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있던 선조 일행은 일본군의 공격으로 의주로 피난갔고, 그 과정에서 일본군은 평양성을 점령했다. 당시 일본군이 전투로 인해서 생긴 피로를 확 풀고 재정비하고 다시 조선선조 국왕을 추격했다면, 역사는 달라지지 않았을까라고 이상하게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본다.
더구나, 명나라가 원조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일본에 점령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글쎄???
명나라는 필요악의 존재가 아니라, 참전하지 말아야 할 존재로 생각하고, 고니시군이 평양에서 진군을 멈춘 것은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명군의 참전이 안된다는 가정에서 쉽게 조선국왕은 붙잡힌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첫째, 광해군 분조가 활동을 재개하며 적진이 가까운 곳에서 활동을 했다는 점이다.
당시 광해군은 산속을 타고 팔도를 돌아다니면 하나의 정부를 형성하면 전쟁을 지위했다. 광해군이 이렇게 활동을 하는데 쉽게 왕이 일본군에게 붙잡지 못할 것이다.
둘째, 명나라가 망명의사가 허락하지 않아도, 바다를 통해서 전라도를 통해 도망을 갈 수 있다는 점이다. 평안도 수군이 미약하나마 존재하니 극단적인 상황에 빠지면, 바다를 통해 도망을 가고, 오히려 그것이 더 안정적이다.후보지는 전라도일 것이다. 임해군일행은 예로 들지만, 그것은 일본군이 잡은 것이 아니라 반민들에 의해서 붙잡힌 것이다.
셋째, 일본의 기록 戰史에 일본 수군의 패배로 일본 1군이 나아가지 못하고 진퇴양난에 빠졌다는 점이다. 그럼 점에서 쉽게 전선을 확대하겠는가!
오히려 고니시군이 평양에서 멈춘 것이 그래도 유리한 일본군의 기세를 다소 유지했고, 협상의 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째듯, 실질적으로 1차 조일전쟁에서 조선이 ( 제 판단으로 보면, ) 판정승을 거두었다고 본다.
첫째, 이유는 조선관민의 저항이요. 둘째는 조선의 매서운 추위로 본다.
전쟁을 통틀어서 생각하면, 명나라가 가세하여 전세가 일찍 역전되었다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효과뿐, 그후 전쟁은 단 몇개월간의 전면전이 있을 뿐이고, 대부분, 지루한 대치기간과 간헐적인 국지전을 되풀이하는 꼴이 된다.
오죽했으면, 본국에 있던 명나라 기록에 임진왜란을 전투가 별로 없고, 대치만 장기간 하는 이상한 전쟁이라고 했을까! ( 모 방송에 교수가 나와서 임진왜란을 강의했을 때 들려준 말임)
평양탈환전에서 명나라군의 화력을 계속 부각하여 전투의 일등공신로 추켜 세우는데, 당시 명나라군의 화력은 대인 살생용보다 적의 위력을 떨어뜨리는 심리전에
이용될 가능성이 높고,( 조선의 사대부들의 기록은 명나라에 대해 허장허세로 과장되게 기록하는 면이 아예 없지 않다.) 선봉에 서서 평양성으로 돌격해 들어간 부대는 김응서가 지휘하는 조선육군과 승병들이었다.
조선인 수천명을 화살받이로 (총알맞이) 배치한 일본군은 조선군의 활약으로 결국 외성을 내주고 내성을 퇴각했고, 그 후 별다른 전투없이 내성에서 눈물을 머금고, 철수를 하여 황해도를 걸쳐 수도 서울로 도망쳐 버린다.
조선군의 활약이 오히려 돋보였고, 명군의 참전이 아니더래도, 이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결과라 본다.
명군은 느긋한 중국인의 성격으로 도망가는 길을(일본군에게) 하나 터주고 추격하지 않는 체, 서울로 향해 여유있게 들어갔다가 벽제관에서 조선군에게 패한 경험이 있던 일본군5군 장수한테 패한다.
당시 명나라 구원부대는 중국에서 정예병사들이었다. 요동병과 남병으로 이루어진 부대였다. 요동병사들은 몽고와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여 키운 병사들이고, 실제 상당수 병력들이 임진왜란 참전 직전에 반란군 진압 작전에( 중국황제 만력의 3대 전쟁에서 포함된 반란으로, 몽고출신의 장수가 여진과 공모하여 난리를 일으켰다고 함.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참전하여 진압함. ) 경험이 있던 역전의 용사들이었고, 남병들은 명장 척계광이 공들여 키운 절강성, 광동성 출신의 포병들이 대부분이며, 그들의 왜구 토벌은 중원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런 중국의 정예 병사들이 벽제관에서 도망가는 일본군의 공격에 패전을 하고 개성을 걸쳐 평양으로 도망치고, 일본인과 화해 공작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 이들이 과연 사대부들이 기록한 재조지은의 부대의 모습인가!중국의 정예병이 이러니 훗날 여진한테 점령당하지 않나!
이여송은 평양에서 반란을 일으킨 남병 출신 병사 천여명이 넘은 인원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고,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이후 평양으로 퇴각한 이 후에 그 곳에서 수천의 병력들이 풍토병과 추위와 보급의 악화로 손실당했다고 하니, 명나라의 군대의 약함을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명나라가 심리적으로 일본군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명나라의
패전과 화평 공작으로 인해서 조선관민의 실망으로 인해서 생긴 우리 손으로 전쟁을 끝내고 말자는 굳은 결의가 오히려 일본군에게 더 강한 심리적인 압박이 된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 실례로 1593. 2월부터 1593년 4월까지의 시기의 조선군의 활약으로 명나라 장수들은 조선군의 용맹에 감탄했고, 탈환된 개성의 성곽문에 걸어 놓은 일본군의 목이 시간이 지날 갈수록 많아졌다고 함)
만일 조선군이 명군의 참전 이전에 일본군의 상황을 어렵게 하지 않았다면, 과연 앞서의 개(犬)같은 전과도 과연 되풀이 될수 있을까! 패전에 패전이 되겠지..!
이렇게 시작된 명나라의 참전역사는 조선에 두고두고 악영향을 끼쳤다.
당시 조선의 현명한 강경한 토벌책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일본과 화평공작을 하니 명나라의 하급관리 심유경과 고니시의 사기 행각으로 명나라는 물론이요, 일본은 망신을 당하고, 그 사기행각의 대상인 조선은 중일전쟁의 전쟁터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조선은) 그들의 후손인 우리는 물론이요, 일본, 중국에게 두고두고 비난을 받았고, 삼중국의 편견에 가미된 동양학을 배운 서양인들은 임진왜란을 더 이상하게 왜곡하는 방향으로 보았다.
심유경과 고니시의 사기 외교는 일본의 도요토미는 화를 내게 했지만, 어째든 소기의 목적인 재정비의 시간을 벌었고, 손해보는 것은 별로 없었다. 명나라도 손해라고 하지만, 전쟁의 당사자인 조선은 더 크다.
정유재란의 일본의 침략은 임진왜란의 시기보다 위세가 떨어지지만, 그들을 막는 조선의 기세도 임진년의 기세가 아니였다. 조선수군이 명랑해전에서 제대로 막지 않았다면, 정유재란의 향방은 알 수 없었고, 한강에서 8천의 조선군이 방어전을 펼치겠지만, 얼마나 가겠는가! 더구나 대규모로 파병된 명나라 군사들은 어이 믿을 수 있겠는가...!
직산전투로 일본의 기세가 꺾여다고 해도, 일본군의 일부 병사요... 대규모 접전이라고 생각할 수 가 없고, 수군의 보급이 제대로 되면, 명나라가 제대로 막아낼 수 가 있을까1
(명은 )명랑해전 이후 4-5일 만에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았고, 일본군은 느긋하게 대규모 약탈을 자행하지 않았는가!
남해에서 대규모로 농성하면서, 장기간 지속되자, 전쟁에 염증이 났고, 강력한 주전파인 가토마저, 다른 장수들과 같이 도요토미한테 연서를 보내 전선의 축소를 주장했지만, 받아주지 않았고, 전쟁은 그 후, 명나라와 조선군의 토벌과 일본의 반격이 있을 뿐이다.
그것마저, 명의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효과도 보지 못했다.
당시 전쟁이 계속 되자, 주둔하는 명나라 병력들은 늘어가니 병력이 십수만에 이르었고,여진, 몽고, 포르투칼, 오키나와인같은 외인용병들도 조선땅에 들어왔다.
당시 1598년에 이르러, 수군이 어느 정도 재건되고, 조선이 아무리 약골 국가라고 해도, 팔도 각지에 병력 9만이 있으니 남해안에서 죽치고 있는 일본군(8만으로 추산.)의 사기와전투력으로 조선을 정복할 수가 없다. 명나라 도움이 없어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장기 주둔으로 인해서 명군의 약탈과 수 많은 명나라의 銀의 유입, 군량미의 우선 지급, 명나라 탈영문제등으로 인해서 조선경제는 파탄이 나니 나가주는 것이 조선을 도와 주는 것이다. 스타크래프의 테란유저로 생각해보면, 일꾼이 scv가 축소되는데, 말린이라는 보병이 제대로 생산되겠는가!
명나라의 엄살과 조선조정의 실속없는 명분과 일본의 과장된 허장허세로 조선팔도의 민중들은 일본군과 명나라군의 시퍼런 눈에 노출되었다. 명군의 약탈은 일본하고 비교하면, 참빗은 명군이요, 얼빗은 왜군이라는 민간의 소문이 들어다 보면 알 것이다.
정유재란 초기의 위험한 위기도 조선수군이 제대로 막아줘 일본군의 철수를 도와지, 명나라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했다. 직산전투의 승전보....웃기다. 그럼, 조선군의 국지전인 광양, 여수, 고령, 금구 전투의 승전을 왜 이야기 하지 않는가...TT
한성에는 명군 따라 내려온 중국 상인들이 조선 사대부 상대로 비단 장사를 하여 조선의 국부가 유출되었고, 명나라군 주변에 조선의 여인들과 장정들이 모여들어 배고픔의 아픔을 달래고자, 몸을 팔고, 심부름꾼을 했다. 그것만 하면, 좋은데, 거기에 짱골라 말을 익숙해지니, 말이 통했고, 친해져 무뢰배로 행동을 하니 같은 민초들인 조선인들을 괴롭혔다.
어느 군관의 처형으로 명나라 장수의 항의로 인해서 조선 조정은 권율장군의 도원수 자격을 6개월간 사임시켰다.( 그러나 조선에 도원수의 자격을 가진 사람은 권율뿐이니, 다시 복귀하였다.)
어느 천민인가 상놈인가 하는 조선인은 양반 사대부가의 담을 넘어서 어느 계집종을 겁탈하려다 그 곳을 지나간 조선의 포졸들에 의해서 붙잡혔지만, 그 놈이 살기 위해서 알지도 못하는 솰라어를 중얼대니 조선의 관리들이 한동안 어쩔 줄 몰라 했다니, 당시 명군의 행패와 그에 기생하는 무뢰배들의 행패는 가히 짐작할 만하다.
명나라 탈영병들의 문제로 조선은 함부론 사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그들을 달래주고만 했으니, 오늘날의 미군의 소파문제를 생각나는구나.
군대 표현으로 하면 좃만한 명나라 장졸들은 민간을 약탈하고, 갖은 행패를 부리고,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일본군에 투항하겠다고 하니 조선조정은 기절초풍하면, 명나라 장수들의 협조를 요청했지만, 윗대가리들이 썩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잘 구슬려 그들이 가진 기술를 활용하고자 귀화를 추진하지만, 어디 항왜보다 나을 소냐!신통치 않았다.
이렇게 조선에 조금의 도움을 주고 갖은 행패를 부리다가 1600년에 조선에서 요동으로 철수하니 오랜만에 주둔했던 명군의 주둔역사는 끝났다.
그러나, 결과는 무엇인가...
그들에 의해서 처참하게 유린당한 민초들에,
오늘날의 이란과 탈레반의 회교 원리주의와 맞먹는 성리학 원리주의로 단단하게 무장한 왕과 사대부들과 전쟁을 객관적으로 본 실용주의자인 광해군과 그 일부만 경제적으로 피폐한 조선팔도에 남았다.
7년동안 조선에 거주하니 조선을 확실한 파악한 명나라는 조선에 갖은 요구를 하고,
사대부들은 유교 원리주의중에 하나인 재조지은을 들먹이며 최선을 다 할때 까지 들어주니 기가 막히다.
그러니, 광해군의 노력도 성과도 없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병폐를 맞이하게 되었다.
첫댓글 moko님 글 잘읽었습니다 근데 글에 좀 여유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네요 너무 글이 붙어 있어서 보는데 눈이 아파요 시력이 요즘에 안좋아져서 줄을 띄워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ㅠ.ㅜ
정예병이라고 볼 수 있을 지 모르겠네요, 명의 정예병은 강남의 오 지방의 병사들이었죠. 척계광씨가 길러낸 병사들. 실제로 임진왜란에서도 그 쪽 출신 병사들이 명의 전공의 대부분을 이루어냈다고 합니다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