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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13,14.43-52>
그 무렵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14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43 많은 유다인과 유다교로 개종하여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이 따라오자,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들에게 이야기하며
하느님의 은총에 계속 충실하라고 권하였다.
44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45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46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47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48 다른 민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49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50 그러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귀부인들과 그 도시의 유지들을 선동하여,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
51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52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 제2독서
<요한 묵시록의 말씀 7,9.14ㄴ-17>
나 요한이
9 보니,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그들은, 희고 긴 겉옷을 입고 손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또 어린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원로 가운데 하나가
14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
15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16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17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0,27-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부활 제4주일이며, 착한 목자 주일이요 성소주일이며, 동시에 어버이 날이고 부처님 오신 날이기도 합니다.
이날 우리는 참으로 귀한 말씀을 듣습니다.
사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목소리들이 혼탁하게 들려옵니다.
온갖 뉴스들이 들려오고, 자신 안에서도 요란스런 생각들의 소리가 거세게 흘러 다닙니다.
우리는 이 많은 소리들의 홍수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구별할 줄 알고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대체 누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세상에 흘러 다니는 뉴스 소문들인가?
타인들의 평가나 비난인가?
자기 자신의 목소리인가?
주님의 목소리인가?
착한 목자주일이요, 성소주일인 오늘 제1독서에서는 모든 시대의 목자들을 위한 모델로 사도 바오로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명령하신 바를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사도13,47)라고 밝히며,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차 이었다.”(사도 13,52)고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하늘나라에서 어린양이라 불리는 목자의 보살핌으로 안전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을 보여주는데, “그분께서는 그들을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하시고, 생명의 샘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며,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으 닦아 주실 것이다.”(묵시 7,16-17 참조) 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요한복음 10장으로 '착한 목자'에 대한 장으로, 예루살렘에서 ‘성전봉헌축제’ 때 벌어진 논쟁을 들려줍니다.
‘봉헌절’(ενκαíνοσ)이란 단어는 ‘새롭게 함’, ‘쇄신’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새 포도주’(마태 9,17;26,29), ‘새 것’(마태 13,52), ‘새 계명’(요한 13,34), ‘새로운 계약’(2코린 3,6;히브 8,8.13.), ‘새로운 창조물’(2코린 5,17), ‘새 사람’(갈라 6,15;에페 2,15), ‘새 하늘 새 땅’(2베드 4,13;묵시 21,1), ‘새 노래’(묵시 5,9) 등에서도 사용되고 있듯이, 새롭게 되는 것, 곧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새롭게 되는 날’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요한 10,27)
여기에는, ‘듣다’, ‘알다’, ‘따르다’, ‘준다.’ 라는 동사가 연이어 나옵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 목소리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들려오는 그 많은 말들이 아니라 참된 말씀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이라면, 분명 그 많은 목소리 속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듣는 데는 먼저 자신의 생각이나 고집을 내려놓고 듣는 일이 필요합니다.
'듣다'라는 이 말에는 ‘더 깊이’라는 뜻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단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알아듣는 것’, 곧 ‘마음으로 듣는 것’, 마음으로 깨달아 알아듣는 것입니다.
곧 내면적인 것인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며, 받아들여 관계 맺는 인격적인 교류를 뜻합니다.
또한 '알다'의 단어의 뜻은 단순히 정보를 안다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밀애의 영역에서 체험하여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곧 목자와 양은 서로를 몸소 체험하여 경험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성소의 길은 ‘말씀을 듣고 체험하면서 알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을 바꾸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막상 그 길을 가면서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내려놓지 못하고 고집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소의 길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따르다'는 뜻은 ‘받아들이다’, ‘환영하다’란 의미로, 나아가서 ‘곁에 있다’는 표현입니다.
곧 ‘곁에서 함께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세 동사는 모두가 관계를 깊이 맺는 진실된 ‘관계성’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진정한 관계가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그리고 이 ‘주님의 사랑’을 믿는 이에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요한 10,28)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그들을(내 양들) 내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
(요한 10,27)
그렇습니다.
'당신의 손'은 ‘당신의 권능’을 드러냅니다.
당신의 손에서 아무도 그분의 양들을 빼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잘 알아들여야 할 것은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지, ‘아무도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곧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채갈 수는 없지만, 자칫 스스로가 자유로이 그분의 손에서 떨어져 내릴 수는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처럼 스스로 완고함으로 '주님의 목소리'를 믿지 않고 배척하는 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가리켜 “너희는 내 양들이 아니기 때문이다.”(요한 10,26)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결코 우리는 예수님의 손에서 스스로 빠져나가는 일이 없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서 아무도 양들을 빼앗아갈 수 없음을 목자이신 당신은 목장의 주인이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서 이렇게 밝히십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요한 10,30).
이와 마찬가지로 목자와 양들도 서로 알아보고 한 몸을 이루고 있으며, 목자는 당신의 지체인 양들을 결코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무엇보다도 양들을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양들을 구하시기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요한 10,27)
주님!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서 숨지 않고 피해 달아나지 않게 하소서!
당신 면전에 나서서 주님임을 알고 당신 사랑의 목소리 듣게 하소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게 하시고 깨달아 알게 하소서!
깨달아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새기게 하시고 따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을 따름이 제 행복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아쉬울 것 없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오늘 부활 제4주일은 예수께서 나에게 어떤 분인가에 대한 가르침으로서, 당신이 우리의 목자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이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선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저 그분의 목소리를 모르지 않는다는 그 정도입니까?
그 정도가 아니라 수없이 많은 목소리 중에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뜻이고, 둘의 관계는 대단한 사랑의 관계이며 특별한 관계, 아니 각별한 관계라는 뜻입니다.
이는 짐승이건 사람이건 어미와 새끼 간에 형성된 관계와 같습니다.
괭이 갈매기나 팽귄이 같은 시기에 새끼를 낳고 같이 키우는데도 어미와 새끼는 그 많은 새끼 중에 또 그 많은 어미 중에 헷갈리지 않고 서로의 소리를 기가 막히게 알아듣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어미는 자기 아이를 기가 막히게 잘 알아봅니다.
수많은 군인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도열해 있어도 그중에서 자기 자식을 즉시 알아보는데 이것은 아비도 못하는 겁니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저희 청원소에서 옛날 어버이날에 부모님을 모셔 식사도 하고 재미있는 시간도 가졌답니다.
그때 자기 자식 알아맞추기 Blind test, 곧 눈가리고 맞추기를 했고, 열 몇 명의 청원자의 손만 만져보고 자기 아들을 알아맞추는 거였는데, 저는 그 얘기를 나중에 듣고 어찌 그런 위험한 게임을 했냐고, 당신 아들을 맞추지 못한 어머니가 계시면 어찌하려고 그랬냐고 나무랐는데, 그것은 저의 기우였고 모든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알아맞추셨다는 것입니다.
목자와 양도 이처럼 특별한 애착 관계가 형성되면 서로에게 각별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사랑의 관계일 뿐 아니라 생명을 주고받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양이 자기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면 그것은 곧바로 죽음이지요.
그것은 목자와 떨어지지 않고 따르는 것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일사후퇴 때 수많은 피난민에 섞여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할 때 나를 부르는 부모의 소리를 알아듣고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아이와 같지요.
양이 목자와 떨어지면 죽는 것이고, 그러니 목자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귀로는 목소리를 알아듣고, 눈으로는 목자를 놓치지 말고 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목자를 외면해서 안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흘낏 봐서도 안 됩니다.
정면으로 봐야 하고 집중해서 봐야 놓치지 않고 따라 갈 수 있고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권고 6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모든 형제들이여,
우리 모두 당신 양들을 속량하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견디어 내신 착한 목자를 주의 깊게 바라봅시다.
주님의 양들은 고난과 박해, 수치와 굶주림, 연약함과 유혹 등 모든 점에서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주의 깊게 바라보라는 뜻으로 Attendo 동사를 씁니다.
이는 영어의 Attention과 같은 뜻으로 바라봐야 할 것을 정면으로 놓고 눈과 귀와 모든 감각과 온갖 주의를 다 기울여보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고, 그래서 시편 22편처럼 목자가 인도하는 푸른 풀밭으로 가 그분이 아쉬울 것 없이 차려주시는 상에서 그분이 술잔 가득히 따라주시는 술을 마시며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 작은 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부르심에 응답하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우리를 신앙에로 이끌어 주신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고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의 봉사직에 부름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고 후원하는 날입니다.
'성소는 믿음에 기초를 둔 희망의 징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함께 살도록 부르시며,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는 것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예수님께 주도권을 드리고, 우리의 삶 자체를 그분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사제성소와 봉헌 생활 성소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는 경험과, 그분과 나누는 진지하고 확신에 찬 대화에서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성소들이 세상을 위한 희망의 징표가 되게 하시는데, 이는 그들의 삶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그분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 피상적이고 덧없는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예수님을 본받아 다른 이들을 섬기고자 하는 갈망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사랑과 아낌없는 투신의 길, 힘들지만 용기가 필요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이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의 증인이 될 것이며,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1베드 3,15) 줄 알게 될 것입니다(베네딕도 16세).
두려움이 없이 세상의 희망이 될 젊은이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선교사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선포하는 선교의 측면은 사제성소와 특별하고 긴밀한 관계를 맺습니다.
자신을 온전히 바쳐 복음에 봉사하는 이들 가운데 특별히 말씀을 선포하고 성사를 집전하도록 부름 받은 이들이 사제입니다.
그들은 미사 안에서 생명의 빵을 쪼갬으로써 공동체 건설을 위하고 영적 양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수도자들은 성령의 활동에 이끌려 정결과 가난과 순명을 서약하고 철저하게 복음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관상생활 수도자들은 지속적인 공동기도를 통하여 온 인류를 위하여 끊임없이 간구하며, 활동생활 수도자들은 다양한 사랑의 활동을 통하여 모든 이에게 하느님 사랑과 자비를 생생하게 증언하며 세계 복음화에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복음 선포의 사명을 계속 수행하고 신앙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새로운 사도들을 풍성히 내려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 뿐 아니라 신앙의 교육자와 교리 교사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희망하며 믿음과 헌신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소계발의 시작과 주체는 누구인가?
본당신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가정이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가정에서 기도하는 자녀, 기도하는 사제, 수도자가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그 안에서 더 큰 신앙인이 성장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겠습니다.
성소자가 나올 수 있도록 기도와 희생으로, 또 물질로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남의 가정에서 나올 수 있기를 바라지 말고 자기 가정에서 나올 수 있도록 봉헌하십시오.
잘나고 똑똑한 자기자녀는 시집 장가 못 보내니 아까워서 안 되고, 남의 집 자녀는 괜찮고…이러면 되겠습니까?
성소자를 하나씩 낳아요!
연세 많으신 분도 나는 이제 틀렸어! 하지 마시고 자녀의 대에서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오.
그것도 안 되면 손자 손녀들의 대에서라도… 꼭 들어주실 것입니다.
마음으로 자녀를 봉헌하고 손자손녀를 봉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소의 동기는 아주 다양합니다.
별것 아닌 것을 통해서도 부르심을 주십니다.
예전에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에도 신부님들께는 쌀밥을 대접하고 밥상에 김이 올라가고 달걀이 놓여 있었기에 그것을 보고 신부가 되고 싶은 꿈을 키운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시골 공소에서 지냈는데 어른들로부터 주일 공소예절에 나오는 것으로 칭찬을 듣게 되어 더 열심히 하게 되었고 “너는 나중에 신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공소 회장님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함께 어울리던 회장님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사람은 수녀가 되었으며 한 사람은 결혼을 하여 자녀에게 성소의 꿈을 키워주고 있습니다.
결혼성소도 좋고 수도자, 성직자의 성소가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녀에로 부르심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은총입니다.
세례성사에로 부름을 받은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특별한 부름으로 성직자, 수도가가 됩니다.
특별성소인 성직자, 수도자의 부름도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만큼 가정 안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각 가정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은총을 입기를 기도합니다.
한자 성어 중에 ‘염화미소’라는 말이 있습니다.
‘꽃을 집어 들고 웃음을 띠다.’ 란 뜻으로 말도 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에로 전하는 일을 이르는 말입니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그들 앞에서 연꽃 한 송이를 집어 들어 말없이 약간 비틀어보였는데 가섭이란 제자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긋이 웃었답니다.
다시 말하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이심 전심’으로 통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 간에 서로 통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7-28)고 하셨는데, 진정 나는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알고 계신데 나는 그분의 목소리를 못 알아듣고 있으니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그분의 목소리에 익숙해야 하고 그분의 행동에 익숙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내 목소리를 줄이고 침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토마스 커킹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록 3장 20절의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세상의 빛’이라는 그림을 설명해 드린 적이 있는데,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고요해야 합니다.
내 마음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정돈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문을 두드리고 아무리 얘기를 하려해도 들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다.
식사를 할 겨를도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이른 새벽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셨습니다.
조용한 곳에 가셔서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상살이에 바쁘고 지치고 힘이 들지만 그럴수록 한적한 곳을 찾아 하느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가는 길이 그분 마음에 드는 길인지 알게 되고 또 그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루 잠시 잠깐이라도 성경을 읽으면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침묵 속에서 그 말씀대로 살 것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감각적으로 들으려고 애쓰지 말고 먼저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펴십시오.
사실 성경은 읽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싶으면 먼저 믿음으로 성경을 받아들이십시오.
삶의 위로와 희망, 지혜, 그리고 구원이 거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십시오.
놀라운 힘과 능력의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삶의 여정에는 많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읽어줄 수 있는 폭 넓은 마음이 요구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하고 부자간에, 부부간에, 이웃간에도 서로 잘 통했으면 좋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 손절 대상 1순위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와 관계를 지속하고 또 누구와 관계를 끊어야 하는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손절했다가 결국 혼자 남겨질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을 붙잡으려다 사람에 치여 고통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관계의 주체를 나로 두기 때문입니다.
‘금쪽상담소’에 모니카 씨가 나와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모니카 씨는 주위의 모든 사람을 자신이 다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이 큽니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책임져야 해서 누군가를 더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합니다.
더 깊어지는 사랑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너무 힘겹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모니카 씨가 태어날 때부터 아프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향이 컸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평생 아프셔서 모니카 씨와 외식 한번 해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놓인 아버지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물론 모니카 씨가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 다른 아이들과 비교되기 시작했을 때 아버지의 부재를 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사랑한다면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책임을 분명히 져 주겠다는 마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관계를 어렵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다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관계의 지속과 끊음에 관한 판단이 명확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뜻대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를 위해 ‘파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파견’ 받으신 분이십니다.
세례받은 우리 모두도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받습니다.
파견받은 사람은 파견하는 대상이 보내는 바로 그 대상에게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를 파견할 때 파견받는 이를 알아볼 수 있는 바로 그 대상에게 파견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요한 5,44-45)
이것이 파견받은 이의 관계에 대한 자세입니다.
파견받은 이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굳이 집착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파견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라고 하시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라고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맡겨주셨기에 아버지의 힘이 나를 통해 그가 떠나지 않게 만들 것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나에게서 떠나는 사람은 나의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없어질 때 나는 나의 곁에 있는 사람이 떠나지 못하게 갖은 집착을 하다가 나만 피곤해집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내 힘으로 모두를 책임지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더 큰 피해를 봅니다.
소위 ‘종교개혁자’라 불리는 ‘마르틴 루터’란 인물이 있습니다.
한때 벼락으로 친구는 죽었고 자신은 살았습니다.
그는 살려만 주시면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수도회에 들어온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철저한 고행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때 바티칸 성당을 짓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교황과 교회가 소위 ‘면죄부’라는 것을 팔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면죄부는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닌 연옥벌을 면하게 해 주는 ‘대사’였습니다.
죄와 벌은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그토록 두려워 떨게 했던 죄책감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교회의 모습을 차마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95개 조 반박문을 내걸었습니다.
교회도 탐욕에 눈이 거의 멀었을 때였기에 자신이 하는 행위를 정당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성경을 근거로 반박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경을 통해 주장을 펼쳤고 이것을 루터도 성경을 통해 반박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입니다.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석이 됩니다.
만약 유대교와 개신교가 성경을 놓고 싸운다면 어떨까요?
싸움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체를 두고 그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인지 아닌지, 개신교와 싸우면 어떨까요?
그 싸움도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진리의 기둥이 교회라고 하는데도, 교회가 루터의 생각에 말려버린 것입니다.
교회를 거부하는 루터에게 교회는 오히려 끌려다녔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 루터는 그 논박 내용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여 유럽에서 루터의 명성은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결국 교회가 세력이 너무 커진 루터를 이젠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되었습니다.
루터가 하는 일을 그냥 지켜봐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의 싸움은 승리하였고 현재의 개신교가 탄생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세상 것에 집착할 때 오히려 관계에 대한 집착도 커집니다.
교회는 본인이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되었고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는 가차 없이 끊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그리스도께서 파견한 대리인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게 끊임없이 상대해 주는 것 자체가 자신의 권위가 인간적인 것들 안에서 나온다고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파견되었다면 굳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파견하신 분은 파견된 자를 알아볼 수 있는 이에게 파견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예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아메리카 대륙이나 아프리카 대륙으로 선교를 나간 이들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자신들을 몰라보는 이들에게 결국엔 무력을 쓰고 학살하고 강제로 믿게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과달루페 성모님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시각이 바뀌었습니다.
과달루페 성모님을 보며 그들은 드디어 자신들이 섬기던 신이 가톨릭교회를 통해 들어왔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교회가 노력하지 않아도 수많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자 몰려들었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다가갈 때 무력을 쓰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선교가 아닙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눈이 열리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파견받은 자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에게는 굳이 대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만 다가가면 됩니다.
그리고 나의 사람들이 되었다고 그들에게 집착할 필요도 없습니다.
관계의 주체는 내가 아닙니다.
나를 그리스도의 파견자라 여기면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집니다.
우리는 어차피 승리할 수밖에 없는 관계로 파견받은 것입니다.
다윗 왕은 우리야 장군을 가장 싸움이 치열한 곳에 파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 다른 군인들은 뒤로 빠지라고 몰래 일렀습니다.
이는 우리야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해 우리야를 죽이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만약 승리할 수 없는 곳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파견하신다면 더는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임금이 암행어사를 파견하는데 마패도 알아보지 못하는 산적 떼에게로 파견하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파견받는 것이고 우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은 당연히 우리가 파견받아 만나야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것처럼 “네가 할 일을 하여라!”라고 하며 떠나보내면 됩니다.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파견받습니다.
그리고 그 파견에는 반드시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질 곳에 파견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마치 질 것처럼, 마치 관계를 잃을 것처럼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파견하시는 분은 파견받는 이와 하나이십니다.
그러니 관계의 맺고 끊음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알아보면 그들에게 다가가면 되고 알아보지 못하면 떠나보내면 됩니다.
나머지는 아버지께서 알아서 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내가 승리할 수 있는 곳에만 파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와 그리스도는 하나입니다.
그분에게 파견받았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에게는 불꽃처럼 활활 자신을 온전히 불사르고 헌신하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성소 주일을 맞아 많은 분들이 큰 걱정을 넘어 탄식을 터트리고 있습니다.
저도 최근 발표된 한국천주교 통계자료 예비 사제·수도자 현황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최근 지망자 숫자가 현격히 감소한 것입니다.
어느 한 지표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하락세가 심각합니다.
안 그래도 노령화 시대, 현직에서 물러난 사제·수도자들의 수가 증가하고 있는데 입회자 숫자는 거의 절벽 수준이다 보니 현상 유지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입니다.
특히 대부분의 수도회·수녀회들에 있어 공동체나 사업체의 축소나 통폐합은 어쩔 수 없는 현실입니다.
다들 속수무책인 현실을 두려운 시선으로, 절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낙담만 하고 있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너무 비관적인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수도자들의 급감 현상은 평신도 형제자매들이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교회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선의와 열정을 지닌 훌륭한 평신도 형제자매들은 분명 우리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또 이런 기회에 사제·수도자들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것입니다.
더 치열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온몸과 마음으로 살아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회원 숫자나 공동체 숫자, 사업체 숫자에 연연하지 않고, 보다 내실있는 공동체 생활을 통한 증거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제의 삶, 수도자의 삶, 공동체적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보여줘야겠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쓰러져가는 중세 교회를 거의 혼자 힘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돈보스코 홀로 수백, 수천, 수만 명의 청소년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켜 세웠습니다.
때로 단 한 명의 힘이 이렇게 큰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단 한 명이라 할지라도 불꽃처럼 활활 자신을 온전히 불사르고 헌신하는 착한 목자의 탄생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습니다.
눈을 뜨나 감으나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만 생각하는 착한 목자, 그저 양들이 성장하기만을 바라는 착한 목자, 그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 착한 목자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노력할 때, 사제 수도자 성소 전망을 그리 비관적이지 않을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목자>
구약시대 백성들은 야훼 하느님을 ‘목자’로 믿고 따랐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를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나를 끌어 주시니, 당신의 이름 때문이어라.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가 저에게 위안을 줍니다.”
(시편 23,1-4)
성경에서 말하는 ‘목자’는 ‘보호자’입니다.
단순한 보호자가 아니라 ‘절대적인 보호자.’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처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마르 6,34)
이 말은 예수님께서 백성들의 처지를 모르고 계셨다가 그것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부터 알고 계셨고, 그래서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왜 목자 없는 양들처럼 되었을까?
목자이신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버려두고 떠나셨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목자이신 하느님에게서 떠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대리해서 목자 임무를 수행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것도 큰 이유입니다(예레 23,1-2).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미카서에 이런 예언이 있습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미카 5,1)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 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미카 5,3-4ㄱ)
예수님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내가 너희의 목자다.” 라고 말씀하신 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내 주겠다고 예언자들을 통해서 약속하신 바로 그 목자이신 분입니다.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내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알아듣는다는 말은 가르침을 듣고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보호를 받으려면 예수님의 말씀만 들어야 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다른 곳을 바라보고, 다른 말에 귀를 기울이면 목자의 보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양들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예수님의 보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을 알고”는 “나는 그들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입니다.
여기서 ‘알다.’ 라는 말은 ‘관계, 결합, 일치’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우리의 일치는 예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일치’는 쌍방이 함께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그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할 때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그들은 나를 따른다.”는 “나를 따라라.”입니다.
(“나만 따라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경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
(루카 21,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일시적인 위안이나 위로가 아니라, 또 세속의 부귀영화 같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삶’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세속의 권력이나 재물 같은 것들만을 얻기를 바라면서 예수님을 따른다면, 그것은 그것들을 따르는 일이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아닙니다.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받는 사람은 죽음과 멸망에서 영원히 해방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는다는 말과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는다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끝까지 우리를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아무도’ 라는 말은, ‘악의 세력’과 ‘죽음의 세력’을 모두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약속도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도 ‘악의 세력’과 ‘죽음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하고, 그것을 물리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예수님의 보호를 거절하는 것이고, 악의 세력과 죽음의 세력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맞설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바로 그 하느님의 힘과 권한을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도 예수님께 맞설 수 없고, 예수님의 양들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앞의 28절에서는 ‘내 손에서’ 라고 표현되었는데, 29절에서는 ‘내 아버지의 손에서’ 라고 표현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것’은 곧 ‘하느님의 것’이고, 예수님께 도전하는 것은 곧 하느님께 도전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님의 품 안에 제대로 머물러 있기만 하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뜻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잃어버리신 양도 아니고, 예수님께서 악의 세력에게 빼앗기신 양도 아니고, 그 자신이 스스로 목자를 떠나버린 양입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이기도 하고, 당신의 약속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약속이라는 것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착한 목자 예수님 닮기 - 경애敬愛, 경청敬聽, 추종追從, 선교宣敎>
참 좋고 아름다운 5월 성모성월에 계속되는 부활시기, 파스카 축제에 오늘은 부활 제4주일 성소주일이자 부처님 오신 날이고 어버이날입니다.
마침 얼마전 쓴 '천국체험'이란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언젠가 천국체험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앞당겨 체험하고 누려야 할 하늘나라 천국입니다.
“날마다 하루에도 수없이 천국체험
아마 너를 모를거다
집무실 문 열면 한눈 가득 들어오는
신록찬란한 생명과 빛의 충만
죽음후 천국문 열렸을 때
기쁨에 어찌 견줄수 있을까
얼마전 베토벤 제9번 합창 자막 가사와 더불어 듣고
감격하다
아, 베토벤 완전 귀머거리
절망적 지옥같은 환경속에서도
내적으로는 이미 천국을 살았네
놀랍도다 악성 베토벤
아무도 탓하지 말자
하늘나라 천국은 순전히 나한테 달렸다”
-2022.5.6.
어떻게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나라 천국을 살 수 있을까요?
오늘은 성소주일이나, 예전에는 일명 '착한목자 주일'로도 불렸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을 닮으십시오.
날로 착한 목자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실현되는 천국의 삶입니다.
마침 부활 제4주일을 앞둔 착한목자 교황님의 영감이 넘치는 긴 강론이 구구절절 아름답고 감동스러워 그 내용을 일부 나눕니다.
바로 천국 삶의 방법을 알려줍니다.
“신자들로서 우리는 개인적으로 성소를 받은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더불어 삶으로 불림받았습니다.
우리는 모자이크의 타일들과 같습니다.
각자는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 할 때, 하나의 그림을 형성합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 마음안에서, 우주의 창공안에서 하나의 별처럼 빛납니다.
그러니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하느님의 꿈이 실현된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 성령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여정에 오릅시다.
함께 일하면서 진리의 증거자가 됩시다.
사랑 안에서 위대한 하나의 인류가족은 결코 유토피아 비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목적입니다.
극적인 역사적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이런 부르심에 날로 잘 응답할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또 우리 모두가 이 위대한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우리 고유의 각자 자리를 발견하고 최선을 다해 살 수 있도록 거룩한 성령의 빛을 탐구합시다.”
그야말로 오늘 여기서 하늘나라 천국이라는 하느님의 원대한 꿈을 실현시키자는 호소입니다.
마침 얼마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호한 러시아 정교회 키릴 총대주교에게 전한 교황님의 메시지에도 공감했습니다.
‘사제’를 ‘목자’로 바꿔 인용합니다.
“형제여, 나는 당신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이 말을 듣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나라의 목자가 아니고 정치의 언어를 쓰면 안 되고 예수님의 언어로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같은 하느님의 신성한 사람들의 목자이고 이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추구하고 전쟁을 끝내도록 해야 합니다.
총대주교가 스스로 푸틴의 복사가 되어선 안됩니다.”
참으로 교황님의 착한목자 다운 충고입니다만, ‘이런 얘기는 두 교회 사이의 건설적인 대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키릴 대주교측의 반론이 참 궁색하고 옹색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착한목자 예수님을 닮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착한 목자 주님의 양들이지만 또 주님을 닮아 이웃들에게 착한 목자가 되어 살아야 합니다.
착한 양이자 착한 목자,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착한 양이며 착한 목자처럼 살 수 있는 구체적으로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경애(敬愛)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대한 마땅한 응답이 주님께 대한 경애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공경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수행의 원동력이 되는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공부하고 대화하고 노동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우리의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갈림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에서 지침이 없이 온갖 수행의 노력을 다할 수 있습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주님께 대한 사랑보다 아무것도 앞세우지 말라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주님께 대한 열렬하고 한결같은 사랑은 성덕의 잣대가 됩니다.
둘째, 경청(敬聽)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언제 어디서나 공경하는 마음으로 귀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겸손한 경청의 자세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순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양들은 목자의 모습을 듣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릅니다.
과연 착한목자 예수님의 목소리를 잘 알아듣고 있는지요.
주님과 소통의 기도는 물론 이웃과 소통의 대화에도 경청은 기본입니다.
참으로 주님과는 물론 이웃과의 참된 소통을 위해 ‘존중, 배려, 경청, 공감’은 필수조건임을 깨닫게 됩니다.
새삼 경청도 부단히 갈고 닦아야 할 영성훈련 중 하나임을 깨닫게 됩니다.
또 서로 간의 관계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조언이나 충고보다는 경청을 통한 위로와 격려임을 깨닫게 됩니다.
셋째, 추종(追從)입니다.
늘 주님을 따르는 삶입니다.
착한목자 주님이야말로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우리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착한목자 주님은 누구보다 우리를 압니다.
그러니 이런 주님을 따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주님을 추종하면서 우리 또한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신뢰와 사랑입니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을 나에게 주신 내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하시어,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얼마나 고무적인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주님을 따를 때 성령께서 바로 우리의 궁극의 꿈인 오늘 제2독서 묵시록에 나오는 영원한 생명의 천국의 현실을 그대로 앞당겨 살게 됩니다.
참으로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지상에서 천국 삶을 사는 이들을 다치지 못합니다.
아버지와 하나로 결속되어 있는 예수님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묵시록의 꿈은 그대로 우리 궁극의 미래에 대한 모습입니다.
진짜 이런 하늘나라의 꿈이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되고 궁극의 위로와 치유를 선사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초월과 내재의 착한 목자 파스카 예수님, 어린양이십니다.
주님 안에서 지상과 천국의 벽은 철폐되어 하나가 되고, 주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영원한 현재’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대로 앞당겨 실현되는 영원한 생명의 천국입니다.
바로 한결같이 충실히 주님을 따를 때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한결같이 따르는 여기 우리 삶의 정주의 자리 수도원은 말그대로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는 하늘나라의 실현이 됩니다.
넷째, 선교(宣敎)입니다.
주님과 일치의 관상은 선교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독점하라 주어진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선교를 통해 이웃과 나누라 주어진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불가의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란 말도 일맥상통합니다.
위로 구원의 지혜를 추구함과 동시에 아래로 모든 이들의 구원을 추구합니다.
혼자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바오로와 바르나바 선교사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제1차 선교여행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이런 열렬하고 한결같은 담대한 선교활동이 영원한 생명의 진정성을 보장합니다.
하느님 궁극의 꿈을 현실화시키는 선교사들입니다.
비상한 선교사가 아니라 일상의 평범한 삶에서 선교사라는 신분입니다.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선교사,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땅끝까지 구원을 가져다 주는 주님의 빛같은 존재가 바오로와 바르나바 선교사요 우리들입니다.
박해와 내쫓김 속에서도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니 연옥같은 현실에서 영원한 생명의 천국을 사는 주님의 제자들이자 선교사들인 바오로와 바르나바 일행들입니다.
전례학의 본산인 로마의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 설립 60주년을 맞이하여 어제 교황님은 이곳을 방문하여 주신 메시지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전례학의 공부는 더 큰 교회 일치로 이끈다'는 제하에, “1. 전례생활에의 능동적 참여, 2. 교회적 친교안에서의 성장, 3. 신비 안에서의 믿음, 4. 모든 전례 거행은 선교로서 끝난다(Each celebration ends with mission)”는 주요 내용입니다.
결국 전례가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는 선교임을 깨닫게 됩니다.
믿는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들이자 주님의 선교사들입니다.
착한목자 예수님의 양들이지만 또 이웃에게는 착한목자가 되어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중적 신원을 지닌 복된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로, 주님의 양이자 착한목자로 사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정주의 제자리에서 주님을 경애하고 주님과 이웃의 말을 경청하며, 착한목자 주님을 추종하며 좋으신 주님을 선포하는 선교 활동에 온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유목(遊牧) 문화에 익숙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목자의 비유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목자가 어떤 존재인지, 목자와 양의 관계가 어떠한지 이미 삶으로 체득해 아는 이들에게 이 비유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요한 10,27)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에 대해 잘 압니다.
성향과 특이점, 건강상태 · 식성 · 약점 · 성질머리까지 샅샅이 알기에 잘 다독이며 돌볼 수 있습니다.
양들은 그런 목자의 목소리를 알기에 그를 따릅니다.
그를 따라가면 물가도 나오고 풀밭도 나온다는 걸 본능으로 또 체험으로 아니까 믿고 따릅니다.
또 목자 곁에 바싹 붙어 있어야 사나운 들짐승의 공격도 도둑의 손길도 피할 수 있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귀를 쫑긋 세우고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움직입니다.
그에게 목자는 생존과 직결됩니다.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요한 10,28)
성실하고 책임 있는 목자, 양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목자는 절대 제 목숨 하나 구하려고 양을 맹수 앞에 버려두고 줄행랑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목숨을 걸고 양을 지키지요.
양 한마리가 곧 재산이라서가 아닙니다.
계산으로 따지자면 줄행랑쳐서 제 안위를 지키는 게 훨씬 남는 장사니까요.
그런데 이 말씀에 이어 예수님은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요한 10,29)고 덧붙이십니다.
그동안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아드님을 보내셨고, 또 동시에 우리를 아드님께로 이끄셨음을 깨달았지요.
절대로 우리를 놓치지 않는 목자 예수님의 손이 곧 아버지의 손과 동일시 됩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고 하시네요.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이 참 듣기 거북해하는 문제적 발언을 하신 것입니다.
양에 대한 목자 예수님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이 다르지 않듯, 당신과 아버지는 하나라고 밝히신 것인데, 이 말씀은 당신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시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당신이 양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영원한 생명"(요한 10,28)의 약속을 확인시켜 주시려는 것입니다.
제1독서인 사도행전에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선교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사도 13,48)고 하지요.
지역과 민족, 인종과 언어, 문화와 역사가 달라도 양떼는 제 목자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복음을 받아들인 건 아니었지요.
하지만 사도들은 실망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아직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구석구석 숨어 있는 잠재적 주님의 양떼를 찾아서 멈추거나 주저앉지 않고 걸음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도 13,52)
주님의 양떼를 찾아나서는 마음은 성령의 불로 타오르고 기쁨이 넘칩니다.
거부와 박해도 이를 꺽지 못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묵시 7,9) 구원받은 이들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그들은 이 지상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묵시 7,14)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당신 양떼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특권으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묵시 7,15)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이들은 평생을 믿고 추구하고 사랑해온 분 앞에 머물며 그분만을 섬기는 복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묵시록의 대목이 어찌나 아름답고 또 지상 순례길에 지친 우리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는지 그대로 옮겨봅니다.
"그들은 다시는 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해도 그 어떠한 열기도 그들에게 내리쬐지 않을 것이다.
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묵시 7,17)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이미 목자의 품 안에 들어 있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앞당겨 살고 있는 복된 존재들입니다.
주님 앞에 머물며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은 무겁고 성가신 의무가 아니라 구원받은 우리의 특권입니다.
도처에 문이 활짝 열린 성당이 있고, 매일 미사가 봉헌되고, 감실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고해성사를 집전할 사제와 나를 위해 기도하는 숨은 이들이 있는 세상, 아직은 아니지만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아멘.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일을 계속할 사제들과 수도자, 선교사들이 많이 나올 수 있도록 마음모아 기도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지난 부활입니다.
제가 미사를 드리는 부르클린 성당에서는 3개 공동체가 부활절 미사를 함께 봉헌했습니다.
미사경본은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를 같이 사용했습니다.
강론도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로 하였습니다.
미사 시간이 길어졌고, 경본을 찾는데 분주했지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친교를 나누듯이 3개 공동체가 주님의 부활을 함께 축하하는 풍요로운 미사를 체험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던 제자들은 성령을 받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각자 자기들의 언어로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알아들었습니다.
저는 영어, 스페인어 강론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미국과 스페인 공동체도 한국어 강론을 알아듣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같은 신앙 안에서 주님의 부활을 축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묵주기도를 할 때도 한국어, 영어, 스페인어로 했습니다.
묵주기도의 기쁨도 3배가 된 것 같았습니다.
열린 마음이 있으면 언어가 달라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닫힌 마음이 있으면 같은 언어를 말해도 소통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유대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기심이 많았던 유대인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은총은 언제나 우리 옆에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그릇을 뒤집어 놓으면 빗물을 받을 수 없듯이,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도 우리를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먼저 여러분에게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배척하고 영원한 생명을 받기에 스스로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니, 이제 우리는 다른 민족들에게 돌아섭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혼인한 독신으로 사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고, 배우자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해받기보다는 먼저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받기 보다는 먼저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셨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과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과 병자를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처음 제자들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과 봉사를 이야기하셨습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큰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면, 능력을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한다면,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이웃의 목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온전한 마음으로 응답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성소주일’입니다.
성소주일에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는 자매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길 하는데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더군요.
“사제로 사는지 22년이 되어 가는데 어떻게 지낼 만한지요?”
저는 그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내가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 지낼 만한 것인지, 아니면 마지못해서 지내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제 생활이 재미있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시장에서 물건 바꾸듯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게 이런 이야길 하시더군요.
둘째 애가 성당에서 복사를 하는데 사제가 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였다고 합니다.
참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며, 나의 모든 것 주님께 돌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후광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한두 가지 우수한 특성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면 사람들은 그 사람의 다른 특징도 모두 좋게 본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족한 특성을 보여주면 그 사람의 다른 특징도 모두 나쁘게 평가합니다.
이 효과를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것이 광고입니다.
광고의 모델은 거의 유명 연예인입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좋은 평가를 받는 연예인입니다.
악인을 연기한 연예인보다 선한 사람 연기를 한 연예인을 광고 모델로 삼습니다.
그들이 과연 광고하는 물건을 잘 알까요?
그 물건을 단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어도 아주 좋은 상품인 것처럼 광고합니다.
그 연예인의 매력이 후광효과를 작용해서 광고하는 물건의 매력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더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이런 말을 듣습니다.
“신앙인이 왜 이래?”
결국 주님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신앙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신앙인은 달라도 뭐가 달라.”라고 말하면서 주님께 대한 평가도 ‘긍정적’이 됩니다.
나의 후광효과만으로도 주님을 세상에 잘 알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후광효과를 내 안에서 뿜어내고 있습니까?
오늘은 성소 주일입니다.
각자의 성소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날입니다.
어떤 이는 결혼 성소로, 누구는 사제 성소로, 또 수도 성소로, 그리고 자기 자리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각자의 성소를 생각하는 날인 것입니다.
주님을 잘 드러내는 우리가 되는 방법은 남들 보기에 잘 사는 것입니다.
나의 후광효과를 높여서 주님을 더 세상에 알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편에 서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을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셔서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악의 세력도 주님의 능력을 누르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를 괴롭힐 수 없습니다.
즉, 주님을 믿는 사람은 제일 안전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묵시 7,17)
주님의 편에 철저하게 설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저는 당신 편입니다.”라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나의 후광효과를 더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보다 분명히 더 잘 살아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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