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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8,1ㄴ-8>
1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2 독실한 사람 몇이 스테파노의 장사를 지내고 그를 생각하며 크게 통곡하였다.
3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
4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5 필리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다.
6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7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8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6,35-40>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청하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5)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곧 “나는 ~이다”(εγω ειμι)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선언문입니다.
곧 당신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 신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신 생명의 신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빵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한참 뒤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성찬의 빵’이 거기에 강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육체의 고통을 없애 줄뿐인 육체의 양식이 아니라,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라는 뜻입니다.
본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이제 죽음을 이기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육체를 썩지 않게 보존해 주십니다.
곧 당신이 ‘참 생명이요 참 양식’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이 빵을 먹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곧 예수님께 와서 믿고 받아먹는 이 안에서 실현되는 생명의 빵입니다.
그리하여, 이 빵은 믿는 이의 생명을 참된 생명에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요한 6,39-40)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들은 그 뜻을 실현하는 데 전념합니다.
곧 당신께 와서 보고 믿는 이들을 살리십니다.
이렇게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보고”(Θεωρεω)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각작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참되게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십자가 아래서 “이 일들을 보고”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54)라고 고백할 사용된 동사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아들을 보면서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보는 것’(요한 12,45)과 같은 그런 봄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우리의 내적인 눈이 열려야 할 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열리는 눈입니다.
믿음으로 보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는다.”
(요한 6,37)
주님!
아래로 흐를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믿어주지 않아도 믿어 주고, 사랑해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며, 물리치기보다 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과 제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위기가 전기가 되고 기회가 되도록>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스테파노의 순교가 교회에 크나큰 전기가 됨을 보여줍니다.
큰 박해가 시작되고 사도들 말고는 신자들이 흩어집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교회를 지키지만, 그밖의 신자들은 예루살렘 아닌 곳으로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도 교회가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가 박해받기 시작했다고, 신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고 합니다.
교회란 하느님 백성의 모임인데 하느님 백성이 흩어졌으니 그때 당장은 그리고 겉으로 보면 교회가 풍전등화입니다.
풍전등(화風前燈火), 곧 바람 앞의 등불이니 예루살렘 교회가 하느님 교회요 우리 교회의 전부라면 정말 암울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신 것은 흩어진 양들을 모으기 위해 오셨고, 당신 교회를 세우기 위해 베드로를 반석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는데, 주님의 그 모든 계획이 실패로 돌아갈 지경이 된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고, 그 바람은 바오로를 비롯하여 유대교 골수분자들이 일으킨 광풍입니다.
이 광풍 앞에서 신앙이 미약한 사람은 믿음의 불이 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광풍이 불어도 꺼지지 않고, 박해자의 광풍이 성령의 바람이 되어 오히려 열정을 불타오르게 하고, 그래서 교회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여러 지방으로 퍼져나가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박해자의 광풍을 성령의 바람으로 얼마든지 바꾸실 수 있으십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마음에 신앙만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으면 바람을 타고 갑니다.
그러면 민들레 홀씨가 바람에 날려 가 떨어지는 그곳에 씨를 뿌리듯 흩어져간 곳이 복음의 꽃을 피울 곳이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많은 교우촌이 박해를 피해 숨어든 곳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앙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간직하고 있으면 어디 가든 신앙을 퍼트리고, 영성을 간직하고 있으면 어디 가든 영성을 퍼트릴 것입니다.
그러니 신앙만 있으면 위기가 아니고 기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앞서 스테파노의 순교와 박해가 교회에 큰 전기가 되었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처럼 교회의 위기가 전기가 되어 기회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도 위기가 전기가 되고 기회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생명의 빵에 대한 갈망>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나는 과연 구원받게 될 것인가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 순종하면 족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에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고 오직 순종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 이르는 인간적인 고뇌에 이르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듯이,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끝까지 순종하는 믿음의 삶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뜻은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뜻은 미래의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지금 그때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준비하는 오늘의 삶이 중요합니다.
하늘의 문은 세상에서 이미 열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신앙생활은 먼 미래에만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서 내 삶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닮는 삶의 여정이며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이미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성체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망이 커졌으면 좋겠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 알도 마르코치는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으면 합니다.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려면 얼마나 더 마음을 열어야 하는지요?
성체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성체의 삶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두를 내어주는 전적인 자기 희생의 삶, 이웃을 위해 밥이 되어주고 영양이 되어주는 삶을 엮여야 합니다.
아직 깨달음이 부족해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편하게 들어오시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는 데 그 어떤 장애물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 가롤로 보르메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람에게만 생명의 빵이 된다>
예수님은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소개하십니다.
생명의 빵은 창조자의 모습입니다.
나를 희생하여 누군가를 살리는 존재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창조자’라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두 양식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피조물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자 방식입니다.
피조물은 모기처럼 이웃을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고, 창조자는 이웃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빵으로 내어줍니다.
그런데 내가 피조물로 살 것인가, 창조자로 살 것인가는 내가 만나는 사람을 내가 어떤 모습으로 대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웃을 창조자 하느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사람으로 보는지, 아니면 내가 선택한 사람으로 보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이나 당신에게 오는 이들이 당신이 아닌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이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7)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이웃을 대하는 방식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보내주신 이들이라 여기십니다.
다시 말해 내가 선택한 이들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이들로서, 이웃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대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빵이 되시는 것이고 영원한 창조자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가장 혐오스러운 유튜버가 있습니다.
구독자 300만이 넘는 유명한 유튜버지만 그는 인기와 돈을 얻기 위해 자신을 혹사하고 있습니다.
니코카도 아보카도라는 이 유튜버는 처음에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시식 장면을 방송했습니다.
가끔 바이올린도 켰습니다.
하지만 그런 맹맹한 방식으로는 구독자를 모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자신이 모으려 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기임을 입증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서 맡겨주시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빵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구독자를 모으려 한다는 것은 생존을 위해 음식을 모으는 피조물의 모습입니다.
어쨌거나 아보카도는 작전을 바꿔 친구와 함께 아보카도 1만 칼로리를 폭식하는 동영상을 내보냈고 엄청난 구독자 수의 증가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이제는 지금까지 유지하던 채식주의를 포기하고 인스턴트 식품을 폭식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것도 안 되니 음식으로 엽기적인 행위를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독자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댓글 대부분은 이제 악플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엽기적인 행위를 멈출 수가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비싼 집에 사는 영리치가 되었지만, 산소호흡기까지 쓰며 생활해야 할 정도로 몸을 망가뜨렸습니다.
심지어 산소호흡기를 끼고 먹는 방송을 합니다.
죽음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로 사는 사람의 운명입니다.
우리는 창조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이들도 창조된 피조물들이 됩니다.
주인이 계셔야지 사람을 만날 때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만납니다.
이웃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창조자 본성에 참여하게 도와주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생명의 빵이 됩니다.
생명의 빵은 창조자로서 영원히 삽니다.
떡볶이 가게에 한 아저씨가 찾아와 떡볶이 500원어치만 달라고 청합니다.
아주머니는 돈이 없어 보이는 아저씨를 위해 떡볶이를 푸짐하게 주었고 “아저씨, 배고프시면 아무 때나 오세요”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후로 아저씨는 정말 아무 때나 와서 아무 말 없이 당연한 듯 떡볶이를 먹고 계산하지 않고 그냥 나가버렸습니다.
이렇게 공짜로 드리는 떡볶이 값은 매달 약 70만 원이었습니다.
아주머니는 그냥 먹고 나가는 그 아저씨에게 무려 8년 동안 그렇게 떡볶이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 아주머니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피조물일까요, 창조자일까요?
당연히 창조자의 마음가짐을 가졌습니다.
돈을 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창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저씨를 대하는 자세에서 드러납니다.
제작진은 묻습니다.
“사람을 돕는 게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억지로 했다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그냥 쉬웠어요. 오시면 드리기만 했으니까요.”
아주머니는 ‘떡볶이 천사’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말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천사일 수가 있겠어요.
저는 그런 분들을 많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분들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일어나니까요.”
현재 그 남자는 지자체 복지팀의 도움으로 정신과 병원에 입원 치료 중입니다.
그리고 아주머니는 그 남자가 이번 달 말일쯤 의사 선생님의 결정으로 퇴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작진이 물었습니다.
“만약 그분이 퇴원하셔서 다시 당연한 듯이 요구할 수도 있잖아요?”
“드려야죠. 그런 마음은 늘 갖고 있어요.
왜냐하면 부자나 권위가 있고 그런 분들한테는 순종이 쉽지만 이렇게 낮은 곳에 계신 분들한테는 무시하거나 이런 부분들이 많잖아요.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하는 그런 삶을 살면….
그런 분들을 통해 낮아지고 그분을 통해서 순종하는 법을 배웠어요.”
'낮아지고 순종하는 법'을 당연한 듯 무전취식하는 아저씨를 통해 배운 것입니다.
이는 자신도 피조물임을 믿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자녀를 키울 수 있는 이유는 부모가 자신을 키웠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받아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창조자가 있다는 사실은 자녀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창조자의 사랑을 할 줄 아는 이런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만날 때 창조자가 맡겨주신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다면 우리도 생명의 빵이 될 수 있습니다.
창조자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피조물은 죽지만 창조자는 영원히 삽니다.
나에게 있는 것을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창조자는 그 생명이 마를 수 없음을 증명합니다.
우리도 창조되었음을 믿읍시다.
그래야 사람들을 피조물로 보고 내가 창조된 그 창조의 소명을 다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창조의 대상으로 여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창조된 피조물로 여기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요한 6,37-39)
자신을 피조물이라고 여기는 사람만 창조자가 되고 생명의 빵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창조자만이 영원합니다.
우리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어서 좋을 게 무엇이겠습니까?
생존에 집착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다 죽습니다.
창조자로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려면 나도 창조되었음을 믿고 내가 만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 맡겨주셨다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맡겨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맡겨주신 이를 하나도 잃지 않으시려는 마음으로 사셨습니다.
우리도 생명의 빵으로 영원히 살려면 내가 만나는 이웃을 주님께서 살리라고 보내주신 선물로 여겨야 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세상 모든 존재의 근원이며 존재의 기반이며 존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 아버지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뜻이 전해지는데,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지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나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요한복음 6장 39~40절)
이로써 우리 인생 각자를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 의지, 최종 목표가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것은 은혜롭게도 우리가 죽어도 죽지 않는 것, 또 다른 생명으로 탄생하는 것,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 부활하는 것, 구원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백번이고 천번이고 틈만 나면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마땅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우리 각자 인생 안에 적용하고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 측의 노력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매일 미사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생명의 빵인 예수님을 지극정성으로 영하는 것입니다.
과분하게도 우리 안으로 들어오시는 주님의 몸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성체성사가 우리에게 건네는 핵심 교훈인 희생과 자비의 삶을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라는 진리, 우리 역시 존귀하신 성체를 통해 죄사함을 받고, 우리 역시 그 성체로 인해 거룩한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진리를 굳게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독생성자 예수님께서 매일 내 인생 여정 안에 굳건하게 현존하시고, 매일 내가 걷는 인생길에 친구처럼 동반하시며 함께 걸으심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는 비록 어쩔 수 없는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수시로 죄에 떨어지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영원히 존재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존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을 통해서 성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그분 존재에 합일함을 통해 존재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 각자를 포함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존재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근원이며 존재의 기반이며 존재 그 자체이십니다.
매일 매순간 하느님 존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그분 존재 안에 숨 쉬고 머무르며, 그분 뜻 안에 살고, 그분 뜻을 실천함을 통해 우리 존재의 빛을 발하는 그런 하루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요한 6,35-36)
여기서 ‘배고픔’과 ‘목마름’은 우리가 인생살이와 세속 생활에서 겪는 고통들과 슬픔 등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그 ‘배고픔’에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생명의 빵’이신 분이고, 또 그 ‘목마름’에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생명의 물’이신 분입니다(요한 4,14; 7,38).
묵시록에서는 “종말의 하느님 나라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 나라” 라고 말합니다(묵시 21,4).
예수님은 바로 그 나라로 우리를 데려가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생명과 평화와 안식은 죽은 다음에나 얻어 누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곳에서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시작되고,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이곳에서 시작해야 그곳에서 완성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화와 안식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미리 누리는 생활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도 많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화와 안식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인생의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리는 것은 같은데, 그들은 그 배고픔과 목마름을 탐욕과 집착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탐욕과 집착 때문에 더 큰 배고픔과 목마름에 빠집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 4,1-4)
베드로 사도는 신앙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
(1베드 1,23-25)
탐욕과 집착으로 무엇인가를 얻는다 해도(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그것은 허무하게 말라 떨어질 풀꽃을 얻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 허무에서 해방되려면 탐욕과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탐욕과 집착을 버리려면 영원하신 주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요한 6,37-38)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끝까지 책임지겠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이라는 말과 “나에게 오는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서 실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구원받을 사람을 따로 정해 놓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예수님은 그 뜻을 실천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요한 6,39-40)
여기서 ‘하나도 잃지 않고’ 라는 말과 ‘누구나’ 라는 말은 ‘하느님의 뜻’이 그렇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고, ‘모든 사람’이 무조건 그렇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하나도 잃지 않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지만, 스스로 떨어져 나가서 잃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뒤의 60절과 66절을 보면, 예수님 말씀이 듣기가 거북하다면서 ‘제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났고,
열두 제자만 남았습니다(66절-67절).
그런데 열두 제자 가운데에서도 한 명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70절-71절).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사람, 예수님을 보고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즉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이라고 해도,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탈락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탓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의 ‘부르심’은 변함이 없는데, 인간 쪽의 ‘응답’이 확고하지 않아서 그렇게 됩니다.
‘응답’은 한 번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완성’될 때까지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 그것이 ‘응답의 완성’입니다.
‘마지막 날’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 즉 종말의 날을 가리킵니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중간에 떨어져 나가지 않고 끝까지 노력한 사람에게는 틀림없이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끝까지’는 ‘종말 때까지’가 아니라, ‘이 세상의 인생을 마칠 때까지’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회개할 기회도 없고, 새로 시작할 기회도 없습니다.
따라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신앙생활에 ‘나중’은 없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생명의 빵이신 주 예수님 -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의 해결>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신록의 기쁨 계속되는 파스카 축제시기이자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성모성월입니다.
온누리에 생명의 빛 차고 넘치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은총입니다.
다음 5월8일 부활 제4주일은 부처님 오신날이자 어버이날이고 또 내일은 어린이날이라 가슴 설레는 감동으로 가득한 금주의 날들입니다.
늘 들어도 감미로운 성모성월 성가 244장입니다.
“성모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
사랑하올 어머니 찬미하오리다
가장 고운 꽃모아 성전 꾸미오며
기쁜 노래 부르며 나를 드리오리.”
이어지는 4절까지 가사도 참 감동스럽고 은혜롭습니다.
참으로 주님 파스카 축제에 걸맞는 기쁨과 평화 가득한 성모성월입니다.
어제의 감동적인 세 일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이 아름다운 영혼들을 통해 빛나는 파스카 주님의 은총입니다.
1. 안젤라 자매입니다.
무려 아들이 9세때부터 매해 한해도 거르지 않고 이맘때쯤 어버이날을 앞두고 꼭 아름다운 꽃이 담긴 화분을 저에게 선물하길 올해 아들이 결혼을 앞둔 35세가 되었으니 무려 26년입니다.
당시 30세쯤 되는 자매였는데 26년 동안 한결같이 살아 온 참 놀랍도록 아름답고 성실한 자매입니다.
어제도 그 무거운 화분을 들고 종점에서 버스에서 내려 두손으로 20분 거리를 들고 왔습니다.
얼마 후에는 작은형제회 재속회원으로 종신서원도 하게 될 참 신심깊은 파스카 주님의 사랑을 가득 받는 자매입니다.
2. 비안네 형제입니다.
곤궁한 처지에 병고중인 50대 중반의 독신이지만 참으로 순결한 영혼입니다.
누나가 마련해준 집에서 노부모님 모시고 살다가 지금은 혼자 기초수급자로 살아가는 형제로, 10년 이상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어느 자매와 순애보(純愛譜)와 같은 사랑을 나누며 결혼을 꿈꾸는데, 자매의 언니가 경제력의 부족으로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방통대 영문과를 나왔고 지금도 고등학교 친구들과 우정도 계속 나누며 도움을 받는다 했습니다.
어제는 구로동 멀리에서 조용히 방문하여 고백성사도 보고 연인과의 미사도 신청했습니다.
마침 연인으로부터의 전화를 받는 모습이나 말투가 참 다정하고 사랑이 가득 담겨 보고 듣는 제 마음도 흐뭇했습니다
주님의 파스카 은총이 이 50대 중반의 순결한 연인들에게 늘 함께 하길 기도했습니다.
3. 올해 백수를 맞이하는 교회의 어른이신 윤공희 대주교의 평전과도 같은 <윤공희 대주교의 북한 교회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이 어제 수도공동체에 선물로 전달되었습니다.
참으로 대주교의 그 파란만장한 대하드라마와 같은 감동스런 인생에 파스카 주님의 은총이 얼마나 풍성한지 직감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조만간 공부하는 마음으로 독파할 생각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병고 중 윤공희 대주교가 병문안 왔을 때, “넌 건강해서 좋겠다!” 라는 추기경의 유머 비슷한 진솔한 말씀이 생각나 저절로 미소가 흘러 나왔습니다.
어제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는 복음 서두와 쌍벽을 이루는 오늘의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라는 주 예수님의 말씀이 참 은혜롭습니다.
누구나에게 열려 있는 구원의 문이요, 우리 인간의 궁극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거에 해결해 주는 생명의 빵이신 주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 주님을 모시고 영원한 삶을 살기 위해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의 선택과 결단의 행동에 달렸으니 주님께 가서 주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참 은혜롭습니다.
세례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의 복된 운명입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파스카의 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바로 예수님께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믿는 우리 하나하나가 우연한 존재가 아닌 하느님이 예수님께 보낸 귀한 은총의 선물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주님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예수님께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릴 것이다.”
언젠가 그날이 아닌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생명의 빵 주님을 모심으로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앞당겨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와 파스카 주 예수님이 환상의 콤비를 이루며 우리 하나하나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지 깨닫습니다.
앞에는 파스카의 예수님이 이끌어 주시고 뒤에는 하느님 아버지가 배경이 되어 주시니 참으로 복된 우리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도대체 무지와 허무가 침입할 여지가 전무합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을 통한 하느님 아버지와 파스카 예수님의 협동 작업은 얼마나 눈부신지요!
순교자 스테파노, 박해자 사울, 그리스도의 선포자 필리포스 모두가 하느님의 구원 섭리의 그물망에 있습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는 말이 실감납니다.
순교자 스테파노로 인해 성령의 강풍에 산불처럼 번지는 복음 선포입니다.
예수님은 스테파노로 부활하셨고, 스테파노는 필리포스로 부활한 듯 흡사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예수 부활 사건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혜성같이 등장한 필리포스를 통해 대활약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얼마나 역동적이고 신바람 나는 사마리아 고을의 복음 선포 현장인지요!
곳곳에서 일어나는 파스카 사건들이요, 치유와 구원의 사건들이니, 모두가 파스카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위업이요 여전히 오늘 지금 여기서 계속되는 구원의 현실입니다.
“군중은 필리포스의 말을 듣고 또 그가 일으키는 표징들을 보고, 모두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고,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그대로 파스카 미사 축제를 연상케 하는 살아 있는 그림같은 장면입니다.
참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우리을 통해 끊임없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하나하나의 삶이 예수님 부활 사건이 됩니다.
요즘 파스카의 봄꽃들도 이런 진리를 연상케 합니다.
하나의 꽃이 지면 하나의 꽃이 피고, 아마 10월 말까지 계속 피고 질 다양한 파스카의 꽃들입니다.
개나리가 지니 연산홍, 철쭉꽃이 한창이요, 배꽃들이 지니 배꽃들 자리에는 신록의 기쁨으로 피어나는 꽃보다 아름다운 무수한 파스카의 나뭇잎들입니다.
파스카 주님의 축복이 넘치는 생명의 빛 가득한 파스카 축제시기이자 성모성월 5월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생명의 빵이신 당신을 모신 우리 모두가 기쁨과 평화 가득한 영원한 현재를,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또 하나의 파스카 예수님이 되어 살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 은총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
(요한 6,36)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존재인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그들이 믿는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성 안에서 당신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7)
예수님께로 오는 이들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것이고, 아드님이신 예수님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이들이라고 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요한 6,39)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당신 생명을 내놓으시어, 결국 그들이 모두 하느님의 생명 안에 들어가게 하시는 사명을 지니고 오신 것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아버지와 아들이 가히 환상적으로 연계되어 계십니다.
구원받을 이들은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다시 그 아들에게서 아버지께로 되돌려집니다.
그렇게 보내어지고 이끌리는 사이에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존재로 거듭 나는 것이지요.
이렇듯 아버지와 아들은 온전히 서로가 서로를 향해 있습니다.
아드님은 아버지의 구원 의지를 실현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시고, 아버지는 끊임 없이 구원받을 이들을 아드님에게 보내십니다.
제1독서는 스테파노의 순교 직후의 정황을 다룹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사도 8,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 대한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그 결과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사도 8,1)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요.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사도 8,4)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향을 등진 이들이 그저 숨어버린 것이 아니라 발길 닿는 곳마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있으니 가히 기적에 가까운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쁜 소식은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과 속도로 전해지고 들불처럼 번져 나갑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에게 주시는 이들, 구원받을 이들은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다양하게 형성됩니다.
누구도 예상 못할 민족과 언어와 문화 안에서 생성되고 성장하여 하느님의 생명,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게 됩니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요한 6,40)
예수님께서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스테파노의 순교와 함께 불이 당겨진 선교가 예수님의 말씀을 보증 삼아 힘차게 뻗어나가게 되는 이 지점에서, 사도행전 작가는 스테파노 순교 때 언급했던 "사울"을 한 번 더 언급하며 미래에 펼쳐질 놀라운 전복을 암시합니다.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긴"(사도 8,3) 사울은 곧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도 중의 사도 바오로로 변모할 것입니다.
그 역시 하느님께서 아드님에게 주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와서 보아라 하느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이루신 놀라운 그 위업을."
(화답송)
겁 많던 사도들부터, 박해를 피해 흩어진 이들, 그리고 바오로가 된 사울과 더불어, 우리는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찾기 위해 멀리 갈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 놀라운 업적의 증거이고 결과물이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오늘 독서와 복음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사자성어를 떠올리게 합니다.
순교와 박해는 놀라운 선교와 위대한 사도의 탄생이란 상상치도 못할 결과를 가져오니까요.
벗님은 이런 전화위복 체험을 한 적이 없는가요?
크고작은 체험들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지금 어려움과 위기를 겪고 있다면 지금이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의 또다른 기회라고 여기며 묵묵히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를 체험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개신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분을 만났습니다.
개종한 이유는 행복해 보이는 친척이 가톨릭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개신교회와는 많이 다른 가톨릭의 전례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았습니다.
개신교회에는 없는 예식들이 가톨릭에는 있기 때문입니다.
성수, 향, 고상, 성상들에 대해서 궁금해 했습니다.
정화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드렸습니다.
가톨릭에서 이야기하는 존경, 공경, 흠숭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드렸습니다.
목사님과는 와인을 마셔본 적이 없는데 사제와 와인을 마시는 것이 생소하다고 합니다.
젊은 날 교회에서 음주를 금하는 것이 아쉬웠다고 합니다.
가톨릭은 음주에 대해서 상당히 관대한 것이 놀라웠다고 합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가톨릭은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덜 한다고 하였습니다.
가톨릭에는 수도원 영성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영신수련도 있으니 나중에 피정에도 참석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님은 개신교회를 떠나서 가톨릭으로 온 것에 대해서 ‘변심’ 한 것에 대해서 마음에 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가톨릭, 이슬람, 개신교, 유대교는 뿌리가 같다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같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변심이 아니라, 회심에 대해서 설명해 드렸더니 마음의 짐이 가벼워졌다고 합니다.
개신교회에서 했던 열심한 신앙으로 가톨릭에서도 열심히 하면 하느님께서 같은 축복을 주실 거라고 설명해 드렸습니다.
변심은 나의 욕심과 욕망 때문에 마음이 바뀌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드라마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성공에 대한 미련 때문에 모든 것을 바쳐서 헌신했던 연인을 버린다면 그것은 변심입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진리를 찾아 나선다면 그것은 회심입니다.
대기업에서 성공이 보장된 자리를 버리고 아프리카로 선교사로 떠난 분을 보았습니다.
회심이라 생각합니다.
종교라는 옷을 갈아입는 것이, 직분을 바꾸는 것이 회심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의 것들과 결별하는 것이 회심입니다.
우리에게 균형 잡힌 신앙이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철야가 좋다고 철야기도를 주로 다니기도 하고, 어떤 분은 좋은 강의를 들어야 한다고 매일 강의를 들으러 가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성지순례가 좋다고 성지순례를 많이 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도 적당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어떤 것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일까요?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분심과 잡념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생각합니다.
첫째는 과로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세상의 일과는 멀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까지 세상의 일들 때문에 주일에 성당에 못나오는 것을 봅니다.
둘째는 자주 기도하는 것입니다.
손을 자주 씻는 것만으로도 질병을 예방할 수 있듯이, 우리가 자주 기도드리면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나의 영혼에 묻어 있는 허물들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를 하셨습니다.
사도들도 모든 일들을 감사하게 여기고, 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성사에 자주 참여하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을 받아 모시는 것은 나의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를 통해서 영혼을 정화시키는 사람은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곧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시작하는 교육과 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은 신앙생활을 더욱 활기차게 할 수 있습니다.
늘 그렇지만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분들이 교육과 피정에 더 많이 참석하는 것을 봅니다.
그분들은 교육과 피정의 효과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교육을 받고, 피정을 통해서 지친 영혼을 정화시켜야 하는 분들은 아무리 좋은 피정이 있어도 교육이 있어도 함께하지 못합니다.
바쁘기 때문입니다.
박해가 시작되었어도, 사도들은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좀 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능력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셨고, 자신을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교만, 욕심이라는 장애를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희생과 봉사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랑으로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현대에도 영양실조에 걸리는 사람이 많다는 신문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잘 못 먹어서’가 아니라, ‘잘못 먹어서’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쁜 일상에서 즉석식 또는 간편식으로 빠르고 간편하게 한 끼를 해결하는 것이 익숙해진 것입니다.
균형 잡힌 식단이 아니어서 영양 부족 현상을 보이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간편하고 편한 식사가 몸에는 좋지 않습니다.
또 자기 좋아하는 것만 먹는다면 어떨까요?
이 역시 몸에 좋지 않습니다.
특히 필수 영양소를 섭취하지 않으면 몸에 좋을 리가 없습니다.
신앙인에서 필수 영양소는 ‘주님’이십니다.
영적 생명의 양식인 주님인데 우리는 주님께 얼마나 가까이 가고 있습니까?
편하고 쉬운 것만 생각해서,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성당 미사에 오시는 분은 팬데믹 이전보다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성당에 못 가고 방송 미사를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당도 안 가고 방송도 보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편하고 간단한 것만을 선택하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생명의 양식이신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영양실조에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과 사람들이 빵을 주제로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빵의 의미를 잘 몰랐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식인 빵을 의미하는 줄 알고 그 빵을 자기들에게 좀 달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빵이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매일매일 먹어도 배고픈 일용품의 빵이 아니고, 양을 따질 수 없는 영적인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나는 ~이다’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자기 계시를 할 때 쓰는 표현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가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있는 나다.”(탈출 3,6)라고 말씀하셨지요.
이런 표현으로 요한 복음에서는 하느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요한 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나는 참포도나무요.’(요한 15,1)
바로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하나임을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빵을 먹는 사람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편하고 쉬운 것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영적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으려면,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 해야만 합니다.
굳은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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