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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2일(주현절 후 여섯 번째 주일)
사무엘상 7:1~12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념한 에벤에셀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한 목사님이 성도의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4살짜리 아이가 주기도문을 외우고 찬양을 불렀습니다. 어찌나 똘똘하던지 이 목사님이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코로나로 교회에 가지 못해 많이 속상하지?”
그랬더니 아이가 “교회가 뭐예요?”하고 되물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찬양도 불렀는데, 1년 6개월 동안 교회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자 교회에 대한 기억이 사려져 버린 것입니다.
-출처: 류응열, 「납작 엎드리기」, 두란노, 2022; 「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23년 2월호, 41에서 재인용.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이야기입니까? 코로나로 인해서 아이들이 한동안 학교에 가지 못하고, 교회에도 나오지 못해서 그동안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습니까?
이민 가서 남부럽지 않게 성공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나이 60에 말기 암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문병을 와서 말했습니다. “힘내세요.”
그때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낼 힘이 없는데, 무슨 힘을 내란 말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출처: 서정오, 「목마른 인생」, 두란노, 2014; 「생명의 삶 플러스」, 두란노, 2023년 2월호, 119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분의 이야기를 공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분의 이야기를 공감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낼 힘이 없는 사람에게 힘을 내란 말이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전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투가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첫 번째 전투는 아니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두 나라 사이에 큰 전투가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대패해서 수많은 군사를 잃었고, 급기야 하나님의 언약궤까지 빼앗겼습니다.
시간이 흘러,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 선지자의 주도로 큰 영적인 은혜를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 군인들은 많은 군사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사무엘 선지자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한 번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을 그 실패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법입니다. 과거의 실패가 이스라엘의 발목을 잡았는지, 이스라엘은 제대로 싸워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사무엘은 젖 먹는 어린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날, 여호와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무찔렀습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해도, 때로는 우리가 전혀 준비되지 않았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한 사무엘은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우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곳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우리가 하나님을 기념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얻는 성공 뒤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과연 사무엘이 말하는 ‘여기’는 어디입니까? 에벤에셀이 아닙니까? 그런데 ‘에벤에셀’이라는 지명은 이미 사무엘상 4장 1절에 등장했습니다.
그곳에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나가 싸우려고 할 때, 이스라엘은 에벤에셀에 진을 쳤고, 블레셋은 아벡에 진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소중한 군사 사천 명을 잃게 됩니다.
전쟁에서 패한 이스라엘 장로들은 왜 우리가 이 전쟁에서 패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블레셋을 이길 수 있는지를 논의합니다. 그리고 생각해 낸 게 바로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해 주시던 장소였습니다.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승리가 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번에도 하나님의 언약궤가 자신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전쟁의 수호신 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과연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요?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궤라고 하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도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첫 번째 패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게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무려 이스라엘 군사 3만 명이 전사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애지중지 여기던 하나님의 언약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에벤에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철저히 실패의 땅이었습니다. 무엇을 해도 안 되는 땅, 열심히 하면 할수록 더욱 망하는 땅, 그곳이 바로 에벤에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성공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오히려 간절히 그분의 도움을 요청할 때, 하나님은 실패의 땅 에벤에셀을 성공의 땅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수치의 땅을 영광의 땅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수치를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필요와 세속적인 열망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영광을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수치를 영광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실패의 땅, 에벤에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얼마든지 실패의 장소를 승리의 장소로 바꾸어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여기까지 도우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바라보는 것에 희망은 없습니다. 신앙은 지금까지 내가 바라보지 않던 전혀 새로운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바라봅니다.
그것들이 자기를 지켜주고, 그것들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방향을 돌린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의미를 부여하던 것에 다시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3편인 <인디아나 존스와 최후의 성전>은 전설의 성배를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인디아나 존스 박사 일행은 마침내 성배가 있는 곳에 접근하게 되지만, 그들 앞에 세 개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특히 세 번째 시험이 인상적입니다. 천길만길 낭떠러지 건너편으로 건너가야 하는데 다리가 없습니다. 훌쩍 뛰어넘을 정도의 거리도 아닙니다. 그들은 그냥 “믿음으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존스 박사는 허공을 향해 몸을 던져 뛰어내립니다. 순간 발에 닿은 딱딱한 감촉을 느낍니다. 보이지 않던 다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서 감독은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는 가장 중요한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교훈을 관객들에게 제공합니다.
영화의 다른 장면에서도 중요한 메시지가 나옵니다. 십자군 기사단이 지키는 여러 성배가 놓인 방에 도착했을 때 한 기사가 소리칩니다. “현명하게 선택하라!”
마지막 최후의 시험에서 선택의 시험을 배치함으로써, 인생에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 것입니다.
-출처: 이동원, 「너희는 일어서 다시 가라」, 압바암마, 2022; 「생명의 삶」, 두란노, 2023년 2월호, 101에서 재인용.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끊임없이 선택의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작게는 점심 메뉴를 선택하는 문제에서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공부할 학교를 선택하고, 일할 직장을 선택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평생을 같이할 배우자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현명하게 선택하라!”라는 메시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과연 어떤 선택이 후회함이 없는 현명한 선택일까요?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무엘의 말을 통해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에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과 이방 신들을 섬기는 신앙이 혼합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혼합적인 신앙으로는 여호와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외쳤습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그들의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내 주실 것입니다.
다행히 사무엘의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 종일 금식하고, 철저히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들이 여호와 앞에 물을 길어 붓는 행위에는 “마치 쏟아지는 물처럼, 지금 나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쏟아지고 있습니다.”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도 사무엘 선지자의 메시지를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입술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세상의 향락과 물질만능주의에 빠져서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점검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죄를 발견한다면, 스스로 돌이켜 여호와 신앙을 선택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중보기도의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기도는 영적 지도자의 기도입니다. 5절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 한 음성으로 5절을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9절도 찾아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
훗날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삼 12:23)”
이스라엘의 승리는 기도의 승리였고, 중보기도의 승리였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승리는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사무엘의 중보기도로 인한 승리였습니다.
물론 어려움을 만날 때 여러분이 기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여러분이 지쳐서 두려워할 때 과연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지쳐 두려워할 때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는 영적인 지도자를 만나셨습니까?
새 번역 성경에서는 히브리서 13장 17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지도자들의 말을 곧이듣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이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드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들이 기쁜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탄식하면서 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그들이 탄식하면서 일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목자는 양을 지킵니다. 우리의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목자 옆에는 항상 개가 있습니다. 목자는 때로는 개를 이용하여 양이 무리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지키고, 이리의 공격으로부터 양을 보호합니다.
오늘날 목회자의 역할은 양을 치는 목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목자를 도와 양을 지키는 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훌륭한 개는 양을 위험으로부터 잘 지키는 일로 인해 보람을 느끼고, 주인의 칭찬을 듣습니다.
여러분이 지쳐서 두려워 떨 때, 목회자는 여러분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들이요, 여러분의 일을 장차 하나님께 보고 드릴 사람들입니다.
갓난아기는 엄마의 젖을 먹고 자라지만, 성도들은 목회자의 눈물을 먹고 자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전서 2장 7~8절에서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만일 여러분이 중보기도의 능력을 믿고 목회자와 함께 기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여러분을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실패의 자리를 성공의 자리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과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13절에 보면,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14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들이 이스라엘에게 다시 회복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회복을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끝으로 14절 하반 절에 보면,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서두에 제가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린 것처럼, 말기 암에 걸려 고통 중에 있는 환자에게 사람들이 찾아가 아무리 힘을 내라고 한들, 그가 어떻게 힘을 낼 수 있겠습니까? 낼 힘이 없는데 말입니다.
한 번은 목사님이 그에게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이제까지 혼자 힘으로 대단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이제는 도움을 받으셔야 할 때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도움을 받는다니, 누구에게 말입니까?”
목사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소개하고는, 이사야 40장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기라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목사님이 다녀간 후,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힘없는 내게 모두 ‘힘내라’고 해서 오히려 절망만 되더니, 목사님이 오셔서 ‘힘 있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시고 기도해 주시는데, 정말 힘이 생기는 것 같았소.”
힘없는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은 하나 마나 한 말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지 말라”는 말도 소용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인간의 생각이나 상상력을 초월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이신 하나님을 앙망할 때, 독수리처럼 날아오르는 새 힘을 받습니다(서정호, 「생명의 삶 플러스」, 119.)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인생 그림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혹시 여러분의 인생 그림이 형편없이 망가지지 않았습니까? 남몰래 수고하고 땀 흘리며 노력한 결과가 한순간의 불행한 사건으로 사라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는 도우시는 하나님,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도우시는 하나님,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방향을 돌린다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여러분의 실패한 인생 그림을 아름다운 풍경화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여러분이 겪고 있는 실패의 자리를 승리의 자리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여러분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기쁘고 가슴 설레는 일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