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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정의 색(色) 속에 12
12회 아무래도 첫사랑은 면죄부일까?
어둠 속에서 반짝거리며 쏟아지는 은빛 빗줄기.
우산표면을 튕겨 눈앞에서 방울방울 희뿌옇게 부서진다.
걷는 것만으로도 로맨틱할 수 있는 건 촉촉한 기후 탓.
그리고 한우산 속에 같이 있다는 것.
어째서인지 온몸에 열기가 훅훅 피어오른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건데.
비 오는 날은 체온조절을 해야 하니까 열이 날 수밖에.
나는 실개울처럼 흐르는 빗물을 슬리퍼 발로 퐁당퐁당 밟는다. 한 우산이라 동욱이 형도 어쩔 수 없이 조리를 신은 발로 빗물을 밟게 된다.
“시원하시죠?”
나는 일부러 빗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응.”
동욱이 형의 조리도 계속해서 빗길에 담가진다.
‘아, 귀여우셔.’
처음 보는 것 같다. 동욱이 형이 반바지를 입고 행길까지 나온 모습은. 위에는 헐렁한 티셔츠를 입고 있어 탄탄한 골격이 간간이 드러나고, 늘씬하게 뻗은 종아리 아래로는 젤라틴 조리가 발가락에 끼워져 있다.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다. 계획 없이 저녁 겸 술을 먹으러 가는 이 길이.
연희로터리로 나오자 차들도 많고, 사람들도 많다. 그러다 보니 주위 시선에 신경이 쓰인다. 내가 우산을 들고 있기 때문일 거다. 동욱이 형이 내 어깨를 더욱 끌어당기는 건.
‘이러면 연인사이로 보일 텐데…….’
조금 쑥스러우면서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 난 고개를 비스듬히 하여 동욱이 형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딘가로 향하는 그의 정처 없는 시선이 오늘만큼은 여유로워 보인다. 한쪽 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은 것도, 나와 보폭을 맞추는 발걸음도, 촉촉한 기미로 눈썹까지 흘러내린 앞머리도, 오늘따라 동욱이 형의 무척 여유로운 모습.
“형, 슈크림 드실래요?”
제과점이 보이자 내가 말을 꺼냈다. 대관절 달콤한 게 확 당긴다.
“그래.”
동욱이 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우린 우산을 접고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즐비한 왕골바구니에는 온갖 맛깔스런 빵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난 쟁반에다 슈크림만 여섯 개 담아 카운터로 향했다. 좀 있으면 포장마차에서 치즈계란말이를 먹을 건데 미리 입맛을 버릴 순 없지.
“안녕하세요?”
난 쟁반을 내밀며 빵집 형한테 인사했다.
“안녕, 태호?”
빵집 형도 쟁반을 받으며 내게 인사한다.
“동욱이도 왔네?”
더불어 동욱이 형한테도 아는 척을 하신다. 뭐, 한동네에 사니까 서로 다 아는 사이.
“네.”
동욱이 형은 뻘쭘이 서서 대답만 했다.
“슈크림 한 개에 얼마에요?”
내가 물었다.
“오백 원.”
빵집 형은 비닐봉지에 슈크림을 담으며 말했다.
“그럼 여섯 개니까 오륙에 삼십, 삼천 원이네요?”
“태호는 계산도 참 잘해?”
빵집 형 좀 봐. 날 놀리고 계셔.
“아, 되게 비싸다. 금방 먹고 없어지는데.”
슈크림은 그냥 입안에서 녹으니까.
“몇 개 더 사.”
옆에서 동욱이 형이 말했다.
“아니에요. 여섯 개면 되요.” 난 대답하고는 미니바구니에 담긴 새카만 걸 쳐다보았다. “이건 뭐예요?”
“수제초콜릿. 내가 만들었어.”
빵집 형이 흐뭇한 얼굴로 말했다. 실은 나도 알고 있다, 초콜릿이라는 거.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라 서비스로 하나 달라고 물어본 건데.
“와! 진짜 대단하시다! 형은 너무 수제초콜릿의 대마왕이세요!”
난 빵집 형을 최대한 띄워드렸다.
“그럼 하나 맛볼래?”
빵집 형이 곰 모양으로 하나 건넨다.
역시, 중국집 배달형도 그렇고 빵집 형도 그렇고, 이 동네 형들은 내가 다 접수했다.
아무래도 난 마성의 동생인 듯~
‘어떡해. 벌써 다 먹었어.’
이렇게 허탈할 수가. 천오백 원이 순식간에 뱃속으로 녹아 없어졌다.
그나저나 세 개, 세 개씩 나눈 슈크림을 난 한방에 다 먹었는데 동욱이 형은 아직도 두 개나 들고 계시다.
너무 좋으시겠어. 천천히 드셔서.
“이거 먹어.”
동욱이 형이 내게 슈크림을 두 개 다 내민다.
“아니에요! 형 드세요!”
난 두 손을 저으며 완강히 사양했다. 침은 꿀꺽꿀꺽 넘어갔지만.
문득 그때가 떠오른다. 쇠고기떡말이. 학교식당에서 달랑 두 개 있는 쇠고기떡말이를 내게 하나 주셨었지. 참 식탐이 없으신 분. 모쪼록 내가 배워야할 점.
“내가 단 걸 별로 안 좋아해.”
“헉! 정말요?”
어떻게 단 걸 안 좋아할 수가 있지? 세상에서 가장 큰 유혹이 단맛이라는데.
“자, 너 먹어.”
동욱이 형이 손을 조금 더 내민다. 이토록 간곡히 권유하시니 사양할 수도 없는 노릇.
“그럼 하나만요~”
난 슈크림 하나를 내 입에 넣고, 다른 하나는 동욱이 형 입에 넣어드렸다.
곰 모양 초콜릿도 꺼내 반으로 뚝 분질러 머리부분을 동욱이 형한테 드렸다. 단 걸 별로라 하셔도 오늘 같은 날은 좀 먹어주셔야 한다. 아무래도 비가 오니까 기분전환 겸.
“와드득.”
초콜릿 깨무는 소리.
“와드득.”
또 한번의 달콤한 소리가 그의 입에서 들려온다.
“할짝~ 쪼옵쪼옵~”
난 아끼느라 오럴해먹는 중~♡
우린 동교동로터리를 조금 못미처 샛길로 꺾어 들어갔다. 곳곳의 가로등 불빛이 주위를 은은하게 물들이고, 즐비한 플라타너스에서 비에 젖은 향기가 맡아진다.
번잡한 곳에서 다시 한적한 길로 접어드니 심장박동이 달라진다고 할까?
안정해야 될법한데 이상하게 더 두근두근 뛴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이대로 아무데나 걸어도 좋을 것 같지만.
“준혁이랑 자주 가는 곳이 있어.”
그러고 보니 인성이 형이랑 준혁이 형은 지금 뭐하고 계실까?
“쫘아아아아아악-”
순간 승용차 한대가 물을 엄청 튀기고 지나갔다.
“와! 이럴 수가. 진짜 매너 꽝이다~”
난 물에 젖은 바지를 내려다보며 과속한 승용차를 원망했다.
“…….”
동욱이 형은 침묵했지만 역시 앞이랑 사타구니 쪽이 살짝 젖어있다.
“아, 이게 뭐야~ 형, 우리 꼭 오줌 싼 거 같아요. 그렇죠?”
“흠.”
동욱이 형이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승용차가 사라진 길을 돌아본다.
“하지만 금방 마르겠죠?”
“응.”
아무려면야 좋다. 바지 젖은 것쯤은. 지금은 비도 오고 바람도 시원하게 부니까.
모락모락~
“와! 계란말이에서 노란색 김이 나요!”
진짜 치즈향기를 듬뿍 담은 김이 노란색으로 모락모락 피어난다.
“훗.”
동욱이 형이 간만에 희귀한 미소를 지으신다. 난 치즈계란말이에 기뻐하는 얼굴이었지만 동욱이 형은 내 기뻐함에 짓는 미소. 늘 그래왔듯 다정함이다. 보이는 건 적어도 가슴으로는 많이 느껴지는.
“먹어. 낮잠 자느라 점심도 못 먹었잖아.”
“네, 배가 좀 많이 고프네요.”
이상한 꿈꾸느라 저녁까지도 못 먹고. 한동안 안 꾸다가 또 꿨다. 유리파편이 날리는 꿈. 무슨 트라우마인 양 걸핏하면.
“형도 어서 드세요.”
난 예의가 바른 편이라 동욱이 형이 먼저 시식할 때를 기다린다. 동욱이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통으로 나온 계란말이를 젓가락으로 반타작 가른다.
‘앗! 질질~’
두툼한 계란말이 틈새로 샛노란 치즈가 걸쭉하게 흘러나온다. 동욱이 형이 조금 뜯어먹자 나도 큼지막하게 뜯어먹었다.
‘아아! 뜨끈뜨끈하면서도 꾸릿꾸릿한 맛~♡’
난 정말 뜨끈뜨끈한 점액질의 느낌과 치즈 꼬랑내가 풍기는 꾸릿꾸릿한 맛이 너무 좋다. 이래서 내가 섹스를 잘하는 건지도. 흠흠.
곧이어 오이미역 냉채가 나오고, 더 주문했던 새우소라 데침이 나왔다.
이제야 동욱이 형이 소주병을 따서 술을 따른다. 내 잔을 채워주시고, 본인 잔을 채우시고. 원래는 내가 따라드리려고 했는데 첫잔은 그냥 자작하시라고 가만히 있었다. 자작해야 멋진 애인을 만날 수 있으니까. 비록 속설이지만.
“아으으~”
난 첫잔의 싸한 알코올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운치 있는 골목 담벼락에 천막을 친 포장마차. 조촐하고 소박하다. 손님은 우리까지 두 팀. 그나마 한 팀은 팀이라고 할 수 없는 외로운 아저씨. 실연이라도 당하셨는지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계신다.
마음 같아선 “이리 와서 저희랑 함께 드실래요?” 묻고 싶었다. 나도 외로움을 잘 알고, 동욱이 형도 분위기 자체가 고독이니까.
하지만 묻지 않았다. 괜한 오지랖일 수 있겠다 싶어서.
술이 계속해서 목구멍으로 넘어갈수록 동욱이 형의 침묵이 조금은 심심하게 느껴진다. 취기도 더 타오르게 하는 것 같고.
그래서 물어보았다.
“형은 말수가 너무 적은 편이세요.”
“응.”
“봐요, 지금도.”
단답형.
“내 천성이 그래.”
그렇다고 냉정함에서 오는 것은 아닌 듯한데. 동욱이 형의 무뚝뚝함은 다정하니까.
“그래도 다행이세요. 형은 워낙에 멋있고, 잘생겼고, 몸매가 좋으시니까. 안 그러셨으면 볼 것도 없고, 상대방이 얼마나 심심하겠어요.”
나 취했나봐! 말을 너무 막 해버렸어!
“…….”
이거 봐. 뭔가 복잡스런 침묵.
“하하! 농담이에요~ 그마만큼 형의 외모가 출중하시다는 뜻이에요. 솔직히 멋있는 사람이 말수 많은 건 별로잖아요. 형처럼 냉소적이고, 고독해보이고, 우수에 젖어 보이는 게 훨씬 더 시크하지. 그렇다고 형이 그런 이미지를 일부러 고수하신다는 뜻은 아니고, 단지 그냥……”
아, 미치겠네. 나 왜 이렇게 자제가 안 되지?
이유를 알겠다. 스스로도 이상하다 싶었는데 눈앞에 빈 소주병이 보인다. 그것도 4병씩이나!
“오늘 하루 종일 뭐했어? 방에서 통 나오질 않던데.”
다행이 동욱이 형이 화제를 돌리신다.
“시험공부 하다가 책 봤어요, 동화책. 그러다가 깜빡 잠들었지만.”
“네 방에 동화책이 있어?”
“책장에 있던데요? 안데르센이랑 그림동화. 어른들을 위한 무삭제판이요.”
“너도 책을 좋아하는구나.”
“취미에요, 독서가.”
독서가 취미인 사람은 평생 지루할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은 책을 읽어도 왠지 지루했다. 왠지 잠이 쏟아졌다. 인성이 형이 없어서 그런지.
그러고 보면 나도 많이 달라졌다. 사람에 대한 즐거움을 알고 나서부터는.
“작가 누구 좋아해?”
“헤르만 헤세요. 저 초등학교 때부터 헤세를 읽었어요.”
그래서 영혼마저 지적인 편이에요, 자칭.
“그러니까 툭하면 울지. 그런 우울한 소설을 어릴 때부터 읽었으니.”
“형도 헤세를 좋아하시면서. 저 기억하거든요? 유리알 유희.”
“그렇긴 해.”
동욱이 형이 소주를 한 병 더 시키신다. 여기서 더 먹으면 완전 취할 것 같은데.
“제가 가끔 눈물나는 건요, 행복해서에요. 과분하다보니 걱정되고 불안해서.”
“그럴 거 없어. 고생해서 얻은 행복은 쉽게 잃지 않아.”
글쎄, 내가 고생을 했던가? 고아원에서 자란 거, 난 고생이라고 생각 안 하는데. 인성이 형 때문에 힘들었던 것도, 동욱이 형 때문에 힘들었던 것도, 나는 오직 추억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내 얼굴에서 전혀 고생한 티가 안 나잖아. 내 귀티.
“형은 요즘 어떠세요? 하루하루 좋으세요?”
“응.”
고개를 끄덕이시며 하는 짧은 대답.
“얼마만큼 좋으신데요?”
물어보지 않으면 정도를 알 수 없으니.
“행복해.”
설핏 번지는 미소가 진정 그러신 것 같다.
아무래도 동욱이 형이 심상치가 않다. 1년 치 미소를 오늘 다 쓰시려나 보다. 동욱이 형의 미소는 뭐랄까? 모나리자 꺼져!
나마저 기분이 너무 좋다. 동욱이 형의 표정이 밝으시니, 행복하다고 하시니 내가 더 행복해지는 기분. 정말 삶이 이렇게 순탄해도 되는 걸까?
“제가 따라드릴게요.”
난 새로 온 소주병을 따서 동욱이 형의 잔을 채워드렸다.
“전부터 너랑 여기에 오려고 했었어.”
“네, 여기 진짜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운치 있고, 편안하고, 아늑하고.”
안주도 짱 맛있고.
“한잔 할까?”
그가 투명하게 찰랑이는 잔을 든다.
“전 한번만 쉴게요. 이러다 한방에 가겠어요.”
“그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쭉 들이켠다.
“흠~”
난 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잠시 바깥쪽으로 시야를 돌린다. 우산을 썼을 때도 들렸는데 포장마차에서도 들린다. 빗방울이 표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감미로운 악기처럼 로맨틱한 음색.
난 천막사이로 손을 뻗어 떨어지는 빗방울을 만져보았다.
한 방울에도 너무 시원하다.
“태호야.”
동욱이 형의 말투가 조금 늘어지신다.
“네.”
테이블 위의 빈 소주병이 어느덧 여섯 병. 그런데도 그가 또 술잔을 채우려고 한다. 앞에 있는 나로서는 난감할 뿐. 예의껏 내가 따라드리려고 소주병을 건네받았지만 이 상태에서 더 따라드려도 될는지.
‘취하신 것 같은데. 나도 그렇고…….’
내가 소주병을 든 채 잠시 머뭇거리자 동욱이 형이 말을 꺼낸다.
“너는 내가 왜 어렵지?”
“별로 안 어려운데요?”
“안 어렵긴. 아직도 내가 불편한가봐.”
“아니에요.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에요. 너무너무 편…… 해요.”
“진짜?”
동욱이 형이 내게 확인을 하신다. 싸늘한 무표정으로. 보통은 대체로 웃는 낯으로 물어볼 텐데. 아니면 그냥 믿는 척을 한다던가.
“솔직히 말씀드리면요, 마음은 편한데 겉으로 표현이 잘 안 될 뿐이에요.”
“그러니까 왜?”
“아직 적응기간이 아닐까요?”
“네가 그러는 게 날 방어하는 것 같아.”
“방어라뇨……?”
“네 스스로 선을 긋는가 싶어서. 나한테 다가오지 않으려고.”
“설마 그럴 리가요. 제가 왜요?”
“내가 너의 처음이니까.”
과거는 사라지지 않고, 기억도 남는다.
“어……”
하지만 시린 겨울은 곧 지나고, 들판의 마른 풀을 태우면 새로운 싹이 트는 법.
“인성이가 네 곁에 있는 이상 나한테 선을 긋는 게 당연해. 안 그러면 다 난처해질 테지.”
내가 설득당한 걸까? 난 일부러 선을 그은 적이 없는데, 동욱이 형이 그렇다고 하니까 내가 정말로 그런 것 같다.
“동욱이 형……”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태호야.”
그가 내 말을 가로채간다.
“네…….”
“넌 인성이가 왜 좋아?”
좋아하는 이유를 묻는 건가? 아니면 하필 왜냐고 물으시는 건가요?
“혹시 왜 친형을 좋아하는지……?”
“아니, 인성이의 어떤 점.”
이유라면 수도 없이 많죠. ‘사람 좋아하는데 딱히 이유가 있나요? 그냥 형이니까요.’ 이처럼 무성의하게 대답하고 싶진 않아요. 섬세하게 집어 백 가지는 댈 수 있어요. 다 말하고 싶어요. 그게 더 바른 예의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동욱이 형한테 그걸 다 나열해도 될지.
“어, 그게……”
난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 말문이 막혀버린다.
“네가 난감해하면 내가 헷갈려. 선을 긋는 것도 그렇고, 인성이 얘기를 기피하는 것도 그렇고. 아직 나한테 감정이 남아있나 오해하게 돼.”
진정 동욱이 형의 혼란한 감이 어조와 기색으로 전해져온다.
“그게 말이죠, 저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한 가지 분명한 건 인성이 형이 너무나 좋다는 사실이고, 그 외에는 좀처럼 갈피를 못 잡겠어요. 내 마음이 어떤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생각도 정립이 잘 안 되는 마당에 말로 하려면 도무지 복잡해서…….”
왜 이렇게 혼란스러울까. 나마저.
“하긴. 짧은 시간에 그 많은 일들이 벌어졌으니.”
그의 말이 빗소리에 녹아들어 나른하기도 하고, 허전하기도 한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내 손이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무언가라도 채워드리고 싶었다.
“너는 안 마셔?”
동욱이 형이 술잔을 들며 말했다.
“저까지 취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제가 형을 데리고 가야죠.”
“네가 날 데리고 갈 거야?”
혼란을 부추기는 뉘앙스.
“당연하죠.”
“어째서?”
너무나 당연한 걸 어째서냐고 물으신다.
“형이니까요. 집도 같고, 학교선배시고, 우산도 하나밖에 없고, 우리 형 친구시고, 또 저한테도 친형이나 다름없으니까……”
아, 힘들어.
“내가 네 친형 같아?”
동욱이 형의 시선이 새삼 나를 응시한다.
“다름없죠. 저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형은 어떠실지 몰라도.”
“나도……”
동욱이 형의 채 못한 말이 허공에 부유하자 어딘가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종종 있는 일이어서 난 신경 쓰지 않도록 애썼다.
이내 동욱이 형이 잔으로 시선을 옮기며 소주를 들이켠다. 그리고 다시 잔을 채워 금세 또 비우신다. 정말 너무 빨리, 너무 많이 드신다. 걱정되게.
“형, 이제 그만 드시면 안돼요?”
“왜?”
“걱정돼요.”
“나 데리고 갈 게 걱정돼?”
“아뇨, 형 몸이요. 건강이요.”
내가 못살아. 날 어떻게 보시고.
“그런 걱정이라면 안 해도 돼.”
“어떻게 안 해요? 형인데.”
“나 취한 거 본 적 있어?”
“아뇨, 없어요.”
“오늘 한번 볼래?”
“…….”
난 침묵했다.
“너 사이다 마실래?”
갑자기 화제전환. 참 대단하시다. 사람을 확 당황시켜 놓고는.
“네.”
어쨌든 사이다 오케이. 동욱이 형을 무사히 데려가려면 나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되니까.
사이다가 도착하는 동안 동욱이 형은 소주를 세 잔이나 더 드셨다. 나는 소주병을 숨기려다 들키는 바람에 못 숨겼고, 안주를 집어서 먹여드리려다가 싸늘하게 노려보셔서 못 먹여드렸다.
어째 이거 느낌이 위험하다. 동욱이 형이 취하시면 난감한 사태가 벌어질 것만 같다.
“그때 내가 너무 무정했지? 너를 안아놓고도……”
느닷없이 앙평에서의 일을 꺼내신다. 이제와 안 하셔도 될 말을.
“…….”
난 조용히 사이다를 컵에 따랐다.
“네가 처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안았어.”
나의 제로상태를 백으로 채웠던 사람이 바로 동욱이 형.
“…….”
그래서 힘들었지만, 그래서 다행이었다.
“네가 상처받을 것도 짐작했고, 실로 받은 것도 알았어. 후에 힘들었던 것도 알았고. 다 알면서도 내가 그랬어.”
“…….”
반짝이는 사이다 거품이 인어공주 같다. 말 못해서 부서지는.
“아무래도 내가 용서 안 되겠지?”
“…….”
나는 말이 어려워 대신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첫사랑은 면죄부인 것 같다. 내가 아팠던 것도, 죽을 것 같던 것도 이젠 추억이 됐으니까. 지금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내게 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이 동욱이 형이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기에 더 이상 용서를 바랄 것도, 할 것도 없는 시점.
“전에 청풍에서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사람을 선택함에 있어 솔직하지 못하면 후에 더 큰 상처가 따른다고 했던 말.”
물론 기억하고 있다. 내가 오토바이에서 뛰어내렸던 그때, 동욱이 형이 내게 그랬었다. 나를 안았던 건 그저 일이었지 마음까지는 아니었다고. 괜한 가식으로 좋아하는 척해서 후에 더 큰 상처를 주느니 차라리 솔직한 심정으로 나를 외면하는 게 나았다고.
그 말을, 그때를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실은 그게 내 얘기였어. 그때 내가 솔직하지 못해서 더 큰 상처를 받고 있었어. 내 진심은 너를 선택하고 있었거든.”
안돼요. 그런 말은.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좋았어. 내가 그걸 부정한 탓에 서로가 너무 큰 상처를 받은 것 같다.”
진심이신 것 같다. 이 시간과 모든 말들이 명확한 근거.
“대체 그 얘기를 왜 하시는데요!”
갑자기 내 속에서 원망이 끓어오른다. 순식간에 날아드는 불씨엔 필히 데일 수밖에 없는 법.
“오늘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기회가 없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일까? 왜 그렇게 감추는 게 많을까? 왜 내가 모르는 걸 동욱이 형은 알고 있는 걸까? 그것도 내 얘기를.
“그럼 그때 왜 그러셨어요? 내가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왜 안으셨어요? 제가 좋았다면서 왜 부정하셨어요? 그토록 저를 매몰차게 외면했던 이유는 대체 뭔가요? 어째서 형은 그때 솔직하질 못했어요?”
“그럴 수가 없었어. 너는 내……”
>> 계속..
저도 오랜만에 낯익은 대화명을 봐서 너무 반가웠어요.
요즘 소설을 통 못 쓰고 있지만 (왜 이렇게 게으를까요;;;)
그래도 다음 한 편까지는 더 남았습니다.
천천히 기다려주세요. ^^;;
좋은 하루 되시길~
첫댓글 앗! 찾아보니까 써놓은 게 "한 편 더"가 아니라 "좀 더" 있네요. ^^
잘봤습니다. ^^
우와~정말 긴 글에 감동먹고~두구두구~드뎌~동욱이의 어정쩡한 감정의 원인이 밝혀지는건가요~~아~ㅂ조아~~
다음편 궁금해욧!!!
"좀 더"있어서 즐겁습니다~♪
재밌어요 ㅋ
우와 담편이요!
어제..오늘..이틀동안 다 읽어버렸네요ㅋ 항상 재미있게 보구있어요..^^
잘 읽었어요 좋은 글 올려주심에 진심으로 감사...힘내세요
이후로 안올라오냐요 준회원이라 완결못보는데 ㅠㅠ올려주새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