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에게 보내는 편지(53)
샬롬!
4월의 아침이 노란 밥풀꽃잎처럼 수수하면서도 흩어지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열렸습니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 4월의 아침에 인사드립니다. 아침 햇살의 눈부심이 완연한 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은 우리의 좁다란 마음에도 길고 넓은 마음의 사랑하나 가슴에 만들고 누군가를 기다려 보는 설레임의 하루가 이루어 졌으면 좋겠습니다. 어렵다고만 하는 경제에 생기의 바람 하나 불어 왔으면 좋겠습니다. 어지러운 정치에도 부정부패에 어두운 눈도 오늘은 활짝 열렸으면 합니다. 오늘만은 모두가 활짝 웃는 일들이 가정마다 직장마다 사업장미디 봄바람 한자락 불어 왔으면 좋겠습니다. 참 포근하고 밝은 햇빛이 온 누리에 따뜻하게 내려 쪼여 바라보는 곳마다 봄이 기운이 넘쳐납니다. 꽃은 앞 다투어 피고 버드나무 가지에는 연초록의 잎이 새 생명의 힘찬 기운을 노래하고, 봄날의 눈부신 햇살은 창을 두드리며 우리 영혼을 깨우는 듯 합니다.
오늘 아침 주영호 집사님으로 받은 이메일 중 “하루 하루를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살고 있는 이 삶이 지금 죽어도 정녕 후회없는 삶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는 대목에서 저는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목사라고 하면서 그리고 수많은 영혼을 양육하는 막중한 사명을 가지고도 요즈음 눈물 흘리는 체휼(자신이 직접 겪어 보았기 때문에 상대방을 깊이 이해하여 가지는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마음, 함께 느끼고 고통하는 마음)을 저에게서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중등부가 조금씩 나아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새벽제단을 쌓아가며 말없이 봉사하고 수고하시는 사랑의 손길과 눈물이 있기 때문이리라. 그것만이 아닙니다. 주집사님은 너무 멋있기까지 합니다. 오히려 저보다 힘들고 어려운 처지일텐데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삶의 오솔길을 찾아 묵상하며 꽃을 즐기고 향기를 찾는 모습이란 부럽기조차 하였습니다. 그의 편지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오늘 새벽에는 아내가 유난히도 꽃을 좋아하여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유달산을 향해 치달았습니다. 낮에는 사람들이 북적대서 싫었고. 하나님이 주신 미명아래 벚꽃과 개나리의 향연을 둘만이 만끽하고 돌아왔습니다.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일생이다가 이제 4월이 되니 마음껏 그 끼를 발산하는 벚꽃과 개나리의 자태가 더욱 아름다웠습니다. 아니 아름다운 꽃 모양은 제쳐 두고 향기만으로도 세상을 적실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저를 깨우는 것은 아침의 맑은 햇살만이 아니라, 아침마다 축복의 통로가 되어주는 박복남 집사님의 메시지, 가끔씩이지만 이같이 저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행복메신저들과 사랑하는 선생님들의 향기였습니다. 엊그제 다소곳하게 수줍어 고개 숙였던 것이 어느 사이 활짝 핀 모습으로 다가서는 교정의 목련꽃과 벚꽃을 보며 제 맘은 조급해 집니다. 제 안에 가득 한 꽃향기 머무를 때 님들에게 전하고 싶은 맘으로 그렇습니다. 제 눈동자에 아직도 그대로 맺혀있는 꽃들의 모습과 제 마음 깊숙이 파고 들어오는 향기와 봄날의 햇살처럼 우리의 삶의 현장에도 밝고 맑은 눈부심이 그윽하기를 소원해 봅니다.
언젠가 어린이들과 감명 깊게 본 영화입니다. [천국의 아이들] 가난한 남매가 삶의 궁핍함 때문에 한 켤레의 운동화를 번갈아 신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오전반, 오후반으로 남매가 서로 교대로 운동화를 신고 학교수업에 임하며 지각하지 않으려고 항상 달리는 남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이 달리기 대회가 열리게 되었고 3등 상품으로 걸린 예쁜 운동화를 동생에게 선물하려고 오빠가 그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빠는 많은 관중들의 환호와 갈채 속에 도취되어 동생을 위한 자신의 아름다운 생각을 잊고 그만 1등을 하고 말았지요. 오빠는 1등의 영예와 함께 운동화보다 더 좋은 상품을 받았지만 시상대에서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때의 감동이 늘 내 삶 속에서 꿈틀거리길 원합니다. 인생은 어렵고 때론 힘이 듭니다. 나만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모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기쁨과 슬픔, 물질과 능력, 은혜와 사랑도... 그래야 관계도 아름답고, 인생이 아름다워집니다. 우리 모두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제 서로를 세워주는 존귀함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아프리카 남부 칼라하리 사막에 '스프링 벅'이라는 산양이 살고 있습니다. '스프링'처럼 뛴다고 하여 '스프링 벅'이라고 부른다 합니다. 이 산양은 보통 20-30마리씩 떼를 지어 다니지만 계절이 바뀔 때는 수천 마리가 떼를 이루기도 합니다. 거대한 산양 떼가 천천히 이동하는 장면은 장관입니다. 그런데 앞서 가는 산양들이 풀을 먹고 지나가면, 뒤에 오는 양들은 먹을 풀이 없습니다. 그러니 뒤를 쫓는 산양들은 풀을 먹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 하고, 앞에 가는 양들은 뒤지지 않으려고 차차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큰 무리가 모두 다 뛰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풀을 뜯어먹기 위해 앞서려고 했지만, 그 다음엔 앞서기 위해 앞서려 합니다. 그 다음엔 왜 뛰는지도 모르는 채 그대로 내달리다가 낭떠러지에서 바다로 떨어져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합니다. 우리도 더 빨리 더 빨리 달리다가 공멸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뛰다보면, 왜 뛰는지도 망각하게 되고, 그저 뛰다보면, 목표도 잃게 되고, 남들이 뛴다고 나도 뛰다보면, 결국 낭떠러지에 함께 떨어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불나방은 환한 불빛만 보면 무조건 달려 든다죠? 자기가 타 죽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구멍가게 두 개가 골목 어귀에 나란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부인은 꼭 골목 아래쪽에 있는 가게에서만 물건을 샀습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웃사람이 부인에게 묻습니다. “부인 왜, 아래쪽 가게만 이용하십니까?” 그러자 부인은 웃으면서 “그 집 아이들이 저를 알아보기 때문이에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복음중등부가 ‘비전증인500’을 향해 뛰기 시작 이제 일주일을 남겨놓고 있습니다. 우리 중등부는 화려한 가게가 아니라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높여주는 아래쪽 가게와 같은 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꿈을 꾸고 나누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목표와 방향이 분명합니다. 흥미진진합니다. 장차 일이 기대되고, 설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들거나 두려운지 모릅니다. ‘비전증인500’이 힘들고 귀챦게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꿈이 없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지만 무조건 1등이 되기 위해 목표만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스프링 벅’의 어리석은 모습이 아니라 주님 사랑하는 열정 때문에 뜨거워지는 ‘천국의 아이들’에 나오는 오빠같은 1등 그리고 가고싶은 가게같은 복음중등부를 그려봅니다.
어제 개봉된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12시간을 그린 것으로 많은 성도들 사이에 '꼭 봐야 할 영화'로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극 사실주의적으로 묘사된 이 영화는 미국에서 개봉되어 연일 매진행진을 거듭하며 올해 아카데미상을 석권한 반지의 제왕의 총수입을 넘어섰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때마침 사순절과 부활절이 이어지는 기간이어서 성도들의 관심이 클 것입니다. 이 영화가 그리고 있는 예수님의 수난은 일반적으로 상상하던 것보다는 훨씬 더 잔인하게 그려져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휘두르는 쇳조각 달린 채찍에 예수님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장면이나 대못이 손에 박힐 때 피가 솟구쳐 오르는 장면에서는 관중들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실제의 십자가 처형은 멜 깁슨이 표현한 것보다 훨씬 더 참혹했을 것입니다. 그저 끔찍하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사순절 기간인 고난주간입니다. 우리 학생들에게는 한끼 금식과 절제를 통해 우리의 죄를 아파하고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누자고 했습니다. 우리 선생님들도 물론이겠지만 이 영화를 통해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묘사 때문에 아연실색하든지 아니면 다른 무엇 때문에 자극을 받든 간에 끝까지 견디며 관람한 후 자리를 떠나면서 바뀌게 되길 원합니다.
침묵이란 자기 포기입니다. 침묵이란 [조금 더]의 포기입니다. 더 말을 할 수 있지만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침묵입니다. 더 추구 할 수 있지만 절제하는 것이 침묵입니다. 더 생각 할 수 있지만 생각을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 침묵입니다. 침묵은 더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침묵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말의 침묵, 욕망의 침묵, 생각의 침묵입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방향입니다. 부분보다 중요한 것이 전체입니다. 멈추어서면 침묵 속에 머물면 그곳에 방향이 있습니다. 그곳에 전부가 있습니다. 이번 고난주간 침묵훈련을 다짐해 봅니다. 유안진 시인의 고백처럼 “저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비게 합니까? 저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제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습니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 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되기를 기다릴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복음중등부의 비전증인500을 통해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성숙해지기를 소망합니다. 숫자적인 부흥으로 화려한 꽃을 피우는 겉모습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격려함을 통하여, 한사람의 영혼이라도 주님께 인도하려는 열정으로 인하여,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맺혀지는 기도의 땀방울로 인하여, 우리의 작은 미소와 친절 그리고 사순절 기간 내내 이어져온 침묵과 묵상훈련으로 인하여 우리 속사람이 영글어져 알찬 열매로 맺어지기 원합니다.
풍성한 열매는 화려한 꽃이 떨어질 때 맺히기 시작하고, 성숙한 인격은 섬기는 삶을 살 때 익어갑니다. 꽃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하나님은 꽃이 아니라 열매를 찾으십니다. 나무의 영광은 꽃이 아니고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성공보다 섬김으로 인격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원합니다.
부활절에 행해지는 ‘비전증인500’은 의미 있습니다. 배신하고 도망가는 제자에서 증인으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이제 우리 선생님들이 먼저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겠습니다. 그래야만 증인 아니겠습니까? 부활절 친구들과 함께 나눌 부활의 기쁨으로 계란도 준비하고, 우리 아이들도 부활절 계란을 손수 아름답고 멋있게 만들어 친구들과 나누며 부활의 기쁜소식을 전하고 나눌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난번 교사회 때 의논되어진 대로 찬양도 함께하고, 한끼 금식도 함께하면서 예수님의 체휼을 배웠으면 합니다. 홈페이지 방문도 꼭 잊지마시고요. 풀잎 끝의 이슬같이 맑고 영롱한 빛으로 우리의 마음 주님 앞에 감사로 드려지길 원합니다. 서로에게 밝은 인사로 행복한 하루를 열어가며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보람있는 하루 되세요.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