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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일부터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 존엄사를 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존엄사와 관련하여서는 1997.보라매 병원사건을 알면 벌써 제정되었어야 하는 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보라매 병원사건이란 뇌출혈로 입원한 가장이 식물인간이 되어 인공호흡기를 달고 병원에 몇 년 있게 되다가 보니 간병이나 병원비 때문에 가정이 파탄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견디다 못한 부인이 남편의 퇴원을 간청하게되자 의사와 병원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확약서를 받고 퇴원을 허락하였다.
그 남편을 집에 가서 임종하게 되었고 사망신고를 받고 그 사실을 안 구청에서 고발을 하여 2004년도에 대법원에서 부인과 병원의사들에게 살인죄 및 살인 방조죄로 판결하고 부인에게는 부작위(不作爲)에 의한 살인으로 징역 3년을, 담당의사는 징역 1년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던 사건이다.
그 때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흘러서 이제 존엄사가 합법화가 된 셈이다. 존엄사와 안락사에 대해서 대충 의미가 다르다는 것은 알겠지만 정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한데 존엄사(尊嚴死)나 안락사(安樂死)는 자연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인위적(人爲的)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같지만 죽음의 시간에 대한 개념이 서로 다르다.
존엄사는 무의미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고 안락사는 고통스런 시간은 단축하는 것이다.
존엄사는 더 살게 하지 않는 것이고 안락사는 빨리 죽게 하는 것이 다르다.
존엄사와 존엄사를 선택할 수 있는 대상을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 한다면 즉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자신의 결정이나 가족이 동의를 거쳐 더 이상의 연명 치료를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으로 반드시 임종과정에 있어야 하고 회생가능성이 없으며 치료를 한다고 하더라도 회복이 되지 않으며 급속이 증상이 악화가 되어 사망이 임박한 상태에 있다는 의학적 판단을 받은 환자만이 가능하다.
안락사는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는 불치의 환자에 대하여, 본인 또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고통이 적은 방법으로 생명을 단축하는 행위를 말하는데 아직 법으로 허용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안락사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존엄사처럼 허용할 수밖에 없는 때가 올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신으로부터 부여 된 것으로 간주하는 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는 존엄사나 안락사를 신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로 규정하고 죄악이라고 하지만 사실 존엄사나 안락사는 가장 합리적일 뿐 아니라 현실적이기도 하다.
생명의 문제에 대해서 어떤 대안도 없이 종교의 잣대만 들이대면 결국 더 큰 불합리만 초래할 뿐이다.
가장 웃기는 일 중의 하나가 아프리카에 에이즈가 창궐하여 에이즈를 예방하고자 세계보건기구에서 피임기구인 콘돔을 보내려고 하자 로마교황청에서 반대를 하였다.
피임기구는 비성서적이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현재 교황 바로 이전에 베테딕토 16세 때의 일로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더 황당한 일은 천연두 등 예방주사를 반대한 일이다. 천연두에 걸려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나....
지금도 수혈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거나 병원의 치료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는데 이런 사람들은 생명은 신이 주관하기 때문에 인간이 손을 댈 수가 없다는 사람들이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는 말은 정말로 인간의 생명이 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은 귀한 것이니 귀하게 여기라는 말일 것이다.
만약 정말로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을 하나님이 주관(主管)한다면 하나님은 욕을 바가지로 먹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태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거나 태어나면 필연적으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면 인간을 태어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인간들의 부모도 자식들을 낳을 때는 그 자식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준비하고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낳아서 기르는데 하나님이라는 분이 태어나면 곧바로 죽게 된다면 인간의 부모만도 못한 신이 아닌가?
신약성서 마태복음13에는 농부가 씨를 뿌리는 비유가 나오는데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다 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비유를 생명의 태어남에 비유를 한다면 새가 먹은 것과 같은 씨와 같은 생명은 태어나자 마자 죽은 생명이라고 할 수 있고, 모래밭에 떨어져서 싹은 났으나 햇볕에 말라 죽은 씨와 같은 생명는 아프리카 같이 태어는 났으나 어려서 굶어죽거나 병으로 죽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고, 시시덤불 속에 떨어져 그늘에서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씨와 같은 생명은 주변의 환경이 정상적으로 성장을 할 수 없는 그런 곳에 태어난 생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안정돤 환경에서 태어나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생명의 태어남과 죽음이 정말 신에게 있다면 모든 생명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환경적으로 안정되고 안전한 곳에 태어나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만약 정말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그리고 인간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어떤 농부가 씨를 아무렇게나 뿌리는 농부가 있다면 그 농부는 미친 농부일 것이다.
농부가 씨를 뿌릴 때는 수확을 염두에 두고 뿌리는 것이고 그 씨앗이 싹이 잘 트고 잘 자라서 많은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
하나님도 인간을 태어나게 했다면 그 인간들이 잘 자라서 시집가고 장가가서 아이들도 낳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보고 싶을 것이 아닌가?
만약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런 하나님은 인간에게 필요가 없는 하나님일 것이다.
존엄사를 보는 관점이 소위 골수 종교인들은 이런 법이 제정되는 것 자체가 못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실제 삶은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추세에 맞추어서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현실적인 상황에서는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에 말과 행동을 다르게 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인명은 재천(在天)인가 재인(在人)인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신의 뜻대로만인가, 아니면 인간의 선택도 가능한 것인가?
인간이 태어남에 있어서는 하나님은 사실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인간의 선택(계획)에 의해서 태어나고 생명이 저절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죽는 것도 인간이 선택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종교의 교리가 어떻든 결국 인간은 현실적인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존엄사는 당연히 시비나 찬반을 할 건덕지가 못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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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2008년도에 연대병원에서 75세 노모의 존엄사 신청을 법원이 기각했다는 기사를 보면서 써서 인터넷에 올렸던 글이다.
존엄사 허용하는 것이 맞다.
어제 방송에서 식물인간 상태에 있는 75세가 된 노모(老母)의 인공호흡기를 떼 내어서 품위 있게 숨질 수 있게 해달라고 병원에 가족이 낸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기각했다고 한다.
의식불명이 된 환자는 지난달 2월에 폐종양 조직검사를 받다가 의식불명에 빠져서 다섯 달 째 중환자실에 있지만 5개월 동안 식물인간 상태였다고 한다.
이 기사를 보면서 각자의 가치관이나 종교관에 따라 다르겠지만 남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이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 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가족과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되지 않을까?
식물인간이나 뇌사상태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고 거기에다 경제적인 부담까지 가중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의 가족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성적으로는 누구나 인공호흡기를 떼야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행위가 신의 뜻을 거스른다는 두려움과 당사자에게 미안한 감정 때문에 막상 그렇게 하는 것은 저어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리 생명에 대한 문제라고 하더라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가치관의 변화 때문이다.
IMF로 인한 경제난이 사람들의 생각 곧 가치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기 시작했으며 지금까지의 가치관이 변화되면서 생명에 관한 가치관도 변화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종교인들이 아무리 생명이 하나님에게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그 생명을 거두어가지 못한다고 주장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주장은 헛된 메아리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기사에서 보는 것처럼 법에서도 아직도 변화된 사람의 생각을 수용하려고 하지 않지만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안에 안락사나 존엄사 등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판결을 하는 판사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판결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현실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해결방법이라는 것을 알지만 어떤 사유로도 생존권의 침해는 불가능하다는 원칙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원칙도 현실적으로 지킬 수 없는 원칙이거나 처음부터 그 원칙이 잘 못되었다면 당연히 고쳐져야 할 것이다. 그리 먼 시간이 지나서 고쳐지겠지만.......
한 사람 때문에 가정이 파탄이 날 정도로 다른 가족이 희생되는 것은 아픈 당사지도 원치 않을 것이며 어떤 원칙을 거론한다고 하더라도 설득력이 있을 수 없다.
법이 존재하는 기본적인 목적은 개인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개인이 속한 사회나 국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면, 개인을 위한 목적과 전체를 위한 목적이 상충될 때는 개인을 위한 목적이 양보되어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그것이 순리이다.
존엄사, 안락사, 자살, 등은 생의 마감을 신의 뜻이 아닌 인간에 의해서 결정한다는 것에서는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며, 존엄사 안락사 등은 타인에 의해서 자살은 본인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만 다르다.
안락사든 존엄사든 자살이든 그 죽음이 당사자나 다른 사람들에게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허용되어야 하며 심지어는 자살이라고 하더라도 비난할 필요도 없으며 죄악시 할 필요도 없다.
2004년도 9월에 김상옥 시조시인이나 2008년 5월 한나라당 대표이던 강재섭씨의 부친이 스스로 단식으로 죽음을 맞이하였으나 그분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그 분들은 고령으로 몸이 불편하자 더 오래 사는 것은 자식들에게 불편할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곡기를 끊고 며칠 만에 본인의 소원을 성취하였다.
건강하지 않은 노인들이 단식을 하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것이니 자식들이 말렸을 것이나 본인의 의지대로 자신의 생을 자신이 결정해 버린 것이다.
위 두 분의 경우에 보라매 병원 판례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가족들은 자살방조죄를 범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보라매 병원의 경우에는 구청에서 그 사실을 알고 고발하였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으나 이 분들의 내용도 고발은 없었지만 신문에 기사화되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고발만 하면 단식을 말리지 못한 가족들은 자살방조죄로 꼼짝없이 기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자살은 분명히 비극적인 방법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에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을 수가 있다.
두 노인의 경우도 안타까운 경우의 하나일 것이고 자신이 희생되었을 때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다든가 가족이 안전해 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희생하게 된다.
정원 초과된 배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물로 스스로 뛰어내리는 것이나, 전쟁에 참여하는 것, 등 반드시 죽을 것을 알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으니 한자 그대로 하면 자살(自殺)이 된다.
우리나라가 1년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17,000명 정도가 된다고 하면 그 중에 노인들이 절반이 넘는다고 한다.
노인들 자살의 대부분은 생활고나 병고 때문으로 자신으로 인해서 자식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결국 자식들을 위해서 부모인 자신이 희생하는 것으로 누구를 위하여의 그 누군가가 자식일 뿐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한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사람들은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사실은 자살의 한 종류임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자살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자신을 희생한 사람의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한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자식을 위해서 죽는 요즈음 노인들은 어떻게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
사람이 살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경우를 만나는 것은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불행한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환경을 스스로가 만들지 않았다면 어떤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고 그런 환경을 만든 사람들이나 사회 국가 더 나아가서는 신(神)이 비난 받아야 할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 인간이 생명에 대해서 손을 댈 수 없다는 맹목적인 논리 때문에 천연두 예방이라든가 질병을 예방하는 행위나 생명이 연장되는 의료행위 자체를 죄악이라고 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식물인간이나 뇌사자의 안락사 등, 노인들이 단식 등을 통해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종교적인 입장에만 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라면 천연두 예방은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라고 비난한 그들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는 인간의 의지대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이성과 감성으로 인간들의 의지대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이성과 지성으로 판단하여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여 선택되어지는 죽음이라면 그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생명이 신으로부터 출발되었다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과 이성도 신으로부터 출발되었기 때문에 이성과 지성이 결정한 것은 신이 결정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신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니......
생명을 경시하여 스스로의 생명을 버리거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함부로 상하게 하는 것은 신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하고 선택되어지는 죽음까지에 대해서 죄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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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수명이 길어지는 문제로 지구호가 침몰하기 시작하면 그 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
첨부파일
신현준 (08-07-16 12:26) 지금은 금지하지만 안락사나 존엄사를 당연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첫댓글 삶을 살아가면서 선택의 순간에 어떻게 결정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원칙을 두고 메뉴얼화 해 두면 결정장애를 겪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존엄사 지금은 생각해 볼 때ㅍㅍ
전 안락사 찬성하는 한 사람 임당
산소 호흡기에 의존해 당사자는 아무것도 모른체
숨만 쉬는 상태 고통은 본인만이 아는 것
전 나이들어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은
저 손으로 생명연장 하지 않겠다고 서명 할 것임
생명 연장하기 위에서 기도 절개하지 말고
마지막 순간 전기 충격기 사용하지 말라고
85세 이상 입원해 대 수술 받게 된다몬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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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기도 절개해 중환자실 1년 치료비용
1억이라고 들었심더
비보험 적용인지 보험 적용인지는 자세한 설명이 없어서
잘 모르겠고 하루 중환자식 비용부담 60만원에서 80만원이라고
새생명으로 태어 난다몬 집이라도 팔아서 아니 땡 빚이라도
얻어서 하나 뿐인 생명을 살려야지예
그러나 90세가 다 되어서 1년이 될지 또 얼마나 연장 될지도
모르는 세월을
년 1억이라는 큰 돈
(있는 사람이야 부담 없겠지만 민초는 허리 휩니더)
산 사람은 살아야지예 현실적으로 남은 사람도
배려해 주는 마지막 가는 길이몬 더욱 좋겠지예
세상 내 맘대루 뜻대루 안되지만서도예
오랫만에 오신 뿅망치님,
글 올리신 것은
대단히 고마운 일이나,
글에 색깔을 넣지 않음을
님은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글의 색을 흑색으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볼 글 잘 읽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다른데 올렸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그렇군요
집에 가는대로 바꿀게요
@뿅망치 감사합니다.
공감가는 글 잘 보았습니다^^
시의적절한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무엇인지
이제라도 진지하게 생각할 때인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해 미리 생각해둔 사람은 현자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