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이남 최초의 교회라는 부산 초량교회, 120년의 역사를 요약한 <초량교회 120년 약사>를 어제(7월 6일) 우편으로 받았다. 약사라고 하지만 120년 역사의 중요한 부분들을 추려 정리하다 보니 224쪽에 이르는 적지 않은 분량이다.
처음에 요청한 것은 <초량교회 100년사>였는데, 그 책은 보존 분밖에 없어서 대신 한참 뒤에 나온 <약사>를 보내 온 것이다. 내가 초량교회 관련 책자를 보고 싶었던 것은 손양원 목사와의 관계성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1946년 손양원 목사가 직접 쓴 이력서에 '1946년 2월부터 부산 초량교회 일 보는 즁'으로 되어 있다. 알려져 있기론 해방으로 출옥한 뒤 애양원교회로 복귀하고 1950년 9월 순교할 때까지 그 교회를 비운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초량교회 쪽 기록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손양원 목사가 초량교회의 일을 보았다는 1946년을 전후하여 약사를 면밀히 검토해 보았다. 제5대 담임 김만일 목사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그리고 제6대 담임 한상동 목사가 1946년 7월 30일부터 1952년 10월 14일까지 시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몇 월(月)까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5대 김만일 목사가 1945년까지 시무했고, 6대 한상동 목사가 1946년 7월 30일부터 초량교회 담임으로 시무했다면 약 1년 정도의 공백이 생긴다. 여기에 손양원 목사가 시무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 가능성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손 목사가 그 사이 초량교회에서 일을 보았다면 기록에 누락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6절 제6대 한상동 목사 항목에 손양원 목사와 관련되는 문장이 나온다. 이렇게 되어 있다.
"평양형무소에서 한 목사와 같은 날 석방된 순교자 손양원 목사는 1946년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임지를 얻을 때까지 초량교회를 주소지(住所地)로 하고 전도활동을 했다(손양원 목사 기념관 자료)"
손양원 목사 기념관 자료라고 하는 것이 손 목사가 직접 쓴 이력서를 말하는 것일 텐데, 초량교회 내 자료가 아닌 외부 자료, 즉 손 목사 친필 이력서에 근거해 위와 같이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감히 추측해 본다면 이런 내용을 제기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교회에서 사역을 했지만 그 교회는 순천노회 소속이었다. 손양원은 경남노회에 속해 있었다. 1946년 2월 마산 문창교회에서 있었던 경남노회 속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경남노회에 적을 두고 있지 않으면 안수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애양원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경남노회의 초량교회에 임시로 적(籍)을 두게 된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손양원 목사의 큰딸 손동희 권사의 기억에 의하면 초량교회 제5대 김만일 목사가 그만 두게 되자 당회에서 애양원교회 손양원 목사를 청빙하기로 하고 여수까지 찾아 왔었다고 한다. 처음엔 손 목사님과 자녀들이 대도시 교회로 가게 되는 것을 무척 좋아했는데, 애양원교회 한센인 성도들이 붙들고 마침 다니러 온 애양원 전 원장 윌슨의 간곡한 부탁도 있고 해서 청빙에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문제는 자료를 찾아보고 좀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인 것 같다. 손양원 목사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대로 역사적 행위가 되기 때문에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초량교회 120년 약사(1892~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