[비수구미에서 생긴 일]
차를 이용하여 비수구미에서 좀더 들어가면 지금은 폐교가 된 초등학교가 나온다. 그 밑 지역들은 파로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고, 몇군데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 잇다. 집단 거주지는 아니고 한 두명이 한 때 머물다 떠나곤 하는 마을이다. 비수구미 입구의 음식점 주인의 제보로 바로 집 앞 텃밭 위치에서 1구의 유해를 '10년도에 발굴했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 어른이 있었다.
"어르신 전쟁 당시에 이곳에 계셨습니까?"
"나는 어린나이로 전쟁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어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밖에 못나가게 혼내고 했어요. 나중에 국군에 의해서 수복이 된 후에는 한 3년이 흘러서 10살이 되어 밖으로 나가도 혼내지 않했어요. 그 당시, 인민군 시절에 못나가게 한 이유를 그때 알았어요. 인민군이 강위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뭘 구워 먹었는데 그게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그놈들이 배가 고프다 보니 포로 중에 한 명씩 데리고 나와서 나무가지로 불을 피워 사람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강이 얼면 텡크가 지나가도 문제없어요. 한 1m는 얼게 됩니다.
나는 미군과 합동으로 파로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북한강 일대를 2~3회 탐사했다. 이유는 미군이 비수구미 바로 밑의 방개지역에서 문교를 이용하여 트럭에 병력을 운송 중에 전복되어 전원이 전사하는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곳 일대를 수중탐사하는 임무(미군이 수중탐지 장비를 가지고 옴)를 가지고 합동으로 조사를 했다.(여의도 주변 한강도 추락한 미군 비행기를 찾기위해 탐사함) 그러나 70여 년이 지나 몇 번의 강력한 수해도 발생하였는데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어렵다.
[무명용사 가묘 추정하는 곳이 있다?]
비수구미계곡 안으로 들어가면 무명용사 가묘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이곳은 어로감시선을 타고 강변에 도착하여 그곳에 살고 있는 지역민의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그분의 이야기로는 전쟁시 국군 높은 분이 권총을 차고 몇 명의 군인들과 같이 동행하여 들어와 이곳에 경례를 하고 갔다는 것이다. 이곳은 지역 주민의 공동 묘지군도 있어서 정황상 우리가 판명하기에는 매우 어려웠다. 혹시 중공군 7월 공세시 북한강 다리 폭파와 관련하여 익사한 국군 제5사단의 일부 인원이 혹시 뭍에 밀려온 것을 올려서 매장한 것은 아닌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라. 전선정리
금성천 북한강
@금성
@오성산 @봉화산 @교암산
*949 *어은산
남대천 *633
@김화 *적근산 *백암산
미3 국11 국7 국7 국8 국8 국6 국6 미45
*주파령 가는대 *백석산
@와수리 @사방거리 *재안산
@다목리
국군 제2군단은 7월 19일, 반격작전을 실시한지 3일만에 금성천을 확보하고 반격목표를 달성하였다. 당시 군단장은 금성천 북안으로 공격을 하려했으나 휴전협정에 영향을 미칠 것을 고려하여 미 네8군사령관이 승인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전선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7월 20일 군단 예비 제7사단을 제11사단과 제8사단 상디 17번 도로 축선에 투입하여 적의 주접근로에 대한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군단 예비 제6사단으로 하여금 우전방 제5사단 작전지역을 인수시켜 군단 우익의 방어력을 강화하였다. 제6사단은 금성천 남안 양지촌까지의 작전책임을 제8사단에 인계하고, 제6사단은 양지촌에서 북한강 서안의 방어에 주력하였다.
이에 다라 제3사단은 사방거리에, 제5사단은 화천에 예비로 있다 제3사단은제8군의 예비가 되었다.
이 금성천 돌출부의 전투는 종심상으로는 4km에 불과하지만 이 ''53. 7. 13~18까지의 전투에서 아군은 14,373명(전사 2,689, 부상 7,548, 실종 4,136명)의 손실을 입었고, 중공군은 확인돤 손실 27,412(사살 27,216, 포로 196명)명과 추정살상 약 38,700명을 합하여 도합 66,000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중공군의 항미원조사에는 이 전투간 33,253명이 살상되었다고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