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금융그룹의 회장과 점심시간에 냉면집을 갔었다. 그의 금융그룹에는 은행들과 함께 여러 금융회사들이 있었다. 그는 전문경영인이 아니라 뿌리 깊은 부자집의 아들이었다. 오너인 셈이었다. 부자라고 해서 그는 생활에서 전혀 다르지 않았다. 같이 김치찌개를 먹기도 하고 길거리의 작은 음식점에서 돈까스를 먹기도 했다. 그와 마주앉아 냉면을 먹을 때였다. 나는 시원한 국물로 먼저 목을 축이고 그 다음에 면을 먹었다. 냉면 위에 놓인 반 조각의 삶은 계란은 제일 마지막에 먹곤 했다. 냉면과 국물을 다 먹고 계란 만 그릇바닥에 동그마니 남아있을 때였다. 앞에 앉아있던 그가 내 그릇에 남은 계란을 보더니 젓가락으로 얼른 집어 자기 그릇에 가져다 먹었다. 아마도 내가 남긴 것으로 생각한 것 같았다. 그의 그런 행동을 보면서 나는 그가 부자라는 의식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기업을 경영하는 또다른 친구와 점심을 먹은 적이 있다. 그는 세계의 여러 나라에 공장을 지어 온갖 종류의 스포츠용품을 제조해 세계시장에서 팔고 있다. 식사가 끝날 무렵 그가 약간 쑥스러운 어조로 내게 말했다.
“먹던 반찬 중에 굴비가 남았는데 내가 싸서 가져 가면 안될까? 난 아버지한테서 절약을 배웠어. 아버지는 회사에서 절대로 새 종이를 못 쓰게 했어. 버릴 서류들의 이면을 활용하라고 했지. 아버지는 일제시대부터 조선 최고 부자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검소하셔. 평생 구겨진 면바지에 농구화를 신고 다녔어. 쟈켓도 차도 다 이십년 이전에 산 거야. 아버지는 그래.”
그 집안의 사건을 맡은 관계로 그의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다. 호기심으로 그에게 물었다.
“일제시대 조선 최고 부자의 아들이셨다면서요? 아버지가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전라도에서 오십개 군에 걸쳐 우리 집안 농토가 있었지. 만주에도 여러 개의 농장이 있었지. 아버지가 조선 최대의 기업인 경성방직을 경영하셨고 만주에도 동양 최대규모의 방적공장을 가지고 계셨지. 그 외에도 만주와 조선에 수많은 회사를 인수해서 가지고 있었어. 나는 아버지의 자금관리를 도왔지. 중학교 때 아버지는 나에게 만주농장의 소유권을 넘겨주셔서 30만석을 수확했지. 사람들은 나를 보고 ‘학생 지주’라고 했소. 엄변호사 부친 세대는 그때 어떻게 지내셨소?”
“저희 할아버지는 만주로 간 유랑농민입니다. 먼지가 이는 만주벌판에서 하루종일 호미질을 해도 밥 먹기가 힘들었답니다. 같은 시대에 살았어도 빈부격차가 참 컸군요. 그렇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부자를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는 건 보지 못했죠.”
우리 집안은 가난을 전혀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만주에서 배가 고파 찰기가 있는 흙을 먹은 걸 담담하게 내게 얘기해 주기도 했다. 나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의 삶이 다를 뿐이라는 생각이다.
나는 사회적 겸손을 가진 부자는 겉으로 보이는 삶도 다르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 검소한 부자인 그 노인의 생활은 나보다 더 소박한 것 같았다. 그 노인은 저세상으로 건너갈 때 자신의 몸을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의 자료로 제공했다. 나는 그 노인이 사회의 이면에서 해온 좋은 일들을 알고 있다. 알려지지 않은 존경스러운 부자였다.
텔레비젼 드라마에서 표현되는 재벌들의 모습을 보면 없는 사람들의 천박한 상상이 작가를 통해 투영되어 있는 걸 느낄 때가 있다. 진짜 부자는 사회적 겸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같았다.
몇년 전 한 기업의 사장이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내가 뽑은 신입사원을 관찰 해 봤어요. 점심 식사가 끝나고 길을 가는 걸 봤는데 커피 전문점에서 산 비싼 커피를 들고 갑디다. 그리고 입고 있는 양복도 사장인 나보다 훨씬 고급인 것 같아요. 그렇게 살면서 언제 돈을 모아 부자가 되나? 우리 때같이 동전을 넣고 자판기커피를 먹으면 안 되나?”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있는 동해 시골에도 주차장에 가보면 공단 직원의 것으로 보이는 고급차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나만 값싼 중고 스파크인 것 같을 때가 있다. 양극화 해소가 시대정신이다. 부자의 사회적 겸손과 빈자의 시각 교정이 그 방법의 하나일 수 있지 않을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