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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은 우아한 물푸레나무에 매혹되곤 했다
6장 2,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적 성격에 관하여
왕은 물었다.
『존자여,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예견하신 분입니까.』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것을 아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예견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째서 제자들에게 비구 승단의 규율을 한꺼번에 제정하지 않으시고 기회있을 때마다 마련해 주었습니까.』
『대왕이여, 지구상의 모든 의약을 알고 있는 의사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마 있을 것입니다.』
『대왕이여, 의사는 이미 병들었을 때 환자에게 투약을 합니까. 아니면 병들기 전에 투약을 합니까.』
『존자여, 병은 다음에 투약합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부처님은 모든 것을 예견하신 분입니다. 제자들에게 때가 아닌 때에 익혀야 할 규율을 마련해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생활하는 동안 필요성이 생겼을 때 법해서는 안 될 규율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존자여.』
6장 3, 부처님의 서른 두 가지 위인의 특징에 관하여
왕은 물었다.
『존자여, 부처님은 위인이 지니는 서른 두 가지 신체상의 특징(三十二大人相)을 갖추시고, 여든 가지 부수적인 특징(八十隨形好)으로 빛나시며, 금빛 같이 피부는 빛나고, 몸 주위의 약6피이트 거리까지 빛이 방광(放光)을 하였습니까.』
『대왕이여, 세존께서는 그러하셨습니다.』
『그 분의 부모도 그러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부모를 닮아 태어나셨을 것이 아닙니까. 아들은 부모 중의 어느 한 쪽과 같거나 비슷하거나 하지 않습니까.
장로는 대답했다.
『대왕이여, 잎이 백 개나 되는 연꽃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서 성장합니까.』
『진흙 속에서나 물 속에서 성장합니다.』
『그렇다면 그 연꽃은 색깔이나 향기나 맛이 연못의 진흙을 닮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색깔이나 향기나 맛이 물을 닮습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부모는 위인이 지니는 서른 두 가지 신체상의 특징을 갖추지도 않았고, 여든 가지 부수적인 특징으로 빛나지도 않았으며, 피부가 금빛으로 된 몸도 아니며, 몸 주위의 6피이트 거리를 방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대가 말한대로 여러 가지 특징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존자여.』
(<밀린다팡하>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여자)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사랑하는 나의 임을 찾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일어나서 온 성읍을 돌아다니며 거리마다 광장마다 샅샅이 뒤져서 사랑하는 나의 임을 찾겠다'고 마음 먹고, 그를 찾아 나섰지만 만나지 못하였다.
성 안을 순찰하는 야경꾼들을 만나서 "사랑하는 나의 임을 못 보셨어요?" 하고 물으며,
그들 옆을 지나가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나의 임을 만났다. 놓칠세라 그를 꼭 붙잡고, 나의 어머니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어머니가 나를 잉태하던 바로 그 방으로 데리고 갔다.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서 부탁한다. 우리가 마음껏 사랑하기까지는,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아 다오.
거친 들을 헤치며, 연기 치솟듯 올라오는 저 사람은 누구인가? 몰약과 유향 냄새 풍기며, 장사꾼들이 가지고 있는 온갖 향수 냄새 풍기며 오는구나.
아, 솔로몬이 탄 가마로구나. 이스라엘 장사 가운데서도 빼어난 용사 예순 명이 그를 호위하는구나.
모두들 칼로 무장했구나. 전쟁에 익숙한 군인들이 야간 기습에 대비하여 저마다 허리에 칼을 찼구나.
솔로몬 왕은 그 가마를 레바논의 나무로 만들었구나.
기둥은 은으로 입히고, 닫집은 금으로 꾸미고, 자리에는 보랏빛 털을 깔았구나. 그 안은 사랑으로 가득 찼구나. 예루살렘의 아가씨들아,
시온의 딸들아, 나와서 보아라. 솔로몬 왕이다. 그가 결혼하는 날, 그의 마음이 한껏 즐거운 날, 어머니가 씌워 준 면류관을 쓰고 계시네.
-(아가(Song of Songs) 3장)
오늘 <밀린다팡하>에서 “연꽃은 색깔이나 향기나 맛이 연못의 진흙을 닮습니까"를 보자.
가까이 있는 것을 닮지 않아 빛나는 것이구나. 보색, 대비 등의 모습이 강렬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오늘 <아가>에서 “우리가 마음껏 사랑하기까지는, 흔들지도 말고 깨우지도 말아 다오.”를 보자.
강렬한 문장이다. 사랑의 행위가 영원히 이어질 것 같다.
<꽃의 제국>에 나오는 글이다.
[꽃의 색은 대개 꽃잎의 색을 나타내고 꽃받침과 꽃차례 밑에 붙은 총포는 녹색인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의 색이 반드시 꽃잎의 색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백합이나 나리는 3장의 꽃잎과 3장의 꽃받침이 같은 색이고 크기도 거의 같아 화피 전체가 아름다운 꽃을 형성한다. 특히 붓꽃은 화피 위로 떨어지는 꽃잎 같은 암술을 가지고 있다. 매발톱꽃은 노란 꽃잎과 붉은 꽃받침을 두르고 있는데 길게 늘어난 꽃잎의 끝부분은 꽃받침처럼 붉은색을 띠고 있다. 가침박달은 꽃잎이 꽃받침보다 훨씬 크기는 하지만 모두 흰 비단결 같아 봄 햇살 아래 더욱 눈부시게 빛난다.]
통으로 꽃이라고 하면 좋을 텐데 공부를 하다 보면 구분하면서 익히는 게 너무 힘들다. 그래서 식물학적 사유가 아니라 식물 매개 사유를 하려는 것 같다.
<길고 긴 나무의 삶>에 나오는 글이다.
[예술가들은 우아한 물푸레나무에 매혹되곤 했다. 존 컨스터블은 에식스 데덤의 자기 집 둘레에 있는 물푸레나무를 그림으로 영원히 남겼다. 그가 그린 <곡물밭(The Comfield)>과 <플랫포드 방앗간(Flatford Mill)> 같은 그림에는 깃털 같은 이파리를 작은 붓으로 잘 표현한 물푸레나무가 전경에 두드러진다. 그의 친한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C. R 레슬리에 따르면 컨스터블은 거의 모든 나무를 ‘기쁨에 도취되어’ 쳐다봤지만, 그가 정말 아끼는 나무는 물푸레나무였다. 햄스테드의 물푸레나무가 베였다는 소식에 컨스터블이 무척 상심했고, 레슬리는 회상한다. 컨스터블이 그린 아름다운 그림들에 영감을 준 나무였다.]
위 글에서 “예술가들은 우아한 물푸레나무에 매혹되곤 했다.”를 보자. ‘우아한’ 수식어가 이채롭다.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물푸레나무 앞에 가면 이 수식어를 떠올려 살펴봐야겠다.
<나무처럼 생각하기>에 나오는 글이다.
[연구자들은 녹지대가 조금이라도 정비된다면 만남의 장소나 사회적 평온을 얻는 곳이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고, 연구를 통해 나무가 울창한 녹지대가 생기면 범죄율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악의적인 사람들은 깨끗이 정비되고 단장된 녹지대는 오히려 부자들이 사는 동네여서 감시가 삼엄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나무와 범죄율의 연관성은 지역의 사회경제적 지위와는 별개의 문제다.
또 다른 유익은 식물이 폭력성이 드러나지 않도록 직접 억제한다는 것이다. 나무는 공격성을 조절한다. 개인 정원을 시야가 트이도록 개방해 초목 울타리를 없앤 도시가 안전하다. 그러니 주변에 나무가 심어진 공공 구역이 남아 있는 도시는 그만큼 안전한 셈이다. 잘 조성된 녹지는 시민들이 사회적으로 적절한 행동을 하도록 이끌며 그런 도시를 찬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게다가 개별성을 지닌 나무들은 도시가 더욱 평화롭게 보이도록 한다.]
위 글에서 “개별성을 지닌 나무들은 도시가 더욱 평화롭게 보이도록 한다”를 보자.
무슨 말일까? 나무 하나하나를 인식하며 산다는 말일까? 그냥 저 나무들이 아니라, 느티나무, 벚나무, 느릅나무, 소나무, 스트로브잣나무, 야광나무, 산딸나무, 목련 등등으로 부르는 것 말이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생물 세계의 이해>에 나오는 글을 보자.
[식물이 잎 기공으로부터 수분을 증산시키는 것은 땀이 나오는 것과 같은 원리가 아닐까 하나 외계 상태에 따라 기공을 넓히기도 하며 좁히기도 한다는 것은 역시 외계의 상태를 식물이 감지하고 있다는 것이며 또한 인정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이 대뇌 발달이나 이에 따른 의식 작용 등에 결부되지 않아도 이와 관계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까지 체온 조절은 의식작용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사람들 입장에서 본다면 식물적 성질이라고 할 수가 있다. 위 속에 먹이가 들어갔을 때 소화액이 제대로 나온다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은 식물적 성질의 한 표현이며, 식물에 있어서도 벌레잡이민들레나 끈끈이주걱은 곤충을 잡으면 소화액을 분비하는 것으로 소화하고 있는 것이다.]
식물적 성질, 식물의 의식작용이라? 처음 보는 단어 조합이 새로운 상상을 가져온다. 이럴 때는 내가 만들어보는 단어 조합에 주눅 들지 않고 계속 시도를 한다. 내가 사는 것이기에.
<생명을 보는 마음>에 나오는 글을 보자.
[동물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아니다. 식물에서도 실제로 스트레스라는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 빛이 너무 강하거나 적음, 기온이 너무 높거나 낮음, 물이 너무 많거나 없음, 염분이 너무 높거나 낮음, 모두 식물에게는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S 전략은 스트레스내성형(stress tolerant)으로, 스트레스 환경요소를 견디는 힘을 갖추고 가혹한 환경을 거처로 삼아 살아가는 식물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사막에 사는 선인장과 툰드라 지역의 고산식물을 들 수 있다. 생활사 측면에서 스트레스 내성식물은 느리게 생장하고 생활사 후기에 생식을 하는 경우가 많다.]
식물은 스스로의 몸만으로 곳곳에 적응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차이가 크네. 그게 아니고 동물로 범위를 넓히면 환경에 따라 동물이 모습이 다른 것, 식물과 같네. 그래서 사람은 동물이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 나오는 글이다.
[식물학은 어느 정도 고독하고 게으른 사람에게 적당한 학문이다. 지팡이와 확대경 하나가 식물을 관찰할 때 필요한 장비의 전부다. 떠돌아다니면서 이 식물에서 저 식물로 자유롭게 옮겨다니고, 온갖 꽃을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본다. 그리고 식물 구조의 법칙을 알아내기 시작하면 식물을 바라볼 때 마치 그것을 알아내고자 큰 고통이라도 겪은 것처럼 매우 강렬한 기쁨을 느낀다. 이 한가로운 작업에는 우리가 열정에서 완전히 벗어나 차분할 때만 인지할 수 있는 매력이 있으나, 그때는 그 매력만으로도 인생이 충분히 행복하고 달콤해진다.]
고독하고 게으른 사람이라? 고독한 것은 모르겠는데, 게으른 것은 맞다.
<한반도 식생사>에 나오는 글이다.
[남한에서 가장 오래된 육상 식물은 고생대(약 2억 8,600만-2억 4,800만 년 전까지) 후기의 것으로 경북 문경에서 나온 뉴롭터리스(Neuropteris)이다. 가장 원시적인 유관속식물인 프실로피타(Psilopsida) 식물은 고생대 실루아기 초기부터 데본기 초기까지 북한에서 자랐다. 석송류는 데본기 중세부터 페름기까지 번성하였고, 속새류는 데본기부터 출현하여 석탄기와 페름기에 널리 자랐다. 그 뒤에 양치류와 씨양치류가 나타났다. 코르다이테스류는 석탄기와 페름기에 크게 번성하여 거대한 산림을 이루었다. 은행류는 상부 고생대 페름기에 이미 알려졌다. 소철강은 중생대에 널리 분포하였다.
송백류 가운데 가장 오래된 화석은 페름기 퇴적층인 사동층에서 나타난다. 남한에서 발견된 고생대 화석 송백류는 엘라토클라듀스와 울마니아이고, 남북한에서 공통적인 고생대 송백류는 왈치아 등이 있다. 고생대 페름기에서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에 만들어진 고방산층에서는 엘라토클라듀스가 나타난다.
송백류는 은행류, 소철류와 함께 중생대에 매우 흔하였고 현세에도 아직 많은 종류가 살아 있다. 왈치아는 평남 순천시 사동통에서, 노리니아는 평남 순천시 직동탄광, 개천군 무진대탄광, 북창군 봉창탄광 사동통, 경북 문경 고방산통에서 나타났다.]
외국 서적을 접하는 것 같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자기는 옴을 웅얼거리다가 잠이 들었다. 나지막이 그는 혼잣말로 옴이라는 말을 입밖에 내어보았다. 그러자 자신의 긴 잠 전체가 바로 명상에 잠긴 채 하나의 긴 옴을 발하는 것에 다름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자신의 긴 잠 전체가 바로 하나의 옴의 사유, 무어라고 이름 붙일 수는 없지만 완성된 그 무엇인 옴 속으로 들어가 완전히 몰입하는 것에 다름아닌 것으로 여겨졌다.]
입밖으로 무언가를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 생각으로 속에서 말로 하는 게 편하다. 내면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좋다. 그런데 가끔 위험을 느끼는 순간이 오면 입밖으로 중얼거린다.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게 다 살려는 것으로 귀결된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예술가들은 우아한 물푸레나무에 매혹되곤 했다"
라는 문장을 보았다.
나는 흰색 무늬만 보이면
아, 물푸레나무네 하고 그냥 지나갔다
겨울에도 물푸레나무는 오래 시선이 담기지 못했다
엽흔이 워낙 두드러지고 양 끝도 박쥐 날개처럼 펼쳐져 있어
아, 물푸레나무네 하고 그냥 지나갔다
그런데
"예술가들은 우아한 물푸레나무에 매혹되곤 했다"
라는 문장이 있었다
어떤 관점이 들어가야
어떤 느낌이 쏟아져야
우아한 물푸레나무가 될까
없는 예술혼에 불을 지펴볼까
우아한 물푸레나무
이 문장만으로도 예술을 느낀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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