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룡매 탐매기
삼월 초순 일요일이다. 봄이 오는 길목 한반도로 저기압이 건너오면서 이삼일 양이 제법 될 강수가 예보되었다. 낮에 우리 지역은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지 싶다. 주간 계획에 일요일은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우중 탐매를 나설 요량이었는데 우산까지 펼쳐 쓰지 않아도 될 듯하다. 내가 사는 생활권에서 다소 거리가 떨어진 김해 시내로 들어가 두 곳 학교 교정 매화를 완상할 참이다.
아침 식후 느긋하게 외동반림로를 따라 걸어 원이대로로 나갔다. 창원대학 앞에서 김해로 오가는 97번 버스를 타고 시내를 관통해 남산동 터미널을 지났다. 버스가 창원터널로 진입할 무렵 불모산 일대는 안개가 짙어 장유 대청계곡으로 넘어가서도 운무가 걷히지 않았다. 신도시 장유를 지나 김해 시내 들머리 내려 내외동 주택지 거리를 걸어 김해 생명과학고등학교 교정을 찾았다.
일제 강점기 1927년 구지봉 아래 터 잡아 개교했던 농업고등학교가 1978년 경운산 아래로 옮겨왔다. 해방을 맞아 일본인 교사들은 돌아간 뒤 신설 건설공고에 터를 양보하고 그곳으로 왔다. 현재 교정에서도 50년 연륜이 쌓인 수목 가운데 매실나무가 눈길을 끌었다. 낮게 전정 된 매실나무에서는 망울들이 맺어 꽃이 피려는 즈음인데 홍매 한 그루가 유난히도 일찍 꽃을 피웠다.
선홍색 꽃잎을 펼친 매화를 완상한 옆에는 백매가 꽃을 피우는데 어디선가 동박새가 날아와 먹이활동에 여념 없었다. 봄이 되니 깃이 푸르고 앙증맞게 몸집이 작은 귀여운 동박새였다. 반쯤 핀 매화 화심 수술에 묻은 꽃가루를 쪼는지, 미세하나마 꿀을 찾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좀체 곁을 주지 않는 동박새였는데 매화를 배경으로 삼아 폰 카메라 앵글에 담고 교정을 벗어났다.
내외동 주택지에서 김해 시내를 관통해 흐르는 해반천 따라 경전철은 교각이 세워져 부산 사상으로 향했다. 천변 냇바닥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 대성동고분박물관을 찾았다. 자리를 지키는 해설사로부터 가야사와 철기문화 이해의 폭을 넓힌 시간을 가졌다. 다양한 토기와 철기 유물에 이어 옥외 모형전시장과 유적지도 둘러봤다. 볕이 바른 언덕에는 아낙이 쑥을 캐는 모습도 보였다.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건설공고 교정으로 들어섰다. 휴일을 맞아 몇몇 탐매객이 찾아와 이제 막 꽃잎이 벙그는 매화를 사진에 담기도 했는데 아직 때가 일러 만개까지는 열흘은 더 지나야 할 듯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일제 강점기에 농업고등학교로 개교하면서 원예 실습용으로 식재된 매화여서 수령이 100년 정도 헤아려질 고매인데 교정 진입로 좌우 80여 그루가 자랐다.
김해건설공고 교정 매화를 흔히 ‘와룡매’라 이르는데 나무둥치가 비틀어지고 옹글어 용이 누워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연전 백발이 성성한 노인 몇이 교정을 찾아 와룡매를 둘러보고 눈물지었다고 했다. 그들은 해방 당시 그 학교 재직 일본인 교사들로 본국으로 돌아가 옛 추억이 떠올라 현장을 찾아 지난날 매실나무가 온전히 보존되어 고매로 자라 보람을 느끼고 감사해했단다.
와룡매는 앞으로 금관가야 사적지 복원사업으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 운명이다. 교정 곳곳에 고인돌도 방치되어 있다고 들었는데 비슷해 보인 바윗돌이 보였다. 수년 내 건설공고는 삼계동에 짓는 신축 교사로 옮겨가고 공원으로 조성될 부지에 포함되었다. 탐매에 나선 김해 시민에게 와룡매 운명을 어떻게 되느냐고 여쭈니 매실나무는 그대로 둔 채 공원으로 꾸며질 거라고 했다.
만개는 아닐지라도 와룡매 탐매를 마치고 동상동 재래시장을 찾아 명물 칼국수로 점심 끼니를 때웠다. 휴일을 맞은 저잣거리는 동남아 노동자들로 활기가 넘쳤다. 근처에 가까운 수로왕릉을 찾아 구지봉 설화 알에서 깬 주인공을 떠올렸다. 홍살문 바깥에는 김해 오일장을 맞아 채소와 과일을 펼쳐져 손님들이 오갔다. 한 젊은 사내가 파는 표고버섯을 한 봉지 사 창원행 버스를 탔다. 25.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