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본인이 서울에서 약 23년전에 공직을 수행하면서 겪었던 일화임
1, 글을 올리게 된 배경 및 요지
이글을 쓰는 필자는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경험도 없는데 오랜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이렇게 외국에 이주하여 한가한 시간을 보내게 되어 지나온 내인생을 뒤돌아보고 자서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33년 가까이 수사부서의 공직 생활속에서 직무상 겪었던 많은 일화중
사기피해를 당하여 삶을 포기하려는 어느 한 여인을 설득하여 살아갈수 있도록 취업을 시켜주고 자녀들을 4년간 부모역활을 대신해주므로 인하여 한가정이 일어설수 있었던 보람된일이 생각나서 글로 구성한 것이니 앞뒤가 맞지않고, 다소 지루하더라도 이점을 이해하시고 끝까지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내용
때는 1987년 늧은봄 필자가 수사부서의 수사간부로서 당직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32세쯤 보이는 미모의 여성이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수사기관으로 사기를 당하였다며 고소장을 들고와서,
수사관님 저는 남편도 없이 홀로 3남매의 어린 자식을 먹여 살리며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사기를 당하여 전재산을 날려 우리 가족은 길바닥에 나가야 할처지가 되어 죽고 싶다고 너무 슬
프게 울며 사기꾼을 잡아 달라고 하소연 하기에 즉시 직수 사건으로 접수를 받아 동 여인인 김ㅇㅇ당 32세로부터 피해자 진술조서를 작성하고 사기 피해 내용을 청취하였던 바,
본 피해자는 약 2년전 까가지만 해도 남편이 농협에 다니며 전북 장수에서 슬하에 2남1녀 의 자녀를 두고 그런대로 다복한 가정생활을 하던중, 남편 35세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자
농협에서 퇴직금조로 받은 기천만원등을 가지고 서울로 상경하여 영등포구 신길동에 삭월세 단칸방한칸을 세얻어 아들 중학생 2명, 딸 초등학생8세등과 같이 거주하면서, 신길5동 근처에 당시 유행하던 인삼찻집 (낯에는 차종류를 팔고 저녁엔 맥주,와 안주등을 판매하는 간이 업소임)을 열어 영업을 2년 가까이 해왔는데,
처음 1년간은 시골에서 올라와 영업경험도 없고,하여 현상유지 정도 해왔으나, 2년이 지나자 경험도 생기고, 단골손님도 생겼으며, 또한 피해자가 미모를 갗춘 32세의 청춘과부가 운영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남자손님들이 많이 찿게되어 저녁엔 매상도 그런대로 많이 오르고하여 휴학했던 아들도 중학에 보내고 조금씩 저축도 하게 되어 낯선 서울생활에 적은해 가고 있었는데
피해자의 업소에 단골손님으로 자주와서 매상도 많이 올려주며, 젊은 여자가 너무 안됐다며, 어려운일이 있으면 오빠같이 생각하고 서슴치말고 이야기하라며 위로해주어 서로 가깝게 된 자칭 건설업자인 이 ㅇ약 40대와 깊은 관계까지 맺게 되어 연인관계까지 발전하자,
동, 피의자인 이 ㅇㅇ이가
내가 빌라를 신축하려는데 공사 대금이 부족해서 그러니 돈을 빌려주면은 빌라를 신축하여 이를 분양하여 10부의 이자를 붙여서 줄테니 돈을 빌려 달라는 말로 피해자를 기망하여 이말을 진실로 믿은 피해자가 그동안 저축해 놓았던 2,000만원과 친척으로 부터 2,000만원까지 차용하여 도합 4,000만원을 피의자 이 ㅇㅇ에게 교부하였으나, 피의자는 수개월이 지나도록 공사도 하지않고 어디론지
행방을 감춰버려 친척에게 빌린돈을 변제하기 위하여 찻집까지 넘겨버려 우리 네식구 먹고 살길이 막막하고 길바닥에 나 앉게 생겼으니 자살하려고 한다며 통곡하며 울기에
필자도 그로부터 10여년 전에 처가 보증을 잘못서 주어 전재산 다 날러가 서울에서 길바닥에 나 앉게 되어 한강에 부부가 투신 자살하려 하였던 기억이 있고 그당시에도 겨우 전세방2칸 짜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던 때였음) 나도 전에 어려운일을 당하여 자살까지도 하려고 한강에 갔던 사람인데
아주머니가 죽으면 딸린 어린애들 (당시 아들 13세,12세, 딸 8세)은 고아가 되는데 누가 키우느냐
내가 사기치고 도망간자를 꼭붙잡아 법에 심판을 받게하고 피해변제도 받을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마음을 안심시켜놓고
그 피해자의 살던집에 한번 가보자 하여 방문해보니 반지하 단칸방 생활이 말이 아니기에 바로 관할 동사무소를 방문하여 동장을 만나 동장님이 근무하는 관내에 이렇게 불쌍한 사람이 있는데 왜 영세민에도 책정이 안되 있느냐, 목민관으로서 어려운 주민을 도와주라고 부탁하여 피해자를 영세민으로 책정해주어 구청에서 주는 영세민 헤택을 받도록 해주고
도망간 사기 피의자 이 ㅇㅇ이는 본건 말고도 다른 피해자들에게 몇건 더 사기를 친자로서 행방을 감추어버려 소재불명으로 전국에 지명수배 조치하고 그로부터 약 8개월후에 공주에서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 여러건의 사기사건으로 구속하여 징역1년 6월의 실형을 선고 받도록 하였으나, 가진돈이 한푼도 없어 피해자는 피해 변제를 받지 못하였음)
피해자가 직장을 구해야 네식구가 연명을 할수 있는데 식당 보조일을 하며 겨우 입에 풀칠하고 있어
당시 필자의 친척인 처제와 처삼촌등이 일본에 재일교포로서 일본 도꾜,요꼬하마 근처등에서 요식업소를 운영하고 있어, 한국인을 종업원으로 고용하고 있기에 일본은 한국보다 급료가 훨씬 비싸기
때문에, 여기에 종업원으로 가겠느냐,고 이야기 하였더니 꼭가고 싶은데 애들 때문에 갈수 없지 않느냐고 말하기에, 처와 장모님께, 이렇게 불쌍한 사람이 있는데 일본 처제가 운영하는 식당에 보내서 종업원으로 쓰면 안되겠느냐고 부탁하며, 애들은 그애들 집안 할머니를 매달 용돈을 조금씩 주고서 밥을해주며 같이 살며 보살피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던바,
저의 처와 장모님이 남을 도와준다는데 좋은 일이니 그 여자를 한번 만나보자고 하기에 저의 처와 장모님과 피해자를 만나도록 주선을 하였더니, 장모님과 처가 피해자를 만난뒤 저의 뜻이 그러하니이를 받아 들이겠다고 하여
한달내로 피해자의 여권을 만들어 처가 데리고 일본에가서 처제에게 피해자를 인계하고 나쁜 사기꾼에게 사기를 몽땅 당한 남편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니 종업원으로 데리고 일하며 동생처럼 도와주라고 부탁한뒤 귀국하여
어린애들 3명을 집안할머니에게 밥을해주고 양육하도록 하였으나, 아빠없이 사춘기를 제멋대로 몇년을 지낸 아들들이라 학교도 안가고, 밖으로 나돌고 하니 1주일에 2회 이상을 방문하여 학교가는지 밑반찬과 쌀등을 사주고 돌아오는등 처와 교대로 바쁜 와중에도 우리집하고 그집애들까지 챙겨야하고, 학교에서 선생님이 자주 결석을 하는등 하자 부모님을 모셔 오라면 저나, 또는 처가 부모대신 선생님을 뵈러 가야하는등 힘든 생활을 해오며,
남을 돕는다는 것이 좋은일 이지만 그당시 두집 애들을 관리 하고 그집 아들들이 집에도 자주 안들어오고 학교도 잘 안가고 사고나 뻥뻥치고 하니 상당히 힘든 생활이 었습니다
그래서 때론 왜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남의 자식까지 돌보아야 하는 힘든일을 해야하나 하는 생각마져 가지게 되었지만 우리가 애들 책임을 진다고 하였으니,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도리가 없는일 이라고 생각하고
모든것을 감수하며 바쁜 직장생활을 하는데, 때론 그집 9살배기 막내딸이 내가 근무하는 관공서로
찿아와 용돈을 달라고 하는것을 보고 주위에선 내가 밖에서 바람을 피워 낳은 늧동이로 착각을 하는 웃지못할 일도 있었답니다
일본에서 저의 친척이 피해자를 잘데리고 도와주어 피해자가 받는 월급을 저의 처가 송금하는 즉시통장에 입금해 두고 애들 식생활비와 학비를 주고 남는돈은 적금에 들어 돈을 늘려가 엄마가 없어도 차차 애들도 안정을 되찿아 가고 있을때 강서구 방화동에 영세민 임대아파트 건립이 되어 분양대상자 추첨을 하게 되었는데 제가 업무시간에 바빠서 도저히 빠질수 없고 더군다나 장마철이라 소낙비가가 세차게 내리는데 처에게 대신가서 추첨을 하도록하였는데,
다행히도 처가 추첨한것이 1순위로 추첨되었다며 내일같이 기뻐하는 처의 전화를 받고서 처에게 고생을 시켜 미안도하고 기쁘기도 하고 내일처럼 기뻐하는 처가 고맙기도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몇개월뒤에 방화동의 배정받은 임대아파트 18평형에 저희 부부가 그애들하고 할머니를 이사를 시킨뒤, 일본에서 약 4년만에 그 엄마가 약 1억원정도의 돈을 모아 귀국하여 보니 이제는 임대아파트지만 새아파트도 보금자리로 생겼지, 또한 매달 꼬박꼬박 적금을 들어 놓은돈이 통장에 몇천만원 들어 있는것을 합하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독산동에 2층짜리 단독 주택을 피해자가 구입하였습니다
그러던중 필자가 부평에 있는 연수원에 2개월간의 간부 연수 교육을 받으러 입소하여 전국에서 온 연수생중에서 서울에 있는 연수생이기에 그랬는지 학생대장과 내무반장등을 필자가 하게 되었는데
연수원의 생활은 숙식을 군대같이 연수원에서 하고 수요일오후 6시에 외박을 같다가 다음날 아침 08시까지 입소하고, 토요일에 외박을 나가 월요일 아침08시까지 입소해야만 하는 규정이 있어
지방 연수생들은 수요일엔 외박을 나가지 못하고 싫치만 어쩔수 없이 토요일까지 영내 생활을 하며 먹기 싫은 짠밥을 먹어야 할 실정이며, 직무 사례를 발표하게 되었는데, 필자는 수사부서에서 오랜 기간 근무하여 실제로 겪었던 일들이 많아서 직무사례를 도맡아 많이 발표를 하던중,
본건을 사레로 발표를 하며 남을 돕는다는 것이 꼭 금전적으로만 도와야 도움이 아니고, 더군다나 박봉의 월급으로 생활하는 공무원으로선 금전으로 돕는다는 것이 쉽지않으니,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선행을 할수 있다고 이야기 하였더니, 처음엔 믿지 않타가
일본에서 귀국하여 독산동에서 자가용차도 마련하여 살던 피해자 김ㅇㅇ이가 친구들하고 자가용차 두대로 갈비 20인분을 만들어 연수원을 방문하여 여러 연수생들에게 이를 나눠 주면서, 이분 부부로 인하여 자살하려던 우리가족이 이렇게 살게 되었다며, 생명의 은인이다, 평생잊지 못할분들이다, 라고 이야기하자 그때서야 제 말을 믿게 되었으며,
그후 저와 같이 내무반 생활을 하던 부산, 대구,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에서 온 연수생 10여명을 피해자 김ㅇㅇ이 두차례나 초대하여 음식점에서 갈비와 소주로 대접해주고, 노래방에까지 데려다가 회포를 풀게 한뒤 독산동 자신이 살던 2층집에서 취침시킨뒤 아침에 해장까지 사먹이고 부평연수원까지 2회에 걸쳐서 픽업해주는 것을 실감한 연수생들이
왜 신문이나, 방송등에 이를 PR하지 가만히 있었느냐, 라는등 하였으나 선행은 무엇을 바라거나 또는 목적을 두고 하면 그것이 진정한 선행이냐,며 우리 직장에도 보고 했으면 승진에 가 점도 받고 할테지만 내 마음이 허락치 않아 그것마져도 하지 않았습니다,
3, 결론
그뒤 연수원에서 제가 발표한 본건 사례가 모범 직무사례로 선정되어 매기의 연수생들이 이를 읽었다고 들었으며, 공직생활를 계속 하면서 되도록이면 약자편에서 조그만 일이라도 불쌍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생각으로 생활하였으며, 약자편에서 일을 업무를 처리해서 그런지 보람도 되고 또한 필자의 집안도 하는일마다 잘되고, 자녀들도 학원에 한번 보내지 않았는데도,
서초동에서 학교다니며 공부하여 이렇게 캐나다에 유학까지 보내 이곳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도 잡고 영주권,시민권까지 획득하여 부모를 초청하여 이곳에 와 살게 된것이 아닌가 하며,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그분 가족이 수년전부터 어디론가 지방으로 이주하여 소식을 알수가 없어 지금은 그 여인이 어느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을까? 궁금하다고 생각되어 이글을올리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몇차레 더 유사한 직무사례를 글로 계재하려 합니다,
너무 너절하고 지루한 글 끝까지 봐 주신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늘 행운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먼 캐나다 벤쿠버에서
첫댓글 참 좋은 일하셨습니다. 긴 글쓰시느라고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더욱이 자기의 과거 직장일[ 특히 수사에서의 일]을 밝히는 것도 보통 용기가 아니면 쉽지 않을 터이고 ... 잘 보고갑니다. 행복하세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는글 잘 읽었습니다.
선행을 베푸신 뒤끝이 좋아서~ 덩달아 저까지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자녀들이 잘되어 카나다에서 안락한 여생을 보내시는 님께 항상 행운이 함께하여,
건강 하시고 행복 하십시요^^
제가 다 흐믓합니다 그 여자 분과 그 자녀들도 지금 어디선가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었으면 좋겠군요
좋은 일 하셧네요,,대신 감사합니다....
세라비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멋진 곳에 사시는군요. 봉사는 아무나 하질 못하는데 ...존경스럽습니다. 더욱이 받는 분이 잘 되었으니 더 기쁘셨겠어요. 그분 아마 평생 잊지 못하고 감사 드릴겁니다. 한번씩 벤쿠버 소식 기대합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사모님께도 박수보내드립니다. 도움받은 그분도 은혜를 잊지 못하여 찾고 있을지 모르니까 이글을 통해 아름다운 인연의 끈이 다시한번 더 이루어 지시길 기원해 봅니다.
가슴을 물클하게하는 감동의 글 잘 읽었습니다 사모님의 심성이 착하시네요 사모님의 내조없이는 힘든일인데 그분도 은혜를 잊지 못하시겠지요 건안건필하소서.
아무나 할수 없는 일을 하셨군요..그 여인은 평생 세라비님을 잊지 못할거예요..벤쿠버에서 늘 행복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정말 감동 그자체 이네여. 어려운 사람을 돕는일이란 마음먹은것 처럼 쉬운일이 아닌데 참 보람있는 일을 하셨네여~존경스럽네여~~~~ 타국에서의 생활이 힘드시겠지만 행복한 나날이 되셨으면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정말 한가족을 살리신 큰 일을 하셧습니다. 두 분은 물론 자손 대대로 복받으실것입니다. 지금 그 여인이 어디선가 이글을 보앗으면 좋겠네요~~ ^*^
공직 생활을 하면서 남을 돕는다는것이 쉬운일은 아니지요 좋은일 하신 두분께 박수를 보냅니다.
고통을 당해 보셨기 때문에 그분의 아픔을 어루만져 복돋아 주셨는데....
그분도 고마움을 잃지는 않으셨을겁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 선행을 하고 있는지도 몰으죠..
세라비님 배픈다는겄은 자기에 마음이 배품을 받는기쁨이 더 클겄입니다....두분에 선행에 사랑을 드립니다..^^*;..
아내분과 장모님께서 대단하시네요 세라비님의 고운 마음도 참 좋네요 어느 하늘 아래서 아마 님께 고마워 하는 마음으로 잘 계실겁니다 그 아짐매는요^^*
하찬은 이 사람의 선행의 글에 대하여 이렇게 많은 아름다운 5060의 님들이 분에 넘치는 격려와,칭찬을 해주시니 그져 너무 감사하고 송그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베풀고 좋은일 하면 하늘도 무심치 않아 언젠가는 그 것이 내게로 돌아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님들의 가정과 사업장위에 하느님의 축복이 내리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자연이 아름다운 먼 캐나다 벤쿠버에서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세라비님 늘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훌흉하십니다 ㅉㅉㅉㅉㅉ 뿌리가 깊으니 열매가 실하죠 ㅉㅉㅉ
정말

감명깊게읽어습니다


정말
`힘든세상에

그래도살맛나는이야기 입니다


수고하셔습니다


1
그 여자분 가족들 연락이 닿지 않더라도 어디선가 많이 베풀며 현명하게 살아가리라 믿습니다. 훌륭하십니다.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오.
사랑을 몸소 실천하신 쌔라비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행복하세요.
그 분은 아마 쌔라비님을 기억하며 열심히 살고 있겠지요.
어쩌면 찾고 있을런지도 모르겠군요.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글이네요 세라비님이 존경스럽습니다 다만 그여인네 가족들과 지금껏 소식을 주고받으며 따스한 인간애를 나누며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네요
존경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멋진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도심에도 개나리가 활짝 피었습니다~ 현충원에도 그러하답니다*^^* 좋은 것으로 심으셨음을 바라보며 더불어 가득한 행복 한자락 누리고 돌아갑니다*^^*감사드립니다~ㅎㅎㅎ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격언이 쌔라비님을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한 나날 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