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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해 놓고 깜박 했습니다
늦음을 용서하십시오
● 列國志 제50회
우공(虞公)이 진헌공(晉獻公)을 작별하고 먼저 돌아갔는데, 중간쯤 가다가 분분하게 도망쳐오는 백성들과 만났다. 백성들이 말하기를, 성은 이미 晉軍의 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고 하였다. 우공은 크게 노하여 외쳤다.
“빨리 수레를 몰아라!”
우공이 성에 이르자, 성루 위에 한 대장이 나타나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우공에게 말했다.
“지난번에는 우리에게 길을 빌려주시더니 이번에는 나라를 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우공은 더욱 노하여 성을 공격하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성 위에서 요란한 북소리와 함께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우공은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다. 그때 한 병사가 달려와 보고했다.
“뒤에 따라오던 군사들은 晉軍의 공격을 받아 거의 죽고, 살아남은 자는 모두 항복했습니다. 晉侯는 지금 대군을 거느리고 오는 중입니다.”
우공은 진퇴양난(進退兩難)에 빠져 탄식하였다.
“궁지기(宮之奇)의 간언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구나!”
우공은 백리해(百里奚)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때 경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소?”
백리해가 말했다.
“주군께서는 궁지기의 말도 듣지 않으셨는데, 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겠습니까? 신은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주군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 晉軍에 항복한 괵나라 장수 주지교(舟之僑)가 달려왔다. 주지교를 보자, 우공은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주지교가 말했다.
“군후께서 적의 꾐에 빠져 괵나라를 저버렸을 때 이미 나라를 잃은 것이었습니다. 이제 다른 나라로 도망가느니 차라리 晉나라에 항복하십시오. 晉侯는 도량이 넓은 분이니 군후를 해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공이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는데, 헌공이 당도했다. 헌공이 웃으며 말했다.
“과인이 여기에 온 것은 옥과 말의 보답을 얻기 위한 것이오.”
헌공은 우공을 군중에 감금하였는데, 백리해는 우공을 따라갔다. 사람들이 백리해에게 떠나라고 하자, 백리해가 말했다.
“나는 우나라의 국록을 받은 지 오래라, 그것을 갚을 따름이오.”
헌공은 성에 들어가 백성들을 안정시켰다. 순식(荀息)이 왼손에는 옥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말을 끌고 와 헌공에게 말했다.
“신의 계략은 성취되었으니, 옥을 부고에 되돌리고 말을 마구간에 되돌릴까 합니다.”
헌공은 크게 기뻐하였다.
염옹이 시를 읊었다.
璧馬區區雖至寶 구슬과 말이 비록 보물이라 하더라도
請將社稷較何如 사직(社稷)과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不誇荀息多奇計 순식의 기계(奇計)가 많다 자랑 말라.
還笑虞公真是愚 우공의 어리석음이 가소로울 뿐이로다.
헌공이 귀국하여 우공을 죽이려 하자, 순식이 말했다.
“저 어리석은 어린애 같은 자가 이제 와서 무엇을 어찌하겠습니까?”
헌공은 우공을 망명해 온 군주에 대한 예로써 대우하고, 다른 옥과 말을 주면서 말했다.
“과인은 그대가 길을 빌려준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주지교는 晉나라에 와서 대부가 되었다. 주지교가 백리해를 천거하자, 헌공은 그를 임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백리해는 주지교를 통해 자신의 뜻을 헌공에게 전했다.
“주군이 살아계신 한 다른 나라를 섬길 생각이 없습니다.”
백리해는 주지교가 돌아간 뒤 탄식했다.
“군자는 비록 다른 나라로 간다 하더라도 원수의 나라로 가지는 않는 법이니, 하물며 그 나라에서 벼슬을 할 것인가? 내 비록 다시 벼슬을 하더라도 晉나라에서는 하지 않겠노라.”
이 말을 전해들은 주지교는 자신을 비방한 것으로 여겨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그 무렵 진목공(秦穆公) 임호(任好)가 즉위한 지 6년이 되었는데, 아직 중궁(中宮)이 없었다. 목공은 대부 공자 칩(縶)을 晉나라로 보내, 晉侯의 장녀(長女) 백희(伯姬)를 부인으로 얻고자 청혼하였다.
[제5회에, 진양공(秦襄公) 영개(嬴開)가 견융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평왕(平王)으로부터 秦伯으로 봉해져 부용에서 비로소 제후국이 되었으므로, 진양공은 秦나라 초대 군주가 된다. 제7회에 秦의 역사를 서술하였고, 양공의 아들 문공(文公)에 대해 얘기하였다. 진목공은 14대 군주이다.]
진헌공이 태사(太史) 소(蘇)에게 산가지점을 쳐보게 했더니, ‘뇌택귀매(雷澤歸妹)’라는 괘(卦)를 얻었는데, 제육효(第六爻)의 효사(爻辭)가 다음과 같았다.
士刲羊 장사가 양을 찔렀으나
亦無也 피가 나지 않고
女承筐 여인이 광주리를 이었으나
亦無貺也 담긴 것이 없네.
西鄰責言 서쪽 이웃이 꾸짖는 말에
不可償也 대꾸할 말이 없네.
태사 소가 효사를 해석하여 말했다.
“秦나라가 서쪽에 있는데, 서쪽의 이웃이 꾸짖는다고 하니, 화목하지 못할 징조입니다. 그리고 ‘귀매(歸妹)’는 여인이 시집가는 일을 말하는데, ‘진(震)’이 변하여 ‘리(離)’가 되니 그 괘는 ‘규(睽)’가 됩니다. ‘규’와 ‘리’는 모두 불길하므로, 이 혼사는 허락하면 안 됩니다.”
헌공은 다시 태복(太卜) 곽언(郭偃)에게 거북점을 치게 하였는데, 점괘가 아주 길하게 나왔다. 점괘는 다음과 같았다.
松柏為鄰 소나무와 잣나무가 이웃이 되고
世作舅甥 대대로 장인과 사위가 되며
三定我君 우리 군주를 세 번 정해준다.
利於婚媾 혼인하면 이롭고
不利寇 싸우면 이롭지 않다.
[두 점괘가 훗날 어떻게 징험될까?]
태사 소가 효사를 들어 거북점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하자, 헌공이 말했다.
“옛말에 ‘산가지점을 따르는 것은 거북점을 따르는 것만 못하다.’고 했소. 거북점이 이미 길한 것으로 나왔으니, 거스를 수 있겠는가? 내가 듣건대, 秦은 백제(百帝)가 되라는 천명을 받고 그 후에 더욱 강대해졌다고 하니, 거절해서는 안 될 것이오.”
진헌공은 진목공의 청혼을 허락하였다.
[제39회에, 진헌공은 여희(驪姬)를 부인으로 삼기 위해 역시 태사 소의 산가지점과 태복 곽언의 거북점을 쳤었다. 그때 두 점괘가 모두 불길하다고 나오자, 헌공은 점이란 귀신의 모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둘 다 물리치고 여희를 부인으로 삼았다. 이번에는 하나는 불길하다고 나오고 하나는 길하다고 나오니, 길한 점괘를 받아들인다. 자신이 바라는 점괘만 받아들일 양이면, 점을 대체 왜 보는가?
제7회에, 진문공(秦文公)의 꿈에 뱀이 어린아이로 변하여 말하기를, ‘나는 상제(上帝)의 아들인데, 상제께서 그대를 백제(百帝)로 삼으시고 서방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자 칩이 秦나라로 돌아가는 도중에,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얼굴이 피를 뿜는 듯 붉고, 코가 우뚝하며, 수염은 규룡(虯龍)의 수염처럼 꼬불꼬불하였다. 두 손에 각각 호미를 들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호미로 땅을 파놓은 깊이가 몇 자나 되었다.
[‘규룡’은 용의 새끼이다.]
공자 칩이 종자에게 호미를 가져오게 하여 살펴보려고 했는데, 호미가 너무 무거워 종자들이 들지를 못했다. 공자 칩이 성명을 물었더니, 그가 대답했다.
“저는 공손씨(公孫氏)이며 이름은 지(枝)이고, 字는 자상(子桑)입니다. 晉侯의 먼 친척입니다.”
공자 칩이 말했다.
“그런 재주를 지니고서 어찌하여 농사를 짓고 있소?”
공손지가 대답했다.
“천거하여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 秦나라로 가지 않겠소?”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를 이끌어주시겠다면, 그건 제가 바라던 바입니다.”
공자 칩은 공손지와 함께 秦나라로 돌아갔다. 공자 칩이 진목공에게 공손지를 천거하자, 목공은 공손지를 대부로 삼았다.
목공은 晉侯가 청혼을 허락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공자 칩을 晉나라로 보내 납폐(納幣)하고 백희를 맞이해 오게 하였다.
진헌공이 신하들에게 누구를 잉신(媵臣)으로 보낼까 묻자, 주지교가 말했다.
“백리해는 晉나라에서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으니, 그 마음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멀리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헌공은 백리해를 잉신으로 삼아 백희를 따라 秦나라로 가게 하였다.
[‘잉신’은 지체 높은 여인이 시집갈 때 따라가는 신하인데, 신분이 낮았다. 주지교가 백리해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한 것이다.]
한편, 백리해는 원래 우나라 사람으로서, 字는 정백(井伯)이다. 나이 30세에 아내 두씨(杜氏)를 맞이하여 아들을 얻었다. 집이 워낙 가난하여 출세할 길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나고자 해도 처자가 의지할 데가 없어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두씨가 백리해에게 말했다.
“제가 듣건대, ‘남자는 천하에 뜻을 두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나이가 이미 장년인데, 벼슬길을 도모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처자만 지키고 앉아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저 혼자서도 능히 살아갈 수 있으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집에는 다만 씨암탉 한 마리가 있을 뿐이었는데, 두씨는 그걸 잡아 요리하여 남편을 전송하고자 하였다. 땔나무가 없어 문빗장을 쪼개어 불을 지피고 거친 현미밥을 한 그릇 지어 떠나는 남편을 배불리 먹였다. 두씨는 어린 것을 안은 채 남편의 옷소매를 붙잡고 울면서 말했다.
“훗날 부귀하게 되거든 부디 잊지 마십시오.”
백리해는 아내와 작별하고 제나라로 갔다.
백리해는 제양공(齊襄公)에게 벼슬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천거하여 이끌어주는 이가 없었다. 오랜 세월을 곤궁하게 지내다가 필경은 구걸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40세였다.
백리해는 구걸하다가 질(銍) 땅으로 갔는데, 그곳에 살고 있던 건숙(蹇叔)이란 사람이 백리해의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고 말을 건넸다.
“당신은 구걸할 사람이 아닌 것 같소.”
건숙은 그의 성명을 묻고는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시사(時事)에 대해 담론했다. 백리해의 응답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고 논리정연 하였다. 건숙은 탄식했다.
“그대와 같은 재능을 지니고서도 이처럼 곤궁하다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겠소?”
건숙은 백리해를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의형제를 맺었다. 건숙이 백리해보다 한 살 위였으므로, 백리해는 건숙을 형이라 불렀다. 건숙의 집도 역시 가난했기 때문에 백리해는 소를 쳤다.
그때 공손 무지(無知)가 제양공을 죽이고 새로 군위에 올라 현인을 구한다는 방을 내걸었다.
[제28회에, 연칭과 관지부가 제양공을 죽이고 공손 무지를 군위에 올렸다.]
백리해가 이에 응하고자 하였으나, 건숙이 말렸다.
“선군의 아들이 지금 타국에 가 있는데, 무지가 분수를 넘어 군위를 찬탈하였으니 끝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네.”
[제29회에, 공손 무지는 군위에 오른 지 한 달이 조금 지나 옹름의 비수에 찔려 죽었다. 제30회에 거나라에 가 있던 소백(제환공)이 돌아와 포숙아의 도움으로 군위에 올랐다.]
백리해는 건숙의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
그 뒤, 주왕실의 왕자 퇴(頹)가 소를 좋아하여, 소 기르는 자들이 모두 큰 상을 받았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제38회에, 주장왕(周莊王)의 아들 퇴는 소를 좋아하여 수백 마리를 길렀다. 위국 등 다섯 대부가 반란을 일으켜 주혜왕(周惠王)을 축출하고 퇴를 왕위에 올렸지만, 얼마 후 정여공(鄭厲公)과 서괵공(西虢公)이 주혜왕을 복위시키고 퇴는 죽음을 당했다.]
백리해가 주나라로 가려 하자, 건숙이 충고했다.
“대장부는 가벼이 남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닐세. 일단 벼슬을 했다가 주인을 버린다면 그것은 불충(不忠)이요, 함께 환난을 당한다면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일세. 이번에 아우가 가더라도 반드시 신중해야 하네. 나도 곧 가사를 정돈하고 뒤를 따를 터이니, 주나라에서 만나세.”
백리해는 주나라에 도착하여 왕자 퇴를 알현하고 소 기르는 방법을 설명했다. 왕자 퇴는 기뻐하며 백리해를 가신(家臣)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때 건숙이 와서 함께 왕자 퇴를 만났다. 돌아오는 길에 건숙이 백리해에게 말했다.
“퇴는 뜻은 크나 재능이 부족하네. 그리고 그가 가까이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첨하는 자들뿐이니, 필시 바라서는 안 될 일을 도모하게 되어 실패할 것이네. 떠나는 것이 좋겠네.”
백리해는 처자와 이별한 지도 오래되어 고향인 우나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자 건숙이 말했다.
“우나라에 궁지기라는 현신이 있는데, 나와는 친한 사이일세. 서로 헤어진 지 오래되어 나도 그를 만나고 싶으니 함께 가세.”
백리해는 건숙과 함께 우나라로 갔다.
그때는 이미 더 이상 살 길이 막막해진 백리해의 아내 두씨가 아들을 데리고 멀리 떠난 뒤였다. 아무도 그들이 간 곳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백리해는 복받치는 슬픔을 참을 길이 없었다.
건숙은 궁지기를 만나 백리해의 현명함을 얘기하였고, 궁지기는 백리해를 우공에게 천거하였다. 우공은 백리해를 중대부에 임명하였다.
건숙이 백리해에게 말했다.
“내가 보건대, 우공은 소견이 비좁고 고집이 센 사람이니, 모실만한 주군이 못되네.”
백리해가 말했다.
“하지만 이 아우는 너무나 오랫동안 곤궁하게 지내다 보니, 마치 물고기가 육지에 올라와 있는 것만 같습니다. 다만 접시 물에라도 적시고 싶은 심정입니다.”
“아우가 너무 가난하여 벼슬을 하겠다니, 내 어찌 말리겠는가? 만약 훗날 나를 만나고자 하거든 송나라의 명록촌(鳴鹿村)이라는 곳으로 오게. 나는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살 작정이네.”
건숙은 떠나갔고, 백리해는 우공을 섬기게 되었다.
그 후 우공이 나라를 잃자, 백리해는 떠나지 않고서 말했다.
“내 이미 지혜롭지 못했는데, 또 불충할 수 있겠는가?”
주지교의 간계로 시집가는 백희의 잉신으로 秦나라로 가게 되자, 백리해는 탄식했다.
“내가 세상을 다스릴 만한 재능을 지니고서도 현명한 군주를 만나지 못해 뜻을 펼치지 못했는데, 이제 늙은 몸이 되어 잉신으로 가게 되어 하인이나 첩과 같은 신세가 되다니, 이보다 더 큰 치욕이 어디 있겠는가!”
백리해는 秦나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쳐서 송나라로 가려다가, 길이 막혀 초나라로 갔다.
백리해가 완성(宛城)에 이르렀을 때, 그곳 시골사람들이 그가 첩자가 아닐까 의심하여 붙잡았다. 백리해가 말했다.
“나는 우나라 사람인데, 나라가 망해서 이곳으로 도망쳐 왔소.”
“그대는 뭘 잘하는가?”
“나는 소를 잘 키웁니다.”
시골사람들은 백리해를 풀어주고 소를 키우게 하였다. 백리해가 소를 돌보기 시작하자 소들은 날마다 살이 찌고 윤택해져 갔다. 시골사람들은 대단히 기뻐하였다.
초왕이 소문을 듣고, 백리해를 불러 물었다.
“소를 키우는 데 특별한 방법이 있는가?”
백리해가 대답했다.
“때를 맞춰 먹여 주고, 그 힘을 아껴주어야 하며, 소와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대의 말이 참으로 좋다. 이는 비단 소뿐만 아니라 말을 키우는 데도 마찬가지이리라.”
초왕은 백리해를 어인(圉人)으로 삼아 남해에서 말을 키우게 하였다.
[‘어인’은 말을 기르는 사람이다.]
한편, 진목공(秦穆公)은 晉나라에서 온 잉신 가운데 백리해의 이름은 있는데 사람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 공자 칩이 말했다.
“그는 옛 우나라의 신하인데, 오다가 도망쳤습니다.”
목공이 공손지에게 물었다.
“그대는 晉나라에 있었으니, 백리해에 대해 알고 있으리라. 그는 어떤 사람이오?”
공손지가 말했다.
“그는 현인입니다. 우공에게 간언을 해 봐야 소용없음을 알고 간언을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지혜로운 것입니다. 또 우공을 따라 晉나라로 갔으며 의(義)를 지켜 晉나라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충성스러운 것입니다. 그는 세상을 다스릴 만한 재능을 지니고 있는데, 다만 때를 만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과인이 어떻게 하면 백리해를 얻어 임용할 수 있겠소?”
“신이 듣건대, 백리해의 처자가 초나라에 있다고 합니다. 그는 필시 초나라로 망명했을 것이니, 초나라로 사람을 보내어 알아보십시오.”
목공은 사람을 초나라로 보냈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했다.
“백리해는 초왕을 위하여 남해에서 말을 키우고 있습니다.”
목공이 공손지에게 말했다.
“과인은 초나라에 많은 예물을 주고 그를 불러오고 싶은데, 초나라가 허락하겠소?”
공손지가 말했다.
“그렇게 하면 백리해는 결코 오지 못할 것입니다.”
“왜 그렇소?”
“초왕이 백리해에게 말을 키우게 하고 있다니, 그것은 아직 백리해의 현명함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주군께서 많은 예물을 주고 백리해를 달라고 하면, 이는 곧 백리해의 현명함을 초왕에게 알려주는 셈입니다. 그러면 도리어 초왕이 그를 등용하려 할 것이니, 어찌 우리에게 보내겠습니까? 주군께서는 그가 도망친 잉신이기 때문에 그를 처벌하기 위해서라고 하시고, 천한 속전(贖錢)을 보내십시오. 그것이 바로 관중이 노나라를 탈출한 방법입니다.”
[‘속전’은 죄를 면하기 위해 바치는 돈이다. 제31회에, 노장공이 관중을 죽이려 하자, 습붕은 포숙아가 일러준 대로 관중이 제환공의 원수임을 강조하여 관중을 제나라로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옳거니.”
목공은 양피(羊皮) 다섯 장을 초왕에게 보내면서 말을 전하게 했다.
“폐읍의 천신(賤臣) 백리해가 상국으로 도망쳤으니, 과인은 그를 붙잡아 처벌하고자 합니다. 그 속전으로 양피 다섯 장을 보냅니다.”
초왕은 秦나라와의 우호를 잃을까 염려하여, 백리해를 붙잡아 秦나라에 넘겨주었다. 백리해가 秦나라로 잡혀갈 때, 마을 사람들은 그가 가면 죽으리라 생각하고 그를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백리해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듣건대, 秦侯는 패왕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어찌 한낱 잉신에게 이토록 마음을 쓰겠소? 이는 필시 나를 초나라에서 구하여 등용하려는 것이니, 이번에 가면 부귀를 누리게 될 것 터인데, 울기는 왜 우시오?”
백리해는 태연히 함거를 타고 떠났다.
함거가 秦나라 국경에 도착하자, 공손지가 영접을 나와 목공에게 안내하였다. 목공은 백리해를 보고 물었다.
“춘추가 어떻게 됩니까?”
백리해가 대답했다.
“겨우 일흔입니다.”
목공은 탄식하였다.
“아깝도다! 너무 늙었구려!”
“신에게 나는 새를 쫓으라든가 맹수를 잡으라 하신다면, 신은 확실히 늙었습니다. 하지만 신에게 앉아서 국사를 보라 하시면 아직도 젊습니다. 옛날에 강태공(姜太公)은 나이 80세에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질 하다가 문왕(文王)이 그를 등용하여 상부(尙父)로 삼았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왕실을 세웠습니다. 이제 신이 주군을 만난 것은 강태공이 문왕을 만난 것보다 10년이나 빠릅니다.”
목공은 그 말을 장하게 여기고, 자세를 바로하고 다시 물었다.
“폐읍은 융적 사이에 있어 중국과 회맹하지도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노인장께서 폐읍이 다른 제후들에 뒤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백리해가 대답했다.
“주군께서는 신을 망국의 포로로 생각하지 않으시고, 또 신이 이미 늙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하문(下問)하시니, 신이 비록 어리석으나 어찌 최선을 다해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무릇 이 옹(雍)·기(岐) 땅은 문왕과 무왕이 일어났던 곳입니다. 산은 마치 개 이빨과 같고 들판은 긴 뱀과 같습니다. 주나라가 이 땅을 지켜내지 못하고 秦나라에 주었으니, 이는 곧 하늘이 秦나라를 열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융적 사이에 있으니 병사는 강하고, 중국과 회맹하지 않았으니 힘을 기를 수 있습니다. 서융과의 사이에 소위 나라라고 하는 것이 수십 개 있는데, 그들을 정복하여 그 땅을 경작하고 그 백성들을 훈련시킨다면, 중국의 어떤 제후도 감히 주군과 겨룰 수 없을 것입니다.
주군께서는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한편 힘으로 정복하여 서방을 차지하십시오. 그러고서 산천의 험난함을 끼고 중국에 임하여 틈을 보아 나아가시면, 은덕과 위엄이 주군의 손 안에 있으니, 패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7회에, 견융이 기·풍 땅을 침략하여 점거하자, 주평왕은 진양공(秦襄公)에게 견융을 물리치면 그 땅을 秦나라에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秦나라는 기·풍 땅을 얻어 그 세력이 더욱 강대해졌고, 옹(雍)에 도읍을 정하여 비로소 다른 제후들과 대등하게 되었다.]
목공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과인에게 정백(井伯; 백리해)이 있는 것은, 제나라에 중부(仲父)가 있는 것과 같도다!”
그날부터 목공은 백리해와 더불어 사흘 동안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말이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마침내 목공은 백리해를 상경(上卿)으로 임명하여 국정을 맡기고자 하였다.
秦나라 사람들은 백리해를 오고대부(五羖大夫)라고 불렀으니, 이는 양피 다섯 장을 주고 백리해를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고(羖)’는 검은 양이다.]
염옹이 시를 읊었다.
脫囚拜相事真奇 죄수가 재상이 된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
仲後重聞百里奚 중부 다음으로 백리해가 나왔도다.
從此西秦名顯赫 이로부터 서진(西秦)의 이름이 빛났으니
不虧身價五羊皮 양피 다섯 장의 대가를 톡톡히 받았도다.
백리해는 상경의 지위를 사양하고, 한 사람을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려고 하였다.
첫댓글 진시황 영정 중국통일(비시221), 과연 영정은 조나라에서
장사한 상인 여불위의 핏줄인가?
감사합니다
중국의 역사는 흥미 진진합니다
옮겨쓰는 저도 복잡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