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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9,1-20>
그 무렵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살기를 내뿜으며 대사제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들에 보내는 서한을 청하였다.
새로운 길을 따르는 이들을 찾아내기만 하면 남자든 여자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고 자기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5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 이제 일어나 성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누가 일러 줄 것이다.”
7 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으므로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9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야!” 하고 그를 부르셨다.
그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자
11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
지금 사울은 기도하고 있는데,
12 그는 환시 중에 하나니아스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
13 하나니아스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16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 그리하여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18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20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6,52-59>
그때에
52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티베리아 호수 건너편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다음, 가파르나움으로 돌아와 '생명의 빵'에 대해 하신 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르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요한 6,53-54)
당신의 살과 피, 곧 당신의 사랑, 당신의 생명을 '먹고 마셔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먹다'(τρωγω)라는 동사는 ‘씹다, 씹어서 부수다’라는 뜻으로, 인간이 음식을 씹을 때 사용하는 동사가 아니라 초식동물이 풀을 먹을 때, 특히 ‘새싹을 입으로 뜯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초식동물이 풀을 씹을 때는 입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의 근육을 연계해 온 몸이 함께 움직여 씹듯이, 말씀을 온 몸으로 음미하며 살아가라는 의미, 곧 ‘실행’을 암시합니다.
곧 실행으로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를르의 체사리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이 구더기가 끓게 될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살)은 ‘인간관계’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의미하고, ‘피’는 ‘생명’ 곧 ‘일치와 유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은 예수님과의 사랑의 사귐과 친교로 예수님과의 유대와 일치된 생명을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당신께서 가지셨던 사랑으로 맺는 인간관계를 가지게 되고, 당신의 생명과 일치와 유대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우리의 세 가지 태도입니다.
첫 번째 태도는 그분의 살과 피를 '어떻게 주는지'를 의혹하고 따지는 말다툼(논쟁)이요, 두 번째 태도는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생명을 얻지 못함이요, 세 번째 태도는 '먹고 마시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됨입니다.
곧 첫 번째 태도는 앎의 의식적 차원의 문제요, 두 번째 태도는 하는 믿음의 결단 차원의 태도요, 세 번째 태도는 실행에 따른 존재적 차원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 곧 ‘순명’이라는 ‘행위의 실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실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
(요한 6,56)
이는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신비적 몸에 합치되는 것을 말합니다.
‘머문다.’는 것은 단순한 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시는 것을 말하며, 그리하여 당신의 신적 생명이 우리에게 증여되고, 선사되고,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어 흐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되고, 그분의 생명 안에서 새롭게 창조됩니다.
이 크신 사랑은 우리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합니다.
당신께서는 이토록 큰 사랑의 신비로 오늘도 우리 안에서 당신 생명의 꽃을 피우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몸과 피를 건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요한 6,57)
'말미암아'라는 말은 ‘그분의 힘으로’라고 번역하기도 하듯이, 이는 ‘그분을 통하여’ 사는 것이며, 그것은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며, ‘그분 안에서’ 사는 것이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미사 중에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 당신의 살과 피, 그 크신 사랑과 신비, 그토록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을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의 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56)
주님!
당신은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저를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에 태워 드높게 날게 하십니다.
오늘 제가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믐달처럼 자신을 감추신 그 오묘함과 놀라움으로, 바람 부는 대로 흘러 다니는 그 가볍고 그윽한 당신 사랑의 숨결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그릇이 큰 사람>
제가 사춘기 고등학생 때 인생 문제로 고뇌가 크고 하느님 존재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아서 방황할 때, 저는 두 분처럼 되고 싶었는데 아오스딩 성인과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아오스딩 성인은 크게 방황하고 종교 편력도 하며 방탕하게 살았지만 어둠이 짙었던 만큼 빛도 강렬하게 발견한 분이었기에 저도 그리되고 싶었던 것이고, 그래서 저도 일부로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져볼까 생각도 할 정도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주님을 극렬히 반대했지만 오늘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듯이 주님의 은총으로 극적으로 주님을 체험하고 주님의 선택을 받아 주님의 전사가 되었던 것처럼 저도 그리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오로는 새로운 길을 가는 신자들을 잡으러 가다가 땅에 엎어진 뒤 이제 자신이 그 새로운 길을 가게 되었는데, 한번의 엎어짐으로 바오로처럼 제가 새로운 길을 가게 되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길을 가면서 겪게 될 어마어마한 수난도 바오로처럼 감수하고 감당할 것인가?
오늘 사도행전은 바오로의 사명과 미래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여기서 바오로가 그릇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큰 인물을 얘기할 때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얘기하곤 하지요.
그런데 사람이 그릇이 크면 그 그릇에 사랑을 그만큼 많이 담겠지요?
또 이해력도 크고 포용력도 클 것이며 그리는 꿈도 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릇이 크면 수난의 그릇도 크지 않겠습니까?
사실 사랑이 크면 받아야 고통도 큰 법이지요.
오늘 주님께서도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이것을 실감나게 얘기하면 소가 자기의 살과 선지를 내어주듯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시며 당신을 다 주시겠다는 말씀이지요.
그래도 이런 주님과 바오로처럼 사랑의 그릇이 큰 사람이길 희망하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맛있는 음식>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그만큼 몸에 영양을 보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에 얼마만큼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맛의 좋고 그렇지 않음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그래서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하며 잡곡밥이나 현미를 먹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이 빠지거나 걱정을 안고 있으면 맛을 잃고 맙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음식입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 사료입니다.
사료는 짐승이 먹는 것입니다.
기도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보충하듯 기도를 통해 영적 양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음식이 있다 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인격적인 결속을 이룬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사 안에서의 준비된 영성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내가 네 밥이야!’하는 ‘먹힘’으로써 하늘과 소통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소통을 이루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유사성을 가장 잘 회복하는 방법은 두말할 것 없이 고해성사입니다.
그러므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속을 비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하여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미사 참례 횟수를 늘리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이지만, 미사성제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이기 때문입니다.”(아르스의 비안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하루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41-42)
평일에도 미사참례를 위해 애쓰는 가운데 주님의 온갖 축복을 풍성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
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성체로 ‘말미암아’ 살아가는가?>
예수님은 계속 ‘생명의 빵’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들만 영원히 살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살과 피를 먹고 그 살과 피를 먹은 이 덕분으로 살아간다는 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영화 ‘아이, 로봇’(2004)은 공상과학 영화이지만 인간과 로봇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며 ‘인간도 로봇과 같지 않을까?’, 혹은 ‘로봇도 인간과 같지 않을까?’란 섬뜩한 메시지를 전달해줍니다.
로봇이 자유의지를 가져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결론은 이것입니다.
‘로봇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생존에 대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2035년, 로봇의 원칙은 1.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2. 인간의 명령에 따른다. 3. 이 두 법칙에 위배되지 않으면 스스로 보호한다. 이렇게 3가지입니다.
인간의 생활 전반에 인공지능이 발달된 로봇과 생활을 합니다.
NS-4가 단종되고 NS-5 모델이 출시되려는 시기에 이 모델의 개발자 래닝 박사가 자살을 합니다.
시카고 경찰인 델은 AI 로봇을 적대시하는데, 과거 애인과 사고를 당했을 때 로봇이 명령을 어기고 자신만 구해 애인이 죽었던 사건 때문입니다.
그는 래닝이 살해당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래닝이 개발한 모델 NS-5는 인간의 명령과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모델이라 로봇의 3대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을 수도 있어 불안해 합니다.
NS-5 써니도 인간처럼 꿈을 꾸고 감정을 느낍니다.
델은 수잔과 써니의 심리 검사를 하는데 나쁜 AI는 아니라고 나와도 델은 써니가 래닝을 죽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수사를 하던 델은 습격을 받고 래닝 사건은 자살로 수사가 종결됩니다.
써니는 델을 피해서 NS-5 공장에 숨습니다.
써니는 왜 래닝 박사가 자기를 만들었나 궁금해합니다.
써니는 자기가 꾼 꿈 얘기도 하며 대화를 나누다 써니를 신뢰하게 된 델은 써니가 알려준 곳으로 가는데 컨테이너 박스에 NS-4들이 숨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들은 NS-5 모델에 의해 제거되고 있었습니다.
델은 사건을 파헤칠수록 의문의 로봇들에게 공격을 받고 로봇의 반란을 예상해서 써니를 없애려던 사장과 얘기해보려고 찾아갑니다.
로봇들의 반란의 배후가 궁금했지만 이미 사장은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봇의 반란은 메인 컴퓨터 비키가 조종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고, 이를 막으려고 델과 수잔은 비키에게 바이러스를 심으려다 비키의 반격으로 죽을 위기에서 겨우 살아나 결국 비키를 제거하여 반란을 막았지만, 사람들이 AI 로봇을 폐기하려 합니다.
써니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델은 마음대로 해보라면서 자유를 줍니다.
써니는 버려진 로봇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인간들의 명령에서 벗어나 이 로봇들은 써니의 지도 아래 자유롭게 자신들의 왕국을 만들게 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요한 6,56-57)
여기서 사용하는 누구를 '말미암다'라는 단어의 ‘디아’(dia)라는 전치사는 “~을 통하여”, 혹은 “~ 덕분으로”란 뜻의 전치사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살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통로가 막히면 들락거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존재입니다.
그 조종 당하는 방법은 나를 만든 이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살은 행동 강령이고 피는 에너지라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에너지를 지니고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는 ‘신’(神)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살과 피로 알려주지 않으면 인간은 살 의미를 잃습니다.
여기 한 인간의 못된 야심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불쌍한 인간이 있습니다.
아니, 두 사람입니다.
한 하체에 두 상체가 달린 샴쌍둥이입니다.
마샤와 다샤 자매는 1950년 러시아 모스크바 산부인과에서 샴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이들의 비극은 어머니 품에서 아이를 떼 자신의 실험 도구로 사용한 한 과학자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소련의 생물학자인 표트르 박사였습니다.
표트르 박사는 어머니에게는 아이가 사산했다고 말하고는 아이를 감금하고 한 아이를 찌르면 다른 아이도 아픈지, 한 아이에게만 음식을 주면 다른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등을 실험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언니 마샤는 긍정적인 편이었고 동생 다샤는 자주 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40년 만에 실험실 쥐처럼 사는 삶에서 자유를 얻었지만 어찌 살아야 할 이유를 몰랐습니다.
자유는 오히려 이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2003년 동생 다샤는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언니 마샤는 몸을 분리하는 수술을 하면 살 수 있었지만 동생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동생과 한 몸으로 살며 동생을 돌보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더는 살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겐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가 없습니다.
인간을 폄하하고 존엄성을 깎아 먹는 발언이 될 수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로 ‘말미암아’ 사는 존재입니다.
지금 대부분 우리는 부모와 학교에서 자라면서 누군가의 살과 피를 먹었고 그들 덕분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뜻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는 그 뜻을 실현해주며 사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뜻이 옳았음을 증명하며 사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존재할 때부터 삶의 의미나 뜻,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사람도 결국엔 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것을 증명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자신으로 산다는 말은 그저 태어날 때의 생존본능(물론 이것도 창조자가 넣어준 것이기는 하지만)으로 모기나 기생충처럼 산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스스로 생존의 의미와 방법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사회생활이 가능한 모든 동물은 결국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그들의 삶을 대신 살아주며 무리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느님 나라의 하느님 자녀들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살과 피를 먹고 그분을 살게 해 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그분 나라에 살 수 있는 모습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인간은 창조자가 아닙니다.
피조물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자의 의지 없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게 뭐가 좋습니까?
모기가 될 뿐입니다.
창조자로 삽시다.
창조자로 사는 방법은 창조자를 아버지로 여겨 그 본성이 나를 통해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성체성사>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말을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 또는 “우리를 살리려고 오셨다.”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믿었던 구약시대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인생을 마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즉 하느님을 모르고 또 안 믿은 사람들은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지 못하고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구약시대 사람들처럼 되거나 하느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죄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
(2코린 5,1-2)
‘지상 천막집’은 현재의 ‘육체’, 또는 그 육체를 지니고 사는 ‘지상에서의 인생’을 뜻합니다.
‘영원한 집’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새로운 몸’입니다.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한다는 말은 죽음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종말과 재림이 오기 전에 죽는 사람들은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살아 있는 동안에 종말과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즉 살아 있는 채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1테살 4,15-17).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말은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몸을 받아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합니다.
‘허무’에서 해방되어서 주님의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허무한 존재에서 영원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 바로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생명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룩한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력을 받는 방법입니다.
‘성사’란 눈에 보이는 상징물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을 전달해 주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성체성사는 눈에 보이는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생명력’을 우리에게 주는 성사입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상징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일이고,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천상의 일’이고, 현실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1코린 10,16)
이 말은 “성체성사의 빵은 곧 그리스도의 몸이고, 포도주는 곧 그리스도의 피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먹어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룸으로써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는 성사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요한 6,53-54)
믿음도 없이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고, 성체모독죄를 짓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사람만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 생명은 여기에서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55-56)
‘내 살, 내 피’를 단순하게 ‘나 자신’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 자신을 받아먹는 성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먹이려고 오신 분입니다.
‘참된 양식, 참된 음료’ 라는 말은 “참 생명을 주는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참 생명’이라는 말은 허무하게 사라지는 물질적인 생명과는 완전히 다른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지는 지상적이고 물질적인 생명은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보면 생명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주 많이 부족한 생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 속에서는 ‘영원한 것’만이 진짜가 됩니다.
‘머무르다.’ 라는 말은 ‘결합, 일치’를 뜻합니다.
영성체라는 ‘행위’보다 영성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예수님과의 결합과 일치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치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의 삼위일체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21)
‘죽음’이라는 것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잘 받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희망과 우리의 희망은 같은 희망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잘 받는 것, 받아서 잘 간직하는 것, 그리고 끝까지 유지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회심의 여정 - 회심과 성체성사>
“주님을 찬미하여라. 모든 사람들아!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 알렐루야”
(시편 117)
신록과 꽃들로 아름다운 계절의 여왕, 성모성월 5월의 한국은 어디나 황홀찬란한 천국같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참 아름다운 신록의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아름다운 날들입니다.
참 축복받은 한국입니다.
어제는 어린이날이라 많은 분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수도원을 찾았고 어른들 역시 어린이들이 된 듯 밝게 빛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요즘은 어린이날이 필요없습니다.
방정환 선생님이 어린이날 제정시는 어린이들에 대한 처우가 매우 열악하여 어린이날 취지에 공감이 갑니다만, 요즘은 하나 둘뿐이 없는 아이들이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 자식들인지 매일이 어린이날입니다.”
한 형제의 언급에 공감이 가면서 영적으로도 정말 딱 들어맞는 말이라는 생각에 무릎을 쳤습니다.
참으로 영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이라면 하루하루 날마다 정신은 늘 푸른 동심으로 빛나는 천진무구(天眞無垢)한 영혼들이겠기 때문입니다.
사실 끊임없는 기도와 더불어 회심의 여정에 충실한 이들이라면 매일이 새 하늘이자 새 땅의 천국의 영적 어린이들입니다.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참 아름다운 날입니다.
이처럼 아름답게 살라고 좋은 날과 자연을 선물하신 하느님을 생각한다면 우리 모두 보답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감사하면서 참 아름답고 희망찬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정말 우울이나 절망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날 노래를 부르며 수도원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마침 오후 피정을 마치고 고백성사 후 떠나는, 여기 수도원에 처음으로 피정왔던 자매에게 보속으로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어제 고백성사를 본 여덟분들에게는 모두 한결같이 보속으로 다음 처방전 말씀과 더불어 “웃어요”라는 초록색 스탬프를 찍어 드렸습니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1테살5,16-18).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 성체성사'(6,22-59)에 대한 마지막 대목(6,52-59)입니다.
참 길고 영적으로도 깊고 풍요로운 '생명의 빵' 성체성사에 대한 내용들이었습니다.
마침 사도행전 제1독서는 바오로 사도의 회심 사건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에 신선한 충격입니다.
여기서 연상되어 착안한 강론 제목이 바로 '회심의 여정-회심과 성체성사'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은 누구나 예외없이 회심의 여정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한결같이 회심의 여정에 충실할 때 날로 정화되고 성화되어 예수님을 닮아 참나의 실현이 이뤄질 것입니다.
이런 회심의 여정에 날마다의 성체성사 미사가 결정적 도움이 됨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회심으로 순수해진 영혼은 성체성사의 진가를 깨달아 더욱 이를 찾게 되고 성체성사의 은총은 우리를 더욱 회심의 삶으로 이끌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은 바오로의 회심 과정이 참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청천벽력같은 주님의 음성이자 벼락치는 듯한 회심의 결정적 순간입니다.
박해받는 제자들과 당신 자신을 동일화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동료들에 대한 우리의 유형무형의 못된 짓의 박해 행위들은 바로 주 예수님께 대한 박해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고,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하니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짐작이 갑니다.
하느님은 한없는 인내의 기다림 끝에 때가 되자 결정적 순간에 개입하셔서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바오로를 회심으로 이끈 것입니다.
흡사 사흘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기까지 날들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마침내 사흘 후 바오로는 주님의 제자, 하나니아스를 통해 결정적 구원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바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도 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회심으로 이끄십니다.
제가 날마다 매일 강론을 쓸 수 있음도 순전히 이런 파스카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은총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고,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린 후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니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부활한 사울, 바로 바오로 사도입니다.
우리의 회심은 이런 비상한 회심이기보다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평범한 일상의 사건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회심으로 순수해진 영혼들은 다음 오늘의 요한복음의 성체성사 진리에 대한 말씀에 그대로 공감할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얼마나 풍요로운 성체성사 미사의 은총인지요!
성체를 모심으로 주님과 상호내주(相互內住)의 일치와 더불어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힘으로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 파스카의 예수님을 모심으로 영원히 살게 된, 또 회심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게 된 복된 우리들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어, 우리를 속량하셨네. 알렐루야.”
(영성체송)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아니나 다를까!
당신 살을 먹으라는 예수님 폭탄 선언에 유다인들 사이에는 다툼까지 벌어집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어떻든, 그들이 알아듣건 못 알아듣건, 예수님께서는 계속 살 이야기를 하십니다.
아니 설상가상으로 피 이야기까지 보태시지요.
이제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께서 건드려 주셔서 영의 귀가 활짝 열려야 알아들을 수 있는 차원으로 넘어갔습니다.
인간적,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차원으로 넘어가 버린 게지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56)
예수님의 살과 피, 즉 그분 생명을 받아먹는 사람 안에는 이미 그분께서 계시고 또 그도 그분 안에 있습니다.
머무름.
서로가 서로에게 머무르는 것은 일치입니다.
하나됨입니다.
그분이 내 영육으로 스며드시고 나도 그분 안에 스며들었으니 이제 둘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말미암아"
(요한 6,57)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시듯, 예수님을 먹는 이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
말미암는다는 말은 원천이고 원동력을 뜻하지요.
예수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신 아버지 때문에/덕분에 사시듯이 우리도 예수님 때문에/덕분에 삽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생명의 이유, 삶의 이유가 됩니다.
벗님이 자식 때문에/덕분에 살고, 부부가 서로 때문에/덕분에 살듯이, 참으로 사랑 안에 일치하여 사는 사람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삶의 이유요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은 성체로, 말씀으로 현존하시고, 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두 기둥이지요.
그렇다면 "나는 성체 신심은 있는데 말씀에는 관심이 없어" 또는 "나는 말씀 연구는 재미있지만 이웃 사랑이나 봉사는 바빠서 못 해" 이런 말을 과연 할 수 있을까요?
사실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 나눔과 봉사를 통해 직접 성체적 삶을 사는 것과, 말씀을 읽고 듣고 머무르고 실천하는 일은 별개가 아닙니다.
둘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삶이고 서로에게 머물러 일치하는 하나된 삶이지요.
말씀에 깊이 깊이 머무를 때,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알아들으려 말씀의 숲길을 샅샅이 헤치며 그분 자취를 찾고 말씀과 씨름하듯 끙끙거리며 애를 쓸 때, (이런 표현이 어떻게 들릴지 몰라 조심스럽지만) 흡사 주님의 몸을 세세히 뜯어 먹고, 잘근잘근 씹고, 되새김질 하고, 또 입에 지긋이 머금어 맛을 음미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럴 때는 실제로 '아,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샅샅이 구석구석 뜯어 먹고 핥고 되새기며 먹고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마치 말씀이 실제로 살과 피가 되셔서 제 앞 식탁에 놓이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럴 땐 주님의 육화, 즉 말씀이 사람이 되신, 살이 되신 신비를 알아듣는 듯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어 주신 살과 피는 그분의 원 존재인 '말씀'이십니다.
살과 피를 받아 먹고 마시는 것이 그분 존재, 생명을 받아 모신다는 뜻이지요.
그러니 그분을 말씀으로 영하고 또 살과 피로도 영하는 우리는 참으로 복된 존재인 셈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선 우리, 그분 안에 머무르는 우리에게 말씀과 성체, 성체적 삶은 분리될 수 없음을 깨닫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서는 열혈 유다교 신봉자 사울이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모하게 된 극적 사건의 현장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는 땅에 엎어졌다."(사도 9,3)
빛은 밝기를 지닌 빛이었을 뿐 그를 땅에 엎어트릴 만한 폭력적, 물리적 세기의 접촉은 아니었을 텐데, 번쩍이며 둘레를 비춘 빛만으로 그가 넘어집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빛은 곧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고 요한 복음사가는 이야기하고, 시편 저자 역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시편 109,105)라고 고백하지않습니까?
사울은 이 빛의 타격, 말씀과의 접촉을 통해 자기가 무너지는 체험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큰 빛 앞에서 작다란 빛도 못되는 인간적 시력을 잃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싶네요.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사도 9,9)고 합니다.
그러다가 주님께서 친히 파견하신 하나니아스의 도움으로 다시 보게 되지요.
"그러자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사도 9,18-19)
인간적 시력을 잃었던 사흘 동안 그는 곡기도 끊습니다.
그동안 가진 신념이 무너지는 혼란과 두려움, 신비 체험에서 오는 충격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지만, 상징적으로 볼 때 그는 육적인 삶에서 영적인 삶으로 건너가는 경계 지점에 있고, 죽음과 같은 진공적 휴지기를 통해 옛 인간의 흔적을 비워내는 중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세례를 받은 다음 그는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고 하지요.
죽음의 시간을 거친 후 물과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어 영한 첫 음식이 무엇이었는지 사도행전 저자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그 음식으로 기운을 차리고 며칠을 제자들과 보낸 후 곧바로 주님 선포의 길로 들어선 힘은 그 음식의 영양학적 성분만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사울은 빛으로 오신 말씀과 음식으로 오신 예수님의 몸을 통해 변모의 길에 들어섭니다.
이제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는 철저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존재가 되어 불같이 타오를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말씀, 빛, 살과 피, 우리 곁의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 더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분류하고 구분하고 나누던 제각각의 존재들이 하나로 통합됨을 느낍니다.
요한 사도가 갈릴래아 바닷가에서 외쳤듯이 그분이 바로 "주님이십니다."(요한 21,7)
아멘.
오늘 말씀과 빛, 살과 피로 또다시 벗님에게 오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한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
세상의 일을 접고, 노년의 삶을 준비해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였습니다.
고향 땅에서 여생을 편히 지내도 좋은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 땅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의 늙은 나이에 정든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땅을 축복해 주셨고,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의 나이는 80세였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집트는 모세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쳤던 곳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늙은 모세를 통하여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는 결단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셨을 때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물은 베드로와 안드레아에게는 삶을 지탱해 주는 도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을 때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배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삶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삶을 지탱해주는 도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하는 결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를 부르셨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의 삶을 이끌었던 신념을 버려야 했습니다.
바오로는 정통 바리사이파로 가졌던 모든 권위와 권리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박해하는 자에서 박해받는 자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신념과 지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라고 응답하는 결단입니다.
아브라함, 모세,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바오로는 벼락 맞는 것처럼 삶의 여정에 극적인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성서는 그런 극적인 순간을 하느님의 부르심, 예수님의 부르심이라고 전해 줍니다.
그러나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도 오늘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서에서 전해주는 극적인 ‘부르심’의 순간은 기억나지 않을지 모릅니다.
몇몇 분에게 물어보았지만 벼락 맞는 것 같은 극적인 ‘순간’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극적인 순간은 없을지 모르지만 세례를 받는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아브라함처럼 고향 땅을 떠나지 않을지라도, 모세처럼 위험한 이집트로 돌아가지 않을지라도, 첫 번째 제자들처럼 삶을 지탱하는 것들을 버리지 않을지라도, 바오로 사도처럼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을지라도,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오히려 극적인 순간이 없음에도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2018년 12월 20일입니다.
병원에서 퇴원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주교님께서 부르신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길이 막혀 지하철을 타고 교구청으로 갔습니다.
주교님께서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을 맡아서 일하면 어떤지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늙은 나이에 고향 땅을 떠나는 것도 아니었고, 모세처럼 위험한 땅으로 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처럼 삶을 지탱하는 것들을 버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제 삶의 신념을 바꾸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벼락 맞는 것 같은 극적인 순간은 아니었지만 제게는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신문을 배달한 적은 있지만 신문을 만들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신문사가 주관하는 성지순례를 기획했지만 코로나로 취소되었습니다.
의욕적으로 신문홍보 일정을 잡았지만 역시 코로나로 취소되었습니다.
코로나는 위기와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코로나는 더 높이 날 수 있는 충전과 기회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 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언젠가 죽기 마련입니다.
당연한 진리인데도 이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탄생과 죽음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태어날 때 아기는 마구 웁니다.
그러나 이 아기를 바라보는 주위의 사람들은 세상의 행복을 차지한 것인 양 활짝 웃습니다.
그렇다면 죽을 때는 어떻습니까?
우선 주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크게 슬퍼합니다.
죽는 사람은 어떤가요?
여기서 이 세상을 잘 살았던 사람은 웃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에 태어날 때 아기는 참 걱정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 뱃속의 편안함을 벗어난 낯선 환경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힘차게 울었겠지요.
하지만 곧바로 안정을 취합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기운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떠날 때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태어난 아기를 보호해 줄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세상을 떠나는 우리를 보호해 줄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갓난아기가 세상 안에서의 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서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우리는 미사 때마다 느낄 수 있습니다.
성찬례 때, 사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당신 자신을 몽땅 내어주는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면서 식인종의 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 사람’이라는 표현은 ‘이 천민 출신’이라는 경멸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전혀 보려고 하지 않고, 미개한 식인종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면 절대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과의 일치를 이루는 사람만이 하느님과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과도 하나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셨던 주님의 사랑에 무조건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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