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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조선사 연구회
 
 
 
카페 게시글
역사토론방(출처있는글) 스크랩 삼태극을 강타한 러브 선의<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지명선 추천 1 조회 1,338 09.09.22 21:52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 대륙조선을 극구 반대하는 삼태극 카페에  러브 선의 작품 <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시리즈>를 소개합니다.

 

[자료의 근거]

 

옮긴이: 세종태왕 조회수 : 91 09.07.09 21:07

http://cafe.daum.net/mookto/GbHv/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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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 가지 <1~4> | 

대조선사의 증거 2009.01.27 18:35  러브 대조선 [블러그]

 

 

 원지은이:러브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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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1~4>

 

 오늘(2009년 1월 27일 화)부터  대조선사의 비밀이 시작된다.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멘지스 작)

[멘지스가 말하는 중국이 대조선이었다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밝혀졌다.]

 

 

1.  남아메리카  페루에서 발견된 그림은 조선 태종황제때의 것이다.

 

갓을 쓰고 칼, 창을 들고 말탄 조선인

 

출처: http://www.1421.tv/assets_cm/files/image/horsemen.gif  , 대륙조선사연구회 김환 작.   홈피의 설명  Horsemen : This is a copy of the drawings of Chinese or Japanese cavalry found by Antonio de la Calancha in Trujillo on his arrival in Peru.

아무리 봐도 상투를 틀고 장창과 도를 든 우리의 선조로 보입니다 (김환님)

 

멘지스는 말탄사람,  이 그림은 트루질로출신 카란샤 의 안토니오가 페루에 도착하면서 발견한
중국인 혹인 일본인 기병대의 그림의 사본이다 라고 했다.
시기는 콜롬
버스가 오기 휠신 전인 1400년대 (대조선의 태종때)의 그림이다.  멘지스는 대조선의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이 그림으로 볼때, 말을 타고 칼과 창을 쓴 것은 분명 동양
인인데, 갓을 쓴 모습은 일본인, 중국인도 아닌 바로 조선인의 모습이다. 

 

대조선 태종황제때 정화제독의 선단이 아메리카(아묵리가)를 정복하면서 조선의 그림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멘지스가 말하는 중국인이 조선인이라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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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캐나다 벤쿠버에서 발견된 관영통보는 조선 태종때의 엽전이다.

 

 카나다벤쿠버에서 발견된 태종시대(1400년대) 의 동전(관영통보)

 

 

관영통보는 동양동전이고, 다른 동전과 00통보라는 점에서 동전이름이 같고 모양도 같고,
크기도 거의 같다라는 것은 거의 같은 나라의 동전이라는 의미이다.
같은나라, 같은문화, 같은지역의 동전.. 이 동질성의 문화는 대조선의 문화, 지역과 일치한다.
그래서 관영통보는 대조선의 동전, 엽전, 화폐가 되는 것이다.

 

관영통보가 발견된 한반도, 유구, 일본렬도, 중국남부는 대조선의 실질영토이다.
그리고  캐나다 벤쿠버에서 조선태종때(1400년도초반) 발견된 관영통보는 그당시 캐나다가 대조선의 식민지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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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미에서 발견된 금속메달은 조선 문종황제때의 것이다.

 

 북미에서 발견된 조선 문종때의 금속메달

 

 

1. 이 금속메달은 멘지스의 홈페이지에 소개된 것으로 북미에서 발견된것이다. 미국 오하이오 컬럼버스의 화학박사
Siu-Leung Lee, PhD 이라는 사람이 소개하는 글에 보면 대명국 황제 선덕제에 의해서 승인되고 하사된 메달이라고 해석했다.

2. 메달의 오른쪽 위부터 보면 한자로 " 대명선덕大明宣德 XX " 라고 나온다.  [출처: http://www.1421.tv/assets_cm/files/image/sllee3_normal.jpg]

 

3. 멘지스나 미국인은 중국 명으로 해석했으나 이것은 대조선을 인식못한 잘못된 해석이다.
원래   " 대명선덕大明宣德 XX "에서   선덕은 문종황제의 연호이고,  대명은 큰 명나라가 아니라,  크게 명철하옵신 이란 뜻의 형용사이다.
따라서 다시 해석해보면  " 크게 명철하옵신 대조선의 선덕(문종)황제님..." 이란 뜻이다.
그당시 명이 있더라도 명은 대조선의 제후이고,  대조선의 연호를 빌려 썼던 나라로 사료되기 때문이다.

 

4. 태종때 정화의 함대가 북미을 정복한 후 ,
세종, 문종때에도 대조선의 북미경영이 지속되었다는 증거가 멘지스가  그당시 발견된 금속메달이다

5. 인디언들, 마야문명만 존재해 있었다던 그 시기에 조선의 금속메달이 널려있고,
조선의 화폐가 속속 발견되고 있다.  그 밖에 셀수도 없는 수많은 조선의 유물이 발견된다고 하여
조선아메리카 (중국아메리카: 멘지스의 표현, 대조선을 현중국으로 잘못 알고 있슴) 라고 불리웠던 곳이 아메리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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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멘지스에 의해 발견된 중국지도는 대조선의 천하도 였다.

 

 [자료의 근거]

 

멘지스의 홈페이지에 보면   Comparison of Chinese maps 1 - Dr Hendon Harrison map

중국지도의 비교- 헨돈 해리슨박사의 지도 가 나온다.  핸돈박사의 지도가 중국의 지도라는 것이다.

 참조:  ttp://www.gavinmenzies.net/pages/maps/1418_sequence/map.htm

 

그런데 그 중국지도가 대조선의 천하도와 거의 같다.  이것은 중국지도가 바로  대조선의 지도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당시 대조선의 천하도는 유럽에 알려져 중국지도로 탈바꿈한 것이 분명하다.

 

 중국 지도

 

[대조선의 천하도와 비교]

아래 대조선에서 만든 천하도를 보면 거의 일치하는 모습이다. 

 

 태종때 대조선에서 그린 천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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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r articleno = "8920780";

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5~7>

 

1900년 파리박람회의 한국관 

 

5. 1900년 파리박람회의 한국관 전시물은 대륙풍이다.

 

 

1900파리박람회 한국관 유물 <무기와 의복>

 

[한국관내 전시품이 대륙풍인  증거]

 

 

 

1. 가운데 불교를 뜻하는 작은 금동불상이 있고, 머리는 서양인 곱슬머리로 보인다.

2. 불상좌측은 소가죽?으로 만든 둥글넙적한 외투가 있다.

3. 불상우측은 장군의 투구와 가죽으로 만든 전투복 외투 가 있다.

 

4. 불상뒤쪽은 화살 4~5개가 거꾸로 솟아 있다.

5.  불상 오른쪽하단은 금동향로가 보인다.

6. 향로위쪽에는 수군에서 강배를 타고 다닐때 쓰이는 큰 노가 보인다.

 

7. 그 노옆에는 대포처럼 보이기도 하고, 거대한 망원경처럼 보이는 금속성 굵은 막대? 있다.

8. 불상바로 왼쪽의 가늘고 긴 꺽인 막대들이 보인다. 알 수가 없다.
9. 윗부분은 의류를 전시해 놓은 듯하다. 흰옷천도 보이고 동물가죽옷도 보인다.

 

10. 조선관 유물중 대륙풍의 결정적인 단서가 윗부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동물가죽옷이다.

이 동물가죽옷은 굵은 점 무늬의 보호색이 띤 표범의 가죽이다. 바로 아시아의 광활한 대륙

에 있었던 동물이다. 대륙에 위치한 대조선에서 표범가죽은 중요한 생산품이었던 것이다.

 

표범가죽은 몽골,시베리아지역서 많이 생산되는 특산품이었다

 

 

표범]

식육목 고양이과에 속하는 표범은 그 서식지역이 다양해 우리에게 꽤 익숙한 동물이다. 아프리카뿐

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 특히, 시베리아, 인도, 미얀마, 말레이시아, 중국 등에 서식한다고 한다. 

 

 

 바이칼호수,티벳,히말라야등지에서 활동중인 설표

 

 아프리카, 유라시아에서 활동중인 전형적인 표범

(두마을 사진참조. http://cafe.daum.net/limso1234/PrrD/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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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00년도 파리박람회의  한국홍보용 카드는 중국풍이다.

 

[동영상 자료]

 

자료가 허술하여 동영상이 옆으로 누인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중간의 잠깐사이에 파리박람회 한국홍보용 카드가 나온다.

그 홍보용카드 그림엔 조선의 황궁 경복궁건물이 등장하는데, 이상한 점은 건물지붕색깔이 감귤색, 황금색으로 나온다는 점

이다.   마치 현중국 북경의 자금성의 지붕을 보는 느낌이다. 틀림없는 대륙풍이었다.

 

한반도 서울 대조선의 황궁에 감귤색지붕은 한군데도 없다.

 

이동영상에서  백성현(58) 명지전문대 커뮤니케이션디자인과 교수는 어느 인터뷰에서 "우리나라가 최초로 한국독립관을 열고

참가했던 1900년 파리 박람회의 한국관 홍보 엽서예요"라고 하면서 소개하고 있다.


 

15년간 세계 박람회 기념품을 수집해 온 백성현 명지 전문대 교수는 "내 수집품들이 우리나라 박람회의 디자인 솔루션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곽아람 기자 (2008년 11월 20일 강남의 어느빌딩전시장에서)

chosun.com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1/20/2008112001900.html

 

 [다른 자료]

 

“320제곱미터에 이르는 건물은 화려한 색을 칠한 목조건물로 넓은 기와지붕을 이었고 골조(지붕)은 금빛(감귤색) 

으로 빛난다.  위로 치솟은 처마 끝은 이곳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입구는 서울의 주택 문을 재현했다.  내부는

 
 서울의 황제가 기거하는 옛궁의 알현실(경복궁 근정전)을 본떴다.”  
“모든 벽에는 오래된 명주천이 걸려있다. 전시관 주위는 난간이 있는 회랑이 있다...”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공식책자) 
  

“전체가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화려한 색깔이 입혀져 있고 극동 건축의 특징인 하늘을 향해 치솟은  
처마끝과 커다란 지붕이 있는 한국관은 행인들의 시선을 끈다. 건축가는 황제의 고궁에 있는 알현실 
에서 받은 영감을 마음껏 발휘했다.” (1900년 발간된 서적 ‘파리박람회’)

 

 

[감귤색의 자금성 지붕]

 

 

 

[의의]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만국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서 대조선에서 만든 카드가  대륙풍이었다는 것은

충격적이다. 사진은 희미하지만 위 자금성 지붕의 색깔과 너무도 똑같지 않은가?  기와가 짙은 노란색, 감귤색,

주황색, 혹은 주홍색이다.

 

서안에 있던 경복궁도  대륙풍의 북경 자금성과 같은 건물형태로 존재해 있었지 않겠는가?  지붕이 감귤색으로..

그런데 한반도 서울의 경복궁건물의 지붕은 검정색이다.  모든 서울시내 황궁의 지붕기와는 검정색뿐이다.  이는

대조선의 황궁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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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900년 파리박람회 한국관그림엔 청인도 있었다.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salon.interview365.com/1

 

 

    1900 (파리)박람회 (한국관그림)       ^ 청인                              ^ 한국관 사진

 

 

 윗그림 왼쪽은 하단에  조선의 귀수댁여인, 갓쓴 양반과 감투를 쓴 대감이 자리에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청인이

 서 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지게를 진 평민이 있고, 저 멀리 삿갓, 갓쓴 조선인들이 지나간다.

 

[의의]

한국관을 그리면서 그 주위의 사람들은 분명 한국, 조선인이 분명하다. 조선인만 있어야 하나  북방인, 청인

있었다.  바로 대조선에는 중원의 조선인 뿐 아니라 북적의 청인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에 있

외국인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그 나라의 성격을 대변하는, 그나라를 대표하는 조선관으로 볼 때  외국인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따라서 윗 그림의 청인도 바로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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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r articleno = "8920781";

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8~10>

 

대조선의 꽃중의 꽃인 모란꽃은 대륙의 꽃이다.

 

 

8.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모란이 우리나라꽃중의 하나로 뽑혔다. 

 

국립중앙박물관내 전시판에 보면 모란이  현재 우리나라꽃중에 하나로 당당히 뽑혔다. 이는 고려, 조선시대의 자기나 그림에서 모란이 많이 쓰여졌기  때

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모란꽃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나라사람들중   모란을  평생 한번도 보지못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모란이 많이

있는 곳은 바로 대륙이다. 고려, 조선이 대륙에 있었기 때문에 모란이 흔한 우리꽃으로 뽑힌 것이다.

 

 

 

 

 

                                            모란꽃문양 고려자기

 

                                               모란꽃문양의 만주국동전

 

 

혼례식 때는 대례병(大禮屛)으로 모란병풍이 많이 사용되었다.

 

                                                                 모란꽃문양의 병풍

  

                                               오죽헌에 전시된 조선시대 모란꽃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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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소치허련은  낙양의 꽃, 모란을 그린 대륙조선인의 증거

 

[근거]

.

  "1839년, 전라도 진도에서 상경한 만 31세의 무명 화가가 지금 서울 통의동에 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저택 대문을 두드렸다. 청년

의 이름은 소치(小癡) 허련(許鍊·1808~ 1893). 체계적인 미술 교육도 받은 적 없고, 고향 바깥 넓은 세상에 자신의 존재와 필력을 알린 적도 없는 시골뜨기

였다. ... 소치는 일흔이 넘도록 전국을 떠돌며 부유한 중인들의 주문을 받아 부귀의 상징인 모란을 숱하게 그렸다. 별명이 ’허모란(許牡丹)’이었다고 한

.

참고: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2/29/2008122901717.html


그만큼 소치는 "모란"을 잘, 많이 그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 그림 설명에서도 "소치 허련의〈모란〉. 그는 외딴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나 추사에게 발탁돼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가가 됐다. 스승이 숨지고 스승의 세력마저 스러진 뒤 소치는 전국을 방랑하며 숱하게 모란을 그렸다. 부유한 중인들이 그의 모란

꽃 그림을 다투어 샀다."고 했다.  

 

 

                       소치 허련의 <모란>                                 소치 허련의 <산수>

                                           

 그의 그림속의 글속에  "昔年我是洛陽客看畵繁華寫牧丹.  泓碧波慧賞 小痴居士." [지난해 나는 낙양의 나그네가 되어 활짝 핀 꽃을 보고 모란을 그렸다.

 소치거사 허련.] 고 나온다.   "소치가 낙양 나그네"였다는 말이다. 그가 32살(1839)에 추사 김정희를 서울에서 만났건, 아니건, 별세한 때가 1893년이니,

그 동안 54년이란 세월 속에서 낙양의 나그네가 되었었다.  낙양은 하남성 낙수와 황하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 도시이다. 내가 알기로는 아직 소치가 조선을

 벗어나 어디엔가 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출처: 대륙조선사 연구회 , 최두환지음    소치 허련의 "모란"에 대하여

 

*해설: 허모란 소치허련은  대조선의 동경 낙양에서 모란꽃을 즐겨 그린것으로 풀이된다.

 

[모란의 등급]

 

양화소록의 부록인 화암수록에 꽃을 9등급으로 분류했다

 

1등은 높은 풍치와 뛰어난 운치를 취하여 매화, 국화, 연꽃, 대나무로 하였다.

2등은 부와 귀를 취하여 모란, 작약, 왜홍(왜철쭉), 해류(海榴), 파초로 하였다.

3등은 운치를 위하여 치자, 동백, 사계화, 종려, 만년송으로 하였다.

4등은 역시 운치를 취하여 화리(華利), 소척, 서양화, 포도, 굴로 하였다.

5등은 번화한 것을 취하여 석류, 도화, 해당화, 장미, 수양버들로 하였다.

6등은 역시 번화한 것을 취하여 두견(진달래), 살구, 백일홍, 감(枾),오동으로 하였다.

7등은 각가의 장점을 취하여 배, 정향, 목련, 앵두, 단풍으로 하였다.

8등은 각각의 장점을 취하여 목근(무궁화), 석죽(패랭이꽃), 옥잠화, 봉선화, 두충으로 하였다.

9등은 각각의 장점을 취하여 해바라기, 전추라, 금잔화, 석창포, 화양목으로 하였다.

 

출처: 정재훈,  한국전통의 원 중에서 

 

 

[낙양의 모란축제]

 

하남성 낙양시에서는 매년 4월 15일부터 25일까지 낙양시를 대표하는 꽃축제인 낙양 모란꽃축제를 개최한다. 낙양은 현재 중국인들에게는 모란꽃으로 유

명한데, 중국인들은 모란을 「꽃중의 꽃」으로 꼽는다. 수나라 때부터 모란의 재배가 시작되어 당나라 때 급속하게 확산되어 유명해졌다고 한다. 송나라의

 문인 歐陽詢(구양순)는 「洛陽牧丹記(낙양목단기)」에서 「낙양의 흙은 꽃에 가장 어울려 모란이 세상에 제일이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낙양의 별칭은 牧丹城(목단성)이다.

낙양의 시화인 모란꽃은 전국에서도 가장 왕성하여 모란의 재배와 감상이 이곳에서는 오랜 풍습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현존 품종만도 3백 50여종에 이

르고, 그 중에서도 요황(姚黃)과 위자(魏紫)는 모란의 왕과 왕후라 불린다. 지난 1983년 첫 번째 축제가 개최된 이래로 계속 개최되고 있는 낙양 모란 꽃 축

제에는 꽃놀이, 연등전시, 서화, 사진전 등 다채로운 이벤트와 모란품종개발에 관련된 각종 세미나, 무역 상담회 등이 펼쳐져 비즈니스의 장이 마련된다.

 특히 왕성공원 식물원에서는 아름다운 모란꽃이 그 멋을 뽐내며 관광객을 사로잡는다. 

출처: 낙양 모란꽃 축제 |작성자 홧띵 

  



낙양의 모란꽃 축제     출처: 미미짱  ,

http://blog.naver.com/mimi_jia/130010878109

 

 

[의의]

1. 한반도에선 거의 모란을 찾아볼수가 없으나, 옛조선의 사서나 그림을 보면 모란이 많이 등장하고, 양화소록에도 2등급을 차지할 정도로 모란은 대조선

의 꽃중에 주류를 이루고 있다.  모란그림의 일인자, 소치 허련도 결국 낙양에서 일생을 마감하였고, 그 낙양이야 말로 모란의 주산지나 다름없을 정도로

모란이 많고, 매년 모란축제도   성대히 열린다고 한다.

 

2.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시물에도 모란을 대조선의 대표적인 꽃중의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이는 대조선이 낙양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진 대륙국가임을 보

여주는 실예인 것이다. 그리고 세계에서 모란을 가장 많이 그렸던 소치허련은  대륙조선의 증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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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낙양의 모란꽃축제는 고려가 대륙에 있었다는 뜻이다.

 

[자료의 근거]

 고려 예종황제때 정습명(鄭襲明) 의 시   石竹花 (패랭이 꽃) 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世 愛 牧 丹 紅  세상사람들 붉은 모란꽃을 사랑하여    裁 培 滿 園 中  정원에 가득히 심어 기르네

 誰 知 荒 草 野  뉘라 알리 황량한 들판위에도              亦 有 好 花 叢  또한 좋은 꽃 떨기 있음을  

 色 透 村 塘 月  그 모습은 연못에 달빛이 스민 듯        香 傳 壟 樹 風  언덕 나무 바람결에 풍기는 향기  

 地 偏 公 子 少  외진 땅 찾아주는 귀공자 적어            嬌 態 屬 田 翁  아리따운 자태를 농부에게 맡기누나 

 

* 이 詩는 작자가 사람들이 화려한 모란은 많이 재배하지만 이 石竹花의 고상하고 아늑한 멋은 모르고 있음을 자신의 처지 

와 비교하여 읊은 詩로 패랭이꽃의 고결한 자태를 이야기할 뿐 모란을 시샘하지도 귀공자들의 안목 없음을 탓하지도 않는 

 "哀而不怨" 즉 슬퍼하되 원망하지 않는 君子의 의연하고 늠연함을 보여준 絶唱이다. 이 詩를 예종이 읽고는 玉堂으로 불러 

올렸다고 傳한다 (풀잎피리 참조)

 

* 해설: 세상사람들, 고려사람들이 집집마다 모란꽃을 많이 심어 기른다는 것은 한반도이야기가 아니다. 대륙이야기이다.

 

[의의] 

 1. 대륙 하남성 낙양시는 고려의 개경( 숭산기슭에 고려의 황궁이 있다고 서긍의 고려도경에 나온다.) 에서 가깝다고 한다. 

 고려시인 정습명의 시에서 보듯이 고려에는 모란꽃을 많이들 재배했다고 나온다. 그래서 현재 대륙의 낙양시에 모란꽃축 

제가 많이 일어나는 것이다. 

 

 2. 이뿐만이 아니라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고려자기를 보았더니 모란을 소재로 한 자기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고려인들은 모란을 즐겨심었고 흔히 보았던 모란을 소재로 도자기에 그려놓은 것이다. 

  그 모란이 낙양에 많았고, 낙양은 고려에 있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3. 모란을 주제로 한 자기는 조선시대에도 역시 나온다. 조선도 대륙에 계속 있었다는 의미이다. 다시 정리하면 낙양은  

 고려의 수도 개경이 인근에 있던 곳으로 모란재배가 성행했고, 그 모란은 고려 조선의 도자기에도 나온바, 고려, 조선은 

다같이 대륙에 대대로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4. 한반도는 축제를 지방단체마다 많이들 하는데 모란을 주제로 하는 것을 못보았다. 이것은 모란이 한반도에 많이들 재배 

하는 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고 고려의 황도 개경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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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11~14>

 

한반도지명의 허구성  (우리가 살고있는 이곳은 조선의 지명과 다르다. )

 

11. 한반도의 천마산은 고려의 천마산이 아니다.

 

[자료의 근거]

 

고려시대 이규보의 시 <천마산天麻山>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산속에 들다 길 잃어 숲속에 떨어졌는데,

높은 바위 쳐다보니 몇 백 길이 되는가.

나무를 헤집고 가니 원숭이들이 서로 싸우네.

창바위에 말을 세웠으니 누구를 치려는가.

북바위소리 없으니 무엇에 놀라리,

사람소리에 산골자기가 응락하는 것 같네.“

 

[의의]

 

1. 윗의 시에 보면 천마산에 원숭이가 나온다. 그러나, 한반도의 천마산에는 원숭이는 커녕 어느 열대동물도 보이질 않는다.

2. 한반도 천마산은 경기도남양주시 화도읍 묵현리에 있다. 겨울에는 천마산스키장으로 유명하다.

3. 한반도에는 천마산을 포함하여 원숭이가 서식하지 않는다. 이는 대조선시대도 마찬가지였으리라.

4. 한반도는 생물도감에서도 예부터 원숭이가 살수 없다고 하였고, 원숭이가 서식할 만큼 아열대기후가 아니기 때문이다.

 

5. 이규보의 시의 천마산은 대륙의 천마산을 말하는 것이다.

6. 대륙의 황하이남은 아열대에 속하고, 원숭이도 많이 산다고 한다. 그 대륙의 천마산은 바로 하남성 숭산의 북쪽에 솟아 있는 봉우리이다. 숭산은 물론 황하이남에 위치해 있다.

7. 그래서 대륙의 천마산에는 원숭이가 많이 있다고 한다.

 

8. 결론적으로 한반도의 현재 천마산은 대조선의 사서에 나오는 그런 천마산이 아닌 것이다.

 

 

[천마산의 비교]

1. 한반도의 천마산

 

 

 한반도천마산은 온대성기후로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  천혜의 스키장으로 유명하다.(조용진님 사진참조)

 

 

 

2. 대륙의 천마산  인근의 숭산 (=사서에 나오는 대조선의 천마산)

 

 하남성인근의 숭산의 북쪽 봉우리가 천마산이다.  깍아진듯한 낭떠러지에 조선에서 유명한 잔도가 어렵게

설치되어 있다.(유호용님 사진 참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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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백제의 하남위례성은 한반도가 아니라 현중국 하남성 숭산에 있다.

 

[자료의 근거]

안영배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신동아 1997년 11월호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711/nd97110190.html 

 

96년 10월 중순 중국 허난성(이하 하남성 : 河南省)의 숭산(崇山) 소림사를 방문했을 때 일이다. 허난성의 수도 정주에서 대절버스를 빌려 낙양 방면으로 2

시간 남짓 달리다가 소림사 입구 쪽에서 10분간 휴식시간을 갖고 있는데, 승객을 실은 일반버스가 마침 우리 일행 앞에 멈춰 섰다.

『저 버스 좀 봐. 「百濟(백제)」라고 씌어 있네』

 

   누군가 소리쳤다. 분명히 버스 노정을 알리는 차창 간판에는 우리의 고대나라 백제와 한문글자 하나 틀리지 않았다. 하남성 소속인 그 중국버스는 분명

히 인근의 백제쪽에서소림사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소림사행을 취소하고 그 버스로 「백제」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을 찾아 그 연유를

캐고 싶었지만, 단체 행동의 제약 때문에 그럴 순 없었다.

 

   숭산 소림사에서 무술시범을 보면서도 내내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황하강 남쪽 하남(河南)의 숭산에서 만난 「백제」라는 단어. 그 옛날 우리의 선

조 백제인들은 한강 이남의 땅을 역시 「하남」이라고 불렀다고 배웠고, 그 왕성을 「하남 위례성」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하남 위례성 인근에는 중국의 숭

산과 똑같은 한자 이름을 가진 숭산도 있다. 


   『삼국사기』는 백제 개로왕 21년의 일을 이렇게 전한다.

『사람들을 모조리 징발하여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다 궁실, 누각, 정자를 지으니 모두가

 웅장하고 화려했다.…(한)강 따라 둑을 쌓아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까지 닿게 하였다…』   황하의 남쪽을 의미하는 하남」과 산(숭산)이 한

반도에서 똑같은 이름으로 나타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또, 우리가 배운 역사 지식으로는 중국 허난성 숭산 인근에 백제라는 이름이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게다가 숭산과 가까운 낙양의 북망산에서 1920

년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615~682년)의 묘지석이 출토되지 않았는가. 이 모두가 우연의 일치일까? 

 

[의의]

1. 백제의 하남위례성은 한반도가 아니라 현중국 하남성 숭산에 있다. 한반도 서울 강남의 위례성 발굴지는 허구이다. 그곳에서 성곽의 흔적도 나오질 않

는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위례성은 숭산이 있는 곳이고  한강의 남쪽이었다. 그 한강은  패하이고 패하의 남쪽이라 해서 하남이다. 즉 하남성에서 였다.

 

2. 하남성은 어디겠는가?  중국대륙의 하남성이다.  패하는  패수이고, 패수는 황하의 중류지점이다. 그 황하는 위수와 합쳐 대동강을 이루고 낙양으로 내

려와 낙수(낙동강)와 합류된다. 그 지점의 남쪽에는 하남성의 숭산이 있다.  그 숭산은 후대에 고려의 수도 개성이 자리잡게 된다.

 

3. 이처럼 하남성은 백제의 땅도 되다가 신라의 땅도 되었던 군사적 요충지이다. 그리고, 후대의 고려, 조선의 지역으로 내려온다.  그 하남성은 대한민국사

에서 역사적인 주무대로 자리잡았던 곳이었다. 그래서 하남땅에 백제의 지명도 나오고, 백제의 무덤도 나오고, 백제로 가는 버스푯말도 나오고 있는 것이

다. 바로 백제의 유적지가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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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서울의 사라진 저자도에 백제의 성터가 없었다.

 

서울의 저자도에 백제의 성터가 있었을까요?

 

조선시대 문학가 이덕무가 그의 저서 청장관저서에서 이렇게 전했다.

 

"저자도에는 백제온조왕의 옛성터가 있고, 그 아래에는 창해 허격이 살던 집이 있다.

 나는 10년전 이곳을 지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은적이 있다.

 

<긴 강물(한강물)은 처사가 주 周나라를 받드는 절개요,

옛 성 城은 나약한 왕(온조)이 촉 蜀을 의지하던 심정이라네.> (이하생략) "

 

 -선비의 소리를 엿듣다 (정병헌,이지영엮음),사군자출판사,444p 

 

 

<해설>

조선의 사서에 보면 옥수동 한강변을 넘어 저자도가 옛날 있었는데, 그곳이 백제온조왕의 옛성토였다고 하네요.

저자도는 압구정 현대아파트단지를 짓느라고 모두 없어졌지만, 과연 백제의 성터(위례성)가 있었을까요?

 

만약 백제의 성터, 위례성(서울 강남에 백제의 성터가 발견되었다지만, 백제성인지 아직도 확인이 안되고 있다)

이라면 문화재청은 무얼하고 있었을 까요.  그냥 내버려두었을까요? 그러나 그곳이 성터가 있었다고 알고 있는

부처는 없는것으로 보이네요. 사실 백제의 성터는 없던 것이 맞을 겁니다.

 

왜냐하면 서울의 저자도는 조선의 사서에 나오는 저자도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죠. 한강이 원래 주나라를 받드

는 절개라고 문헌에는 나오네요. 이것은 이 한강이 주나라가 있던 땅이라는 소리이고, 그 후예국가 조선이 그나라

를 차지하고 있다는 내용이지요. 

 

따라서 저자도는 한반도 한강에 있었던 섬이 아니라 대륙 섬서성 위수(옛 패수,한강)에  있었던 섬이라면 모든

것이 이해됩니다. 조선의 한양(한성,서안,장안)인근의 한강(위수)에 있었던 섬이 저자도이고, 이곳에 백제의 옛성

터가 있었고, 그 이전에는 주나라가 있었다는 그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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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있는 이곳은 조선의 지명과 다르다.


14. 서울의 아차산은 조선의 아차산이 아니다.

 

<조선시대 아차산  峨嵯山모습>

 

 

조선때 문인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 내에 실려있는 아정유고 제3권, '문(文)'에서의 협주기(=한강을 거슬러 가며)의 내용

이다.

 

<1776년, 내가 3월25일 정사원과 동자와 함께 청교에 사는 심경문의 집에 이르자, 여문중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이

 

들과 함께 출발하여 광희문을 나와 전관의 고개에서 쉬면서 동쪽에 있는 아차산을 바라보았다.

 

 

그 산은 붉은 쇳물을 내리부은 듯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나지 않았다. 산 밑의 평원에는 풀이 푸르고 무성하여 역마들이 꼴

 

을 뜯고 있으며, 밭의 보리가 이리저리 쓰러져 있다. 같은 비단 필목처럼 훤한데 공중에서 메추리의 울음소리만 들려온다. (이

 

하 생략)>

 

 

<서울의 아차산모습>

 

서울의 아차산은 강북의 동쪽끝에 위치하며 구리시와 서울시 동대문구,광진구와 접해있는 산이다. 높이 287m이다. 산이

 

푸르르고, 후대에 고구려유적지가 발견되어 경기도 구리시에서는  떠들썩하다. 아차산남쪽 한강변에는 외국인들이 많이 찾

 

는 워커힐호텔이 있다.

 

 

 

<해설>

 

그러나 조선시대의 아차산은 서울의 아차산과 매우 다른 모습이다. 조선시대 문헌속의 아차산은 한반도의 녹음이 우거져 있

 

는 그런 아차산이 아니다. 산에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가 나지 않는 사막기후의 산을 말한다.

 

 

비록 나무와 풀이 없다함이 산불이 일어났다면 잠시 그럴 수도 있으나, 그것도 겨울이 아니라면 풀,나무들은 다시 생겨나기

 

마련이다. 다만 산 밑의 평원에는 풀만 자란다고 한다. 그리고 아차산은 신당동 야산(전관의 고개)에서 나무와 말을 볼 수 있

 

는 가까운 거리(1km이내거리)로 나온다.

 

 

그런데 서울의 신당동에서 아차산을 본다면 산의 테두리는 볼 수 있어도 어느 물체를 볼 수는 없다. 양쪽의 거리만 해도 7여

 

km나 된다. 그래서 서울의 아차산은 조선시대의 아차산이 아닌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조선의 아차산은 한반도의 기후와는 전혀 맞지 않는 그런 곳이다. 비가 자주 오지 않고, 토질이 나무와 풀이

 

 잘 자랄수 없는 곳이다. 건조지대와 접해있는 스텝류기후지역이다. 비가 와도 1년에 조금씩 내려 풀만 자랄 수 있는 곳. 고산

 

지역은 그남아 빗물이 모아질수 없는 곳. 반사막지역, 황토지역이다.

 

 

 

옛 독립문사진의 뒷산의 그런모습이다.(서안일대로 추정)  산은 거의 돌산의 모습.  나무가 있다하나 어쩌다가 한 두개 보이

 

고...  문헌속의 아차산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동안 조선이 대륙에 있음을 여러번 밝히면서 서울도 대륙의 서안에 있음을 점

 

쳐왔었다. 그런 도중 아차산이 만약에 서안일대에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한번 가정해보면 거의 일치한다.

 

 사진= 일제당시의 독립문 (대륙조선사 연구회참고)

 

 

아차산은 섬서성 서안인근에 있다.

 

 

서안의 섬서성중남부일대는 황하지류인 위수가 흐르고 있고, 위수 이북, 서쪽의 감숙성으로 가는 산골쪽은 모두 황토로 이뤄

 

진 산악지대이다.  이곳은 필자가 2007년 12월에 방문한 적이 있다. 겨울에 가서 그런지 나무한그루, 풀한포기가 없었다. 

 

 

 

 

사진- 섬서성일대의 황토산  (MBC 황화6부작 참고)

 

 

그러나, 물을 끌어들여 밭농사를 한 흔적이 보인다. 물을 대면 풀, 야채류는 자랄 수 있다고 해석이 된다. 그러나 나무는 거의

 

 몇그루밖에 보이질 않는다. 거대한 산악지대가 계단식 밭모양으로 정상에서 아래까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만약에 바람이

 

 불것 같으면 황토가 먼지가 되어 온 동네를 휩쓸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섬서성 이지역은 건물이 모두 이곳 황토로 만든 황

 

색벽돌로 지어졌고, 동네가 항상 뿌여했다.

 

 

 

 

 

사진= 해발1700여m 의 섬서성 황토고원 (함께여는 세상/천둥산참조)

 

 

 

고산지대의 협곡을 넘어 서안시내쪽으로 가면 위수(패수)를 따라 드넓은 초원이 전개된다. 조선시대 아차산이 바로 이런 지

 

형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한반도 서울의 지형하고는 전혀 맞지않는다.

 

 

 

<지은이 이덕무 약력>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영조~정조) 조선후기의 실학자로 자가 무관이고, 호가 형암이다. 본관은 전주이고, 박지원, 유득

 

공과 친하다. 박학다재하고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저서로는 <청장관전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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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15~17>

 

 

[물소가 대조선의 동물인 증거]

 

15. 대조선의 물소뿔이란 공물은 동남아대륙의 공물이다

 

물소의 뿔은 대조선의 주요한 생산품이다. 그래서 최고의 정부기관인 의정부에서 조선황제께 물소뿔을 바쳤고, 그 물소뿔을 재료로 조선의 각궁이 만들어

졌다.

 

[근거]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태종 12년 임진(1412, 영락 10)   2월 20일(을해) 

에 이렇게 나온다.   " 의정부에서 물소뿔 16척개를 바치다.  "
의정부(議政府)에서 수우각(水牛角) 16척(隻)을 바치었다.
【원전】 1 집 626 면
【분류】 *재정-진상(進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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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각궁의 재료]: 님의 글참조 

각궁은 길이 120∼130cm의 단궁()이자 여러 재료를 사용하는 복합궁이다. 물소 뿔, 소 힘줄, 대나무, 뽕나무, 참나무, 화피(벚나무 껍질), 민어부레풀 등 7가지 재

료가 사용된다.

[의의]

 

1. 물소뿔은 한반도에서 생산되지 못하는 조공공물품목이다. 물소는 대륙의 중남부지방에서 흔한  열대지방의 동물이다.

2. 조선은 대륙국가의 대국이었기에 ,   황제에게 바치는 공물에는 물소의 뿔이 있었고,  신사임당의 동물그림에도 우리나라 조선에서 흔한 물소가 있었다.  그리고 청

나라의 조선에 대한 만행을 그린 삽화에도 대조선의 물소가 등장하는 것이다.

3. 대조선의 명품 각궁의 재료로서 신토불이 물소뿔이 있었다함은 물소가 조선에서 흔한 동물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4.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후 전리품으로 바치라는 물품중에 물소뿔로 만든 각궁이 있었다고 하니, 물소는 명백한 대륙조선의 증거물중의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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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청나라군인이 잡아가는  조선의 소는 물소이다.

 

 

 그림= 소를 약탈하는 청나라군인들

 

 

<소를 약탈하는 청나라 군인들> 제목의 그림은 영국 [그래픽]지 1895년 3월 9일자에 실린 것으로 잡지의 종군 기자이자 화가였던 후리프가 청일전쟁 당시 조선에서 목격한 장면을 스케치한 것이다. 그는 이 그림과 함께 기사를 통해 청일전쟁 당시에 청나라 군인들이 조선 백성에게 저지른 각종 만행에 대해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그런데 청나라 군인 , 청인은 아랍모자를 쓴 아프리카계흑인이고, 조선인은 백의를 입었으며, 조선인의 소유였던 소는 동남아시아 열대지방의 물소이다.

 

이 그림의 의미는 청나라는 그 위치가 서남아시아쪽에 위치해 있음을 의미하며, 조선의 영역은 열대지방까지 퍼져있었는데, 특히 동남아시아에 살던 조선인들의 소인 물소를 청나라사람들이 끌고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영역을 대충 짐작 할 수 있다. 조선의 국세가 기울기전 조선에는 물소가 있었으며, 조선은 서남아시아에 있던 청나라와 국경을 대치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참조=대륙조선사 연구회. 김창민 

                                                                                                                             러브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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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신사임당은 열대동물 물소를 그렸다.

 

[자료의 근거]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내 전시관에 신사임당이 그린 물소가 있다.

화가: 신사임당.  시기: 조선 (16세기). water buffalo.

 

* 설명서

" 경사진 물가에서 한가로이 물을 먹고 있는 소의 모습을 포착하였습니다. 좌측하단에 짙은 먹색의 바위를 배

치하여 구조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습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소의 몸체에 X자형의 콧구멍,검은눈동자 주

위에 두른 흰색테등 당대의 시대양식이 잘나타나 있다."

 

[의의]

1. 조선시대 여류화가인 신사임당이 물소를 그렸다고 함은 큰 의미가 있다. 그 당시 동물원이 있어 동물원의

물소를 보고 그렸을 가능성이 없다.  물가에 있는 물소, 조선의 남부지방은 아열대, 열대지방이어서 농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소가 바로 물소임을 분명히 보여 주는 예이다.

 

2. 조선의 남부지방의 강에는 악어가 우글거린다는 내용이 있듯이 물소는 조선에서 흔한 동물일 것으로 기

대된다.

 

 오죽헌 전시장의 신사임당이 그린 물소 (Water Buffalo)- 우측그림

 오죽헌 전시장의 신사임당이 그린 물소 (Water Buffa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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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18~20>

 

[대조선에서 그린 지도는 조선의 세계영토를 표현했다.]

 

18. 한국본여지도는 대조선본토의 지도이다.

 

 [자료의 근거]

 

한국본여지도

대조선에서 그린 지도지만 원본은 프랑스에서 소장하고 있다.  지도이름이 한국본여지도  즉 한국을 나타내는 지도이다. 한국본토지도, 대조선본토지도, 한반도,열도,

 중국대륙, 동남아가 모두 대조선의 본토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동아시아지도라면 아세아지도라 했을 것을 왜 한국~ 지도라 했을까?  이 땅이 모두 대조선의 영토

였기에 한국본여지도라 했던 것이다. 

 

 

 

[의의]

 

이 지도에는 한국이 중국, 한반도, 일본, 동남아시아임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중국지역의 지역표시무늬가 한반도에 축소되어 비슷하게 표시된것 같은데

요. 원본에는 천하여지도라 한다. 이는 대조선인 대한민국(corea)이 아시아임을 다시한번 증명하는 꼴이 된다.  귀중한 자료다. 원본은 프랑스국립 도서관에 있다. 한

국여지전도는 조선대륙 강화(강도)에서 프랑스가 빼앗아 간 대조선의 지도입니다. 대륙조선의 명백한 증거입니다.     참고: 대륙조선사 홈페이지

 

 한국본 여지도(韓國本 輿地圖)는 17세기 즈음에 (1637년에서 1644년 사이 ) 대조선에서 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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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대조선국토의 지도이다.

 

[자료의 근거]

                                                                                                                                                        http://cafe.daum.net/chosunsa/1PGZ/48 주소 복사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 조선초 1402년(태종 2)에 권근(權近)·김사형(金士衡)·이무(李茂)·이회(李?) 등이 제작한 유라시아 대조선의 국토지도이다. 정화제독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하여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크기는 세로 158.5㎝, 가로 168.0㎝. 비단 바탕에 그린 채색 필사본. 원본은 일본 교토[京都]의 류고쿠대학[龍谷大學]에 있으며, 규슈[九

州] 시마바라 시[島原市] 혼코지[本光寺]에도 유사한 본이 있다

 

 2. 한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일본, 서쪽으로는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당시 알고 있던 세계인 구대륙 전체를 그린 사실적이고 정확한 지도이다.

 지도 하단에 있는 양촌(陽村) 권근이 쓴 발문에 의하면, 대륙에서 만든 〈성교광피도 聲敎廣被圖〉·〈혼일강리도 混一疆理圖〉, 우리나라·일본의 지도를 합하여 새

로 제작했다고 기록했다

 

3.  신대륙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이전의 지도로서 세계적으로 훌륭한 세계지도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조선 초기의 지도제작술의 수준은 세계최고였다. 

대조선의 기술로 그린 유라시아, 바로 대조선의 강토를 잘 표현해 냈다. 유라시아는 국경이 없다. 오직 대국 대조선이 관할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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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태평양은 대조선의 동해로서 원래 대동양이었다.

 

[지도의 증거]

1669년(조선 19대 숙종)에 송이영?이   제작한  자명종식 혼천시계는 국보 제230호로 지정된 것이고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혼천시계에는 지구의가

있는데 그 지구의는 대조선의 세계 영토지도를 나타낸다. 이 안에는 태평양이 대동양으로 나온다.

 

 

그림= 시계의 지구의(문중양 교수의 역사과학기행,동아시아,325p,2006  참조)

 

 

<해설>

조선의 동해인 태평양은 원래 대동양大東洋이라고 표기했다.  조선의 서쪽은 대서양大西洋, 동쪽은 대동양, 남쪽은 태평양이다. 그래서 조선은 삼면의 바다로 둘러

쌓여 있다는 것으로 통한다.  조선이 서쪽바다 대서양을 만들었으면, 동쪽바다 대동양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조선의 4해란 유라시아,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북해은 북극해, 동해는 대동양(후에 태평양으로 고침), 서해는 대서양, 남해는 태평양(후에 인도양으로 바꿈)이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볼때 서쪽의 대동양은 맞지 않으므로  조선의 남해인 태평양을 가지고 대동양의 이름을  바꾸어놓았고, 그 태평양자리는 영국이 차지한 인도에 가

깝다하여 인도양으로 바꾼것으로 보인다.

 

 대조선은 지구촌을 다스리는 초대형 국가로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대양 육대륙의 명칭이 모두 우리말(한자)로  표기되어 있고, 1669년도 대조선은 세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세계는 그당시 어르신들이 말하는 조선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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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21~24>

[대륙은 대조선의 땅이다]

 

21. 양자강은 고려, 조선 고유의 강이었다.

 

 

[자료의 근거]

 

조선시대 문집 동문선 권22   김구용의 시 < 양자강에 배를 타고(夜拍揚子江)>

 

"  달은 양자강에 가득하고 밤은 맑은데,

  배는 남쪽 언덕에 매고 조수나기 기다리네,

  봉창에 잠깨어 보니 어딘지는 알겠거니,

  오색구름 깊은 곳에 백제성이 보이누나  "

 

月滿長江秋夜淸    繫船南岸待潮生  봉窓睡覺知何處  五色雲深是帝城

월만장강추야청     계선남안대조생 봉창수각지하처  오색운심시제성

 

[해설]

1. 양자강은 장강이라고도 하며 백제성은 사천성 봉절현 동쪽 백제산에 있다.

2. 호북성의  양자강을 따라 상류로 가다보면 장강삼협을 지나다 보면 백제성

이란 고성이 나온다.

3. 고려의 시인 김구용이 지은 이 시구는 한반도가 아니라, 고려의 양자강에

밤배를 타고 한수 지은 것이다. 김구용은 사신으로 대륙을 간것도 아니다.

4. 고려의 본토,  전라도 접경지대인 양자강에서 배를 탔던 것이다.

5. 양자강은 즉 고려 대조선으로 이어지는 국가의 강이었다.

 

[참고]

 이사람을 보라2권 (金鍾潤)

 

[참조사진] 제공:명화

 

 

 

양자강의 야경

 

 

 

백제산인근  백제성의 백제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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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양자강이남도 고려땅이었다는 고전문학의 증언

 

조선시대 문학지 동문선 권69 기(記) 운금루기(雲錦樓記) (이제현저, 주1)에 나오는 내용이다.

" 산천을 찾아다니며 구경할 만한 명승지란 반드시 궁벽하고 먼 지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임금이 도읍한 곳으로서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에도 진실로 구경할 만한 산천은 있다(주2).

 

그러나 명예를 다투는 자는 조정에 모이고 이익을 다투는 자는 시장에 모이게 되니, 비록 형산 衡山, 여산 廬山, 동정호 洞庭湖, 소상강 瀟湘江(주3)이 반발자국만 나서면 굽어볼 수 있는 거리안에 있어 우연히 만날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런것들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사슴을 쫓아가면 산이 보이지 않고, 금을 얻게 되면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털끝만한 것을 살피면서도 수레에 실은 나무짐은 보지 못한다. 이곳들은 마음이 쏠리는 곳이 있어 눈이 다른 데를 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주4)

 

 

 

 

                                                           

<해설>

 

주1) 이제현 (李齊賢, 1287~1367, 고려 충렬왕~공민왕). 고려의 문학가. 호는 역옹,익재,실재이고, 1301년 문과 장원에 급제함. 문화시중에 오르고 당대의 명문장가였으며, 외교문서에 뛰어남. 정주학의 기초를 세웠으며,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역옹패설이 있다.

 

주2) 참고도서: 선비의 소리를 엿듣다. 정병헌,이지영엮음.사군자. 2005. 276쪽. 고려 충선왕때 도읍지는 개경(대륙 하남성 낙양인근) 이였다. 그때도 명승지는 백두산, 금강산(황산)이었지만, 황궁주위의 가까운 곳에도 찾아보면 좋은 명소가 있다는 말이다.

 

주3) 형산(조선의 지리산)은 대륙 호남성에 있고, 동정호는 호남성에 있으면서 양자강과 연결되어 있고, 소상강은 양자강지류를 뜻한다.

 

주4) 등잔밑이 어둡다고 신경을 못쓰면 가까운곳도 못본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가까운데서도 미를 발견하여 만족할 수 있다는 비유의 내용이다.

 

 

<의의>

 

1) 조선의 역사는 일제에 의해서 소국사내지는 제후국사로 축소발전되었다. 대륙적인 요소들을 조선사편수회를 통하여 철저히 반도적인 것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2) 그런데 문학서적만큼은 사서가 아니라서 완전히 손을 대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의 대륙적인 요소가 곳곳에 남아있다.

 

 

3) 동문선 운금루기에서는 고려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중국대륙의 산과 강과 호수의 명칭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다. 명승지는 먼곳뿐만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다. 임금은 하남성 황도(중악,숭산,낙양인근)에 계시는데, 양자강이남의 호남성 지역의 형산(지리산,남악), 여산, 동정호, 소상강이 반발자국만 나서면 곧바로 찾아 볼수 가 있다고 했다.

 

 

4) 그만큼 호남성이 주위에서 엎어져 코닿을 거리,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말이다. 고려의 명승지는 수천거리의 먼거리에 있었지만, 호남성은 고려의 중심지 중원,경기에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곳은 고려의 산하에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고려는 대륙에 있어 하남성, 호남성 등지에 있었다는 증거가 되고 있다.

 

5) 동문선은 조선 성종때 처음으로 서거정이 고려,조선의 문집들을 엮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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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고려사에 현중국의 오악이 고려산으로 나온다.

 

 

 

 

고려말기 공민왕, 즉 공민황제때 몽골의 중원장악을 막기위해 고려의 산하의 이름을 지정한 일이 있었다.  그 이름하여 다섯개의 산 오악과 4개의 바다 사해와 4개의 강 사독, 그리고 오진이 있었다. 그 중 오악을 살펴보자.

 

<문헌의 증거>

' 고려사(김종서,정인지등저)'   공민왕 조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 중악숭산지신 中嶽嵩山之神 = 고려의 가운데산 숭산의 신

남악형산지신 南嶽衡山之神 = 고려의 남쪽 산 형산의 신

서악화산지신 西嶽華山之神 = 고려의 서쪽 산 화산의 신

동악태산지신 東嶽泰山之神 = 고려의 동쪽 산 태산의 신

북악항산지신 北嶽恒山之神 = 고려의 북쪽 산 항산의 신 "

 

그림= 중국 중원의 5대산

 

 

이 오악의 산 이름을 보면 한반도에는 전혀 없는 산으로 대륙의 중원지방에 틀림없이 존재해 있는 산이다. 현중국의 오악이 모두 고려의 산인 것이다. 그 고려산이 있던 곳이 고려가 본토로 위치해 있던 곳이다. 이 고려의 오악은 조선의 5대명산이 되었고, 현재 중국의 5대명산으로 불리우고 있다. 오악은 바로 하남성 낙양인근의숭산, 호남성의 형산, 섬서성의 화산, 산동선의 태산, 산서성의 항산 이다.

 

오악중 숭산은 송악산, 형산은 지리산, 화산은 삼각산으로 불리우면서 후대에 대륙에서 한반도로 지명이전을 해 놓은 것이다. 고려사에 나타난 오악은 현중국이나 대한민국이나 다 똑같이 고려땅에서 조선땅에서 같이 존재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도 똑같고, 지역도 똑같다. 시간만 흘렀을 뿐이다. 단지 나라만 서로 다르게 나뉘어져 있을 따름이다. 모두가 고려인,조선인의 후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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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고려사

   고려사는 대조선때인   1449년(세종 31)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2년 반 만에 완성을 보고, 1454년(단종 2)에 간행했다. 김종서(金宗瑞)·정인지(鄭麟趾)·이선제(李先齊) 등의 관료들이 편찬에 참여하였다. 책의 구성은 기전체 방식을 따랐으며 세가 46권, 지 39권, 표 2권, 열전 50권, 목록 2권 등 총 139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과 짝하여 편년체로 구성된 고려시대사인 <고려사절요>가 1452년(문종 2)에 편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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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여지승람은 고려가 대륙에 있음을 나타냈다.

 

 

[자료의 근거]

 여지승람의 당고의 시를 보면

 

 

" 평양과 개성이 하늘과 바다를 함께 덮었는데,

성루에 올라보니 거친 연기 일어나네.

옛 궁터는 기자의 오랜 옛터요.

은나라부터 염유(유방)에 이르기 9백년이라,

산을 의지한 누대와 전각이 하늘을 뚫었는데,

숲에 묻히고 연무에 잠겨 와력만 남았구나."

 

[해설]

 

여기서 평양은 서경으로 지금의 서안이고, 개성은 개경,동경으로 고려의 황도를 말하는데 위치는 대륙하남성 숭산인근에 있었다.  옛궁터는 기자조선의 서울인 장

안,서안,서경을 말하며 대륙의 중원지방이 은나라부터 한나라 유방(염유)에 이르기 까지 그들의 영역이었음을 의미한다.   결국 고려는  기자조선의 영역에 있었으

며, 은나라, 한나라의 영토와 같은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고, 아울러  기자조선, 은나라, 한나라가 고려의 선대국가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대륙조선이 한반도로 축소왜곡되기 전에는  기자조선이전의 하나라, 은나라(은조선), 주나라, 그이전의 단군조선, 배달, 그리고 최초의 국가 환국, 기자이후의

한나라, 북부여, 삼한(마한,진한,변한),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이르기 까지 모두가 대륙 중원에서 어우러져 대대로 같이 내려

온 나라, 같은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실예이다. 

 

당연히 한반도지역도 대륙의 한 일부분으로서 이들나라의 영역에 같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한국본여지도>를 포함하여 대륙의 고지들을 보면 한결같이

반도를 크게 표시하고 항상 대륙과 같이 그려 놓은점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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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여지승람은 

동국여지승람으로서 조선시대의 지리서이다. 조선 성종의 명()에 따라 노사신 등이 편찬했다. 《대명일통지》를 참고하여 우리나라 도()의 지리·풍속과

밖의 사항을 기록하였다. 특히 누정(樓亭), 불우(佛宇), 고적(古跡), 제영(題詠) 따위의 조()에는 역대 명가()의 시와 기문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55권

 25책의 활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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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25~27>

 

[우리나라국토크기는 삼천리가 아니다.]

 

25. 고려사에 고려의 강토가 만리가 된다고 씌여있다.

 

우리나라영토는 한반도의 압록강과 두만강의 경계로 삼천리라고 못박고 있다.  우리나라 애국가에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만세

 무궁화 삼천히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우리나라만세"

라고 하여 삼천리라고 규정하고 있다.

 

어느나라도 자국의 규모가 얼마라고 규정한 애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삼천리라는 말을 써 넣어야

하는 이유가 무얼까? 이는 일본의 영향이라 볼 수 있다. 반도사관,  한반도우선주의, 단일민족, 한반도 안

에 모든역사를 다 넣겠다는 의도로 아예 애국가마져 헌법마져 정해버린 이유이다.

 

하지만~  전혀 아니다. 우리는 우리스스로 대한민국사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한민국사에는 분명히 우리나라영토가 만리라고 여러군데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국사교과서상에는 전혀

집어넣지도 않고, 교육도 시키지 않으니, 국민들은 까맣게 모를수 밖에 없다. 오늘은 첫번째 순서로

고려사에 나오는 내용을 소개하겠다.

 

북한국역 고려사  제5책, 권 제56  지제10  지리1편을 보자.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둘러있고, 1면만이 륙지에 련결되어 있는바 강토의 넓이는 거의 만리나 된다.

고려 태조가 옛 고구려땅에서 일어나 신라를 항복받았으며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개경에 수도를 정하니

3한의 땅이 이제 통일되었다. ....."

 

 

 

 

그림1=  고려사의 책표지

 

 

그림2=  북역 고려사내 고려의 강토가 만리라고 표현된 증거

 

위글 둘째줄에 만리라고 분명이 나와있다. 이래도 거짓이라고 하면, 말도 않되니, 서점에 가서 고려사 책

을 사보고 확인하면 더 정확하겠다.   한자로 원문은 좌측하단 둘째줄에 보면   於萬里 라 나온다.

만리라 함은 10리가  4~6km이므로 4000~6000km정도이다.  1리가 요즘은 0.4km, 조선시대에는 0.5~0.6km로

계산되었다는 말도 있다.

 

지도상에 만리라 함은 1리가 0.4km일 경우 4000km를 말하며  아래아시아전도의 척도 800km의 5배가

된다. 이거리는 한반도 부근에서 중간좌측의 검은 선부분까지이다. 즉, 동서로 한반도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의 거리가 만리이다.  이것이 고려의 영토란 소리이다.

 

1리 0.6km일 경우 아래 척도800km의 7.5배가 되어 한반도 부근에서 사우디아라비아건너 홍해,지중해까지이다.

실지로 지도로 보니 눈에 확들어 온다. 우리나라 고려의 영토가 적게는 아프가니스탄까지 많게는 지중해연안

까지 였다는 사실,   참 쇼킹한 내용이다.  만리가 이렇게 넓은 땅이다.

 

남북으로 보자  1리가 0.4km라면 만리는  중국남부 하이난섬에서 북쪽으로 바이칼호수위까지이다.  만약 1리가

0.6km라면 만리는 하이난섬에서 시베리아를 넘어 북극해까지가 된다.  이럴 수가? 고려의 영토가 북극해까지라

니.. 그러나  사서에 1면이 육지고 삼면이 바다라고 했으니, 범위는 북쪽이 시베리아라고 보아야 한다.

 

그럼 삼면의 바다는 어디인가?  동쪽바다는 동해다, 동해는 현재 황해, 한일사이의 동해, 동중국해, 태평양을

말한다.  남쪽바다는 남중국해, 인도양,남극해이다.  서쪽바다는 어디인가? 서쪽바다는 지도에서 보듯이 홍해,

지중해, 흑해이다. 여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영토가 더 넓어져  대서양이 서해로 증명이 된다.(후일에 설명)

 

                                                                                                                        일만리(1리=4km)

                                                                            <--------------------------------------------------------------------->

                                                                                          일만리(1리=6km)

                        <-------------------------------------------------------------------------------------------------------->

 

 

그림3= 아시아전도,  고려는 만리다. 바로 아시아전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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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우리나라는  지역의 넓이가 만리가 됩니다.

 

[자료의 근거]

 

성종실록 134권 12년 10월 17일 에서 남원군 양성지가 상언하기를, 

 

 “우리 나라는 요수의 동쪽 장백산(=백두산,지금의 음산)의 남쪽에 있어서 3면이 바다와 접하고 한쪽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지역의 넓이가 만리나

 됩니다. ” 

 

[의의]

대조선지역의 넓이가 만리가 된다함은  바로 아시아대륙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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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조선 세조때 상소문에 조선은 만리지국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료의 근거]

 세조실록1권 1년에서

 

 "우리 동방(조선)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이라 불렀습니다. ."

 

 

[의의]

 조선이전의 고려도 만리지국이었는데,  북역고려사 제5책     지(志) 56권 지제10  지리1편 첫줄에 보면,  “우리나라는 ~ 강토의 너비가 거의 만리

   가 된다.” 고, 분명히 명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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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대조선사의 비밀 1000가지 <28~30>

 

[우리나라국토크기는 삼천리가 아니다.]

 

28. 독립신문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조선은 세계 가운데서 큰나라이고, 토지는 동양에서 제일이다.”

 

(주1) 독립신문(1896.4.7 창간 이십사호: 1896년 5월 13일 논설)에서 "조선의 호수는 348    

  만911호 가량이다. 지면은 영국 리수로 12만 방리요, 조선 리수로는 60만 방리 가량이     

  다 ~ 아메리카합중국외에는  조선같이 인구 많은 나라는 없고~~조선이 세계 가운데서     

  큰 나라요, 토지는 동양에서 제일이다."  12만방리를 환산하면 1만리정도 나온다. 이      

  정도면 만리장성이 있는 대륙이 조선의 지면이요 크기라고 볼수있다.

고려사에 고려의 강토가 만리가 된다고 씌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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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조선의 지방은 고구려보다 2배 더 크고 산천이 험준하다고 한다.

 

(주) 숙종실록 38권 29년 그 기록을 보면, "  고구려  안시성에 이르렀을 때 황제가 한탄하     

기를,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도 성을 잘지키는 것으로 이름이 나서, 수·당의 백만 군     

 대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조선)는 지방이 고구려에 비하여 배(倍)나 크고     

 산천이  험준한 것은 고금이 같은데도..."라고 하였다.  삼국시대에  가장 큰영토를 확     

 보했던 나라가 고구려인데, 그 고구려 영토의 2배가 조선의 영토라고 하니 과연 그 크     

 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수서 81권 열전46 동이고려에 ‘안시성은 산서성 남쪽을 흘러가   

   는 패수근처에 있다’ 고 나오는데, 안시성에 이른 황제의 위치가 바로 대륙조선임을 증

      명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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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광개토황제(AD 391~412)는 아시아를 제패했다 (고구려 영토고찰 )

 

1. 대륙사에 대하여

1) 현재 반도(지금의 대한민국)에서의 한국사(大韓民國史)는  대륙사(아시아대륙사)에서 중원사(중국사)를 발췌하여 한일합방(1910년)이후 반도로 옮겨온 것이고,
제후국사는 현중국(지금의 중국)과 렬도(지금의 일본)와 몽골, 러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국가들로 나눠어져 꾸며져 있다.


2) 즉 대륙사는 모두 우리겨레의 력사이다. 특히 현중국사는 더 친밀한 우리의 역사이다.
현중국사는 中原史중원사 (배달, 단군조선, 고구려, 신라, 백제, 발해, 고려, 조선, 대한제국)를 포함할때, 완전하게 되고, 우리겨레의 력사가 된다.

현중국사는 중원사(중요한 력사)를 빼고, 일부중원사(삼황오제, 황제, 하, 은, 주, 漢한)와 제후국사(춘추전국시대국가, 진, 後漢후한, 삼국(촉,위,오), 연, 후연, 서진,남북조국들, 북위, 동진 ,수 ,당, 5호16국, 명, 청, 장개석의 중화민국)와
기타제후국사(말갈, 거란, 서하, 요, 금, 몽골. 티벳, 위구르, 동여진, 서여진)를 포함하고 있다.


3) 중원사에 현중국사를 포함할 때 진정한 우리겨레의 력사가 된다.
특히 부여에서 독립한 고구려는 내몽골에서 남진하여 中原중원에 자리 잡으면서 漢한을 멸망시킨다.
漢한은 이전에 단군조선이 소멸되면서 어부지리로 中原중원(중국)을 차지했고, 다시 고구려에 중원을 넘겨준다.

  한의 광활한 영토는 모두 고구려의 땅이 되었고, 中原중원(중국)이 곧 고구려였다.
추모(광개토황제릉비에서 나온 이름, 주몽(삼국사기), 동명성 황제)이후 배다른 자식(소서노?의 아들들, 비류와 온조)들이
고구려에서 떨어져나와 십제(후에 백제로 고침)를 중원(중국)남부에 건국한다.

  漢한이 망한뒤 피난민(후한)이  서나벌(후에 신라)에 와서 신라건국에 막대한 공을 세운다.
고구려가 차지했던 中原중원이 삼국(백제와 신라는 제후국의 일종임)으로 나뉘었고, 기타 제후국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2. 광개토황제시절의 고구려 영토고찰

1) 광개토 황제가 등장하면서 고구려는 개국당시시절로 돌려졌다. 우선 중원내 토호세력들을 약화시켜
중앙집권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주위의 제후국들을 정복하고, 천자국 고구려의 위용을 다시 과시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를 정복하는 이야기가 주로 나오고, 거란 옆 비려와 숙신을 복속시켰으며,
서토의 후연과의 종속관계를 확고히 한다. 廣開土皇帝陵碑광개토황제릉비(주1)에 보면 제후국(속국) 백제를 百
백잔이라 비하시키며 정벌하는 내용과 제후국 신라를 도와 왜를 정복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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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주1) 廣開土皇帝陵碑광개토황제릉비 전경


(주2) 廣開土皇帝陵碑광개토황제릉비

"백잔(=백제), 신라는 옛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왔다.

百殘, 新羅, 舊是屬民 來朝貢,


그러나 신묘년 이래로 왜가 바다를 건너 백잔과 신라를 쳐 신민으로 삼았다.

6년 병신에는 왕(황제)은 몸소 수군을 인솔하여 백잔국(백제)을 토벌했다. "

而倭以辛卯年來, 渡海破百殘▨▨▨羅, 以爲臣民, 以六年丙申, 王躬率水軍, 討殘國.


" 왕(황제)이 진노하여 아리수(현재 한수)를 건너고, 장수를 (한산성)에 보내어 성을 압박하라고 하니,
(단기로 쳐들어가서 백제왕에게 항복하고 백성들이 편히 살라고 하여)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남녀 천명과 세포 천필을 왕(황제)에게 바치고 백제왕은 이제부터 영원히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왕(황제)은 백제왕을 아량으로 용서하여 “앞서는 어리석었지만 차후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새기도록 하였다.
이때 백제의 58성과 7백의 부락을 빼앗고 백제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인을 인질로 삼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

口口口其國城 殘不服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城 橫○○○○(衝直撞以) 便國城

而殘主因逼獻 (上)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 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 幷大臣十人 旋師還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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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은 이를 왜곡하여 오히려 왜가 신라를 정복하여 任那임나(일본부)를 반도에 세웠다고 한다.
신라가 중국에 있었으므로 실제로의 의미는 대륙에 임나가 있어야 한다. 임나는 광개토 황제비를 비밀리 수정하여 만든
나라라는 의혹이 있다. 재야학자들 사이에서는 임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분들도 있다.



2) 광개토황제릉비도 문제다. 진품인지의 여부도 불분명하다. 일본인이 먼저 발견해서 수정했던 흔적이 있고,
위치도 반도북부에 있음이 어울리지 않다. 원래는 내몽골지역이나, 중앙아시아등지에 있어야 타당하다.

  일본인이 반도사관에 입각하여, 반도북부(동북삼성)지역에 옮긴것도 의심해야될 사항이다.
그러나 그당시 세워진 비석이 맞다면 삼국사기를 포함한 문헌보다도 더 확실한 것이 된다.



3) 광개토황제의 고구려를 보면 근세조선과 흡사하다.

국내성을 중심으로 한 中原國중원국(천자국)과 동이,서융,남만, 북적을 포함한 제후국들이 서로 이로 물듯이 톱니바퀴처럼(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동이로는 신라, 반도, 렬도, 서융으로는 후연, 북위, 동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남만으로는 백제, 가야, 왜, 동남아시아, 북적으로는  말갈, 숙신, 비려, 거란, 몽골고원, 시베리아가 있었다.



4) 광개토황제때 각 국가의 임금들 비교

위치

국가

국명

임금명

임금호칭

연대

비고

중국

천자국

고구려

광개토

천자,황제

AD 391~412

 

동이

제후국

신라

내물

이사금

AD 356~402

 

실성

이사금

    402~418

 

서융

제후국

후연

모용성

황제

    398~401

 

모용희

황제

    401~407

 

모용운

황제

    407~409

 

제후국

북위

 

황제

    386~535

 

제후국

동진

 

황제

    317~420

 

남만

제후국

백제

진사

황제

    385~392

 

아신

황제

    392~416

 

제후국

닌토크

천황

    313~399

 

리츄

천황

    400~405

 

한제이

천황

    406~410

 

제후국

가야

이시품

황제

   346~407

 

좌지

황제

   407~421

 

북적

제후국

말갈

 

 

 

제후국

숙신

 

 

 

제후국

거란

 

 

 

기타

인접국

인도 굽타왕조

 

320~

 

 

3. 고구려사 지도의 비교

1) 왜곡된 한국사(고구려사) 고등학교 교과서 역사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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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새롭게 고찰된 광개토황제(AD 391~412) 때 고구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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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보면 광개토황제때의 고구려는 중국(중원)에 위치하여 천자국으로서 사방에 제후국(소국)들을 거느린 아시아의 대제국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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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게 있는데.. 중국의 춘추전국시대는 사실인가요.. ' '? 대고구려제국이 저렸대면... 갑자기 의문이 들어서요..^_^ㅠ;; 09.07.09 23:58

이중에는 사실인것도 있고 아닌것도 있습니다...!! 지금 역사를 한단고기부터 윗대부터 조명하다보니...조선 고려에서 막히는겁니다.....고려의 미스테리만 풀어도 모든것은 풀릴겁니다....고려의 수도만 가지고도 개성이다 중원어디다...신라가 중원에 있었다면 신라계승국 고려는 어디인가? 왜는 중원남부에 있었는데..왜 일본열도이고 한반도는 뭐였던가??? 그렇타면 한단고기는...... 09.07.10 14:01
아니 그렇게 궁금하셨다면 묻고답하기방에 물어 보시면 될것을 이것 저것 아무거나 다 올려 놓고 테스트 하는것도 아니고 이건 아니지요.. 09.07.11 06:59

가슴이 벅찬 이느낌은 왜일까요 09.07.11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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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역사 공부한걸 후회할정도 입니다..차라리 삼국이 한반에 있는게 마음편한뿐.....과연 우리 한반도는 뭐였단 말인가??? 09.07.08 22:17

천하전여총도는 고려의 것입니다.우리민족은 고려를 끝으로 해상왕국은 막을내렸습니다.이조 신기전=고려주화 최무선의 화포등등등 문자또한 있었습니다.왕건의 고려대선은 36미터가 넘었으며 객관(지금의 호텔)의 크기는 도성만큼이나 컸으며 무역은 대식국(지금의 아라비아)마팔국(인도반도)섬라곡국(태국)교지국(베트남)쥐나족과 왜족은 말할것도 없구요...이조선시대는 해상국이라고는 찾아볼리야 찾아볼수도없고 역사또한 그리말하고 있습니다.좋은내용도 많지만 조금왜곡이 있어보입니다. 09.07.08 22:38
고려는 주변의신하국을 거느리는것은 문론이고 엄청난 부의 나라였습니다. 세계최초로 화포를 탑제하고 강력한 군함을 만들어 저런 상상하지도 못할 세계의 지도를 그린것입니다. 09.07.09 13:05
세종태왕님의 우리역사를 사랑하는 마음은 제가 본받고 싶습니다.저도 많이 부족하고 배우는것을 좋아해서 많이 찾고있지만 먼저 알고 자료를 만드시는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09.07.08 22:41

한고려님! 고려 대국이면...조선이 대국이 아닐수가 없기 때문입니다..태조.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해서 모든땅을 잃었다는 논리는 성립이 안돼기 때문이죠..백성들이나 군인이 가만있겠습니까?? 지금 만약mb가 우리나라를 왜나 지나족에게 땅을넘기다면...분명 시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게 분명합니다.. 09.07.08 22:56

글을 너무 많이 적어 다 지워져버려 허무하나 다시 적겠습니다.ㅎㅎ 문론 고려중후반? 부터 무인정권이 들어서면서 각종난들과 거란의 침입으로 국력이 약해지는것은 사실입니다.헌데 고려에 이어 이조선이 대국이 아니될수가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안타깝게도 이조선은 대국이 아니였습니다.하늘미르님께서 다 설명한것으로 압니다만 다시말씀드리자면,이조선시대는 있을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맙니다.고종은 명의 위패를 모시고,명에게서 옥새까지 하사받고 이성계는 생민을 수십만을 죽이는가하면 세계어디에서도 찾아볼수없는 일들이 일어났고,명의 제후국이였으며 명에 왕게게 왕의 시호까지 받는등 한민족 역사에서 도저히 일어날수가 없 09.07.09 00:51
는 일들이 일어난것입니다.세종님에게 간곡히 말씀드리자면 이곳말고도 이러한 내용은 온라인을 통해서 쉽게 찾아볼수 있을것입니다.한번 자세히 찾아봐 주세요.이런 안타까운 이조선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 맞습니다.고려는 마음만 먹으면 왜놈들 나라를 우습게 점령하고 격파했습니다.헌데 이조선시대는 왜놈들에게 침략에 침략을 받고 일성이 때문에 남북이 분단된 아픔을 격었지만 다시 기지개를 펴고 세계의 주인이 될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09.07.09 00:55
남북분단이 왜 김일성 탓입니까? 일본놈들과 미국놈들과 구소련놈들과 중공놈들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죠. 왜 강대국들로 인해 빚어진 민족의 비극을 한 개인의 탓이라 하십니까? 이건 아니죠. 저도 근세조선 왕조는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요 청산해야 할 역사라는 점에서는, 한고려님이나 하늘미르님같은 분들 의견과 대체로 일치합니다. 09.07.09 07:42
그러나 남북분단 및 6.25전쟁의 원인에 대한 시각에서 저랑 좀 차이가 나는군요. 일본이 초래하고 미국과 소련이 작당하여 국토를 동강나게 한 남북분단 문제와, 중공과 미국의 대리전이었던 6.25전쟁! 우리민족은 강대국들의 못된 장난질에 놀아난 것입니다. 그게 남북분단과 6.25전쟁이고요. 09.07.09 07:40
배달님의 말씀처럼 외세,강대국에 의해서도 625가 벌어진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한겨레 역사에 있어 씻지못할 죄를 지은이는 결국은 일성이가 되는것입니다. 09.07.09 10:03
그렇다고 한다면 이승만이란 개새끼는 6.25에 대해 아무 책임이 없는 줄 아십니까? 북한이 처들어올 때 뭐했습니까? 친일파 출신 장군놈들 광란의 술파티하고 놀았죠? 그 전날 비상경계령 해제했죠? 그 전날 하필 군사들 휴가나 외박, 외출 보냈죠? 전 군사병력의 절반이나요? 북한이 처들어오자 한강다리 끊어놓고 저 혼자만 도망치고 백성들 다 죽게 했죠? 또한 보도연맹 사건 조작해서 죄없는 양민들 수십만이나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죠? 또한 이승만 이 개새끼는 백범 김구선생, 우사 김규식선생, 몽양 여운형선생같은 훌륭한 광복투사들 씨를 다 말린 놈입니다! 민족의 죄인으로 김일성을 거론하시려면 이승만 이놈도 같이 다뤄주십시오! 09.07.10 07:23
제가 듣자하니 6.25 때 소위 '좌익세력'에 의해 학살된 양민보다 소위 '우익세력'에 의해 학살된 양민 수가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6.25 전쟁 중에 수백만의 양민이 희생됐는데 이중 70~80%는 미군과 남한 군인, 남한 경찰에 의해 희생됐다고 합니다. 이승만이라는 개새끼가 중용한 친일파 놈들이었으니까요. 적어도 북한은 친일매국노 새끼들 다 싹 쓸어 없애버렸어요. 우리 남한은 뭡니까? 매국노 새끼들의 천국 아닙니까? 적어도 친일매국노 문제에 관한 한 우리 남한은 북한에 대해 할 말 없어요! 09.07.10 07:23
당시부터 작전통제권은 미군놈들이 갖고 있었죠? 1950년 7월 미군놈들이 작전통제권 가진 이후부터 우리 남한측이 저지른 수많은 양민학살은 다 미군이 저지른 거나 마찬가집니다. 미군놈들의 묵인 또는 지시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거든요. 작전통제권을 미군놈들이 갖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김일성도 물론 잘못을 저지른 건 맞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보다 더했습니다. 김일성이 민족의 죄인이면 이승만은 그보다 더 악랄한 역천자의 표상입니다. 친일 반민족행위자들 기득권 만들어준 놈이 그놈이니까요! 09.07.10 07:20
그리고 6.25 전에도 수많은 양민학살 있었죠? 남한에서! 48년 4.3 제주도 양민학살 사건 아시죠? 같은 해 10월 전남 여수, 순천 양민학살 사건도 아시죠? 이 만행도 이승만이란 새끼가 군인과 경찰 동원해서 자행한 사건입니다. 김일성이 민족반역자라면 이승만은 이보다 훨씬 더 최악질 민족반역자라는 것입니다. 제주 양민학살은 제주도민들이 단독정부 수립 반대했다는 이유로 자행된 학살만행이죠. 6.25가 일어난게 분단상황 때문입니다. 이 분단상황 누가 만든 겁니까? 바로 주변 4대열강과 영국, 그리고 남한의 이승만과 그의 친일파 무리들이 만든 상황 아닙니까? 09.07.10 07:32
당시 우리민족의 염원은 자주독립된 하나의 통일정부와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란 놈은 북쪽의 사회주의자들이 싫다고 남쪽만의 단독정부를 외치고 밀어붙인 놈입니다. 다시 말해 6.25 원인이 된 분단상황은 바로 이 이승만과 그의 무리들에 의해 만들어진 겁니다. 그 뒤에 미국과 일본 등 강대국들이 있었죠. 사회주의든 자유주의든 당시 민중의 염원은 하나의 체제, 하나의 정부인데, 이승만 이 개새끼는 민중의 이런 염원을 양민학살로 대답한 놈입니다! 09.07.10 07:37
예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09.07.10 09:52
이승만..김일성 잘못보다 러시아.중국=미국.일본 이나라들이 결탁하고 타협한 결산물입니다....김구 주석이 투표했으면 이겼을꺼라고 보십니까?? 이미 미국의 각본입니다..전쟁도...그들의 시나리오구요...나라가 힘이 없어서 그건겁니다.... 09.07.10 14:34
자꾸 우리들의 선조를 욕돼게 하면 안?니다...지나족 싸이버 테러단이 우리나라에 대거 상륙한 모양이네.... new 16:56

세종태왕님..님께 진심으로 충고를 하나 해드리겠습니다..여기 저기서 여러가지 역사를 접해 보시는 것은 좋습니다..님께서는 아무리 봐도 역사관이 정립이 안되어 계시는군요..바로 며칠전에는 반도사관을 펼치며 그것에 반박을 하는 저를 막혔다고 답답해 하시더니 오늘은 또 뜬금없이 대륙이조사를 들고 나오시나요?요 밑에 님이 스스로 올리신 자료에 고려는 반도에 그것도 거의 반동가리 밖에 차지 못한 것으로 말을 해서 제가 고려는 대국이였고 축소된 후에도 심양왕으로 불릴만큼이였다는 의미로 심양왕을 언급을 하였는데 왜 이리 왔다갔다 하십니까?님의 며칠전 글들은 뭡니까? 스스로의 역사관 먼저 정립을 하세요.. 09.07.09 03:13
위에 자료는 말도 안되는 짜집기라는 것을 님이 역사관이 정립이 되시면 아실겁니다..아마도 심양왕에 대해 답변을 하려다 보니 접하게 되신것 같은데 제발 근거라고 제시하는 것들을 본인이 직접 찾아보세요..님이 퍼오신 이 자료들의 까페주인장이신 러브선님이 줄곧 여기서 대륙이조사를 말하였으나 하나라도 논파되지 않은것이 없습니다..위에 공지에 있는 번호 글들을 참조를 해보시죠.. 09.07.09 03:16
앞으로 대륙이조설에 해당하는 자료는 스팸처리 하겠습니다..님이 존중을 받으시려면 남부터 존중하는 것을 배우세요.. 09.07.09 03:20

물론 제자신이 아직 역사관이 정립안?건 사실입니다....근데 그건 나만의 일이 아니걸로 압니다만....삼태극에서도 정립안됐기 때문이죠..그게 잘못은 아님니다...심양왕에 대한 답변은 했으니..댓글 참조하시구요...조선이 평현없는 국가였다면...신라의 대국을 물려받은 고려가 다 말아먹었기 때문에 조선이 개국?겁니다...이의가 있으면 태클 환영합니다.. 09.07.09 10:26
참역사동아리 삼태극의 역사관은 정립이 되어 있습니다..글을 올리는 것은 자신의 주장을 올리는 것입니다..자신의 주장도 정하지 못하셨으면서 무슨 글을 올리시나요?스스로 공부를 더 하셔서 역사관이 자리 잡은 다음에 글을 올리는것이 당연합니다..며칠전 본인의 주장과는 반대되는 내용을 오늘 주장한다면 며칠전에 스스로 올린 글들은 스스로 틀렸다는 것을 인정 하는것 밖에 더됩니까? 역사관의 정립이란 역사 전부를 다 아는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반도고려를 주장하신게 며칠전인데 아시아 전체가 이조라는 대륙이조설을 지금 주장하시는건 솔직히 코메디밖에 안됩니다..본인의 역사관 먼저 정립하세요.. 09.07.10 07:39
하늘미르님!!! 삼태극역사관이 정립됐다는데.....1.삼태극에서 고려의 수도는 어디입니까?? 2.신라의 영토는 중원과 지금의 경상도중 신라계승국인 고려는 어느쪽을 계승한겁니까?? 3.왜는 중원남부에 있었느데.언제 일본열도로 갔습니까? 09.07.10 14:20
세종태왕/님께서는 역사관이 무슨 개개의 사실들인줄 아시나 보죠? 역사관이란 대략적인 큰틀을 말함입니다..님은 반도사관을 말하다가 갑자기 대륙이조를 말하고 그 근본적인 틀 자체가 뒤바뀌기 때문에 기본 사관 먼저 정립을 하라 말씀을 드린것입니다..삼태극의 기본 역사관은 대륙사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철저하게 소중화를 기치로 내건 이조를 민족혼의 암흑기로 보고 있는것 입니다.. 09.07.11 06:35

고려초기에 마음만 먹으면 왜를 정벌할수 있었을지 모르지만....후기에 고려가 그런힘이 있었을까요...그렇게 조금씩 밀린거지 한번에 조선에서 다 망쳤다는 논리가 잘못인겁니다...!!! 그래서 조선보다 고려 신라가 못하다는 말이며 고려 신라가 소국이라는 뜻은 아님니다....!! 결과론으로는 조선이 그럴수있지만...원인제공은 고려 신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려제국이면 대조선으로 다시 시작해야지 실타래가 풀립니다...삼국이 한반도에 있었아고 공부했느데..한번에 모든실마리가 풀리지는 않을겁니다.모든걸 앞에 정권의 잘못이다 이건 아니죠..왜? 모든결과가 한반도는 별도일까? 의문이 생기니 하느말입니다.. 09.07.09 12:58

아...피가 끓는다 09.07.09 11:54

위의 내용들은 바로 제가 궁금증을 가지고있던 내용들이며 또한 여기에 덧부쳐 조선 전기때 문신인 유호인 에 개성기행문 이라는 책을 보시면 조선은 반도땅이 아닌 대륙이 주강역 이었다는 것들을 느낄수 있읍니다... 09.07.09 14:21

조선사가 과연 진실은 있는가? 그러나 확실한 것은 유교사상 특히 성리학과 문벌 양반시스템을 기반으로 하고, 지배층이 소중화주의라는 점. 이점에서 조선은 중국애들의 번국임을 자처함. 빼지 못할 진실. 09.07.10 20:54

아 ... 애달프다.. 09.07.09 23:54

하늘미르님!!! 삼태극역사관이 정립됐다는데.....1.삼태극에서 고려의 수도는 어디입니까?? 2.신라의 영토는 중원과 지금의 경상도중 신라계승국인 고려는 어느쪽을 계승한겁니까?? 3.왜는 중원남부에 있었느데.언제 일본열도로 갔습니까? 위댓글이 잘보이지 않은것 같아 다시올립니다.!! 09.07.10 18:56
역사관이 정립이 된것과 세부적인 사항들의 밝혀짐의 여부는 논의의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즉,역사관이 세부사항은 아니란 말입니다..세부사항은 연구의 진척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수가 있습니다..당연히 삼태극에서도 우리 역사의 모든것을 다 알고 있지 못합니다..역사관이 정립이 됐다는 것이 모든 역사적인 사실을 다 알고 있는거라 생각을 하시는거 같은데 그리 알고 계셨던 거라면 대략적인 논술 먼저 배우셔야 할것 같습니다.. 09.07.11 06:40
1,고려의 수도는 하나가 아니였습니다..초기 대륙의 천자국이였을때에는 서안이였을것으로 추정이 되고 원에게 패퇴한뒤로는 심양으로 옮겨졌으며 그후 반도로 몰렸을때는 개경으로 보아야 할것입니다..물론,세부적으로 변동이 생길수도 있으나 대략적인 틀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입니다..2,어느 것을 계승을 하다니요? 당연히 전부를 계승을 하지요..3,왜가 현재의 일본 열도에 정착을 한것은 최소 12세기 경입니다..박창범 교수의 일식연구에 의하면 최소 12세기 경에는 현재의 일본열도로 정착이 된것으로 나타납니다.. 09.07.11 06:57

하늘미르님 답변 감사하니다....!! 서한->강화(심양)->개성 이론리가 맞다면.. 누가 대제국을 다 망쳤나 보고 조선를 욕하세요...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한것은 심히 유감스러운일이나....결과가 패망으로갈지 영토를 확장할지 알수 없는일입니다...그만큼영토을 회복한것도 이성계의 공입니다..고려는 몽고 일본양쪽에 공격을 받고 있었고...그적을 격퇘한건 이성계의 여진부족입니다(가장용맹한 여진군사 였다느거죠) 그리고 어떤 나라도 자국의 제왕을 역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습니다..진심으로 충헌하느바입니다!!! 09.07.11 15:31

또한 요동정벌시 일본쪽도 신경써야 할텐데...모든군사가 가서 패하면...그거로 끝이라느 생각은 안해보셨는지...그당시 왜는 고려초기 생각하면 안?니다...가야유민 남지나(왜)가 합세한후 다시 백제제국이 멸망해서간 유민이까지 막강한 해상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한태입니다....근데 죽기아니면 살기로...국운을 걸기란 쉬운게 아니란 말입니다...그건 지금 남북통리됐으니(북 이성계군대 남 고려군대)이제 강국이니 중국쳐들어 가자느 거와 똑같은 겁니다...제발 현실좀 보세요...한번에 제국을 만든게 아닙니다...상대나라가 내란이 일어나도 후방에 군사를 남길수 있어야 전쟁을 하느겁니다... 09.07.11 15:25
세종태왕//영토를 다 잃었다고 이조정권을 비난하는게 아닙니다만? 핵심이 뭔지를 아직 모르시네요 ㅠ.ㅠ..영토의 크고 작음은 문제가 안됩니다..만약에 이조가 국력의 열세로 반도마자 다뺏기고 제주도만 남아 있었더라도 민족혼이 살아있었으면 오히려 자란스러워 할 일입니다..이조정권의 정신이 썩어 민족혼을 내팽겨 쳤기 때문에 이조정권을 비난하는 것입니다..뭔가 잘못 알아도 크게 잘못 아신거 같은데요..이조는 청에게는 겉으로 사대하는 척만 하였습니다..그리곤 명에게 제사를 지내며 이미 망한 명을 그리워합니다..속까지 소중화로 물들어 버린 이조정권을 왜 감싸야 합니까? 님께선 문제의 핵심을 보시기 바랍니다.. new 09.07.12 07:28
제주도땅만 가지고 있어도 민족 혼이 있어야 한다....혼이 있어야 한다는말을 맞지만...땅이 고만했으면 예전에 일본에 먹혀서 류큐왕국(오끼나와) 처럼됐겠죠...조선이 사대한것은 형식일수도 있습니다...그걸 철석같이 밑고 있느것이 사대주의발상입니다...식민교육을 제대로 받은거지요...조선시대 부끄러운 역사가 있었더는사실이나 그것도 우리역사 입니다...조선왕조실록에 연산군은 요하에서 앞록강에 사는 사람은 본디 우리나라 사람이라 했고 고려때 없어진 단군사당도 조선때 복구해 제사를 지낸것을 보면 모르십니까? new 14:32

하늘미르님은 영토를 다 잃어도 자존감만 지키면 ?다고 보십니까?? 자존감도 지켜야 하지만 더 중요한거는 국민을 지키는 일입니다.....고려가 모든 영토를 잃어 버린것은 용서가 돼도 조선이 사대한거는 용서가 안?다...참내...그럼 지금 한국은 사대 안하고 있습니까? 미국에 사대하고 있죠...힘이 없으면 어?수 없는일입니다!! new 10:31
님께서는 중요한것을 모르고 계시는데요..나라를 다 잃었어도 임정의 요인들이 존경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정신의 문제입니다..힘에 의한 사대라면 이조는 청에게도 사대를 해야 했으나 겉으로만 사대를 하는척하고 이미 망한 명에게 제사를 지냅니다..진심으로 사대를 하였다는 말입니다..조상을 내팽개 치는 그런 썩은 정신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new 11:03
답답하신분이네...!! 물론 님이 말씀하신 부분도 있습니다...청과 친하려고 했던적도 있다는것입니다...광해군 시절....하지만 결국 왕좌에서 밀려났죠....왕에서 군으로 격하돼고...그일을 벌인 사람은 바로 당신들의 선조라는거 있지마세요,.,..왕 한사람의 힘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보시나요...작금 mb도 저들이 등 돌리면 끝이에요...!! 국민 지배층 양쪽의 돌아서는 거요...그럼 다음은 어떤 사람이 지도자가 ?거 같습니까?? 모든 국민이 깨어나지 않으면 계속 반복? 뿐입니다!! new 13:46

앞으로 조선왕조를 역적으로 표현하는것은 지나족의 싸이버 테러단으로 간주한다!!! new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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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9.23 00:36

    첫댓글 전에도 댓긇 올렸었는데...저 청나라 흑인 군인들은...청의 본국군이 아닌...양이들이 중원 남부로 동원했던 흑인들을 다시 재 고용한 남명과 청의 양창대입니다...청나라 인들에 흑인이 많았다면...이를 수 많은 역사서가 한결같이 놓칠리는 없었을 겁니다.

  • 09.09.25 05:38

    독립운동했던 후손들에게 더많은 증언이나 사료 같은걸 입수 하면 좋을 듯..... 암튼 우리가 바라는 대륙조선사가 하루빨리 입증되길 바랍니다^^

  • 09.09.25 05:41

    증거 가있어두..왜곡되어 이해하는 경향이 우리 국민에게 만연되어 있는듯해요...낙양성 십리허에~높고낮은 무덤은 누구..영웅호걸이 몇명인가..와 결부시켜 백제 의자왕 무덤 발굴을 한다는 소식에.....백제왕과 왕자들이 그곳에 볼모로 끌려가 살다가 초라하게 죽었다고 기술하는 중국여행기 책을 보았어요..ㅠㅠ...이게 현실이라 참 안타까워요~

  • 작성자 09.09.27 07:19

    대륙조선사, 지구조선사 모두를 국민들에게 이해시키고, 계몽운동을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 10.10.26 20:47

    너무 중요하여 저도 보관하고 싶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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