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과 이혼, 또는 독신은 성소요 자유다 “하느님 중심의 삶”
2024.8.16.연중 제19주간 금요일 에제16,1-15,60.63. 마태19,3-12
“보라, 하느님은 나의 구원,
신뢰하기에 나는 두려워하지 않네.
주님은 나의 힘, 나의 굳셈,
나에게 구원이 되어 주셨네”(이사12,2)
모든 불행과 재앙은 중심을, 하느님 중심을 잃음에서 기인합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있음도 한결같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가능합니다. 결혼과 이혼, 독신 어느 경우든 성소요 자유입니다만 하느님의 중심의 삶에 충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서 16장은 63절까지 이어지는 참 길고 복잡한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흡사 하느님 중심의 삶을 잃은 우리의 인간의 적나라한 내면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공동번역은 16장을 일컬어 “부끄러운 과거”로 명명했고 주석성경은 “예루살렘의 역사, 부정한 아내의 역사”라 명명하고 있습니다. 흡사 한반도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는 듯, 우리 인간사의 복잡다난한 내적 삶의 모습을 보는 듯 합니다. 새삼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함이 답이요 길임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두 구절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계약의 삶에 충실할 것을 상기시킵니다.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이는 네가 저지른 모든 일을 내가 용서할 때, 네가 지난 일을 기억하고 부끄러워하며, 수치 때문에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에제16;60,63)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질서와 조화, 균형잡힌 삶이 얼마나 본질적이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하느님 중심이 아니곤 도저히 인간 무지와 비극의 끝없는 깊이의 어둠의 심연과 혼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멀리 밖에서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삶의 중심과 질서를 회복함이 구원의 지혜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반갑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진리는 깨닫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다. 말이 많다는 비난은 있어도 많이 듣는다는 핀잔은 없다.”<다산>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조문도 석사가의)”<논어>
우리의 영성생활에 경청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2024년 정순택 대주교의 성모승천대축일 메시지 일부를 인용합니다.
“참다운 경청은 침묵을 필요로 합니다. 침묵을 통한 경청 속에서, 우리 자신에게 중요한 시간을 상대방에게 내어주는 ‘자기증여’의 한 형태를 발견합니다. 이 경청이야 말로 사람이 행해야 하는 ‘첫번째 봉사’이자, 현대에 필요한 ‘듣는 귀의 사도직’입니다.”
오늘 복음은 결혼과 이혼, 그리고 독신에 대해 다룹니다. 참 어렵고 힘든 것이 결혼이요 이혼이요 독신입니다. 어느 경우든 쉽지 않습니다. 좌우간 부부가 함께 살았다는 자체로 구원이요 성인이라 저는 주저없이 말합니다만 끝까지 부부생활 유지하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이혼으로 혼자 사는 이들도 많고 아예 혼자 사는 독신도 많습니다. 결혼의 대원칙은 다음 창세기 말씀입니다.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하고 이르셨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된다.”
결혼의 대원칙입니다만 부득이한 사유로 인한 이혼 역시 엄연한 현실이기에 일체의 판단은 유보되어야 합니다. 결혼과 이혼이 이렇게 힘들바에야 혼자 사는 것이 좋겠다는 제자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사실 모태에서부터 고자로 태어난 이들도 있고, 사람들 손에 고자가 된 이들도 있으며,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
그러니 결혼하여 잘 사는 이들도 있고, 이혼하여 사는 이들도, 또 다양한 독신의 형태로 사는 이들도 많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하느님 중심의 삶과 더불어 겸손한 경청의 자세요 서로의 자리와 거리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자세입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오는 결혼에 관한 잠언은 늘 나눠도 새롭습니다. 함께의 부부생활이든 수도생활이든 이혼자든 독신자등 모두에게 삶의 통찰과 지혜를 제공합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서로 구속하지는 마라
그보다 너희 영혼과 영혼이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는 마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는 마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의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 속에 묶어두지는 마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마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더불어 생각나는 위 잠언과 일맥상통하는 ‘사랑’이란 오래전의 제 자작시입니다.
“사랑이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거리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지켜냄과 견뎌냄의 고독중에
순화되는 사랑
깊어지는 사랑
하나되는 사랑이다”<1997.3>
삶의 형태는 참 다양합니다. 어떤 삶의 선택이든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랑과, 하느님 중심의 홀로와 더불어가 균형잡힌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 각자의 의무요 권리요 책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참삶에 좋은 도움을 줍니다.
“너희는 기뻐하며,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시온 사람들아, 기뻐하며 외쳐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
너희 가운데 계신 분은 위대하시다.”(이사12;3,6). 아멘.
- 이수철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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