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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사도행전의 말씀 12,24-13,5ㄱ>
그 무렵
24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25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다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갔다.
13,1 안티오키아 교회에는 예언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바르나바, 니게르라고 하는 시메온, 키레네 사람 루키오스, 헤로데 영주의 어린 시절 친구 마나엔, 그리고 사울이었다.
2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3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보냈다.
4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셀레우키아로 내려간 다음,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5 그리고 살라미스에 이르러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 복음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 12,44-50>
그때에
4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45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46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7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48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49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50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요한복음을 '표징의 책'과 '영광의 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은 '표징의 책'이 끝나는 12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말씀해 온 것들을 요약하시면서, 간절함으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2,44)
그것은 네 번에 걸친 “나는 ~이다”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로,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요한 12,46)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46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시작인 1장의 '로고스 찬가'에서 “모든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의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6)라는 말씀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주제인 ‘빛의 자녀 찾기’를 반영합니다.
두 번째로,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47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전체 복음서의 핵심을 보여주는 제3장의 말씀, 곧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
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는 말씀을 상기시켜줍니다.
반면에 믿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요한 3,18 참조).
세 번째로, “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요한 12,4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49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7장의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라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네 번째로,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50절)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한다.”(요한 8,38)는 말씀과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8,55)는 말씀을 밝혀줍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 선언에 앞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라고 밝히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가 원천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원천임을 밝혀주십니다.
곧 당신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속하며, 아버지의 유일한 계시자로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보는 것은 당신을 보내신 분을 본 것이 되며,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아버지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시는 빛으로 오셨고,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요한 12,47)
주님!
당신께서는 이루시되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제게 간청함은 제게 희망을 두심이요, 제가 더디어도 놀라운 인내로 기다리심은 제게 믿음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가 무릎 꿇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의 선과 호의로 인내하고 때를 기다릴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영적인 배후를 볼줄 아는 믿음의 눈>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퍼득 떠오른 말이 바로 배후와 혐의입니다.
배후란 벌어진 어떤 일을 보고 그 일이 그 사람이 한 것이라기엔 너무 큰일거나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의심이 들 때 곧 혐의가 있을 때 그 사람 뒤에 있다고 생각되는 누구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혐의가 있을 때 유능한 수사관은 그 배후를 캐냅니다.
그런데 배후를 캐내는 것은 의심스러운 안 좋은 일뿐 아니라 우리 신앙인의 경우 영적인 면에서도 그 배후를 캐야 합니다.
말하자면 모든 일의 '영적인 배후'를 캐는 것인데, 꽃이 피면 그 꽃의 배후에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이고, 꽃의 아름다움에서 그 배후의 아름다움이신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가 피조물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얘기를 전하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프란치스코는 암흑세계의 지배자인 마귀와의 관계에서는 이 세상을 전쟁터로 보았지만,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선하신 하느님의 매우 밝은 표상으로 보았다.
그는 창작가이신 그분을 찬미하였다.
피조물들에게서 무엇을 발견하든 그는 그것을창조주와 관련시켰다.
그는 주님의 손에서 빚어진 모든 작품 안에서 즐거워하였고,유쾌한 사물들의 배후의 뜻을 살핌으로써 그 사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이성과 원인을 보았다.
그는 아름다운 사물들 안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보았다."
피조물을 그렇게 본다면 인간은 더더욱 그렇게 봐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기에 우리는 더더욱 그 영적 배후인 하느님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그렇게 보는 데 실패하고, 다른 피조물은 그 배후의 하느님을 보면서도 인간은 그렇게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내게 파견한 사람으로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보낸 인간이 아니라 어떻게 뚝 떨어져 내 앞에 있게 된 인간, 꼴보기 싫은 인간, 장점은 하나도 없고 단점만 보이는 인간, 죄만 보이는 인간입니다.
이렇게 영적인 배후를 볼 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도 그렇게 보는데,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는 믿지 않아 어둠속에 있는 사람에게, 어둠속에 있기에 볼 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니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영적인 배후를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보이는 대로만 보지 않고 뒤의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일컬어 혜안(慧眼) 곧 지혜의 눈이라고 하고 인도에서는 제3의 눈이라고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교는 뒤의 것이 아니라 배후의 하느님을 볼줄 아는 눈을 믿음의 눈 또는 영안(靈眼)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다음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고 육은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하느님은 영 안에서가 아니면 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아드님도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에 아버지를 보는 방법과 다르게 또한 성령을 보는 방법과 다르게는 아무도 아드님을 볼 수 없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결정적으로 바라는 것은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기에 구원의 도구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빛 안에서 구원받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구원을 실현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요한 12,47)
언제나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묶인 매듭을 풀어주십니다.
고해성사가 심판이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다시는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과거를 치유시켜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일으켜 세워 줍니다.
그럼에도 그분을 무시하면 그분은 심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의 어둠, 무지의 어둠, 불신의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을 비추는 빛으로써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기에 심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안 하고는 우리의 자유의사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마땅히 선택한 사람이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심판으로부터 벗어 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어둠 속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사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요한12,35).
그러므로 빛이 우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로 굳건해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언제든지 아버지의 말씀에 순명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항상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생명을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심판을 원치 않으시고 사랑을 원하셨다면 우리도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져도 어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만큼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분께서 나도 보내셨다는 것을 인식하며 언제나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한 발 더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죽고 싶지 않으면 꼭 만나야 할 사람>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심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이 곧 심판의 기준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말은 곧 빛입니다.
마치 오징어잡이 배의 빛을 보고 오징어만 그 배로 접근하여 올라오는 것처럼, 그렇게 당신의 말씀을 찾아 올라오는 이들은 구원을 받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어둠 속에서 죽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아버지께서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빨리 탈출하라고 소리치는 말씀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 소리를 거부하고 귀를 막습니다.
구원의 길은 좁고 그 길로 들어서는 이들은 계속 줄어들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을 악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줄 이를 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때는 이 역할을 세례자 요한이 하였고 지금은 교회가 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가 세상과 타협한다면 세상에 더는 희망이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세상과 싸워 이기셨습니다.
며칠 전 검찰이 결국엔 이은해와 내연남 조현수 씨를 살인·살인미수·보험사기방지 특별법 위반 미수 혐의로 구속기소를 했습니다.
검찰은 이들이 수영할 줄 모르는 윤 씨에게 4m 높이의 바위에서 3m 깊이의 계곡물로 구조장비 없이 뛰어들게 해 살해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수영을 못하는 윤 씨가 여러 차례 거절하자 “그럼 차라리 내가 뛰겠다”라며 압박했습니다.
그리고 구조를 할 수 있는데도 일부러 하지 않아 살해했을 때 적용하는 ‘부작위에 의한 살인’이 아닌 직접 살해한 상황에 해당하는 ‘작위에 의한 살인’ 혐의를 적용한 것입니다.
검찰은 또 공소장에 이들이 범행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윤 씨를 상대로 이른바 ‘가스라이팅’을 했다고 적시했습니다.
가스라이팅은 상대방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함으로써 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입니다.
이들은 앞서 2019년 2월과 5월에도 복어 피 등을 섞은 음식을 먹이거나 낚시터 물에 빠뜨려 윤 씨를 살해하려 한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이렇게 여러 차례 자신을 죽이려 하고 자기를 피폐하게 만드는데도 윤 씨는 이 씨와 그의 친구들을 의심 없이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검찰에 따르면 이 씨는 사건 발생 8년 전인 2011년쯤부터 남편 윤 씨와 교제를 시작하면서 당시부터 윤 씨의 돈을 받아냈습니다.
그녀는 2017년 3월 윤 씨와 결혼하여 다른 남성들과 사귀면서 윤 씨를 착취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윤 씨는 6천만 원 상당 연봉을 받던 대기업 직원이었으나 이 씨와 결혼한 뒤로 개인회생을 신청했습니다.
심지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불법 장기매매를 하겠다’라는 글까지 올릴 만큼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끼니를 해결하려 직장 동료에게 3천 원을 빌려달라는 요청도 했습니다.
사망 당시 윤 씨 자취방에 있던 서류들을 보면 빚만 1억5천만 원에 달했습니다.
윤 씨는 결혼 2년 차인 2018년 12월에 이 씨와 통화하면서 “빚이 너무 많아 얼마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그만할까. 지친다”라며 흐느끼기도 했습니다.
이에 이 씨가 “정말 그만 만나고 싶냐?”라고 묻자 “그런 건 아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 씨는 윤 씨에게 “이해한다”라며 공감한다는 식으로 답하면서 심리적 지배를 이어갔습니다.
윤 씨는 숨지기 5개월 전인 2019년 1월에 조 씨에게 문자를 보내 “은해에게 쓰레기란 말 안 듣고 싶다. 은해가 짜증 내고 욕할까 봐 무섭다”라고 호소했습니다.
윤 씨는 결국 2019년 6월 30일 오후 8시 24분 경기 가평군 용소계곡에서 숨졌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오금이 저릴 정도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악해질 수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도 똑같이 세상에 이런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것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하는 짓은 더하면 더했지 이은해 씨보다 못하지 않습니다.
잔인하게 물로 빠뜨립니다.
윤 씨가 살아날 수 있었던 방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당연히 이 씨와 조 씨로부터 탈출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사람이 악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줄 누군가를 만났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가스라이팅에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교회를 만나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교회는 자아, 삼구, 그리고 그 욕망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이 세상이 사탄 무리의 것임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탈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이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이미 심판받은 것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먼저 만나야 합니다.
세상에서 빠져나와 광야로 나가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2013년 톰 크루즈가 출연한 ‘오블리비언’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오블리비언은 ‘(기억의) 망각’이란 뜻입니다.
잭 하퍼란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지구에 남아 있는 외계인들을 없애는 일입니다.
외계인들에게 잡혀 정보를 빼앗기면 안 되기에 그 사람의 기억을 일부러 지워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기 아내를 만나게 되어 기억을 되찾습니다.
아내는 잭 하퍼가 외계인들에게 잡혀가서 기억이 지워져 그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결국 그가 죽이고 있었던 것은 지구상에 남아 있는 자신과 같은 인간들이었던 것입니다.
잭은 인간들과 힘을 합쳐 외계인들을 물리칩니다.
단순한 내용이지만 성경과 같습니다.
우리는 처음에 우리도 모르게 세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아내를 만납니다.
교회는 세상이 적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싸워야 할 대상임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받아 세상과 싸워 이기게 됩니다.
승리한 자만 구원에 이릅니다.
예수님의 말이 들리지 않는 이유는 아직 세례자 요한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뱀으로 보이고 세상이 사탄의 집으로 보이게 해 주는 세례자 요한을 만나야 합니다.
아이들에겐 부모가 그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할 때 자신에게 절하면 자신이 가진 세상의 영화를 예수님께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세상은 자신의 것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동굴 속에서 빛을 보려면 자신이 어둠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빛을 바라볼 수 있고 빛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 어둠에 속해있음을 보게 하는 이를 먼저 꼭 파견하십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모두 빛에서 빛으로 나아갑시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2장 46절)
복음 구절 안에 빛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언제 어디서든 항상 똑같은 강론을 반복하는 동료 수도자 덕분에 이제는 거의 암기하다시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네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사람, 빛에서 빛으로 가는 사람. 우리는 지금 어디서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곰곰이 반추해보니 나름 의미심장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생을 마칠 때까지 줄창 어둠에서 어둠으로 직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그저 잘 먹고 즐기는 것이 전부입니다.
영혼이나 구원, 진리나 사랑 같은 개념과는 완전 등을 돌리고 살아갑니다.
애완견이나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에 못지않게 불행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빛에서 어둠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입니다.
애초에는 흘러넘치는 축복과 은총 속에 빛의 삶을 살았지만, 충실성과 항구성의 부족으로 인해 자꾸만 어둠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자주 체험하는 유형입니다.
거룩한 아침 미사와 기도를 통해 하루 온 종일 주님 은총의 빛 속에 살았습니다.
순간순간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기도와 일을 삶 속에 조화시켰습니다.
말 마디 그대로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자동으로 뿜어져 나오는 광채에 주변 사람들이 눈부셔 할 정도로 찬란한 하루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것, 마치 부서지기 쉬운 흙덩이와 같이 나약하고 변화무쌍합니다.
빛의 상태에서 하루를 잘 마감하면 좋으련만,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술잔을 기울입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 잔이 되고...엉뚱한 말을 해대고, 이런저런 실수를 연발하고, 빛으로 충만했던 하루가 어둠으로 마무리됩니다.
어떻게든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비록 어제 짙은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할지라도 아침이면 아침마다 훌훌 털고, 다시금 빛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매일 매 순간, 어쩔 수 없는 한계와 부족함을 딛고 찬란한 광명의 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유달리 더 크게 다가오는 이 큰 좌절감과 우울감을 딛고 어떻게든 빛으로 건너가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요한 12,44-45)
이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계시입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말과 ‘본다’는 말은 같은 뜻으로 사용된 ‘같은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
(티토 2,11-13)
이 말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 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같은 신앙’이고, ‘하나의 신앙’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라는 말은 진리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은 서로 상관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중요한 것을 못 보는 것은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안 보기 때문이고, 중요한 것은 안 보고 하찮은 것만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
(요한 9,41)
예수님은 못 보는 사람은 볼 수 있게 하고, 안 보는 사람은 회개시켜서 보게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계시를 믿는 것,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믿는 것이고, 가장 중요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2,46)
이 말씀은 앞의 8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 8,12)
이 말씀들에서 ‘빛’은 ‘생명’을 뜻하고, ‘어둠’은 ‘죽음’을 뜻합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말은 '멸망하지 않는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
(요한 12,47-50)
이 말씀의 뜻은 “구원과 멸망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라.”입니다.
혹시라도 “나는 그런 선택 자체를 안 하겠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구원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들은 전부 다 멸망을 선택하는 사람들에 포함됩니다.
구원 문제에서는 중간지대도 없고, 중립도 없습니다.
생명이 아니면 죽음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이 아니면 ‘밖’입니다.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신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라, ‘회개와 구원의 때’ 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구세주가 아니라 ‘심판관’으로 오실 것이고,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은 멸망을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그를 심판하시기 전에 그 사람 자신이 이미 멸망을 선택하는 것이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을 선택한 채로 심판대에 서게 됩니다.
그러니 멸망을 선고받은 뒤에 심판관이신 예수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 그대로 사는 사람은 구원을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그대로 말한다는 말씀은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니, 당연히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입니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라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명령’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버지의 하느님의 간절한 바람이고, 강력한 의지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아버지 하느님도, 또 예수님도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간절하게’ 바라시는데, 나는 나 자신의 구원을 얼마나 간절하게 바라고 있는가?
그냥 하루하루 세속 일에 묻혀서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과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은 과연 나의 구원에 얼마나 도움을 주는 일인가?
또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과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은 과연 나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들인가?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구원의 행복 - 하느님의 선물을 선택하십시오>
행복은 선택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하느님의 선물들입니다.
지인들이 참 많이도 보내 주는 아름다운 5월의 사진들입니다.
한국의 5월은 어디나 천국처럼 아름답습니다.
어디를 찍어도 작품입니다.
어제 피정을 마치고 떠난 코이노니아 자매회 한 자매님이 공동카톡방에 올린 수도원 풍경들은 얼마나 환상적이었던지요!
저절로 나오는 많이도 인용했던 주님께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가 우리가 살아야 할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이런 선물을 선택하여 살 때 구원의 행복이요 저절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참으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수도원 역사와 함께 하던 수도원 십자로 중앙의 예수님 부활상 배경의 참 좋았던 단풍나무가 사라졌습니다.
거의 죽어가기에 베었다는 해명인데 참 서운했습니다.
그런데 전화위복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시가 이를 입증합니다.
“보라
높고
멀리 넓게
예수님 부활상
배경
단풍나무 사라지니
주변이
온통 환해졌다
넓어졌다, 밝아졌다
전체가
불암산이
바로 하느님이 배경이 되어 주셨다!”
단풍나무 큰 배경이 사라지니 주변 모두가, 불암산이 배경이 된 듯 합니다.
오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10-12세기 약200년동안 계속 전성기를 누렸던 클뤼니 베네딕도 수도원 성인 아빠스들의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예수님 배경의 밤하늘의 별들처럼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들 같은 성인 아빠스들입니다.
유럽 수도원들 개혁의 중심지 역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성 오도(927-944), 성 마욜로(954-994), 성 오딜로(994-1048), 성 후고(1049-1109), 복자 베드로 베네라빌리스 등 줄줄이 혜성처럼 나타난 성인 아빠스들입니다.
모두가 발광체(發光體)인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反射體) 별들같은 성인들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참 좋은 선물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빛이신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세상은 물론 우리의 내면은 캄캄한 어둠일 것입니다.
빛중의 빛이, 선물중의 선물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보내신 분을 보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빛으로 오신 참 좋은 하느님의 선물인 예수님을 선택해 믿는 것이 구원의 행복입니다.
우리 인간의 근원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에 대한 처방도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믿음 역시 하나의 선택적 결단임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누구나에게 열린 구원의 문입니다.
새삼 구원도 심판도 우리의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자초한 심판입니다.
얼마나 엄중한 선택인지요!
참으로 빛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 별같은 존재로 살아감이 영원한 생명의 구원의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사울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빛으로 파견된 예수님에 이어 성령으로부터 예수님을 증언하고 선포하라 선택, 파견되는 바르나바와 사울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예배를 드리며 단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하고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그래서 그들은 단식하며 기도한 뒤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나서 떠나 보냈다.’
성령께서 파견하신 두 제자는 주님의 선교사로서 하느님 말씀의 선포에 돌입합니다.
두 분 다 예수님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 큰 별 같은 제자들입니다.
사도행전 서두 짧은 묘사도 아름답습니다.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오늘 지금도 이런 우리 주변의 장면이라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면서 널리 퍼져나가게 하는 것’, 바로 빛이신 주님을 모시고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는 주님의 제자이자 선교사인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날마다 빛의 선물로 오시는 주님을 선택하여 빛이신 주님과 하나되어 세상의 빛으로 살아갈 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이요 행복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 모두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편 67,2)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요한 12,44)
유다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과 어떤 관계인지 확실한 답을 듣고 싶어 하면서도, 자기들 안에 이미 부정적인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에 걸쳐 당신 신원에 대해 아무리 반복해 말씀하셔도 받아들이지 않고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묻고 또 묻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런 이들 앞에서 다시 한 번 '큰소리'로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분명하게 확언하십니다.
이때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요한 12,12-19) 당신의 죽음을 명백히 하신(요한 12,27-36) 다음입니다.
이제 더 미룰 것도 감출 것도 없이 정면으로 모든 것을 밝히시는 순간입니다.
"나를 믿는 것이 곧 아버지를 믿는 것이고, 나를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며, 나는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대로 말할 뿐"이라는 것을 명백히 하십니다.
다양한 문장들로 표현된 예수님의 이 모든 말씀들은 사실 단 하나의 변하지 않는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와 당신이 하나이시고, 같은 말씀, 같은 뜻을 품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주체적입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요한 12,48)
말씀은 생명을 지니시고 심판의 권한도 갖고 계시지요.
이렇게 예수님 입에서 발설된 하느님의 말씀은 "자신을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요한 12,48)할 것입니다.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사도 12,24)
사도행전 저자는 말씀이 자라고 퍼져 나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말씀은 또한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르는 사이 자라고 열매를 맺어, 보내신 분의 뜻을 성취하도록 살아 움직입니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사도 12,2)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떠나 세상에 오셨어도 아버지의 '말씀'을 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하며 아버지의 '뜻'을 사신 것처럼, 성령의 권고에 따라 따로 세워진 바르나바와 사울도 물리적 공간적으로 떨어져 활동하는 것일 뿐, 예수님의 가르침을 선포하며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따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해 받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담게 될 그릇들이 다양하다는 것과 그 역할과 소명이 각각 다름을 존중하는 표현인 동시에, 또한 말씀은 생명력을 지니고 온 세상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고 확장된다는 사실을 배태하고 있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벗님처럼 아버지와 아드님 사이에 오가는 사랑, 일치, 존중, 상호 순명, 상호 증여의 아름답고 순수한 관계를 감지하는 사람은 이 두 분의 관계가 바로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교회의 정배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말하고 있음을 금방 압니다.
그래서 비록 좁아터지고 낡고 심지어 금이 갔거나 깨지기까지 한 우리이지만, 우리라는 이 각기 다른 그릇에 담기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말씀'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숨 쉬고 자라고 열매 맺도록, 스스로의 생명력으로 힘차게 약동해 뻗어 나가도록, 우리 자신을 내어놓고 허용하게 됩니다.
설령 그 이유나 목적을 모른다 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에게서 예수님께로, 그리고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온 '말씀'임을 알고 또 믿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도 보잘것 없는 질그릇인 우리를 통해 '자라고 퍼져나갑니다.'
아니, 꼭 그리 되실 겁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한국인 독자에게 잘 알려진 마이클 샌던 교수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사회에 대한 우려’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어릴 때입니다.
동네 진흙탕에서 놀고, 불량식품을 먹고,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요즘 아이들이 고생하는 ‘아토피’는 별로 없었습니다.
냉장고도 없었고, 깔끔한 마트도 없었습니다.
구충제를 먹어야 했지만 그래도 건강하게 잘 지냈습니다.
마트에는 깨끗하게 정돈된 식품들이 진열되어 있고 냉장고에도 신선한 재료들이 있지만, 요즘 아이들이 예전 아이들보다 더 행복한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과학 분야에서 완벽함은 긍정적인 면이 분명 있습니다.
유전적인 질환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고칠 수 없는 질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벽함은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성형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성형중독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근육 강화제를 지나치게 사용하면 경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지만 건강에 해롭습니다.
유전적인 방법으로 건강하고 똑똑한 아이를 가질 수 있지만, 자칫 건강하지 못하고 부족한 아이들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완벽함을 추구하려고 ‘선악과’를 먹었던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들이 추구하는 완벽함은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훼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완벽함은 늘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깨끗한 물에는 오히려 고기가 살 수 없다고 합니다.
너무 완벽한 사람 곁에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직업도 ‘금수저’는 아니었습니다.
어부였고, 세리였고, 열심 당원이었습니다.
‘흙수저’가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스승을 팔아넘겼습니다.
베드로는 3번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에 사로잡힌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의 표상이지만 그 길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다윗도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가 있으오리까?
오히려 용서하심이 주님께 있사와 더더욱 주님을 따르라 하시나이다.”
우리가 죄를 지었음에도 부족함에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완벽함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완벽해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두려움을 느끼고, 여전히 나약함 때문에 좌절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제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나약함을 믿음으로 극복하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어느 병원 응급실에 한 여자가 실려 왔습니다.
아파트 8층에서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아주 심각한 상태로, 얼굴을 심각하게 다쳤고 전신에 부서지지 않은 뼈가 거의 없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습니다.
그 병원의 모든 외과 의사들이 달려들어 그녀의 수술을 맡았지요.
자살한 사람을 살리겠다고 모든 의사가 힘을 쏟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의사 중 한 명은 이런 노력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고 합니다.
스스로 죽겠다고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은 막대한 시간 낭비와 자원 낭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수술은 아주 잘 되었지만, 이 여인은 좀처럼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어느 날 이 여인이 깨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깨어나자마자 어떤 말을 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었을까요?
“남편이 발코니에서 저를 밀었어요.”
그녀의 말에 남편은 체포되었고 자신의 모든 죄를 인정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앞서 치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던 의사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잘못된 판단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판단에 앞서 자신이 할 일에 먼저 충실해야 합니다.
지레짐작은 한 생명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과거 예수님 시대의 종교 지도자들도 지레짐작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가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었지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아 관은 세속적인 통치자, 모든 나라를 다스릴 유다인의 왕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힘 있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군대를 조직하지도 않고, 종교 지도자들의 편에 서서 행동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랑만을 강조하는 약한 모습만 보이니 메시아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특히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하느님 나라에 유다인 뿐 아니라 모든 나라 백성이 들어간다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선민으로 자처하던 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대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반대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그들 역시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되기 위해서는 빛이신 주님을 믿고 따라 걸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빛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을 것이며, 그 말씀을 믿는 사람은 그분을 보내신 하느님을 믿고, 믿음으로써 하느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로 지레짐작과 같이 잘못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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