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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을 보려면 숲 밖에서 봐야 온전한 숲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같은 이유로 산을 보려면 산 아래서 산을 둘러보는 게 오히려 나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산의 외양을 확실하게 관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여러 가지 이유 중 한 이유입니다.
주중에 계속 비가 내리다 보니 지리산 둘레길 스케쥴을 잡기가 어렵습니다.
금주 예보를 봅니다.
월요일 비.
화요일 흐림.
수요일 비.
목요일 흐림.
정말 막막하기만 합니다.
주말엔 다른 산행이 이미 예약이 되어 있는데....
어제 저녁 심기를 어지럽히는 일이 생겨 오늘 일정을 포기할 생각도 해봤지만 빨리 둘레길을 마무리해야 하기에 길을 나섭니다.
지리산 둘레길 노선은 크게 본선本線과 지선支線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선本線이란 말 그대로 꼬리에 꼬리를 이어가는 주 루트라는 것이겠고, 지선支線이라는 것은 본선에서 벗어나 얼마간의 거리를 갔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그런 곳입니다.
그러니 지선은 접근의 편의성을 고려한 것 가령 하동읍 ~ 서당마을 구간, 혹은 본선으로 루트를 잡기에는 거의 산행 수준이어서 일반인들에게는 부담이 될 것 같은 곳 가령 목아재 ~ 당재 구간 같은 곳 등을 고려하여 그냥 놓치기에는 아까운 곳들을 잡았을 겁니다.
오늘은 지난 구간에 이어 인월 ~ 장항 ~ 수철리 구간을 고려합니다.
어차피 이어가는 둘레길이라면 그게 맞을 것도 같은데 저로서는 얼마전 진행한 남부 지리의 여운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습니다.
머리속에 남아 있는 그 울림.
그 울림을 놓치고 싶지 않군요.
그렇다면 그곳으로 가야죠.
확실히 남부지리의 중심은 아무래도 악양 부근입니다.
하지만 그 부근은 교통편이 영 안 좋습니다.
그렇다면 지난 번 화엄사 ~ 차일봉 ~ 종석대 ~ 노고단 ~ 형제봉 ~ 월령봉 ~ 배틀재 구간을 진행한 적이 있으니 눈에 익은 배틀재 부근의 오미마을이 떠오릅니다.
그 오미마을은 지리산 둘레길 16구간인 송정 ~ 오미 구간의 날머리가 되는 곳이니, 그 구간에 이은 제17구간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 17구간이 조금 재미있습니다.
다른 곳과는 달리 두 구간의 시작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17구간에서는 오미마을에서 시작하여 구례읍을 거쳐 난동마을로 진행하는 약 18.9km의 시작점이기도 하고, 황전마을 ~ 한수마을을 거쳐 방광마을로 진행하는 약 12km의 시발점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두 루트는 난동마을에서 만나게 되니 결국 이 두 구간을 잇는 곳이 바로 난동마을 ~ 방광마을 사이의 약 2.7km구간이 되겠군요.
이 두 루트 중 어느 루트가 주 루트로 17구간이라는 이름을 가져야 할까요?
이 길을 기획한 사단법인 숲길이 둘레길을 소개할 때 오미 ~ 난동 구간을 먼저 올렸으며 그 구간에 '구례안내센터'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아무래도 이 구간을 제17구간으로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오미 ~ 방광 구간은 제17-1 구간으로 보아 이 구간만큼은 환종주로 이어가는 것도 가능해 보입니다.
구례읍이 바로 옆에 있다는 교통의 편의성 때문이죠.
물론 그러고 나면 다음 구간인 난동마을 ~ 구리재 ~ 탑동마을로 진행하여 산동으로 가면 당일치기로 주천까지 이어갈 수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오늘은 워밍업으로 이 17구간과 17-1구간을 잇는 환종주 루트로 진행하면 되겠습니다.
좌측으로는 계족산을 시작으로 사성암의 오산 , 구례의 진산인 봉성산, 서시지맥을 따르는 산성산과 요강바위산, 서시지맥의 천마산과 견두산, 노고단에서 흘러내린 지초봉과 간미봉 그리고 백두대간의 종석대와 노고단, 거기서 흘러내린 형제봉과 월령봉 등이 오늘의 주 타깃이 될 겁니다.
산줄기로는 백두대간과 호남정맥 그리고 서시(견두)지맥 등이 주主이겠고 거기서 가지를 치는 단맥들의 부副일 겁니다.
그들이 어떤 모습으로 저에게 다가올까요?
그들과 만나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것 같습니다.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오미마을로 갑니다.
지도 #1
08:30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지리 103.
운조루의 주소입니다.
이 운조루가 아무래도 오미마을의 대표적인 명소일 겁니다.
이하 갈색 글씨는 앞으로 발간 될 '현오와 걷는 지리산 둘레길' 초고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운조루는 1776년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류이주가 지은 55칸 목조주택으로 중요민속자료 제8호다. 이 운조루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곳이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한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즉 시쳇말로 ‘가진 자의 의무’를 보여준 곳이라는 것이다.
초기 로마 사회는 물론 영국이나 미국의 고위층 자녀들도 조국에 전쟁이 일어나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솔선수범해 전장으로 달려 나갔다. 이로 인한 전쟁의 희생으로 귀족이 크게 줄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우리에게도 이와 유사한 의무와 나눔의 정신을 실천한 부자가 있었다. 타인능해他人能解 즉 ‘타인도 열게 하여 주위에 굶주린 사람이 없게 하라’는 글귀는 이 운조루의 쌀독에 적힌 글이다. 류이주 선생은 쌀독 아래에 구멍을 내고 마개에 이런 글귀를 써 놓았던 것이다. 가난한 이웃들이 와서 필요한 만큼 쌀을 가져가 먹을거리를 해결하라는 뜻이다. 이는 선생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과 궤를 같이하는 나눔의 삶 곧 베풂의 정신을 알려주는 예다.
대문과 행랑채 남쪽 마당 건너편에 연당이 있는데 원래는 약200평 규모였으나 지금은 그 일부만 남아있다. 강 건너 오봉산174.8m과 삼태봉207.6m이 화산이어서 화기를 막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운조루 대문 앞의 연당蓮塘.
이 연당이 원래 약 200평 규모였다고 하니 상당한 규모였군요.
지금 이 모습이 그 중 일부라고 합니다.
이 연당을 만든 이유가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풍수지리라!
산세나 지세 그리고 수세 같은 자연을 판단하여 이를 인간의 길흉화복에 연결시키는 학문이 바로 풍수지리 아닙니까?
우리의 전통 지리학입니다.
이 풍수지리에서 땅을 해석하는 방법 중 금환락지형이라는 게 있습니다.
한자로 쓰면 金環落地일 것이니 곧 이 일대의 땅들이 여인들이 쓰는 가락지 그 중에서도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진 형국이라는 것입니다.
예로부터 가락지는 여인네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정표로서 아기를 낳을 때나 성행위를 할 때만 뻬놓는 것이니 곧 '출산', '생산'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그러니 결국 이 일대가 풍요와 부귀가 마를 날이 없다는 곳이라는 겁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명당이 바로 이 운조루가 있는 곳인데 다만 맞은 편 섬진강 건너에 있는 오봉산과 삼태봉이 화산火山이어서 이 화기를 막기 위하여 연당을 만들게 된 것이라는군요.
그런 심오한 뜻이 있었습니다.
한 번 들어가 볼까요?
너무 이른 시간이라 남의 집 들어가기가 좀 뭐합니다만 제가 시간이 없습니다.
좌측으로 표석과 우측으로 안내문이 세워져 있고....
잠깐 슬쩍 보고 나옵니다.
오미자가 연상이 될 법한 이 오미마을은 이전에는 오동마을이었습니다.
마을의 안산인 오봉산이 기묘하며 물이 좋고 땅도 좋아 오미리五美里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둘레길 이정목을 봅니다.
주지하다시피 검은색은 온 방향 그리고 빨간색은 진행하는 갈 방향을 나타냅니다.
그러니 내가 어느 방향으로 진행을 하든 한 색깔을 선택했으면 계속 그 색깔을 따라가야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빨간색의 화살표가 두 곳을 가리킵니다.
지리 둘레길 중 이곳만큼은 두 갈레로 길이 나뉜다고 했었죠?
저는 17구간 먼저 하기로 합니다.
그 길은 이순신 장군의 '백의종군 길'과도 부분적으로 겹칩니다.
무능하기로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선조의 교서로 1597년 음력 2월 26일 이순신은 한산도 통제영에서 긴급체포 됩니다.
당시 선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굶주림에 떨고 있었는데 나라를 위하여 하루도 쉬지 못하는 이순신에게 "한산도의 장수는 편안히 누워서 무얼 하고 있는가?"라고 어전 회의에서 말했다고 하는군요.
당시 죄목은 ①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했다고 하는 공문서 위조 및 동행사 죄와 ②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은 국군통수권자에 대한 명령불복종, 직무유기 등의 죄였다고 합니다.
선조는 이순신을 사형시키려고 작심을 하였으나 그 죄를 입증하지 못해 단 한 차례 고문을 한 다음 결국 같은 해 음력 4월 1일 방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고.....
그래서 출옥을 한 이순신은 '백의종군' 즉 아무런 직위나 계급도 없이 홀로 걷거나 말을 타고 남쪽길로 향했습니다.
이때 이순신이 걸은 길이 '백의종군 길'이라는 것이죠.
의義 · 경敬 등 실천을 중시한 남명 조식의 제자 중 이순신과 관련한 인물이 정탁鄭琢(1526~1605)이다. 당시 권율의 장계로 이순신이 체포되었고 이순신의 죄목은 ①군공을 날조애서 임금을 기만했다고 하는 공문서 위조 및 동행사 죄와 ②가토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출격 명령에 응하지 않은 명령불복종, 직무유기 죄 등이었다. 당시 선조는 이순신을 사형시키기로 작심하였었다.
당시 판중추부사로 있던 정탁은 이순신을 구명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렸다. 조정 내부에서 이순신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이순신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조정에는 없었다는 얘기다. 류성룡만이 이순신의 인물됨과 무죄를 믿고 있었으나 그도 정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변론은 삼갔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정탁의 상소만이 유일한 이순신의 구명을 위한 공론화 된 의견이었던 셈이다. 어쨌든 정탁의 상소로 이순신은 단 한 차례 고문을 당한 다음 결국 같은 해 음력 4월 1일 출옥을 해 '백의종군' 길에 오르게 된다.
의금부가 있던 종로3가를 시작으로 과천 ~ 안양 ~ 의왕 ~ 수원 ~ 평택을 지나 남원 ~ 운봉 ~ 구례 ~ 순천 ~ 합천 ~ 진주에 이르는 640km의 긴 여정이었습니다.
그 길을 걷고는 삼군통제사로 재임명되어 수군을 재건하기 위하여 부임지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자, 그럼 마을을 나서면서 주변 지형을 봅니다.
맞은 편에 19번 도로와 섬진강이 있고 그 건너편에 계족산이 보입니다.
계족산 앞으로 낮은 줄기 하나가 가로로 누워 있는데 육안으로도 정자 하나가 보이는군요.
아직 오봉산은 보이지않고....
그 계족산 줄기가 구례군 문척면과 간절면의 면계 역할을 하니 좌측 골짜기 마을이 바로 간전면 소재지인 간문리입니다.
19번 도로 건너 앞에 보이는 마을은 조금 이따 진행할 토지면 용두리의 원내마을.
오미리 좌측으로 멀리 지리산 왕시루봉이 보이니 그 사이 골짜기로 들어가면 문수리로 들어가는 길이 보이겠고 토지천이 흐를 겁니다.
그리고 그 토지천의 끝은 노고단의 형제봉 능선과 반야봉에서 흘러내린 왕시루봉 능선의 골짜기가 될 것입니다.
왕시루봉은 노고단이나 반야봉과 맞물려 문수사와 연결이 되겠죠.
문수보살 때문입니다.
이 내용과 계족산 얘기는 다음에 송정 ~ 오미 구간을 할 때 자세히 살펴볼 것이니 오늘은 패스!
폰의 광각렌즈로 잡았습니다.
문수리로 들어가는 능선 넘어 왕시루봉의 봉애산 줄기니 그 너머가 피아골로 들어가는 루트겠습니다.
섬진강이 우측 줄기 앞에서 우측으로 휘어나가니 맨 뒤가 화개장터로 내려오는 날라리봉(삼도봉) ~ 불무장등 ~ 황장산 줄기가 힘이 있습니다.
그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면 계족산 전위봉과 그 우측이 730.7봉에서 우측으로 가지를 친 줄기들입니다.
간전농공단지 ~ 계족산 ~ 삼선재 ~ 삽재 ~ 천황봉 ~ 둥지리봉 ~ 오산을 잇는 약 22km의 종주 코스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루트는 앞 줄기에 가려서 보이지않고....
그 우측으로 중산리 들어가는 골짜기니,
사진의 맨끝으로 오산이 보입니다.
우측부터 오산, 매봉, 자래봉, 솔봉 그리고 둥지리봉이겠군요.
그리고 그 오산 우측으로 섬진강이 흐를 테니 그 우측에 보이는 봉우리가 봉두산753.8m이겠고 그 산 뒤에 그 유명한 태안사가 있습니다.
태안사는 신라 선문9산 가운데 하나인 동리산파의 중심 사찰이고 그 개산조가 혜철국사입니다.
혜철의 제자가 바로 옥룡기의 저자이자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원조격인 도선 즉 연기조사 아닙니까?
옥룡기의 중요성은 우리 백두대간과 관련된 얘기에서 비롯됩니다.
즉 "우리나라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로 한 땅인지라..."라는 구절 때문입니다.
한편 연기조사라고 하면 세 분이 거론됩니다.
도선은 연기烟起라는 한자를 쓰는 사람이고 화엄사, 연곡사, 법계사를 창건한 緣起 혹은 鷰起조사와는 다릅니다.
뒤에 자세히 보죠.
08:42
주위를 둘러보고 사진찍고 하느라 13분이 지났건만 100m를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곡전재도 정통 가옥이고 사람도 살 테니 이른 아침이라 겉모습만 보고 그냥 통과합니다.
바로 앞에 이 오미마을의 진산인 오봉산174.8m과 삼태산207.6m이 보이는군요.
삼태산에는 정자가 보이고...
그리고 멀리 오산오 능선의 끝 둥지리봉690.2m이 보이는군요.
08:46
이제 겨우 19번 도로로 나갑니다.
길을 건너 정류장에서 좌틀하여,
문수사 간판을 따라 마을 길로 들어섭니다.
대나무 숲에서 좌틀하여,
원내마을로 들어섭니다.
덩치 큰 개소리를 들으며 약간 위축이 되긴 합니다.
우측 고가古家가 눈길을 끄는군요.
마을을 벗어나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진행합니다.
정면으로 오봉산과 우측 오산을 보면서 걷게 되는군요.
마을을 돌아보니 좌측으로는 월령산 전위봉이, 우측으로는 왕시루봉 능선이 보이는군요.
중앙 멀리 삼신산까지 보이는군요.
조금 당겨봅니다.
저 능선이 좌측으로는 쌍계사로, 우측으로는 지리남부능선과 횡천(화개)지맥으로 흐르겠죠.
하늘은 찌푸둥하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조건입니다.
계속 콘크리트 도로를 따릅니다.
중앙 멀리 서시(견두)지맥이 병풍처럼 구례를 둘러싸고 있고,
중앙 형제봉 능선 상 우측으로 월령봉과 좌측 쫑긋 선 형제봉이 보이지만 반야봉이나 노고단을 보려는 욕심은 아직 이릅니다.
뚝방으로 올라섭니다.
아!
섬진강입니다.
이 섬진강을 남원에서는 순자강鶉子江, 곡성에서는 압록강鴨綠江, 구례에서는 잔수강潺水江, 광양에서는 섬진강蟾津江으로 불리는 등 그 이름도 다양합니다.
이 구례에서 잔수강이라 부르게 된 까닭은 좌측 오산의 사성암과 관련지어야 합니다.
원 이름은 오산암鰲山庵이었다는 사성암은 원효, 의상, 도선, 진각 등 4인의 고승이 수행을 한 수도처라 하여 사성암四聖庵이라고 합니다.
통일신라 후기 이래 고려까지 고승들의 참선을 위한 수도처였다고 전해집니다.
거기에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불도를 닦고 있을 때 어머니가 병환으로 눕게되자 효성이 지극한 원효대사는 온갖 약을 다 구해드렸지만 별 차도가 없자 밤낮으로 부처님께 불공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부처님이 나오고, 그 부처님은 원효에게 “천국에 있는 복숭아를 구해드려야 한다.”고 하자 원효는 그길로 연곡사에서 수행을 하고 있는 동생 혜공대사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고 혜공은 천도를 구해와 결국 어머니의 병환을 낫게 해드렸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그후 섬진강의 물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기가 어렵자 “무슨 물소리가 이렇게 시끄럽냐.”고 하자 부처님께 불공을 올려 불력으로 물소리를 잔잔하게 만들어서 그때부터 섬진강을 잔수潺水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섬진강 하류 방향.
섬진강을 따라 걷습니다.
대나무 숲 뒤로 오산 능선을 봅니다.
뒤를 돌아봅니다.
중앙으로 형제봉 능선 그러니까 지리남부능선이 높게 솟아있군요.
뚝방의 끝은 무명 정자가 있는 수달보호구역입니다.
둘레길은 이렇게 멋진 데크로 만들어져 있고,
너무 운치가 있군요.
강과 풀과 나무.....
09:34
용호정을 지키는 이는 없고 개쉬키 한 마리만이 요란하게 짖어 대는군요.
용호정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에 나라를 빼았긴 울분을 달래기 위해 뜻있는 분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지었다고 합니다.
용호정 옆을 지나,
바로 좌틀하여 운치 있는 숲길로 진행합니다.
그러면 이 표지띠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구례군에서 주관하는 옥스팜트레일워커OXFAM TRAIL WALKER 길 안내 표지띠입니다.
한 팀이 기부 펀딩 50만원을 내야 참가할 수 있구요.
그리고 4명이 한 조가 되어 함께 골인해야 하는게 동계스포츠 팀추월 스케이팅 같은 거로군요.
인터넷에서 퍼왔습니다.
길을 내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산천이 섬진강으로 흘러드는 수로입니다.
이 마산천의 발원지가 바로 화엄사골의 코재 부근입니다.
그러니까 백두대간에서 노고단 부근에서 형제봉 능선과 차일봉 능선이 갈라질 때 그 사이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바로 이 마산천이라는 것이죠.
이 마산천이 아주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즉 '물은 산을 건너지 못한다.'는 소위 '산자분수령의 제1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죠.
바로 무넹기 때문입니다.
즉 이 물에는 노고단에서 발원하여 달궁계곡을 지나는 만수천이 되어야 할 물이 상당 부분 이리로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무넹기?
그런데 갑자기 장감독이 큰소리를 친다.
“형 지금 이 길이 백두대간 능선이잖아! 그런데 왜 이 물은 능선을 따라 흐르다 왜 우측 만수천 쪽으로 안 가고 화엄사 쪽으로 가는 거야! 거긴 섬진강으로 가는 방향이잖아.”
그렇다. 다리를 건너 성삼재로 향하다보면 코재 바로 전에 왼쪽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흐르는 물줄기가 있다. 이 물은 분명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그리고 이 물은 장감독이 지적하듯 만수천으로 가야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산자분수령의 예외란 말인가?
미리 얘기하자면 이 물은 노고단 물이 맞고 이 수로는 인공수로이다. 예전 화엄사 부근 그러니까 구례의 들에 가뭄으로 인해 물이 부족할 때가 있었다. 그때 이 노고단의 풍부한 물을 화엄사 쪽으로 넘겨주기 위해 인공 수로 하나를 만들었다 그게 바로 이 수로이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물을 넘겨주었다.’고 하여 무넹기이다. 그리고 이 물은 낙동강이 아닌 족보에도 없는 섬진강으로 가게 된다. 따라서 이는 인공수로이므로 산자분수령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다.
머쓱해 하는 장감독이지만 난 속으로 생각한다. ‘산경표의 기본 원리는 알아가는구나. 그래. 산자분수령만 알아도 반은 안 것이네.’
- 졸저 '현오와 걷는 백두대간' 70쪽
구례읍이 눈에 들어오면서 읍내 중앙에 비록 낮기는 하지만 구례의 진산인 봉성산165.6m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우측에서 물줄기 하나가 합류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서시천입니다.
아주 중요한 물줄기죠.
이 물줄기의 시작은 지리산 만복대입니다.
서시천은 특히 남부 지리산에 있어서는 제일 중요한 물줄기라 할 수 있죠.
서시천의 발원지를 봅니다.
백두대간이 백두산을 떠나 지리산으로 들어올 때 만복대에서 우측 즉 서쪽으로 가지 줄기를 하나 내게 됩니다.
그 때 백두대간과 이 가지 줄기 사이에서 물줄기 하나가 발원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그 물줄기인 서시천입니다.
한 산줄기(A)에서 다른 산줄기(B) 하나가 가지 칠 때 그 사이에서는 반드시 물줄기(B') 하나가 발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고 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 산줄기B는 반드시 물줄기B'와 생사고락을 같이 해야만 하는 운명입니다.
부부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그 산줄기B는 물줄기B'가 자신보다 상위등급의 물줄기인 A'와 만나는 곳에서 그 맥을 다하게 됩니다.
이때 물줄기B'가 자신보다 상위 등급의 물줄기A'와 만나는 곳을 합수점 혹은 두물머리라고 합니다.
정확한 용어는 아니지만 보통 산꾼들은 이를 '산자분수령의 제2법칙'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곧 간幹은 줄기이고 맥脈은 줄기에서 흘러나간 가지 줄기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경우 산줄기A는 백두대간幹이고 물줄기A'는 섬진강이며, 산줄기B는 도상거리 30km가 넘기 때문에 지맥脈이 되고 물줄기B'는 서시천입니다.
산줄기B인 지맥 이름 짓기가 문제입니다.
이럴 경우 박성태 선생님은 신산경표에서 '그 지맥에서 가장 높거나 유명한 산에서 이름을 가져온다.'고 하여 이 지맥의 최고봉인 견두산의 이름을 따 견두지맥이라 불렀습니다.
이 신산경표의 저자 박성태 선생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위대한 민간지리학자 임에 틀림없으며 이 책의 출간은 대단한 업적이었습니다.
다만 산경을 중시한 나머지 '합수점에서 반드시 지맥이 맥을 다하여야 한다.'는 원칙에 소홀했다는 아쉬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난점을 극복하고자 나온 것이 '대한산경표'의 이론으로 이는 물줄기를 중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경우 위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시천과 섬진강이 만나는 합수점에서 맥을 다하는 것으로 지맥의 마루금을 긋고, 그 이름도 물줄기의 이름을 따 '서시지맥'으로 부릅니다.
마루금이라는 용어가 낯설으신가요?
마루금의 올바른 뜻은?
여기서 팁 하나!
이 글을 읽다보면 마루금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대간길을 걷다 보면 ‘마루금 산악회’라고 쓰인 표지띠도 볼 수 있다. 마루금? 마루금이 뭘까? 국어사전에도 안 나오는 단어다. 마루금 개념을 처음 제안한 이는 조석필 선생이다. 선생의 저서 ‘태백산맥은 없다’에 나오는 개념으로 이는 지도와 관련지어 생각하여야 한다.
마루금은 주로 대간이나 정맥 등 이른바 산줄기 산행을 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개념이다. 즉 우리가 산행을 준비할 때 필수적으로 지도를 준비하고 그 지도에 우리가 갈 길을 미리 정해야 한다. 그러고는 갈 길을 연필이나 형광펜 등으로 알아보기 쉽게 선을 긋는다. 일반산행이면 개울을 건너고 능선을 타고 그것들을 반복하지만 산줄기 산행에는 절대 그럴 일이 없다. 물론 접속 구간이 계곡을 거쳐야 하는 경우는 예외지만.
이럴 경우 지도 위에 능선을 따라 선을 긋게 된다. 봉우리에서 안부를 지나 또 다른 봉우리로 그리고 고개로.... 이렇게 그은 선을 능선의 능陵 즉 ‘산마루’에서 ‘마루’를 따왔고 선線에서 ‘금’을 따와 ‘마루금’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니 능선은 우리가 실제로 산을 걸을 때 사용하는 즉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을 지칭하는 개념이라 본다면 마루금은 지도상에 그은 선 일종의 맵소스map source라고 보면 될 것이다.
- 졸저 전게서 94쪽
섬진강이 서시천을 안는 모습을 봅니다.
수초와 물줄기를 찍느라 자세를 좀 낮춥니다.
중앙 우측 구례읍 시가지 뒤로 갈미봉496.6m에서 움푹 파인 까막재를 거쳐 병방산160.4m으로 흘려내리는 줄기를 봅니다.
건물 뒤의 낮은 곳이 구례구역에서 구례읍으로 넘어오는 제비재이겠죠.
그렇다면 구례구역 뒷산이 별봉산614.4m이고 그 뒤 우측 뾰족봉이 봉두산753.8m이군요.
아까 얘기했던 동리산파의 태안사가 있는.....
풍수지리학에서 볼 때 저 병방산은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즉 구례의 진산鎭山인 봉성산165.6m에 대응하는 조산祖山으로 구례의 맨 가장자리를 관장하고 있는 산이라고 합니다.
조금 더 어려운 얘기 하나를 더 할까요?
저 병방산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대한산경표와 신산경표의 차이점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라는 겁니다.
살펴볼까요.
위 지도에서 보시다시피 서시지맥은 물줄기를 중시하여 서시천과 섬진강의 함수점에서 맥을 다하게 규정하였습니다.
반면 신산경표의 견두지맥은 산경山經을 중시하여 더 긴 쪽인 병방산 방향으로 진행하게끔 그은 것입니다.
어느 게 맞다고 단정하는 건 금물입니다만 산경표의 정신이 물줄기를 중시하고 맥은 두 물줄기의 합수점으로 가게끔 되어 있음에 비추어 대한산경표에 한 표를 던집니다.
그렇다고 하여 제 사부님이신 박성태 선생님의 업적이 조금이라도 손상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쨌든 선생님은 이런 산줄기를 체계화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지도 #2
우측으로는 드디어 차일봉 능선이 그 윤곽을 드러냅니다.
그 우측으로는 신라시대의 성지인 노고단이 얼굴을 내밀고.....
그러니 노고단 좌측이 종석대 그 좌측이 작은 종석대이니 그 아래 육안으로는 식별이 어렵지만 우번암(대)도 보입니다.
지리 10대臺 중 하나죠.
차일봉과 원사봉도 보이니 그 좌측은 간미봉입니다.
지리산 둘레길은 걷는 목적은 바로 이렇게 지리산 주변을 더듬으면서 그 산행을 꿈꾸다 보면 둘레길을 걷는 목적은 저절로 달성되지 않을까요?
우측 뒤를 보면 형제봉 능선이 내려오고 그 뒤로는 왕시루봉 줄기가 보입니다.
10:15
시간이 지체됩니다.
냉천교차로가 있는 서시1교를 다리 아래로 통과하고,
10:18
연이어 만나는 서시교를 좀 주의하여야 합니다.
서시교는 다리 방향으로 직진하여,
다리를 건너지 않고 좌틀하여 직진하여 서시천을 건넌 다음,
좌틀하여
유턴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산면을 나와 구례읍으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고는 이제 서시천을 우측에 두고 진행을 합니다.
노고단이 더 확실하게 보입니다.
애국지사 왕재일 선생 동상에서 잠시 묵념을 드리고,
진행하는 서시천변 둘레길은 도로를 따라서 걸어도 되지만 우측 천변을 보면,
이렇게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 길은 자전거 길을 따라 가는 모양새입니다.
실내 체육관 등이 있는 체육공원 내의 서시정을 지나고,
정장교를 지나,
13:36
둘레길 구례센터를 통과합니다.
10:46
계속 포장된 길을 따르다보니 조금 심심하군요.
이때 우측으로 웬 표석들이 보입니다.
삼도봉, 연하봉, 제석봉 그리고 천왕봉 등 지리산 주릉에 있는 봉우리들의 정상석 모형들을 갖다 놓았군요.
아주 기발한 착상입니다.
이제 둘레길은 정면으로 산성봉362m을 보고 걷게 되는군요.
저 산성봉은 요강바위산 옆으로 진행하여 서시지맥으로 연결되겠죠?
광의교 너머로 서시지맥이 멋지게 늘어섰습니다.
좌측 천마산은 전라남도 구례군과 곡성군 그리고 전라북도 남원시 등 세 개 군이 만나는 곳이죠.
여기서도 천마산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안테나가 보입니다.
광의교에서도 직진을 합니다.
그러면서 구례읍을 벗어나 이제부터는 용방면으로 들어섭니다.
좌측으로 매화인지 배꽃인지....
아니 그런데 저 멀리 4분이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이는데 걸으시는 모습이 너무 낯익어 보입니다.
설마 선생님께서....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이시군요.
사모님과 두 어른 등 네 분이 '백의종군 길' 답사에 나서신 것입니다.
예.
선생님 걸으셔야죠.
제 손가락 두 개 중 하나로 손꼽는 분이십니다.
제 산행기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오는 분이십니다.
신산경표의 저자이신 선생님은 우리나라 산줄기의 산증인이시자 민간지리학자로서도 명망이 높으신 분입니다.
신산경표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은 졸저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기도 합니다.
저에게는 사부님이신데 요즘 제 집안일로 소원했었습니다.
이 얘기 저얘기 안부 말씀 나누고 이번 '홀대모' 모임때 꼭 참석하라는당부의 말씀을 듣습니다.
항상 강건하십시오.
반대방향이기도 하고 점심 먹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라 아쉬운 마음으로 선생님 일행과 작별을 합니다.
간미봉, 원사봉 .......
그런데 좌측 중앙 아래 저 색깔이 바랜 봉우리는?
지난 번 설날 성묘객 실화사건?
그런 거 같군요.
이따 그 부근으로 진행할 것이니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지도 #3
앞으로 한 달도 안 남았나요?
벚꽃으로 난리가 날 곳이군요.
여름에 버찌나 따 먹으러아야 되나....
불난 흔적 맞군요.
성묘할 때 촛불까지 켜고 하나요?
정신 나간 사람같으니....
중앙에 종석대가 이제 많이 가까워졌습니다.
11:58
선월마을에서 우틀하여,
광용교를 건너,
광의면으로 들어섭니다.
면사무소 좌측 화장실 뒤로 돌아나가,
수령 450년의 느티나무 앞으로 나가 다시 서시천 뚝방길을 따라 갑니다.
지도 #4
12:16
광의면 구만리를 보며 진행합니다.
좌측 앞이 까치절산295.7m, 그 뒤 우측이 지초봉601.6m.
그 우측으로 납재 지나 간미봉까지 한 줄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니 백두대간의 종석대 ~ 노고단 혹은 성삼재로 갈 때 산꾼들이 잘 찾지 않는 시암재 루트를 타기 위해서는 이곳으로 와야합니다.
즉 광의면 구만리 이곳 서시천을 만나는 까치절산을 시작으로 지초봉으로 오른 다음 간미봉728.4m ~ 상복골재 ~ 시암재 ~ 작은종석대 ~ 종석대 ~노고단(성삼재)로 진행하면 될 것입니다.
산수유 시목지 이정표를 통과하고,
12:27
구만교 이정표에서 좌틀하여 구만교를 건너자마자,
우틀하여 세심정을 보고 직진합니다.
세심정을 지나,
구만제를 보고 수로를 건너고,
구만 저수지 뒤로 보이는 유원지 방갈로도 보며 뒤로 서시지맥 줄기도 감상합니다.
12:42
우리밀 체험센터 주차장을 가로 질러 나와 우틀하여 7번 도로를 따라 잠시 진행하다,
삼거리에서 좌틀하여 온당리로 들어섭니다.
우측으로 온당제를 끼고 진행하면,
온동 마을로 들어가는 삼거리가 나오지만 직진합니다.
온동마을을 지나면서 지리의 남쪽을 봅니다.
우측 아래가 봉성산 그 좌측으로 오산 그리고 그 뒤가 둥지리봉.
그 좌측으로 계족산이니 그 뒤가 호남정맥이겠고 그 좌측으로 멀리 드디어 백운산1216.9m까지 보이는군요.
그 좌측으로 형제봉이 높게 보이지만 엄연히 형제봉은 지리남부능선 상에 있는 봉우리이고 그 사이에 섬진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13:09
그러고는 난동마을입니다.
버스 정류장 옆 느티나무가 있고 쉼터, 운동시설이 되어 있군요.
예전에 난약사라는 절이 있어서 난약골이라고했다가 난동으로 바뀌었다고 하는군요.
여기서17구간을 마치고 17-1 구간을 이으려 예술인 마을 쪽으로 갑니다.
18.9km를 4시간 39분 걸려 도착했습니다.
첫댓글 방대한 자료를 통해 지리산 주변만 해도 한평생 다녀야 모두 답사해야 겠습니다. 무심코 지나던 곳도 본 게시글을 통하여 멋진 장소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사진과 지도를 통한 설명 재미있게 잘 봉앗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