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언이 여드레를 머물렀던 평창의 팔석정
한 달 살기, 두 달 살기, 일 년 살기가 유행이다. 내가 좋아하는 곳에서 잠시나마 세상을 잊은 채 살고 싶은 것이 요즘 사람들의 로망처럼 된 것이다. 그러한 꿈을 맨 처음 꾸었던 사람이 조선 전기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인 양사언이었고, 그가 그 꿈을 펼쳤던 곳이 평창의 팔석정八夕亭이다. 팔석정은 평창군 봉평읍 백옥포리 홍정천의 물가에 위치하고 있는 명승지를 말한다.
태산(泰山)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山)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것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누구나 외우고 있는 <태산가>를 지은 양사언楊士彦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 팔석정이다.
조선 전기의 문인이며 서예가인 양사언의 본관은 청주(淸州)이고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이다. 형인 양사준(楊士俊), 동생인 양사기(楊士奇) 삼 형제의 문장이 뛰어나 중국의 삼소(三蘇: 소식·소순·소철)에 비견하기도 했는데, 그의 아들 양만고(楊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높았다.
명종 1년인 1546년 문과에 급제한 양사언은 대동승(大同丞)을 거쳐서, 함흥(咸興)과 평창(平昌) 그리고 강릉(江陵)·회양(淮陽)·안변(安邊)·철원(鐵原) 등 강원도와 함경도 일대 8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자연을 즐기고 자연 속에서 노닐기를 좋아했던 양사언은 회양의 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감상했다. 지금도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봉래풍악원화동천)’이라 글씨가 남아 있다.
양사언이 강릉부사로 부임하던 중 그 당시에 강릉부 관할이던 이곳에 이르렀다. 아담하면서도 그 자연경치가 빼어난 풍광에 감탄하여 하룻동안만 머물다 가고자 하였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 정사도 잊은 채 여드레 동안을 신선처럼 자유로이 노닐며 경치를 즐기다가 갔다는 곳이다. 그 뒤 양사언은 이곳에 팔일정八日亭이란 정자를 세우고 매년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에 세 차례 씩 찾아와서 시상詩想을 다듬었다고 한다.
그가 지은 정자의 자취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양사언이 강릉부사를 그만두고 고성부사로 옮겨가게 되자 이별을 아쉬워하며 정자 주변에 있는 여덟 개의 큰 바위에 저마다 이름을 지어주었다. 봉래蓬萊(전설 속 삼신산 중의 하나,금강산). 방장方丈. 영주瀛州(전설속 삼신산 중의 하나,한라산). 석대투간石臺投竿(낚시하기 좋은 바위). 석지청련石池靑連(푸른 연꽃이 피어있는 돌로 만든 연못). 석실한수石室閑睡(방처럼 둘러쌓여 낮잠을 즐기기 좋은 곳). 석평위기石坪圍琪(뛰어오르기 좋은 흔들 바위). 석구도기石臼搗器(바위가 평평하여 장기 두던 곳)라고 지었는데, 그 바위들은 주변의 풍치와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아기자기한 기암괴석과 그 바위를 의지 삼아 휘어지고 늘어진 소나무, 그리고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결은 절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팔석정 밑에 있는 구룡소九龍沼는 용 아홉 마리가 등천하였다는 곳이고, 팔석정으로 들어가는 소는 도래소到來沼라고 부른다. 그곳에 가서 바위 둘레에 적힌 글들을 바라보며 시공을 초월하여 옛 사람을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뭐니 뭐니해도 시원하게 흐르는 냇물과 널찍널찍 한 바위가 인상적이다. 팔석정에 가서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면 어쩌면 신선이 된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에 같이 풍경이 되어 앉아 있다 보면, “산을 보고 사는 사람은 심성心性이 깊어지고, 물을 보고 사는 사람은 심성心性이 넓어진다.”는 옛 사람들의 풍수설에 합당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고 깨닫게 된다.
넓은 들판에 높이 연기 피어오르고
지는 해 수평선 아래로 지는구나.
남으로 날아온 기러기에게 묻노니
혹 나에게 부쳐 온 집 편지는 없느냐.”
이런 시를 남긴 양사언이 안변의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는 백성을 잘 보살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받았고, 북쪽의 병란(兵亂)을 미리 예측하고 말과 식량을 많이 비축해 위급함에 대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릉(智陵)에 화재가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로 귀양을 갔다. 2년 뒤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세상을 떠났다.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 양사언은 남사고(南師古)에게서 역술(易術)을 배워서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으며, 그가 지은 한시는 작위적이지 않고 표현이 자연스 러워, 더 이상 고칠 데가 없이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이곳 역시 재미 난 지명들이 많이 있다. 평촌리 서쪽 산 밑 강가에 있는 바위는 모양이 배와 비슷하다고 하여 선바위라고 부르고, 선바위가 있는 골짜기를 선바웃골이라고 부른다.
평촌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는 예전에 호랑이가 들어 있었다고 해서 범든골이고 꽃밭골이라고 부르는 꽃벼루라는 골짜기는 벼루가 지고 꽃이 많이 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평촌 동북쪽 골짜기에 있는 썩은새라고도 부르는 후근내마을은 조선 중엽에 석은石隱이라는 이씨가 살았다는 마을이고, 남안동 남쪽 골짜기에 있는 쇠파니(금산동)마을은 예전에 쇠를 캤다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가까운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白玉浦里)의 '판관대(判官垈)'는 신사임당이 율곡선생을 잉태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율곡의 아버지인 이원수가 재직한 수운판관(水運判官)을 따서 '판관대(判官垈)'라 이름지었는데, 수운판관이란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배로 실어 나르는 일을 하는 관직이다.
하지만 율곡을 잉태할 당시(當時)인 1536년에 이 원수(李元秀)공의 관직(官職)이 수운판관(水運判官)이었다는 설이 있으나, 이원수가 수운판관이 된 때가 1550년임을 고려해 볼 때 와전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곳 산기슭에 위치한 '봉산서재'에 이이의 출생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려있는 곳이다.
이이의 부친 이원수(李元秀)는 어머니인 신사임당에 가려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그가 수운판관이라는 벼슬살이를 하던 조선 중종(中宗;1530년경)때의 일이다.
사임당 신씨와 결혼 한 후 관직을 얻기 위해 처가인 강릉에서 과거를 보러 서울을 오르내리게 되었는데, 오고 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신사임당은 과거 길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白玉浦里)에 거처를 정하고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며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었다.
이원수가 인천에서 수운 판관을 지내던 무렵 신사임당을 비롯 그의 식구들이 산수가 아름다운 이곳 봉평의 판관대에 머물고 있었다. 오랜만에 휴가를 얻은 이원수가 가족들이 살고 있던 봉평으로 오던 중이었다.
평창군 대화면의 한 주막에서 여장을 풀게 되었는데, 그 주막 여주인은 그 전날 밤 용龍이 가슴에 가득히 안겨 오는 기이한 꿈을 꾸었다. 하늘이 점지해주는 뛰어난 인물을 낳을 예사롭지 않은 꿈이라는 것을 짐작한 주모는 누군지 알 수 없는 그 사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이원수가 그 주막에 들어왔는데, 일이 잘되기 위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날 그 주막에는 손님이 이원수뿐이었다. 주모가 이원수를 바라보자 그의 얼굴에 서린 기색氣色이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달랐다.
주모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이원수를 하룻밤을 모시려고 했으나 그의 거절이 완강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무렵 친정 강릉에 가 있던 신사임당도 역시 똑 같이 용이 품안으로 안기는 꿈을 꾸고는, 언니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140리 길을 걸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주모의 청을 거절한 이원수도 그날 밤 집에 도착하여 부부간에 회포를 풀었는데, 이날 바로 신사임당이 율곡을 잉태한 것이다.
며칠간을 신사임당과 지낸 머문 이원수가 다시 인천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막의 주모가 생각이 나서 찾아가 “이제 주모의 청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주모가 그의 청을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손님을 그날 하룻밤 모시고자 했던 것은 신神이 점지한 영특한 아들을 얻기 위해서였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이번 길에 손님은 귀한 아들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귀한 인물을 얻었지만 후환後患이 있으니 그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이원수가 ‘그 화를 막을 방도가 있는가.‘하고 묻자 주모가 다음과 같은 방도를 알려주었다. “밤나무 1,000그루를 심으면 괜찮을 것입니다.” 이원수는 주모가 시키는 대로 밤나무 천 그루를 심은 뒤 몇 해가 흘렀다. 어느 날 험상궂게 생긴 스님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면서 아이를 보자고 했다. 이원수는 주모의 예언이 생각나서 거절했다. 그러자 중은 밤나무 1,000그루를 시주하면 아이를 데려가지 않겠다고 했다. 이원수는 쾌히 승낙하고 뒷산에 심어놓은 밤나무를 모두 시주했다. 그러나 썩은 밤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한 그루가 모자랐다. 깜짝 놀란 이원수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는데, 숲속에서 나무 한 그루가 "나도 밤나무다"고 소리를 쳤다. 그 소리를 들은 스님은 호랑이로 변해서 도망쳤다. 그때부터 ’나도 밤나무‘라는 재미있는 나무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나도 밤나무는 “낙엽 활엽 소교목으로 꽃은 유월에 피고 열매는 9월에 익는다. 목재를 태우면 향기가 나며 거품이 난다.“ 고 알려져 있다.
봉산 서쪽에는 모양이 매우 수려한 삼신산三神山이 있고, 평촌리 동남쪽에는 그 모양이 머리에 쓰는 관모와 비슷한 관모봉이 있다. 평촌 마을 뒤에 있는 봉산蓬山은 예전에는 덕봉德峯이라고 하였는데, 양사언이 이 산에서 놀고 간 뒤로 봉산이라고 지었고, 평촌에 있는 율곡 이이를 모신 사당이 봉평서재峯坪書齋라고 부르는 봉산서재이다.
봉산서재는 이곳에서 율곡이 잉태된 사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이 고을 유생들이 1906년에 창건(創建)한 사당(祠堂)인데, 이곳에 봉산서재를 지은 연유는 다음과 같다.
이곳에 살고 있던 홍재홍등의 유생들이 율곡과 같은 성인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상소를 올려 1905년에 판관대를 중심으로 한 10리 땅을 하사받았고 유생들이 성금을 모아 이이의 영정을 모신 봉산서재를 지은 뒤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현재는 서재 경내(書齋境內)의 재실(齋室)엔 율곡 이이선생과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선생의 존영(尊影)를 모시고 이 고장의 유림(儒林)과 주민들이 가을에 제사를 봉행(奉行)하고 있다.
경치가 아름답기 그지없는 팔석정과 율곡 이이와 그의 부모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 평촌리에 터를 잡고 메밀꽃 필 무렵인 초가을에는 메밀꽃이 하얀 봉평장으로 장을 보러 간다면 얼마나 신바람 나는 일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