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 간 : ? ~ 1304(충렬왕 30) 고려 후기의 문신. 자는 자운(子雲) 혹은 운부(雲夫). 호는 홍애(洪崖).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아버지는 지경(之慶)이다. 1266년(원종 7)에 과방(科榜)에 등제한 후 비서윤(秘書尹)을 거쳐 도첨의사인(都僉議舍人), 지제고(知製誥)에 이르렀다. 후에 원주의 주관(州官)으로 나갔다가 언사(言事)때문에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어 그 곳에서 졸(卒)하였다. 홍간은 시문에 능하였으며, 서체가 청려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제현(李齊賢)은 『역옹패설(轢翁稗說)』에서 “그가 시 한 편을 지어내기만 하면 어진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모두 그 시를 좋아하여 서로 전해가며 외웠다.”고 칭찬하였다. 또한 조선조 비평가인 허균(許筠)도 『성수시화(性?詩話)』에서 홍간의 시에 대해 “아름다우면서도 맑고 곱다.”고 평하였으며,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주지번(朱之蕃)이 “이인로(李仁老)와 홍간의 시가 제일 좋다.”고 하였다는 내용으로 홍간의 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의 시는 당풍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이에 대해 허균은“「난부인(?婦引)」· 「고안행(孤雁行)」등의 작품이 매우 뛰어난데 성당의 작품과 같다.”고 하였고, 홍만종은 “당조(唐調)를 깊이 얻어 송나라 사람의 기습(氣習)을 벗어났다.”고 하였다. 저작(著作)으로는 『홍애집(洪崖集)』이 유고로 남아 있으며 『동문선(東文選)』· 『대동시림(大東詩林)』· 『청구풍아(靑丘風雅)』·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등에 여러 편의 시가 실려 있다. 한시를 잘 지었는데 특히 고체시에 능하였다.
□ 유소보장(流蘇寶帳) : 수실이 달린 비단 장막(帳幕). 유소(流蘇)는 기(旗)나 승교(乘轎)등에 달아 놓는 오색실로 된 술을 가리킨다.
□ 금장(金張) : 한나라 금일제(金日?)와 장안세(張安世)는 모두 귀족으로 후손들도 모두 귀족이 되었다. 유금장(留金張)은 곱게 단장한 여인들이 신분 높은 사람들을 놀다 가라고 붙드는 모양을 묘사한 것이다.
□ 동벽휘(東壁輝) : 제나라에 서오(徐吾)라는 가난한 부인이 있었다. 이웃 부인들과 밤에 촛불을 켜고 방적(紡績)을 하는데, 서오(徐吾)는 아주 가난하여 촛불을 계속해서 대지 못하였다. 이에 이웃 부인들이 서오(徐吾)에게는 촛불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서오(徐吾)는 서러워서 “내가 가난하여 촛불을 같이 대지 못하므로 항상 먼저 와서 소제하고 자리를 정돈하여 당신들 오기를 기다렸다. 한 방에서 나 한 사람 더 있음으로 해서 촛불이 따로 소비될 것도 아니니 동벽의 남은 빛은 왜 아끼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이웃 부인들이 서오(徐吾)에게 촛불을 같이 쓰기를 허락하였다고 한다. 이 시에서는 가난한 여인이 부유한 여인들이 놀이를 하는 곳의 현란한 불빛을 부러워하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