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7.22.월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아가3,1-4ㄴ 요한20,1-2.11-18
마리아 막달레나
“순수하고 지고한 사랑의 최고봉”
사도들의 사도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땅,
이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시편63,2)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심정을, 우리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승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오늘 화답송 시편입니다.
벌써 가을이 온 듯 강론을 쓰고 있는 고요한 여름 밤, 풀벌레 청낭한 소리가 들립니다.
아마도 예수님 당대는 물론 교회 전 역사를 통틀어 예수님을 가장 사랑했고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유일한 분이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일 것입니다.
성녀와 예수님의 사랑관계를 보면 이성간의 연정과 스승에 대한 우정의 사랑이 절묘하게 조화된,
그러나 선을 넘지 않은, 하늘을 우러러 추호의 부끄러움이 없는 순수하고 지고한 사랑의 최고봉처럼 생각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의 이름 대문자는 순수하고 지고한 사랑의 아이콘이된 느낌입니다.
얼마전 제가 어느 분의 단편소설에 추천의 글을 썼는데 그 소설 제목이
마리아 막달레나를 줄인 ‘막달라’였습니다.
성녀의 아침기도 찬미가 아름다운 다섯째 연을 소개합니다.
“향기론 막달라의 고운꽃이여
예수의 사랑으로 도취된이여
당신의 타오르는 사랑으로써
우리의 마음들을 달궈주소서”
26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한 1998년 12월25일 주님 성탄절에 수녀님으로부터 빨간 칸나꽃을 받고
즉석에서 쓴 시,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였고 지금까지 무수히 나눴지만 나눌 때 마다
새롭고 좋았던 시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며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
예수님께 대한 막달레나의 사랑이 이러했을 것입니다.
하느님만을 찾는, 하느님 사랑에 목숨을 건 수도승들의 모범이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조정래의 대하소설, 20여년에 걸쳐 집필한 한반도의 근현대사를 망라한
총 32권의 <아리랑>, <태백산맥>, <한강>일 것입니다.
특히 태백산맥을 읽을 때는 얼마나 재미있던지 40대 수도생활중 밤을 새워 읽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인터뷰중 기자가 그의 아내 시인 김초혜는누군가 물었을 때 답변도 잊지 못합니다.
“집사람은 제게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 막달레나에 예수님이 누군가 물었을 때 역시 성녀의 답변도 이와같을 것입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그대로일 것이며 제 경우도 똑같을 것입니다.
“그분은 제게 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꽃입니다.”
48년전 28세 젊은 교사시절 아이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제모습을 물었을 때
자매님과 주고받은 메시지도 생각납니다.
“멋있어요! 인기가 많았겠어요!”
“그때는 멋있는 줄 몰랐어요! 그때는 인기가 좋은 줄 몰랐어요!”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한 교회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늦게서야 마리아 막달레나의 주님 사랑에 감격한 교회는 2016년, 그러니까 거의 2000년이 지난 다음에야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도들의 등급인 축일로 격상시킨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뜻을 받들어 교황청 경시성은 2016년 6월3일 교령 “사도들을 위한 사도”를 통해
‘이날은 로마 보편전례력에서 사도들의 경축에 해당하는 것과 같은 축일 등급을 지니고
교회의 모든 여성의 모범이고 본보기인 이 여인의 특별한 사명은 강조되어야 한다.’ 밝힙니다.
서방교회는 전통적으로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해석에 따라 예수님의 발에 야유를 바르며
참회하는 여인, 마르타와 라자로의 동생인 베타니아의 마리아를 한 인물로 결합시킵니다.
분명한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는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했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경배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도들 앞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셨고’,
‘부활의 기쁜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배경으로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성녀에게 ‘사도들을 위한 사도’라는 호칭을 부여했고
바로 교령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마리아 막달레나의 예수님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 한폭의 살아 있는 아름다운 그림처럼
압축적으로 드러납니다.
제1독서 아가서중 신부의 서두와 마지막 말마디는 그대로 성녀 마리악 막달레나의 고백을 방불케 합니다.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성읍을 돌아다니는 야경꾼들이 나를 보았네.
‘내가 사랑하는 이를 보셨나요?’
그들을 지나치자 마자 나는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았네.”
오늘 복음중 감동적인 몇 대목을 나눕니다.
맨먼저 예수님 무덤에 도착한 이는 마리아 막달레나 였고, 빈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로부터
시작되는 복음입니다.
“왜 우느냐?”는 천사의 물음에,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대답하는 성녀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입니다.
당신을 찾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랑에 감동하신 부활한 주님께서 나타나 “여인아, 왜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아시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묻지만 성녀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정원지기로 착각하고 다시 묻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일편단심의 사랑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부르십니다.
새삼 예수님을 만나는 것도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마리아가 아무리 주님을 찾았어도 주님의 부르심의 은총이 없었으면 못 만났을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나눠야 할 묵상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정원지기로 착각했는데 착각이 아닙니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정원지기 아담의 실패를 완전히 만회하는, 죽음이 아닌 생명을 가져온
새 에덴 동산의 정원지기 주인공이 바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으로 바뀌었음을 봅니다.
여기서 또 죽음을 가져온 하와의 실패를 만회하는 생명을 가져온 마리아 막달레나의 지고한 사랑이 빛납니다.
두분의 감격적인 만남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야!”하고 부르셨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뿌니!”하고 불렀다.
이는 “스승님”이라는 뜻이다.’
마리아의 돌아섬은 내적전환의 회개를 상징합니다.
세상에 “마리아야!” 부르실 분은 예수님 말고 누가 있겠으며, “라뿌니!”하고 부를 분은 예수님 말고
누가 있겠는지요?
집착해 붙잡으려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만류하시며 하시는 말씀에서 언제 어디서나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분으로서 새로운 차원으로 변모된 예수님 모습을 감지하게 됩니다.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이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하고 전하여라.“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 막달레나는 사도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환희에 넘쳐 고백하니 바로 여기에서 “사도들의 사도”라는 호칭의 유래가 됨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마리아 막달레나 성녀 덕분에 새 에덴 동산을 상징하는 이 거룩한 미 시간에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생명나무의 열매, 성체를 모시게 됨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한결같은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도록 이끄십니다.
“당신의 은총이 생명보다 낫기에,
내 입술이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이 목숨 다하도록 당신을 찬양하며,
당신 이름 부르며 두 손 치올리리이다.”(시편63,4-5).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