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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거철피(橫渠撤皮)
장횡거가 모피 자리를 거두다는 뜻으로, 후진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리를 내주다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橫 : 가로 횡(木/12)
渠 : 개천 거(氵/9)
撤 : 거둘 철(扌/12)
皮 : 가죽 피(皮/0)
높은 직위나 어떤 분야에서 권위를 누리는 사람은 저마다 각고의 노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 누구나 우러러보고 존경하니 오래 그곳에 머물려하는 것은 모두 원할 것이다. 그러나 강물이 흘러가듯 세월이 흐르면 후진들이 더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나중의 후학이 더 훌륭하다고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했는데 권위만 앞세우고 자리를 차지한다면 후생가외(後生可畏)를 모르는 노추(老醜)로 욕먹는다. 영예로운 자리에서 물러날 때를 현명하게 알고 실천한 사람으로 중국 북송(北宋)의 장재(張載)를 먼저 꼽는다. 그의 자인 횡거(橫渠)가 스승의 자리에서 물러났다(撤皮)는 성어까지 남겼으니 그럴만하다.
장재는 유가와 도가의 사상을 조화시켜 우주의 일원적 해석을 설파함으로써 당대 최고의 학자로 이름 높았다. 그가 스승의 자리인 호피 방석에 앉아 유교 경전을 논하면 명성을 듣고 제자들이 모여 들었다. 어느 때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찾아 와 가르침을 청했다.
장재가 이정(二程)과 역경(易經)을 논하다 학문이 깊이를 알아보고 놀랐다. 다음 날 장재는 호피를 거두고(次日 横渠撤去虎皮/ 차일 횡거철거호피) 제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지난 날 강의한 것은 도를 혼란하게 한 것이니라(吾平日 與諸公說者 皆亂道/ 오평일 여제공설자 개란도)." 주희(朱熹)의 이정어록(二程語錄)이나 탁극탁(托克托)의 송사(宋史) 등에 전한다.
장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호, 정이 형제를 스승으로 삼아 가르침을 받으라며 자신은 고향으로 떠났다. 후진의 능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스승의 자리를 선뜻 물려준 장재의 용퇴는 중국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범 가죽이나 표범 가죽 등 짐승 가죽으로 만든 자리는 명신이나 대학자들에 내리는 임금의 귀한 선물이었다. 특히 호피(虎皮)는 학문을 강론하는 스승의 자리를 뜻하는 상징적인 물건이었고 달리 고비(皐比)라고도 불렸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李德懋)는 장재를 본받아야 한다며 후진들에 수시로 강조했다. "허물을 알면 아낌없이 자리를 걷어야지(省尤莫吝掇皐比/ 성우막린철고비)."
후진의 능력을 알고 적극적으로 길을 터준 장재와 같이 큰 공을 이룬 뒤 용퇴하라는 것은 이미 노자(老子)의 가르침에서도 나왔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만 둘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는 知足不辱 知止不殆(지족불욕 지지불태)와 같이 공을 이루고 명성을 얻었으면 물러나라고 공성신퇴(功成身退)를 강조했다.
멀리 갈 것 없이 이형기 시인은 더 와 닿게 노래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낙화)." 숱한 좋은 말이 있어도 좀처럼 실행은 눈에 띄지 않는다. 영광의 자리에 오래 머물고도 더 좋은 낙하산 자리는 없을까 두리번거리는 사람만 우글거리기 때문이다.
횡거철피(橫渠撤皮),지지불태(知止不殆)
知足不辱 知止不殆(지족불욕 지지불태)
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만둘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해가 갈수록 여름이 더 더워진다는 느낌이다. 올여름도 무척 더웠다. 그나마 더위를 견디게 해준 것은 매미의 청량한 울음소리 덕분이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기도 하다. 그렇게 울어대던 매미들이 처서가 지나자 약속이나 한 듯 하루 아침에 울음을 뚝 그친다.
그래서 서진(西晉)시대의 육운(陸雲)은 한선부(寒蟬賦)를 지어 매미의 신의를 칭송했나보다. 그는 늦가을의 매미를 ‘지덕지충(至德之蟲: 지극한 덕을 갖춘 곤충)'이라며 군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다섯 가지 덕(五德)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반복적인 울음소리는 글을 읽는 선비의 문덕(文德), 수액만 먹고 살기에 청덕(淸德), 다른 벌레와 달리 농부의 곡식을 탐하지 않으니 염덕(廉德), 집을 짓지 않으니 검덕(儉德), 마지막으로 물러날 때를 알고 신의를 지키니 신덕(信德)이 있는 곤충이라 했다.
한낱 벌레인 매미조차도 신의를 지키려 기꺼이 그 자리를 가을의 전령사인 귀뚜라미에게 양보하고 있다. 곤충이니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것은 당연하다 치부하더라도, 우리 인간들 가운데에도 매미처럼 때를 아는 인물들이 있다.
일본 나라의 야마토분카칸(大和文華館)은 킨테츠그룹에서 운영하는 사립미술관이다. 이곳에는 한중일 삼국의 그림과 도자기 등이 유명한데 특히 국보급 고려불화가 다수 소장돼 있다. 소장품 중에는 조선후기 왕실 자제를 교육하기 위해 제작된 학습서 ‘예원합진(藝苑合珍)’이 있다.
이 책에는 '횡거가 호랑이 가죽을 거두다'라는 의미의 '횡거철피(橫渠撤皮)'란 제목의 그림이 있다. 오른쪽 페이지는 화원화가 양기성(梁箕星)의 섬세한 필치로 그린 그림이다. 정자 안에서는 학자 타입의 세 사람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열띤 토론을 하고 있다. 앞뜰에는 주인이 깔고 있던 것인지, 아니면 손님에게 선물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자가 호피를 들고 있다. 그림 왼쪽 페이지에는 서예가이자 학자인 윤순(尹淳)의 필적으로 주자가 편찬한 이정어록(二程語錄) 17권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 적혀 있다.
橫渠在洛 坐虎皮說周易 聽從甚衆(횡거재락 좌호피설주역 청종심중). 一夕二程先生至論易(일석이정선생지논역). 次日橫渠撤去虎皮曰(차일횡거철거호피왈). 吾平日與諸公說者皆亂道(오평일여제공설자개란도). 有二程近到 深明易道 吾所不及(유이정근도 심명역도 오소불급). 汝輩可師之(여배가사지). 乃歸陝西(내귀섬서)
장횡거가 서울에서 호피에 앉아 주역을 강론하니 듣는 이들이 많았다. 어느날 저녁 정호, 정이 두 형제가 와서 주역에 대해 견해를 나누었다. 다음날 횡거는 호피를 거두고는 "내가 지금껏 강론한 것은 횡설수설이었다. 정씨 형제가 어제 와서 주역의 본체를 확실히 밝히니, 내가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수준이다. 그대들은 그들을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라 하고 고향인 섬서로 돌아갔다. / 성리대전(性理大全)
이글에서 '횡거철피'란 고사성어가 유래한다. 횡거는 장재(張載)의 호이며, 호피는 학문을 강론하는 스승의 자리를 뜻한다. 북송(北宋) 당대 최고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장횡거가 후배인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의 능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선뜻 자리를 내주고 떠나갔다는 일화다. 이는 중국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는 물러난 뒤에도 정씨 형제와 더불어 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또한 북송의 구양수는 답매성유서(答梅聖兪書)에서 "소동파의 글을 읽으니 절로 식은 땀이 납니다. 통쾌하고 통쾌합니다. 이 늙은이가 이제 길을 비켜 주어서 그가 두각을 드러내도록 해야겠습니다. 이런 후학이 있어 너무 기쁩니다"라 적고 있다. 구양수는 비록 호피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후학의 앞길을 터주었다. 과연 일세를 풍미한 문종(文宗)다운 태도다.
고려말 유가 참고서라고는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注)밖에 없던 시절 포은 정몽주는 경서의 뜻을 정확히 해석하고 이를 설명할 때도 막힘이 없었다. 그의 스승인 목은 이색(李穡)은 "포은은 강론할 때 고금의 여러 이론을 들어 설명하였으며 이론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라며 정몽주를 스승인 자기조차 뛰어넘는 '동방이학의 시조(東方理學之祖)'라고까지 극찬했다. 스승으로서 제자에 대한 칭찬치고는 과도한 감이 없지 않지만, 이로써 호피를 거두는 것을 넘어 송두리째 내주고 만다.
이형기(李炯基) 시인은 시 '낙화'에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노래했다. 꽃은 떨어져야 할 때 미련없이 떨어져야 축복에 싸여 가는 길이며 또한 아름다운 길이다. 귀뚜라미에게 자리를 내준 매미처럼, 정씨 형제를 만나서 호피를 거둔 횡거처럼, 소동파의 앞길을 열어준 구양수처럼, 제자 포은을 받든 목은이 그런 길을 갔다.
대학에서는 지지(知止) 즉 '분수에 넘치지 않도록 그칠 줄 알라'고 했으며, 노자는 도덕경(44장)에서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만둘 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길이 오래도록 편안할 수 있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고 설파했던 것이다.
세상사람 모두의 눈에 물러나야 할 사람으로 비치는데도 본인만 모르거나 알고도 구질구질하게 욕심을 부리면 그 끝은 십중팔구 패가망신이다. 요즘 매스컴에 많이 오르내리는 ‘인물’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장횡거, 학자의 길
장횡거는 젊어서부터 남보다 재주가 뛰어난 데다, 특히 병법(兵法) 이야기를 좋아하였다. 열여덟 살 되던 해, 오랑캐를 내쫓기로 결심한 그는 붓을 내던지고 군중들을 모아 요서(요동반도 서쪽)의 빼앗긴 땅으로 진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범중엄(중국 북송의 개혁 정치가)은 그의 재주를 알아차리고, 경계하여 이렇게 말했다. “유가에는 뛰어난 가르침이 있어 능히 그것으로 즐거워할 수 있거늘, 어찌 새삼스럽게 병법을 알고자 하는가?”
그리고는 '중용' 책자 한 권을 보내어 자세히 읽어보기를 권하는 것이었다. 이에 횡거는 아무 생각 없이이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점점 내용을 깨닫고 보니, 그 속에 지극한 도리가 들어 있지 않은가? 이에 군대에 나아갈 생각을 버리고 도를 공부하고자 뜻을 세웠던 것이니, 이 사건이야말로 그가 군인 대신 학자로 나아가게 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장횡거의 본래 이름은 장재(張載)이다. 그의 선조는 현재 허난 카이펑이라 불리는 대량(大梁)에서 살았었다. 그런데 부친이 벼슬길에 나섰다가 세상을 떠나매, 대량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리하여 집안에 남은 그의 모친과 형제들이 지금의 산시 메이현의 횡거진으로 옮겨 살았기 때문에, 후세인들은 그를 일컬어 횡거(橫渠)선생이라 불렀다.
부지런히 책만 잃던 횡거는 ‘유가의 정신은 실천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 과거에 응시한다.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운암현의 현장이 되었고 이때부터 유가의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해보고자 뜻을 세웠으니, 그의 나이 서른일곱 살 때의 일이다. 그는 무엇보다 어버이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를 중하게 여겼고, 노인을 공경하고 어른 섬기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그는 매년 명절 때마다 어른들을 초빙하여 많은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횡거가 운암현을 아무 탈 없이 잘 다스려 나가자, 조정에서는 그를 숭문원의 교서(校書: 유교 경전의 인쇄와 교정 등을 맡아보던 벼슬)로 승진시켰다. 이때 재상 자리에 앉아있던 왕안석이 그를 신당(新黨)에 가입하도록 권유하였다. 왕안석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데다, 나라의 재상이 되어 이른바 ‘왕안석의 개혁’을 실시하였던 인물이다. 더욱이 황제 신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부국강병의 개혁정책을 강력히 밀어붙인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횡거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였으니, 앙심을 품은 왕안석은 일부러 그를 절동(浙東: 지금의 상하이 남쪽으로, 저장성이 절동과 절서로 나뉘었음)으로 보내어 감옥을 다스리게 하였다. 일이 이 형편에 이르자 횡거는 병을 핑계로 삼아 벼슬을 사직하고, 종남산(중국 섬서성 서쪽 해안에 자리 잡은 산. 높이는 2,600m에 이름)으로 돌아와 조용히 살면서 책 쓰는 일에만 매달렸다.
장횡거는 날마다 자기의 서재에 종이와 붓, 먹을 가득 쌓아두고 책상 앞에 부동자세로 단정히 앉았다. 그리고 독서와 집필에 전념하였는데, 비록 몸은 이곳에 은거하여 있지만 마음만은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또한 그에게는 무엇인가 깨달은 바가 있으면, 망설임 없이 기록하는 습관이 있었다.
언젠가는 한번 깊은 밤에 잠자리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곧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름불을 켜놓고, 온 힘을 다하여 글을 써 나갔다. 이렇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고민하고 사색하는 가운데, 그 유명한 저서 '정몽(正蒙)'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학문에만 몰두하느라 건강을 돌보지 않은 탓에 폐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호랑이 가죽 자리를 비워주다
장횡거와 관련하여 ‘횡거철피(橫渠撤皮)’라는 고사가 있다. 어느 날 저녁 정씨 형제(정명도, 정이천)가 그를 찾아와 함께 주역을 논했다. 다음 날 장횡거는 강의할 때 깔고 앉았던 호랑이 모피를 거두고(撤皮),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난날 강의한 것은 도(道)를 혼란하게 한 것이니라. 두 정씨가 도를 밝게 알고 있어, 내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더라. 그대들은 그를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 이 말을 남기고 그는 홀연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여기서 호피(虎皮: 호랑이 가죽)는 학문을 강론하는 스승의 자리를 뜻한다. 당대 최고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장횡거가 후배인 정씨 형제의 능력을 한눈에 알아보고 선뜻 자리를 내주고 떠나갔다는 일화인데, 이는 중국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학자들의 귀감이 됐다. 그는 물러난 뒤에도 앞서 말한 두 정씨(정명도, 정이천)와 더불어 송나라 유학(성리학)의 기초를 세운 대학자로 존경을 받았다.
장횡거는 그의 유명한 저서 '정몽(正蒙)'에서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도의 본래 생김새는 태허(太虛)한 것이다. 그것은 형체도 없고, 느낌도 없으며, 그침도 없이 한없이 텅 빈, 말하자면 ‘커다란 비움’이다. 그런데 이 비어있는 한 가운데(虛中)로부터 도가 밖으로 드러나는 바, 그 모양을 두고 우리는 태화(太和)라고 부른다. 하늘과 땅의 모든 사물들은 모두 이에서 흘러나온다. 이렇게 보자면 태허란 기(氣)의 본체이자 우주 만물의 본체를 가리켜 붙인 이름이고, 태화란 우주 만물의 본체가 나타내는 능력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 橫(가로 횡, 빛 광)은 ❶형성문자로 横은 간체자, 撗은 속자이다. 뜻을 나타내는 나무 목(木: 나무)部와 음(音)을 나타내며 동시(同時)에 '지키다', '방어하다(防禦--)'의 뜻을 가지는 黃(황→횡)으로 이루어졌다. 문이 열리는 것을 막기 위한 '나무, 빗장'을 뜻한다. 빗장은 옆으로 끼우므로, 가로의 뜻이 되었다. ❷회의문자로 橫자는 '가로'나 '옆', '가로지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橫자는 木(나무 목)자와 黃(누를 황)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黃자는 패옥을 두른 황제를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발음 역할만을 하고 있다. 橫자는 본래 대문을 걸어 잠그는 '빗장'을 뜻했었다. 옛날 대문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문을 걸어 잠그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橫자는 후에 '가로'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횡령(橫領)이라는 뜻이 그러하듯이 고대에는 '가로'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橫자는 주로 부정적인 뜻으로 쓰인다. 그래서 橫(가로 횡, 빛 광)은 (1)'가로 횡'의 경우는 ①가로 ②옆, 곁 ③뜻밖의, 갑작스러운 ④자유자재로(自由自在-) ⑤연횡책(連橫策) ⑥학교(學校) ⑦가로로 놓다, 옆으로 놓다 ⑧섞이다, 뒤엉키다 ⑨가로지르다 ⑩비정상적이다(非正常的--) ⑪(덮어)가리다 ⑫제멋대로 하다 ⑬거스르다 ⑭방자하다(放恣--) ⑮사납다 따위의 뜻이 있고, (2)'빛 광'의 경우는 ⓐ빛, 광채(光彩) ⓑ빛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의어로는 竪(세울 수), 縱(세로 종, 바쁠 총) 등이다. 용례로는 남의 물건을 제멋대로 가로채거나 불법으로 가짐을 횡령(橫領), 제멋대로 굴며 난폭함을 횡포(橫暴), 도로나 강 따위를 가로지름 또는 가로 끊거나 지름을 횡단(橫斷), 거리낌 없이 멋대로 행동함 또는 모로 감을 횡행(橫行), 뜻밖의 재앙에 걸리어 죽음을 횡사(橫死), 노력을 들이지 않고 뜻밖에 재물을 얻음 또는 그 재물을 횡재(橫財), 가로 지르거나 가로로 덧댄 물건을 횡대(橫帶), 자기 마음대로 함부로 내뱉는 말을 횡언(橫言), 가로채기로 남의 것을 불법으로 가로챔을 횡취(橫取), 가로쓰기로 글씨를 가로로 쓰는 일을 횡서(橫書), 모로 걷는 걸음을 횡보(橫步), 가로와 세로 또는 자유자재로 거침이 없음을 종횡(縱橫), 권세를 오로지 하여 제 마음대로 함을 전횡(專橫), 차도 위에 사람이 가로 건너 다니게 마련한 길을 이르는 말을 횡단보도(橫斷步道), 제 명대로 다 살지 못하고 뜻밖의 사고로 죽음을 이르는 말을 비명횡사(非命橫死), 행동이 마음 내키는 대로 자유자재로 함을 이르는 말을 종횡무진(縱橫無盡), 뜻밖의 재앙이나 사고 따위로 제 수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음을 이르는 말을 비명횡사(非命橫死), 말을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하다라는 뜻으로 두서가 없이 아무렇게나 떠드는 것을 이르는 말을 횡설수설(橫說竪說) 등에 쓰인다.
▶️ 渠(개천 거)는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同時)에 사면 팔방으로 통한 길의 뜻인 衢(구)을 나타내는 구(矩+木)의 생략형(省略形)(渠에서 삼수변(氵)部를 제외(除外)한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물을 통하게 한 길의 뜻에서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 '그', 의문사 '어찌'의 뜻으로도 쓰인다. 그래서 渠(개천 거)는 ①개천(-川: 개골창 물이 흘러 나가도록 길게 판 내) ②도랑(매우 좁고 작은 개울), 해자(垓子) ③우두머리 ④다리, 교량(橋梁) ⑤방패(防牌) ⑥하루살이(하루살이목의 벌레 총칭) ⑦깊고 넓은 모양 ⑧갑자기, 느닷없이 ⑨어찌 ⑩그(3인칭 대명사) ⑪(도랑을)파다 ⑫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로는 溝(도랑 구)이다. 용례로는 악당의 우두머리를 거수(渠帥), 위를 덮지 않고 그대로 터놓아 둔 수로를 개거(開渠), 땅 위로 시설한 배수용의 도랑을 명거(明渠), 개골창을 이르는 말을 구거(溝渠), 도랑으로 매우 좁고 작은 개울을 수거(水渠), 짐을 싣거나 부리거나 하려고 배를 들여대기 위해 파서 만든 깊은 개울 조구를 조거(漕渠), 배가 독에서 밖으로 나옴을 출거(出渠), 더러운 도랑을 오거(汚渠),
물의 근원이 가까운 곳에 있는 내를 천거(川渠), 땅속이나 구조물 밑으로 낸 도랑 또는 위를 덮어 버리는 공사를 암거(暗渠), 제 복을 개 주랴는 뜻으로 선천적으로 타고 난 복은 덜어서 적게 할 수 없다는 뜻의 속담의 말을 거복급견호(渠福給犬乎), 물이 흐르면 자연히 개천을 이룬다는 뜻으로 학문을 열심히 하면 스스로 도를 깨닫게 됨을 이르는 말을 수도거성(水到渠成), 개천의 연꽃도 아름다우니 향기를 잡아볼 만함을 이르는 말을 거하적력(渠荷的歷) 등에 쓰인다.
▶️ 撤(거둘 철)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재방변(扌=手: 손)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철)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撤(거둘 철)은 ①거두다 ②치우다 ③제거하다(除去--) ④줄이다 ⑤없애다 ⑥철회하다 ⑦철수하다 ⑧그만두다 ⑨(직위를)면하다(免--) ⑩경감하다(輕減--) ⑪물러나다 ⑫덜다 ⑬피다 ⑭뽑다 ⑮폐하다(廢--) 따위의 뜻이 있다. 유의어로는 收(거둘 수) 이고, 통자로는 彻(통할 철), 徹(통할 철) 등이다. 용례로는 거두어들임이나 걷어치움 또는 전투를 중단하는 작전으로서 진출했던 곳에서 군대나 장비나 시설 등을 거두고 질서 있게 후방으로 물러남을 철수(撤收), 일단 제출했던 것을 다시 되돌려 들임 또는 한 번 말한 것을 취소함을 철회(撤回), 건물이나 시설 따위를 걷어 치워 버림을 철거(撤去), 전에 있던 제도나 규칙 따위를 걷어치워서 없앰을 철폐(撤廢), 시장이나 점포 등을 모조리 거두어 치움을 철시(撤市), 제사를 마침을 철사(撤祀), 음식상을 거두어 치움을 철상(撤床), 주둔했던 군대를 철수함을 철병(撤兵),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조금도 쉴 사이 없이 일에 힘씀을 이르는 말을 불철주야(不撤晝夜), 가족을 모조리 데리고 도망감을 이르는 말을 철가도주(撤家逃走) 등에 쓰인다.
▶️ 皮(가죽 피)는 ❶회의문자로 又(우; 손)으로 가죽(又를 제외한 부분)을 벗기는 것을 나타내어, 벗긴 가죽을 뜻한다. 革(혁)과 자형(字形)이 비슷한데, 나중에는 皮(피)는 짐승으로부터 벗긴 채로의 가죽, 革(혁)은 털을 뽑아 만든 가죽, 韋(위)는 다시 가공(加工)한 무두질한 가죽으로 구별(區別)하고 있다. ❷상형문자로 皮자는 '가죽'이나 '껍질', '표면'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皮자는 동물의 가죽을 손으로 벗겨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皮자가 가죽을 뜻하는 革(가죽 혁)자와 다른 점은 갓 잡은 동물의 '생가죽'을 벗겨내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皮자와 결합하는 글자들은 대부분이 '껍질'이나 '표면', '가죽'과 같은 '겉면'을 뜻하게 된다. 상용한자에서는 부수로 쓰인 글자는 없지만 波(물결 파)자나 被(입을 피)자 처럼 부수가 아닌 글자에서는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皮(피)는 (1)물건을 담거나 싸는 가마니, 마대, 상자(箱子)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가죽 ②껍질, 거죽(물체의 겉 부분) ③겉, 표면 ④갖옷(짐승의 털가죽으로 안을 댄 옷), 모피옷 ⑤얇은 물건 ⑥과녁 ⑦(껍질을)벗기다 ⑧떨어지다, 떼다 ⑨뻔뻔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뼈 골(骨)이다. 용례로는 척추동물의 몸의 겉은 싼 외피를 피부(皮膚), 날가죽과 무두질한 가죽의 총칭을 피혁(皮革), 가죽과 살을 피육(皮肉), 살가죽과 뼈를 피골(皮骨), 피부속이나 살가죽의 밑을 피하(皮下), 가죽으로 물건을 만드는 사람을 피공(皮工), 파충류나 곤충류 등이 성장함에 따라 낡은 허물을 벗는 일을 탈피(脫皮), 털가죽으로 털이 붙어 있는 짐승의 가죽을 모피(毛皮), 식물체 각 부의 표면을 덮은 조각을 표피(表皮), 털이 붙은 범의 가죽을 호피(虎皮), 탄환이나 처란의 껍질을 탄피(彈皮), 땀이 나고 허한을 거두는 데 필요한 한약재로 쓰이는 계수나무 껍질을 계피(桂皮), 껍질 또는 거죽을 벗김을 박피(剝皮), 가죽과 비슷하게 만든 것으로 인조 피혁을 의피(擬皮), 게나 소라나 거북 따위의 몸을 싸고 있는 뼈처럼 단단한 물질로 된 껍데기를 경피(硬皮), 겉으로만 알고 속을 모르는 것 진상까지를 추구하지 아니하고 표면만을 취급하는 모양을 이르는 말을 피상적(皮相的), 쇠처럼 두꺼운 낯가죽이라는 뜻으로 뻔뻔스럽고 염치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을 철면피(鐵面皮), 깨달은 바가 천박함을 이르는 말을 피육지견(皮肉之見), 살가죽과 뼈가 맞붙을 정도로 몹시 마름을 일컫는 말을 피골상접(皮骨相接), 옛 모습에서 벗어남을 이르는 말을 구태탈피(舊態脫皮), 범이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는 뜻으로 사람도 죽은 뒤에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말을 호사유피(虎死留皮), 속은 양이고 거죽은 호랑이라는 뜻으로 거죽은 훌륭하나 실속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양질호피(羊質虎皮), 얼굴에 쇠가죽을 발랐다는 뜻으로 몹시 뻔뻔스러움을 두고 하는 말을 면장우피(面張牛皮), 호랑이에게 가죽을 내어 놓으라고 꾀다라는 뜻으로 근본적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을 이르는 말을 여호모피(與虎謀皮), 살갗은 닭의 가죽처럼 야위고 머리칼은 학의 털처럼 희다는 뜻으로 늙은 사람을 이르는 말을 계피학발(鷄皮鶴髮), 수박 겉 핥기라는 속담의 한역으로 어떤 일 또는 물건의 내용도 모르고 겉만 건드린다는 말을 서과피지(西瓜皮舐), 주견이 없이 남의 말을 좇아 이리저리 함을 이르는 말을 녹비왈자(鹿皮曰字), 염치가 없고 뻔뻔스러운 남자를 일컫는 말을 철면피한(鐵面皮漢), 풀뿌리와 나무 껍질이란 뜻으로 곡식이 없어 산나물 따위로 만든 험한 음식을 이르는 말을 초근목피(草根木皮)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