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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 글자의 증언들
맹문재
1.
여순항쟁 75주년 추념 창작집에 실린 시인들의 작품 중에서 단연히 눈길을 끄는 시어는 ‘빨갱이’이다. ‘빨치산’(박철영, 이종근, 조경일)과 ‘빨간색’(복효근)도 연계된다. 시인들은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하거나 연좌제로 몰려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물론 힘없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덮어씌워 가해한 국가폭력에 비판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모습은 “빨갱이란 낙인이 찍히고/70여 년의 그 긴 세월/유족들까지 빨갱이 사냥을 당했다”(김영숙, 「흰 고무신이 벗겨지던 날」), “빨갱이 집으로 지목된 우리 일가 불태워”(김종숙, 「이것이 내 극한의 추위다」)졌다는 데서 여실하다. “누군가의 손가락질로 빨갱이가 되”(김청미, 「나비야」)었다, “나는 빨갱이 아들로 족쇄가 채워져 멀리 도망갈 수가 없었다”(오미옥, 「아버지, 아버지」), “빨갱이 새끼라 최종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우동식, 「여순 10․19 빨갱이 연좌제」), “영문 모를 빨갱이 반란군으로 몰”(이복현, 「그 이름, 목 놓아 부르리」)렸다 등에서도 확인된다. “다친 무장대를 숨겨주든/죽어가는 진압군을 “빨갱이 형제도 형제이거늘 무더기로, 무더기로 죽여버렸다”(이은봉, 「형제묘」), “빨갱이 낙인찍혀 한 많은 세상을 살다간/자식들”(정성권, 「부릅뜬 눈」), “빨갱이 새끼라고 연좌제로 묶었다”(정은호, 「손가락 총」), “빨갱이 집안이라고 손가락질 당”(최기종, 「썩을 놈들」)했다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시인들은 “빨갱이라고 욕먹는 사람들을 망각하지 않”(졸시,「왼쪽에서 사진 찍다」)고, “차라리 빨갱이 폭도로 남아 잘못된 역사를 증언”(김영란, 「여섯 개의 점으로 쓰인 비문에 대하여」)하려는 것이다. “다친 무장대를 숨겨주든/죽어가는 진압군을 치료해주든/빨갱이든 파랭이든”(김미승,「달의 이면」) 민족 공동체로 품으려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들이 맞서고 있는 빨갱이는 1950년대 미국에서 광풍처럼 불었던 매카시즘(McCarthyism)의 다른 이름이다. 1950년 2월 연방 상원 의원인 조셉 매카시(Josep R. McCathy)는 버지니아주의 휠링이라는 데서 공화당의 선거 지원 연설을 하는 도중 미국 국무부에 205명의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매카시의 발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미소 간의 냉전, 동유럽 국가들의 공산주의화, 중국의 공산주의화, 소련의 원자탄 보유, 그리고 한국전쟁의 발발 등으로 공산주의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미국 국민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그 결과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공화당 후보가 승리할 수 있었다.
공화당 의원들은 선거가 끝난 뒤에도 매카시의 주장을 지지하고 지원했다. 그의 주장이 근거가 빈약한 것을 알면서도 정치적으로 이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수백 명의 시민이 공산주의 혐의자로 수감되었고, 1만 명 정도가 직장을 잃었으며, 동료들 사이에서도 서로 의심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그렇지만 미국 국민들은 이성을 되찾아 매카시즘에 맞서기 시작했고, 1954년 3월 9일 CBS에서 방영된 <See It Now>라는 시사 프로그램에서 애드워드 머로우 기자에 의해 매카시의 주장이 거짓인 것이 밝혀졌다. 그 이후 매카시는 정치 생명을 잃고 미국 정치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퇴출된 매카시즘이 이승만 정권에 들어와 부활했다. 해방된 뒤 국민들은 진정한 민족 국가의 건설을 위해 친일파의 숙청을 기대했지만, 미군정을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은 국민의 기대를 무시하고 오히려 통치하는 데 유리한 면을 내세워 친일파를 각 분야의 요직에 임명했다. 아울러 국회를 통과한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위원회의의 활동을 방해했고, 단독정부 수립에 친일파 세력을 적극적으로 가담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매카시즘을 이용했는데,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민들에게 공산당이 배후에 있다고 담화문을 발표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2.
이찬식 씨, 보성군 복내면 봉천리, 당촌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해맑은 모습으로 사진에 찍힌 서너 살 아이
평생 연좌제에 걸려 반듯한 직장에 취직 한 번 못해 본 사람이
제 나라 죄 없는 국민을 죽이는 국가 지도자가 어디에 있나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진 속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울먹입니다
― 김완, 「사라지는 목소리」 부분
위의 작품은 2020년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에서 간행한 여순 10․19 증언록인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이름, 그리운 아버지』에 소개된 “이찬식 씨”를 통해 그의 아버지가 억울하게 희생당한 일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1948년 5월 29일 37명의 보도연맹원은 이승만 정부군에 의해 보성읍 갈몰이라는 곳으로 수송되어 집단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때 불려간 사람들은 당촌(봉천리), 일봉리(일와리 1구, 2구), 시천리(1구 살치 마을, 2구 시래 마을) 사람들이었다.
보도연맹은 일제강점기의 정치범 교화단체인 대화숙(大和塾)을 본받아 이승만 정권이 1949년 4월에 설립한 관변단체이다. ‘전조선 사상보국연맹’이라고 불린 대화숙은 독립운동 전력자 등 요시찰 인물의 사상을 개조하려고 조직했다.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등록시켜 정부가 ‘보호’하고 ‘선도’하겠다며 ‘보도연맹’이라 불렀다. 그렇지만 자수한 맹원의 수가 부족하자 시나 군별로 가입 할당량을 정해 가입자를 늘리는 대책을 세웠다. 그 결과 33만 명의 양민들이 가입했다. 좌익 경력과 상관없는 사람들이 가입하면 쌀을 준다, 고무신을 준다, 비료를 준다 등의 미끼에 걸려들거나 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가입한 것이다. 2010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확인한 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760명 중에서 문맹 363명, 초등학교 졸업 268명, 중학교 이상 97명, 서당 15명, 초등학교 중퇴 12명, 기타 5명이었다. 직업별로는 농업 80.6%, 상업 2.7%, 교사 1.8%, 학생 1.4%였다. 연령별로는 20대 46.8%, 30대 29%였다.
이렇듯 글자도 모르는 사람들은 보도연맹의 정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가입했고, 또한 이유도 모른 채 희생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양민들을 보도연맹이라는 죄를 덮어씌워 “풋고추 하나 준 일 없어도/부역자였고/빨치산에 쌀 한 톨 준 일 없어도/따지지도 묻지도 않으면서/수장시켰던”(허승호, 「애기섬의 우화」) 것이다.
영문을 모르는 선생님
더 영문을 모르는 학생들
고기를 잡던 어부
나무하던 나무꾼
농사짓다 손 털고 나온 농부
오일장을 찾아오던 화순 고흥 장돌뱅이
부지런한 하동 댁
아, 자식을 찾던 이름 모르는 어머니
모두 붉은 꽃이 되어 떨어졌습니다
덤으로 이유 있는 사람들은 이유 있는 보안 사범으로
독립군 출신이라는 이유로
반대 정치 노선을 걷는다는 이유로
눈 치켜뜨고 걸었다는 이유로 무명에서
백범까지 따로 죄를 물었습니다
― 배정빈, 「사라져간 붉은 꽃들」 부분
이승만 정부군은 여순항쟁의 진압 과정에서도 보도연맹 가입자들에게 가해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공부를 하는 학생은 물론 “고기를 잡던 어부”, “나무하던 나무꾼”, “농사짓다 손 털고 나온 농부” 등은 영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다. “오일장을 찾아오던 화순 고흥 장돌뱅이”며 “부지런한 하동 댁”도 그러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은 “이유 있는 사람들은 이유 있는 보안 사범으로”, “독립군 출신이라는 이유로”, “반대 정치 노선을 걷는다는 이유로” 만행을 저질렀다.
이승만 정부군이 여순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양민 학살을 자행한 것은 “간문천 변에 솔갱이 잎사귀로 덮여 아무렇게나 내팽개쳐버린”(강경아, 「다시 돌아오지 말거라」) 데서도 볼 수 있다. 정부군은 간전면 주민들을 간문초등학교로 끌고 가 남로당 가입 및 부역 혐의를 자의적으로 취조한 뒤 간문천 변에서 70여 명을 사살한 것이다.
3.
그랬다,
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
너 나와, 너 나와
손가락 총을 쏘았다
죄의 유무를 밝히는 재판도 없이
바로 즉결처분,
총살시켰다
손가락 총을 맞은
남자, 부녀자, 어린아이까지
국가권력이 양민을 죽였다
빨갱이 새끼라고 연좌제로 묶었다
누가,
빨갱이고 반역자인가
그토록 원했던 해방이 되고
너무도 당연한
하나의 조국,
하나의 국가,
동족상잔을 반대한 것이
어떻게 빨갱이인가
아직도
조국은 하나가 아닌데
손가락 총에
무고한 양민만 죽었다
― 정은호, 「손가락 총」 전문
이승만 정권은 군병력을 증파해 4․3항쟁의 불길을 잠재우고자 1948년 10월 중순 제14연대 제1대대 군인들에게 성능 좋은 무기를 지급하고 출동할 것을 명령했다. 그렇지만 제14연대의 3천여 명 군인들은 동포들을 학살할 수 없다고 명령을 거부했다. 그리고 민중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10월 19일 봉기했다
이승만 정권은 이에 맞서 여수, 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통행 금지, 집회 금지, 가담군 신고, 무기 반납 등을 명령하고 진압 작전에 들어갔다. 저항군은 대규모의 정부군에 맞서 싸웠지만, 전세가 불리할 수밖에 없자 벌교, 지리산 등으로 후퇴하였다. 정부군은 그 과정에서 저항군뿐만 아니라 노동자, 청년, 학생, 부녀자, 어린아이 등을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지역을 점령한 정부군은 주민들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시켜 놓고 그들의 외모, 개인 감정, 자백 등 다분히 자의적인 기준으로 분류해 처형하거나 경찰에 넘겼다. “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놓고/너 나와, 너 나와/손가락 총을 쏘”아 “죄의 유무를 밝히는 재판도 없이/바로 즉결처분,/총살시켰”던 것이다. 주민들은 “머리를 짧게 깎았다고/지까다비를 신었다고 흰 고무신을 신었다고 군용 빤쓰를 입었다고/손바닥 굳은살로 미루어 분명 총을 잡았을 거라고/그렇게 손가락 총 한 방에”(복효근, 「조심하라 동백꽃」) 목숨을 잃었다.
정부군의 만행은 “아버지를/아버지라 일러줘서/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할머니 어머니 누나가/군홧발에 차이는 걸 목도하”(박정인, 「약이 있어야 했다」)면서도 아무 소리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공포 그 자체였다. 그리고 “아버지와 큰 형이 쓸려 가고/남은 건 불탄 집, 불탄 곡식”(김칠선, 「살아남아 살아내기」)뿐이듯이 무자비했다.
키 크고 용모조차 훤칠한 데다
공부도 많이 하여 박학다식한, 한 청년이
국가의 명에 따라 입대영장 받아 들고
여수 제14연대 병사로 배치받았었는데
입대하고 얼마 안 된 신병 시절, 어느 날
갑자기 영문 모를 빨갱이 반란군으로 몰리고 나서
종적이 묘연하여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였건만
그 후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도무지 모를,
영영 돌아오지 않은 불귀의 혼이 되었다는데,
― 이복현, 「그 이름, 목놓아 부르리」 부분
여순항쟁에서 이승만 정부군에 의해 학살된 양민의 수가 6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뿐만 아니라 2만 명 이상 투옥되었고, 5천 호 이상의 가옥이 방화로 불탔다. 또한 “국가의 명에 따라 입대 영장 받아 들고/여수 제14연대 병사로 배치받”아 복무하다가, “어느 날/갑자기 영문 모를 빨갱이 반란군으로 몰리고 나서/종적이 묘연”한 사람도 많았다.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였건만/죽었는지 살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승만 정권은 양민 학살에 멈추지 않고 체제의 위협을 미리 막으려고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한 뒤 11만 명 이상의 국민을 체포하거나 처형했다.
4.
지금이라고 다른가
자기 생각과 다르면 빨간색으로 낙인찍고
감옥에 보내고 압수 수색하고
밥줄을 끊어버리고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버리지
거시기가 왼쪽으로 기울었다고 나는 잡혀갈지도 모른다
여순은 끝나지 않았다
― 복효근, 「조심하라 동백꽃」 부분
위의 작품에서 진단하고 있듯이 빨갱이 몰이는 과거의 역사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되고 있다. 그러한 예는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 심판 청구, 천주교 시국 미사에 대한 종북몰이, 야당에 대한 종북몰이, 참사 희생자들의 유족에 대한 종북몰이, 예술가들의 작품 검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자기 생각과 다르면 빨간색으로 낙인찍고/감옥에 보내고 압수 수색하고/밥줄을 끊어버리고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버리”는 것이다. 군사독재 시기에 정치적으로 이용된 빨갱이 몰이가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선 지금도 진행되는 현실이 안타깝고 두렵다. 그만큼 매카시즘은 뿌리가 깊은 것이다. 아울러 남북분단의 그림자가 짙어 우리 사회를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빨갱이 몰이는 우리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세계는 과학 기술의 발전에 따라 도시, 조직, 제도, 지식, 정보, 문화 등이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문화되고 다양화되고 또 빠르게 변하고 있다. 따라서 급변하는 상황에 제대로 적응하고 주도하기 위해서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구성원들의 사상과 표현을 억누르는 이데올로기로는, 즉 빨갱이 몰이 같은 폐쇄된 이데올로기로는 이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도 주도할 수도 없다. 따라서 빨갱이 몰이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요구된다.
잊지 말아야 한다 기억해야 한다
뜨거운 울음 삼키며 묻힌 진실을 찾는 사람들
그 비 다 맞으며 작은 돌멩이 하나씩 움켜쥔다
돌멩이마다 붉은 동백 필 때까지 서로의 이름 부르며
여순은 새 세상 꿈꾸라 한다 포기하지 말라 한다
― 김지숙, 「여순」 부분
위의 작품에서 화자는 “뜨거운 울음 삼키며 묻힌 진실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여순항쟁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기억은 이 세계의 본질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가치를 판단하는 행위이다. 세계 속에 들어 있는 존재들을 진지하게 이해하고 해석하고 현재의 터전으로 옮겨 그들을 다시 살리는 것이다.
따라서 화자의 기억이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이다. 구체적이고 종합적이고 그리고 결정적인 행동이다. 곧 “기억의 눈”(안오일,「기억의 눈」)을 부릅뜨고 “그 비 다 맞으며 작은 돌멩이 하나씩 움켜”쥐는 모습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혁명이”어서 “내 안에서 그들을 찾아내어 내 안에 그들을 되살리는”(성미영, 「기억한다는 것」) 실천 행동인 것이다.
1998년 10월 12일
호명마을 돌쫑지 깊숙한 계곡
여순항쟁 50주년에 맞춰
민간인 학살 피해자 암매장지를 최초로 발굴했다
불법적인 학살이나 암매장은 없었다는 거짓된 권력이
동백꽃 울음 앞에 하얗게 밝혀지던 날
여순반란이 여순사건이 되는 공론화(公論話)가 피어올랐다
― 김숙경, 「돌쫑지」 부분
위의 작품은 “1998년 10월 12일”, 즉 “여순항쟁 50주년에” “호명마을 돌쫑지 깊숙한 계곡”에서 “민간인 학살 피해자 암매장지를 최초로 발굴”한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이 발굴을 통해 “불법적인 학살이나 암매장은 없었다는 거짓된 권력이” 밝혀지게 되었고, “여순반란이 여순사건이 되는 공론화(公論話)”를 이룰 수 있었다.
실제로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여순항쟁 50주년이 되는 해에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암매장 유골을 발굴했다. 그리고 그 상황을 실태조사 보고서 간행과 발표 행사 등으로 세상에 알려 여순항쟁의 실제를 바로잡았다. 좌익 세력들이 시민을 학살한 사건이 아니라 정부군이 초토화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규명한 것이다.
여순항쟁 75주년 추념 창작집에 수록한 시인들의 작품 또한 이와 같은 차원으로 의미화할 수 있다. 빨갱이 외에도 항쟁(고선주, 김칠선, 이무성, 이민숙), 혁명(김희정, 나종영), 반란(김도수, 유종, 이규석), 피(김진숙, 박병성, 박정인, 이상인, 정미숙, 조현옥, 주석희), 함성(김정애), 분노(주평무) 등의 시어는 민중들이 목숨 걸고 살아온 여순(김영주, 김요아킴, 김지숙, 안준철, 이종수, 차옥혜, 최상해, 표성배)과 조계산(김재석)과 섬진강(송태웅) 등을 지킨다. 나아가 학살(주선미)당한 민중들이 겨울(박상률)처럼 찬 눈물(김경은, 박두규)을 흘리는 것을 함께 나누면서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장엄”(서경)한 세상(이지담)을 추구한다. 시인들이 매카시즘에 희생된 민중들을 외면하지 않고 품는 것은 부정한 정치 권력이 그들에게 주홍 글자를 새기는 만행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인 것이다.
맹문재(문학평론가, 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