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저녁, 밀크로션 외 1편
고경숙
저녁 찌개가 짜다고 아버지는 물을 한 사발 들이켰어
조갈이 난 건 아버지의 주머니 사정도 마찬가지였지
윗목에 앉아 귀가 닳은 동화책을 반복해 읽던 나는
화장품 사들고 온 언니의 손부터 봤어
전구 밑에 영롱히 빛나던 뽀얀 유리병
일방적으로 끝난 연애에 분풀이라도 하듯
엄마한테 등짝을 맞아도 덤비겠다는 듯
내 손이 절대 닿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
결연하게 선반 위에 올려놓으러 가다
언니는 가만히 있는 내 발에 걸려 넘어졌지 뭐야
발등은 깨진 유리 조각과 피와 로션이 범벅이 되고
한 번도 써보지 못한 외제 로션은
패망한 언니의 연애처럼 일방적으로 끝났어
어린애처럼 크게 더 크게 울던 언니의 울음에
내가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어리둥절한 발등에 붕대를 감던 저녁,
흑백 티비에선 수사반장이 범인을 잡고 있었어
한 번도 보지 못한 언니의 그 놈이, 나는
범인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했지
한동안 언니에게선 비누 향 외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어
불가촉 당신
내가 일몰을 바라볼 때 지구 반대편의 새벽도 어둡고 고요했을 겁니다 서역의 바람이 얼음처럼 차가워져 분분히 일어서던 그때, 우리 마주치지 못했던 눈동자 속에서 가지런히 눈물이 떨어집니다 당신이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었던 잉여의 노래입니다
계절이 예정된 대로 거침없이 깊어집니다 시간 속에서 당신을 걷어낸 나는 지워진 이름입니다 우리가 허락받은 허름한 저녁을 지나는 기차의 헛발질 소리, 그리고 잠깐 부딪쳤을 등의 체온 정도를 기억하는 일 모두 꿈이어야 합니다. 갠지즈강을 걸어나온 물빛 영혼을, 다 탄 장작더미에서 살아남은 그대의 얼굴을 내가 감싸쥐었을 때 그대의 두 손이 나를 일으켰을 때, 그 순간이, 우리가 유일하게 스쳐지나는 교차점이었음을 어둠이 내리고 칠흑같은 지상의 모든 것들을 더듬더듬 만지며 깨달았습니다 유기와 궁핍으로 굶주린 떠돌이개와 고양이들조차 내 발을 핥기를 주저합니다 앙상한 검은 발바닥에 별처럼 하얗게 붙어있는 모래를 털어주던 당신은 어느 별에서 보낸 어머니의 선물이었을까요?꿈은 늘 많은 것들을 빼앗아가고 나는 쫓깁니다
나는 당신을 만지지 못하고 당신 또한 그러하다면 더 이상 태양의 제단에 불을 지피는 일 따윈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죽어 문들어질 만큼만 손끝을 내리찍어 다시는 병든 의지가 당신에게 가닿는 일 없어야 한다고 율법을 내려주십시오
내가 만지는 모든 것들은 언제나 겨울입니다
고경숙
1961년 서울 출생. 2001년 시현실 등단.
시집 고양이와 집사와 봄 외 5권. 청소년소설 프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