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조정에서는 아산의 영인산 북쪽 바닷가인 인주면 공세리에 공세창貢稅倉을 설치하고, 바다와 가까운 충청도 근해 40개 고을의 조세를 거두어서 매년 배에 실어서 울로 날랐으므로 이 호수를 공세호貢稅湖라 불렀다.
지금의 공세리 성당 자리가 공세미를 쌓아 두던 곳이다. 이곳은 본래부터 생선과 소금이 넉넉했는데, 창을 설치한 후 부터는 백성들과 장사꾼이 많이 모여들어서 부유한 집이 많았다. 창이 있는 마을만 그러할 뿐 아니라 영인산 두 갈래의 물길, 즉 곡교천과 둔포천 사이에 그쳐서 기세와 맥이 풀리지 않았고 곡교평야가 펼쳐져 있으므로 산의 전후와 좌우가 모두 이름난 마을이며 사대부집이 많았다
충청도 내포(內浦) 지역에 공세리 일대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에 이미 ‘내포의 사도’라고 불리던 이존창(李存昌)에 의해 복음이 전래되었다. 그 뒤 천주교 박해기를 거치면서도 신앙을 보존하던 이 지역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뒤에는 양촌 본당의 관할 아래 있다가 1895년 6월 드비즈(Devise, 成一論) 신부가 공세리로 부임하면서 본당이 설립되었다.
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는 세곡(稅穀) 운송 창고였던 공진창(貢津倉)이 있던 터를 사들여 1899년에 한옥식 성당을 건축하였고, 신자 수가 증가하자,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공사를 감독하여 1922년에 현재의 고딕 양식의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공세리성당은 천주교 대전교구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성당으로 주변 자연환경과 잘 어우러지는 아름다움으로 내포 지역의 명물로 자리 잡았으며, 이후에 지어진 합덕성당[1929], 예산성당[1934], 공주 중동성당[1936] 등 다른 성당의 건축 모델이 되었다.
대전 교구 중에 가장 먼저 생긴 이 성당, 한강 이남에서 다섯 번째로 지어진 이 성당은 전주의 전동성당, 횡성위 풍수원 성당과 함께 아름다운 성당 중 한 곳이다.
한편 이곳 공세리 성당에 2대 주임신부로 근무하던 에밀 피에르 드비즈가 프랑스에서 익힌 의술을 바탕으로 1906년 종기를 다스리는 고약(膏藥)을 제조하여 신자들을 치료했다. 이 고약은 드비즈 신부의 한국식 이름을 따 ‘성일론 고약(成一論膏藥)’이라 불렸는데, 이 고약의 제조법을 신자 이명래가 배우고 발전시켜서 ‘이명래 고약’을 만들었고, 이명래는 서울로 올라가서 사업을 확장하여 해방 후 명래제약을 세워 운영하였다.
어린 시절, 종기가 나면 누구나 붙였던 이명래 고약의 발상지인 공세리 성당에 가을비가 추적 추적 내리고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