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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일 사순 제1주일
제1독서 : 창세 2,7-9; 3,1-7
제2독서 : 로마 5,12-19
복 음 : 마태 4,1-11
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6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8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하고 말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11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영적 전쟁
-주님의 전사, 말씀의 전사, 승리의 전사-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3월 첫날이자 사순 제1주일입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혼란해도 영춘화迎春化, 봄꽃은 피어나고 봄비에 젖은
농장의 매실나무 꽃봉오리들은 피어날 준비에 분주합니다.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은 한 결 같이 위용을 자랑합니다.
시절이 뒤숭숭하고 어수선할수록 마음의 평온과 안정은 중요합니다.
어제 주고받은 긍정적 메시지들입니다.
-“신부님, 불암산 아침 축복 인사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잘 계시죠?”
“네, 신부님의 기도와 관심 덕분에 방에서 자가 격리 잘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도 항상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수녀님, 영춘화 아침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영춘화가 무슨 꽃인가? 하였는데---
아! 참 맑고 깔끔하고 청명하고 예쁘네요. 고맙습니다.”-
-“신부님, 제 며느리가 건강한 아들을 낳았습니다. 신부님 기도 덕분입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아, 축하드립니다. 손자를 두셨으니 이제 할머니가 되셨네요!”
-“자매님, 불암산 아침축복 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아멘. 맑은 하늘과 고고한 불암산이 제 맘에 희망의 빛줄기가 되어 자존감을 높여 주네요.---
지금은 힘들어도 희망의 부활을 기다립니다.”-
-“자매님, 영춘화 아침 인사 받으시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추운 겨울 이기고 이렇게 예쁘게 피어나다니 신비롭습니다. 꽃을 보니 행복과 희망이 생깁니다.”-
-“자매님, 영춘화 축복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어쩌면 이리 맑고 밝고 아름다운지요! 예쁜 축복인사를 받으니 세상의 시끄러움이 잠시 잊혀집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게 진정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매님의 영혼이 이처럼 맑고 밝고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아멘, 신부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이런 따뜻한 마음이 담긴 덕담들이 어둔 마음을 밝히고 살 힘과 희망을 줍니다.
요즘 코로나 19사태로 몹시도 혼란한 현실이 전쟁상황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참으로 이와는 대조적으로 윗 주고 받은 따뜻한 빛과 희망의 메시지와는 달리
인터넷은 온갖 부정적 비방과 비난 악담의 혐오스런 댓글들로 도배된 느낌입니다.
범람하는 가짜 뉴스와 더불어 그대로 ‘더러운 영들’처럼 알게 모르게 우리를 오염시키는 것들입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누구나 더러운 영에 걸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치열한 영적 내전內戰 상태에 있는 나라요 시국같습니다.
이럴수록 위엄과 품위를 견지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치열한 영적전쟁 상황 중에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을까요?
광야에서 악마를 물리친 예수님처럼 ‘주님의 전사’, ‘말씀의 전사’, ‘승리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예수님을 통해 참사람 하나 만나는 느낌입니다.
영적전쟁에 승리를 위한 몇 가지 지침을 나눕니다.
첫째, 삶은 광야입니다.
그 어디나 삶은 광야입니다. 광야인생입니다. 광야를 피할 수 없습니다.
옛 수도승들은 하느님을 찾아, 악마와의 싸움을 위해 고독과 침묵의 사막을, 광야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악마와의 치열한 영적전쟁터가 바로 광야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만나 행복을 살아야 할 오늘 지금 여기가 몸담고 살아가는 삶의 광야입니다.
토마스 머튼도 사막을 사막으로 받아들일 때 바로 거기가 낙원이 된다고 했습니다.
영적진리는 언제나 역설적입니다.
전쟁 중의 평화요, 고통중의 기쁨이요, 절망중의 희망이요, 광야여정중의 낙원입니다.
박노해(가스팔) 시인의 ‘길이 끝나면 이란 시도 이런 역설의 진리를 보여줍니다.
바로 광야인생의 영적전쟁 중 일어나는 기적입니다. 절망은 없습니다.
-“길이 끝나면 거기/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새 봄이 걸어 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둘째, 삶은 전쟁입니다.
악마와의 영적전쟁입니다. 악마가 없으면 얼마나 좋을까 합니다만 짧은 생각입니다.
악마의 유혹이 없는 유토피아 세상은 환상입니다.
악마의 유혹이 없다면 영적성장도 없고 나태로 무기력해져 서서히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그러니 영적전쟁을 기꺼이 맞아 수행하십시오.
바짝 긴장만 할 것이 아니라 유머를 잊지 말고 여유를 지니십시오.
하느님 수중에 있는 악마들이요, 하느님 주신 시련과 훈련의 도구가 악마의 유혹입니다.
그러니 악마의 유혹이 없게 해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악마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잘 통과할 수 있게 해 주십사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보다시피 에덴동산 낙원에도 악마를 상징하는 뱀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복음의 예수님의 대조가 우리에게 크나큰 깨우침이 됩니다.
하와와 아담 부부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영적전쟁에 패한 것입니다.
누구 탓도 아니 자기 탓입니다.
악마의 유혹에 빠져 불순종의 죄를 짓는 순간 줄줄이 죄로 오염되는 사람들에 세상입니다.
아담으로 시작된 죄의 역사와 대조적으로
복음의 예수님의 영적승리로 말미암아 새롭게 시작된 은총의 역사입니다.
바로 오늘 제2독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대로 복음의 예수님과 창세기의 아담에 대한 바오로 사도의 심오한 해석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로마5,18-19).
아담과 하와의 실패를 만회한 하느님의 전사, 승리의 전사 예수님이십니다.
삶의 광야에서의 영적전쟁에 두려워 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경우에서 보다시피 악마의 유혹에 앞서
성령의 인도가 있고 배경에는 천사가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도 하느님과 악마가,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가 공존했듯이,
우리 인생 광야에도 천국과 지옥은, 천사와 악마는 공존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행불행이 결정됩니다.
누구를 택하느냐에 따라 영적전쟁의 성패는 결정됩니다.
성령을 선택하여 성령의 인도따라 성령의 전사, 주님의 전사로 살 때 유혹에 빠지지 않고 백전백승입니다.
이미 예수님 덕분에 우리의 영적전쟁은 이겨 놓고 싸우는 전쟁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의 전사, 승리의 전사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참사람의 영원한 모델 예수님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예수님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이 입증하는 진리입니다.
셋째, 삶에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삶의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중심을 잊어, 중심을 잃어 방황이요 혼란에 복잡다난한 삶입니다.
하와와 아담의 실패는 방심으로 유혹에 빠져 하느님 중심을 잃은 탓이었습니다.
어렵고 혼란한 세상일수록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일이 절대적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을 때 바로 그 자리에 자리잡는 온갖 우상들 잡신들 더러운 영들입니다.
참으로 황폐화되는 인성에 존엄한 품위의 인간성 상실입니다.
급기야 괴물이 악마가 폐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은 폐해가 참으로 막심합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 부부와 대조적인 복음의 예수님과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광야에서 악마와의 치열한 전투에 예수님이 궁극의 승리를 할 수 있음도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믿음이 전제되었기에 가능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충실한 사도 바오로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은 우리 모두 익히 아는 사실입니다.
오늘 복음은 물론 전생애동안 예수님께서는 현세적 목적을 달성하시려고 당신의 영적 능력을 이용하지 않으셨고,
기적같은 것을 통해서 당신을 신비한 방식으로 구원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독촉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믿음으로 모든 것을 돌파해 나가셨고 마침내 궁극의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넷째, 말씀과 하나 되어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전사, 승리의 전사는 바로 말씀의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허무나 탐욕이 아닌 사랑이자 말씀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중심의 삶을 견고히 해주는 말씀의 은총이요 영적전쟁에 최상, 최고의 무기가 말씀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자 빛이자 영입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튼튼하고 건강한 영혼입니다.
말씀의 부재로 인한 영혼의 영양실조, 영혼의 골다공증입니다.
사순시기의 단식, 기도, 자선 모두 영혼을 튼튼히 하는 수행들인데
필히 이에 전제되는바 말씀 공부와 실천의 수행입니다.
말씀과 일치될수록 정화되고 성화되는 존재요 더러운 영들 또한 범접치 못합니다.
악마들에 대한 유일무이한 퇴치 수단은 말씀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세요. 거듭된 악마의 유혹을 말씀으로 이겨내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말 그대로 주님의 전사, 말씀의 전사, 승리의 전사입니다.
온갖 탐욕과 허욕의 사탄의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는 ‘참 사람’ 예수님이십니다.
1.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으로 배고픔에서 유혹을 물리쳤고,
2.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는 말씀으로 재차 허욕의 유혹을 물리쳤고,
3.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마지막 허영의 유혹을 말씀으로 일거에 격파하신 주님이십니다.
얼마나 하느님을 사랑하셨고 얼마나 말씀과 하나된 예수님의 삶인지 깨닫습니다.
육신의 배는 텅 비었어도 마음은 살아 있는 생명과 빛의 말씀으로 충만해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악마의 정체는 낱낱이 폭로되니 참으로 통쾌, 유쾌, 상쾌한 영적 승리입니다.
악마는 패퇴하여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으니 천상 양식으로 영육을 충전시키는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말씀 공부와 실천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보이지 않는 성령과 천사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심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치열한
1, 광야에서의 2. 영적전쟁에, 3.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삶 중에
4. 말씀의 무기로 악마를 패퇴시킨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주님의 전사, 말씀의 전사, 승리의 전사로 영적전쟁터인 삶의 광야로 파견 출전시키십니다. 아멘,
유혹- 악마의 작전
류해욱 요셉 신부
요즈음 코로나 사태로 사순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가는 것은 아닌가 염려가 됩니다.
미사도 없고, 활동도 없습니다. 사순 제 1 주일을 보내며 다시 한 번 그 의미를 정검 합시다.
오늘 제 1 독서와 복음에서 어떤 공통된 낱말을 듣습니까? 유혹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유혹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릅니까? 달콤합니까? 누군가에게 유혹을 받으면 좋겠습니까?
유혹이라고 하면 어떤 그릇된 길로 이끄는 힘을 말하지요.
나쁜 일을 하도록 꼬시는 것이지요?
사실 성서에서 의미하는 바는 유혹이라기보다는 시험이라고 옮겨야 좀 더 정확합니다.
희랍어 페이라자인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하느님이 아들 이사악을 바치라는 명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다고 할 때
같은 단어를 쓰는 것으로 미루어 시험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유혹하실 수는 없지 않아요?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성서에서 일어난 사건이 분명히 유혹이지만
단순히 악으로 가는 걸림돌이 아니라 더 깊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유혹일지라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때
커다란 영적인 진보를 이루는 하나의 시험의 관문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십니다.
광야라는 곳, 들짐승이외는 아무도 살지 않는 험하고 메마른 곳이지요.
광야라는 곳은 많은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쓸쓸한 곳입니다. 외로운 곳입니다. 아무도 살지 않기에 철저히 혼자이어야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홀로 서시기 위하여 광야로 나가신 것입니다.
절대 고독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 하느님이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광야에 가신 것입니다.
거기서 사십 주야를 단식하시면서 하느님과 함께 머무셨습니다.
당신이 공생활을 하시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바로 거기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난 후 찾아온 자가 있었으니 그는 유혹하는 자, 악마였습니다.
우리도 때로 온전히 혼자 있는 광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광야의 체험이 필요합니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하느님하고만 지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삶에 아무도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없으며 아무의 도움도 소용이 없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만 단식하면서 기다려야 하는 광야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그 시간을 통해 우리의 도움은 오직 주님이시라는 것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닉하게도 그것을 깨달으며 안도의 쉼을 쉬려 할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자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찾아왔던 유혹하는 자입니다.
바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광야에 가셨고 악마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옴으로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확신, 당신이 바로 메시아라는 사명을 받으신 위대한 체험의 순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바로 그런 위대한 순간 이후에 따라오는 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은총의 순간 이후에 어김없이 찾아드는 것이 바로 시험의 시간인 것입니다.
이때야말로 조심해야 하는 때입니다. 질투가 많은 악마가 견디지 못하고 안달을 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려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유혹의 체험이 다만 외적인 것으로 생각하시면 잘못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께서 내면적으로 겪으신 투쟁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마음과 정신, 영혼이 겪는 갈등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실상 유혹하는 자가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우리의 내면의 생각과 바람을 통해서이지요.
악마가 우리를 공격하는 부분은 언제나 우리의 내면 속에 있는 생각이지요.
가장 그럴듯한 생각을 불어넣으면서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우리를 시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부하심으로서 악마를 패배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악마는 물러갔지요.
그런데 영원히 간 것입니까?
루가 복음 사가는 분명하게 말하지요. 그는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물러갔다고.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안 된다고 할 때
다시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시지요.
보십시오. 그 순간도 바로 베드로가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한 위대한 순간이었지요.
그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너는 베드로다. 바로 네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신 위대한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 사탄이 베드로에게 와서 유혹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렇습니다. 한 순간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늘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분께 매달릴 때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외쳐주십니다.
베드로에게 외쳐 주셨던 것처럼. ‘사탄아, 물러가라.’ 어느 누구도 유혹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누군가가 나는 이제 어느 정도의 경지, 다시 말해, 어느 선은 초월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유혹에서 제외된 적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약한 우리 인간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늘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으며 시험을 이기고 더 정진 할 수 있도록 매달려야 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유혹은 바로 그 유혹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혹은 단순한 유혹이 아니라 시험이고 시련인 것입니다.
물론 유혹은 악마의 힘이고 악마는 늘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것은 때로 하느님께서 악마의 그 유혹을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우리가 영적인 성장을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결코 견딜 수 없을만한 시련을 주시지 않으십니다.
다만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분의 도움 없이 우리가 유혹을 이겨나갈 수 없고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시련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악마가 예수님께 와서 하는 그 유혹을 보면, 악마의 작전을 알 수 있습니다.
세 가지는 한마디로 하면, 물질, 명예, 권력이지요.
그것이 이 세상 안에서 악마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수단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들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의 앞에 하느님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두 유혹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성서를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늘 우리의 실제의 삶에서 새겨야 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과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과
‘너희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말씀으로서
우리의 삶에서 가장 앞에 두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 빵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요.
어느 정도의 힘도 또한 인간다운 명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주 하느님의 앞에 놓고 산다면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내가 그 어느 것을 하느님보다 앞에 놓고 산다면, 나는 바로 사탄의 하수인이 된 것입니다.
물론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 것이지요.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그분의 도우심으로 유혹자에게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주님께 ‘예’라고 말씀드려야 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나이 든 노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 열심히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강론 시간에 강조하셨습니다.
이 강론을 들은 나이 많은 한 형제님께서 미사 후에 신부님께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신부님, 저도 성경을 읽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인지 읽고 나서 뒤돌아서면 곧바로 무엇을 읽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성경의 내용은 2,000년도 더 된 옛날이야기가 아닙니까?
이 과거의 이야기가 현대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 읽는 것이 쓸데없는 시간 낭비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본당 신부님께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아주 지저분한 대나무로 만든 작은 바구니를 주면서 말씀하십니다.
“이 바구니에 물을 가득 담아 오셨으면 합니다.”
수돗가에 가서 물을 담았습니다.
그런데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바구니여서 신부님 앞에 도착했을 때는
바구니 틈새로 물이 모두 빠져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신부님은 빈 바구니를 보면서 다시 물을 담아 오라고 시켰습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 차례 반복했어도 바구니에 물을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형제님은 화를 내며 말합니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바구니 틈새로 물이 다 빠져나가는데.”
그때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구니를 보세요. 처음에는 너무나도 지저분했지만, 형제님의 노력으로 깨끗해졌습니다.
형제님이 성경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용이 이해 안 되고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님 영혼은 깨끗해집니다.”
우리는 성경의 힘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이해하기 힘들고, 때로는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 정도로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은 우리의 영혼을 분명 깨끗하게 해줍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언제 유혹을 받으셨는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만족스러웠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사십 일 밤낮으로 단식해서 아주 시장한 상태였습니다.
바로 부족함이 있을 때 악마는 찾아옵니다.
즉, 가장 강력한 무기인 탐식, 허영, 탐욕을 들고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 겪을 수밖에 없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찾아오는 이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지를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성경 말씀으로 이겨내셨습니다.
모든 유혹을 이겨내야 내 영혼이 깨끗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반드시 성경이라는 참된 방패로 유혹에 맞서야 합니다.
유혹을 물리치는 길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셨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고
그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에게 악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시간 유혹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악을 지배할 수 있는 주님의 힘과 능력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 근심걱정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유혹도 없이 평온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근심걱정이 없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악의 유혹을 받으셨고 더군다나 악의세력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음기회를 노리며”(루카4,13)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도 이러한 어려움이 생겼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겠습니까?
그러므로 근심 걱정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어떠한 유혹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근심과 곤란이 없으면 자만하는 마음,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사치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따라서 근심과 곤란으로서 마음의 회초리를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이 지상의 순례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유혹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거룩하고 완전하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악의세력은 거룩함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에서 지면 보통 사람이고, 이기면 그야말로 큰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쁜 일은 멈추고 좋은 일만 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만 실천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유혹을 물리치는 길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2,18).
그러나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겪은 첫째 유혹은 생계문제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쓰리고의 문제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고 성경에 기록 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마더데레사 수녀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내가 너그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도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빵이 중요하지만 빵보다 사랑이 중요합니다. 물질적인 것 위에 영적인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명성에 대한 유혹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성경의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고 받쳐주리라.’ 하는 말씀을 들먹이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루카4,9)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살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의 능력인 기적을 남용하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눈에 띠고 인정받으며 찬사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상의 십자가는 남몰래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생색내기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세 번째 유혹은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사탄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성경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상대방을 더 많이 지배하고픈 마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불의와 타협하고도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렸습니다.
박해 시절에 그들이 세상과 타협했다면 목숨을 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지상의 조그마한 유익함 때문에 하느님을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정치에 발을 디뎠던 분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정치를 하려니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하며 소신이 없어야 하더라.”
만약 우리가 불의와 타협한다면 그것이 사탄을 경배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부, 권력, 명예의 3가지 유혹을 보았는데
결국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물리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6,10. 17절을 보면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유혹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성경을 읽으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히브4,12).
따라서 말씀에 나를 비추어 새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통해 유혹을 극복한 인물을 보면 구약의 요셉은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마침 집안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때 보디발의 부인은 요셉의 옷을 붙잡고 침실로 같이 가자고 꾀었습니다.
요셉은 옷을 그의 손에 잡힌 채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창세 39,11-12).
다윗은 자기를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오히려 죽임으로써
원수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알리는 아비새를 타이르며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치워서는 안 된다.
누가 감히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어른에게 손을 대고 죄를 받지 않겠느냐?”(1사무 26,8-9) 하며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3번의 유혹을 받으셨는데
“성경에 기록 되어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4,7).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탄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4,10). 하시며
하느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뱀과 여인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창세3,1-7)
그리고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창세19,26)
에사오는 떡과 불콩죽을 받아먹은 후 야곱에게 장자의 상속권을 팔아먹었습니다.
아론은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제단을 만들고 축제를 올렸습니다.
다윗은 어느 날 궁전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을 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고
결국 그 여인을 불러다가 정을 통하고 돌려보냈습니다(2사무 11,2-4).
다윗은 유혹을 이긴 사람이기도 하지만 유혹에 넘어간 사람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이렇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 좋은 결심을 해도 한 순간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을 한번 이겼다고 해서 방심할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적대자 악마가 으르렁대는 사자처럼 누구를 삼킬까 하고 찾아 돌아다닙니다.
여러분은 믿음을 굳건히 하여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1베드5,8).
가리옷 유다는 적신 빵을 예수님으로부터 받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하고 이르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바로 밖으로 나갔습니다. 때는 밤이었습니다(요한 13,25).
그리고 마침내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습니다.
그렇다면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만해서 그렇습니다.
이사야서 47,10에서는
“네가 실컷 나쁜 짓을 하면서도 ‘나를 감시할 눈이 없다.’하고 자신만만이구나.
너는 지혜로운 체, 세상일을 다 아는 체하며
‘이 세상에 나 밖에 없다.’고하다가 제 꾀에 넘어가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들여 다 보시는 하느님께서 보고 계신데 하느님을 의식하지 못한 탓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자기 욕심에 끌려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옵니다”(야고 1,14-15).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심이 우리를 병들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하기를 청한 다음 겟세마니 동산에 오르시어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깨어 있어라.
부탁하고 조금 더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셨습니다”마르14,36).
“기도를 마치시고 세 제자에게 돌아와 보시니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나와 함께 단 한 시간도 깨어있을 수 없단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하시며 한탄 하셨습니다(마태26,40-41).
이성과 육이 따로 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한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로마7,15.21).
주님의 기도에서도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하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말씀과 함께하면 유혹은 은총입니다.
자신을 확실히 볼 수 있는 기회이고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유혹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소유와 지배, 명예, 현세적인 권세, 정치적인 유혹으로부터 끝까지 지켜줄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뿐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말씀이 능력으로 살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모든 사람을 도와 줄 수 있으십니다.(히브2,18)
그러므로 우리는 유혹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며 필요하기도 합니다.
유혹은 자신을 확실히 볼 수 있는 기회이며 주님께 간절히 매달릴 때입니다.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지 말고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쌓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가슴에 안고 사시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광야에서의 유혹과 시련”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사순 제1주일이다.
오늘 <말씀전례>의 장소는 오늘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준다.
곧 <제1독서>의 장소는 에덴동산이고, <복음>의 장소는 광야이고, <제2독서>의 장소는 로마라는 도시 광야이다.
바로 이곳이 오늘 우리가 있는 장소이다.
이 이야기에는 역사를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거대한 두 사건이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의 중심에는 ‘유혹’이 자리 잡고 있고, 그 유혹의 결과에 따라 두 개의 세계가 열리게 된다.
곧 에덴동산에서의 ‘유혹’과 광야에서의 ‘유혹’의 결과에 따라 열리는 두 세계가 있다.
이는 유혹에 대한 패배와 승리의 결과에 따라 열리는 세계이다.
그것은 죽음의 지배를 받는 세계와 생명의 지배를 받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 마디로, 말씀에 대한 순명과 불순명에 따라 결정된 세계이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죽음의 지배를 받는 것을 세계를 택하고 있는가?
아니면 생명의 지배를 받을 세계를 택하고 있는가?
1, 광야
자, 그럼 먼저 “광야”로 가 보자. 대체 ‘광야’는 어떤 곳인가?
‘광야’(사막)는 지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물이 귀하고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대신에,
마귀들과 해로운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이 살만한 땅이 아닌 저주받은 땅으로 간주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 한가운데도 ‘광야’가 있다.
우리의 삶 한 가운데에 어둔 밤이 있고, 공허가 있고, 막막함과 무미건조함이 있다.
어찌할 수 없는 나약함과 붙들어 매어지지 않는 흔들림이 있고,
불가항력적인 무능함과 도리 없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무기력이 있다.
벗어나지지 않는 고통과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가슴 안에, 황량한 ‘광야’를 품고 살아간다.
결코 피해 지지 않는, 피할 수도 없는 광야를 좋으나 싫으나 부둥켜안고 살아간다.
<성경>에 의하면, ‘광야’는 아주 독특하다. 곧 지리적인 장소만을 의미하지는 않고, 구세사적인 독특한 시기를 의미한다.
곧 일반적인 의미의 사막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입은 이들이 겪게 되는 사막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모세는 홍해를 건넨 후에 광야를 길을 걷게 되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신 후에 광야로 나아간다.
곧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에 펼쳐져 있는 광야인 것이다.
그러니 이 광야는 이미 홍해를 건네 온 이들에게 주어진 광야이다.
그렇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홍해를 건네 온 이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인도하시기 위해서 사막을 통과하게 하셨다.
그것은 하느님에 의해 직접 선택된 길이었다.
그 길은 가나안에 이르는 짧은 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인도하기를 원하셨던 길이었다.
이스라엘인들은 바로 이 사막에서 율법을 받았고,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하느님의 백성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목마름과 갈증, 허기짐과 베고픔이 있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과 우상숭배가 있다.
이방 민족들의 침탈이 있고,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투정과 불평, 배신과 반역이 있고 불충이 있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는 만나와 메추라기가 있고, 바위에서 솟아나는 물이 있고,
그들을 인도하는 지팡이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다.
그들을 치료해주는 구리 뱀이 있고, 이민족을 물리쳐주는 하느님이 손길이 있다.
하느님의 보살핌과 연민, 자비와 충실함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의 승리가 있고 하느님의 영광이 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사막에 살게 하지 않으시고, 단지 약속의 땅에 이르는 통과지로서 간주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유배지인 바빌론 또한 사막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묵시문학에서는 마지막 날에 이루어질 구원은 사막이 낙원으로 변하는 것으로 소개며,
그때에는 메시아가 사막에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마태 24,26;사도 21,38;묵시 12,6.14.).
따라서 사막은 신앙생활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광야”라는 이 묵중한 십자가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
곧 구원에 이르는 통로로 주셨다. 그리하여 이 사막을 걷는 길은 곧 신앙의 길이 된다.
그렇다면, 광야에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2, 광야에서의 유혹
오늘 사순 첫 주일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장면이다.
광야에는 예수님이 있고 유혹자인 사탄이 있고 주님의 천사가 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
먼저 있었던 그 말씀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들려준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참조).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신명 6,16 참조).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명 6,13).
자, 그럼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들려주게 된 상황인 ‘사탄의 유혹’이 대체 무엇인지를 보도록 하자!
유혹자는 치명적으로 악마적인 매력으로 유혹하는데, 이는 유혹의 세 단계를 보여준다.
<첫 번째> 유혹은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 해보시오.”라는 꼬드김이다.
곧 돌을 빵으로 만드는 능력에 대한 탐욕이다.
나아가서는 자신의 기능과 재능 등을 포함할 수 있다(예; 술과 목숨을 걸고 도박을 벌린 청년이야기-영혼의 부패와 파괴).
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하시면서
하느님 말씀을 생명으로 삼으신다.
<두 번째> 유혹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라는 꼬드김이다.
곧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다치지 않고 내려오는 장면을 연출하면서
당신의 신적인 힘의 과시를 드러내라는 허영에 대한 유혹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하시면서,
겸손하게 땅의 낮은 곳에서의 설교와 기도와 고통을 겪으시고,
마침내는 높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다.
<세 번째> 유혹은 “당신이 땅에 엎디어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라는 꼬드김이다.
곧 권력과 영광의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이라도 승리의 방식으로 사용하라는 유혹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하시면서, 아버지의 뜻을 따르신다.
이 유혹들은 한 마디로, 아버지의 계획에 맞서라는 것이었다.
곧 사탄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서 정해놓으신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하라고 부추기며 유혹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탄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세상의 방식이나 자기 자신의 방식,
자기가 원하는, 자신이 유익하다 편리하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하라고 꼬드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에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이러한 유혹을 받으셨다.
그리고 겸손하게 성경의 말씀으로 유혹을 이기셨다.
공생활의 시작부분에서뿐만 아니라, 공생활 내내, 그리고 십자가에서까지
그 유혹을 받으면서도 아버지의 뜻을 순종함으로써 유혹을 승리로 바꾸셨다.
그리고 오늘 <제2독서>는 아버지께 대한 예수님의 순종이 가져온 선이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불순종이 가져온 악을 훌쩍 넘어선다(로마 5,10)는 증언을 담고 있다.
3, 유혹의 의미
그런데 유혹은 대체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오는가?
“유혹”(πειρασμον)이라는 단어는 이중적인 의미,
곧 ‘유혹’이라는 의미와 동시에 ‘시련’ 혹은 ‘시험’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마치 우리말의 위기(危機)가 위험과 기회라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는 것과 같다.
‘유혹’은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면,
‘시련’은 믿음을 흔드는 것으로 테스트하는 것이고 믿음을 굳세게 한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한다.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야고 1,2-3)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 1,12).
사실, 거의 모든 사건에는 우리의 두 가지 상반된 의지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곧 그 사건을 통해서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려는 ‘거룩한 의지’와
하느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하려는 ‘악한 의지’가 함께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같은 돌이 어떤 이에게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다른 어떤 이에게는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곧 어떤 사람은 유혹을 통해서, 오히려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게 되고,
그것은 그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시련’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시험’하시기는 하지만 유혹하시지는 않으신다.
이에 대해 사도 야고보는 말한다.
“유혹을 받을 때에 “나는 하느님께 유혹을 받고 있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망은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3-15)
그렇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꼬임에 넘어가는 바람에 유혹을 받는 것이다.”
그러니, 유혹에 빠지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곧 마음이 깨끗하면, 유혹은 마음 안에 침범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존자 베다는 말합니다.
“마귀라 할지라도 우리의 나쁜 생각들에 힘을 보태어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오상의 비오 신부도 이렇게 말한다.
“그 어떤 경우라도 마귀는 인간의 응답 없이는 인간 안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다.
‘유혹’은 악마에게서 온다. 그것은 맨 처음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서 벌어졌다(창세 3,1-7).
오늘 <복음>에서는 광야에 있는 예수님에게서 벌어졌다.
그리고 공생활 내내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서까지 유혹을 받으셨지만 승리하셨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유혹과 패배의 한가운데로 찾아오시어 우리 손을 붙잡아 일으켜주신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인류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계속해서 인류를 유인하고 있는 유혹들을 예수님을 통해 이겨낼 수 있다.
이를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분은 친히 유혹을 받으시고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은 사람들을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죄 외에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셨습니다.”(히브 4,15)
이처럼, ‘유혹’은 사탄이 하며, 악과 관련된다.
그래서 마태오복음사가는 ‘유혹’이 사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주님의 기도”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다음에 “악에서 구하소서.”를 덧붙인다.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는 유혹 자체를 저지할 수는 없기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 달라고 청원한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이 구절을
“유혹받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니라, 유혹에 굴하지 않기를 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세상의 한복판을 살아가는 제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5-17)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 있으면서 악에서 보전되기를 기도하셨다.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그 보전되는 길을 기도하셨는데,
그것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말씀의 진리로 거룩한 자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곧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사는 것이 진정으로 악을 이기는 길이다.
따라서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며”라는 기도는
“우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라는 적극적인 기도와 같은 것이 된다.
그러니 우리는 단지 악에서 벗어나는 것에만 머물러 있어서만은 안 된다.
더 적극적인 의미로 선으로 악을 이겨내야 한다.
그렇다. 악은 단지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으로 이겨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21)
그러니 악에서 구원된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로서 선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4, 유혹에 대한 대처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담은 에덴에서 유혹에 걸려 넘어지고 시험에 실패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유혹을 막아내고 시험에 승리하였다.
왜 아담은 걸려 넘어졌고, 예수님은 걸려 넘어지지 않았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기도에 달려 있다. 아담에게는 기도가 없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는 40일간 드리는 기도를 통해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렇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사탄의 계략에 이길 수 없다.
사탄은 어려운 일이 오면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원망하게 하고,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통해서 교만하게 함으로써 하느님과 멀어지게 만든다.
그렇지만 기도를 한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것들을 통해 성화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에서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루카 22,40)
아마 베드로가 예수님의 이 충고를 따랐더라면, 그날 밤 스승을 배반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짐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무거운 시련을 허락하지는 않으신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으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여러분이 시련을 당당하도록 묵인하지 않으실 것이며,
오히려 시련과 함께 그것을 견디어 낼 방도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1코린 10,13)
결국, 우리는 끊임없이 유혹과 시련을 마주하지만, 그것들은 오히려 우리를 구원받도록 도와준다.
바로 그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동행하시며 우리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스 큉은 말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혹 속에서 오히려 하느님을 발견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길을 가르쳐주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다름 아닌 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영적 전쟁이란 복음에 신실하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적 전투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 6장 10-18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끝으로,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날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채비를 마치고서 그들에게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여러분은 악한 자가 쏘는 불화살을 그 방패로 막아서 끌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무기는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이며, 말씀의 영이신 “성령”이며, 성령이 동반된 기도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성경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곧 기도로 성경 말씀을 사용하시고, 성경말씀으로 기도하기를 제시하신다.
결국, 말씀이 유혹을 이기는 권능을 발휘하시고, 말씀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비추고 어둠을 몰아내신다.
오늘, 부활을 기다리는 우리는 텅 빈 ‘광야’에 나서야 한다.
그리고 사막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이 생명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주 너희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주님!
나의 필요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헤아리고,
소유하기보다 소유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무엇이 유익한가보다 그것이 사랑인가를 보게 하시고,
능력을 가지기보다 가진 능력을 사랑으로 쓸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으로부터 떼어 놓는 모든 것으로부터 떨어져 있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힘입어 말씀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성경공부를 좋아하면 이단에 빠질 확률이 크다.
전삼용 요셉 신부
지금 신천지 교인이 20만 명이 넘고 신천지에 들어오려고 교육받는 학생이
7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신천지에 빠지는 많은 사람들이 젊은 지식층이라는 데도 놀랐습니다.
이는 신천지가 명단을 내놓지 않았으면 누구도 모를 숫자입니다.
신천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지 않으면 됩니다. 모든 이단은 다 성경공부로 시작하고 성경공부로 끝납니다.
따라서 저는 통계는 보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는 개신교 신도들이
신천지에 훨씬 잘 넘어갈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천지에 빠지는 이들이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럴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몰라서가 아니라 이전에 가졌던 ‘교리’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자신이 가진 교리지식을 확인하고 타인에게 그 교리를 전수하는 수단입니다.
성경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사람의 교리를 자신도 모르게 흡수하여 그 사람 교리에 빠지게 됩니다.
신천지가 성경을 통해 가르치는 교리 중 하나는 ‘거짓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을 허용합니다.
그래야 새 교육생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육생들은 자신들이 이미 헤어 나오지 못하게 신천지에 빠졌을 때 쯤 자신들이 신천지에 입문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이 포섭방법을 쓰기 위해 거짓말의 교리가 허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거짓말의 교리를 그들은 성경으로 가르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려 할 때
“너희나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라. 나는 이번 축제에는 올라가지 않겠다.
나의 때가 아직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8)라고 말씀하시고는 갈릴래아에 남으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요한 7,10)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거짓말을 하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좋은 의도를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가르칩니다.
성경에서 진리를 찾아내려는 사람은 이런 가르침에 바로 빠져버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도 예수님을 성경말씀을 통해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마귀가 이렇게 성경을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성경구절을 수긍하시면서도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라는 말씀으로 반박하십니다.
성경에는 이런 말도, 저런 말도 있어서 누구든 그 말씀으로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근거를 댈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도 있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부모를 미워하라고 하십니다(루카 14,26 참조).
도대체 무슨 말씀이 진리일까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쓰신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 성경을 믿는다고 하지 않고 “교회를 믿는다.”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기본교리에서 벗어나 성경을 믿으려한다면
그것을 통해 잘못된 교리를 주입시키려는 마귀의 소행에 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가톨릭교리를 믿는 종교입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는 “진리이신 주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1381항)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으신다고 하셨다가 다시 올라가신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있다는 가정 하에서 해석해야합니다.
교리서는 또 “선한 의향(예를 들어, 이웃을 돕는 것)은 그 자체로 무질서한 행동(거짓말이나 비방)을
선하게 하거나 정당화하지 않는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1573항)고 말합니다.
선한 의도에서 하더라도 거짓말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거짓말은 (정직의 덕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가한 명백한 폭력이다.”라고 합니다.
신천지는 이런 교리가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교리를 성경을 근거로 주입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신자이고 교리를 배웠다고 하면서도
‘선한 거짓말’은 해도 된다는 식으로 말하면 그 사람 역시 교리를 모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성경공부를 하면 잘못된 교리에 빠지고 맙니다.
문제는 가톨릭교회 안에도 성경으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강의하다가 신자들에게 불붙는 영원한 지옥이
반드시 있음을 믿는 사람 손을 들어보라고 하면 10%도 안 듭니다.
지식층으로 갈수록 더 심합니다.
심지어 신학박사학위를 지니신 분들도 장소적인 개념의 ‘불붙는 지옥’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신학생들이 배우고 신자들이 배웁니다.
그렇게 배운 지식으로 성경까지 공부한 선생님들은 성경공부를 통해 자신들의 믿음을 다른 신자들에게 전해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으시고
비를 뿌려주시는 분이시라는 성경구절을 제시합니다(마태 5,45 참조).
결국 하느님은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지 않으시는 분이고 그래서 심판도 지옥도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공부를 통해 잘못된 진리가 계속 주입됩니다.
천국과 지옥의 심판 교리는 교리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만약 지옥이 없다고 말하면 지옥에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비웃는 사람이 됩니다.
지옥도 없는데 왜 괜한 고생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교리를 믿으면 가톨릭신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8)라고 하신 것처럼,
지금은 교회의 가르침인 「가톨릭교회교리」가 너무도 힘을 쓰지 못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많은 신부님들이 그렇겠지만 저도 책이나 글을 통해 「가톨릭교회교리서」의 내용을 전파하려 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교리서에 있는 내용도 제대로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책에 “우리도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썼다고 많은 이들이 반박을 합니다.
성경에 그런 이야기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근거를 교리서에서 찾아야 하겠지만, 물론 성경에도 있습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4-36 참조)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으니 본성상 ‘신’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성체는 하느님이라고 하면서 성체를 모신 하느님의 자녀는 인간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이 이상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신학박사들까지도 인간이 본성상 하느님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성경이 아니라 교회의 가르침을 보아야합니다.
교리서는 구원에 대해 이렇게 가르칩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말씀’과 친교를 맺고, 자녀 됨을 받아들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성자께서 인간이 되셨다.’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가톨릭교회교리서」 460)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우리도 하느님 신성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리입니다.
교리서도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라고 하고,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하느님: deus)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교리 앞에서 인간이 절대로 하느님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 잘못된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잘못된 교리에 물들어있으면서도 가톨릭신자라고 믿고 있을 수 있습니다.
가톨릭 교리를 믿어야 가톨릭 신자입니다.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으려면 마스크를 써야하고, 손을 깨끗이 씻어야하고,
따듯한 물을 마시는 등의 주의사항이 있습니다.
이단에 빠지지 않으려면 하루 손 씻는 만큼이라도 ‘교리’를 공부해야 합니다.
교리를 다 배우고 성경을 보아야합니다. 교리를 아는 만큼 성경이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이 짧은 생을 앗아갈 수 있지만, 잘못 배운 이단적 교리는 영혼도 앗아갈 수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