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광란의 춤
세상에 비밀이란 없었다.
W측에서는 오백억 원을 날린 사실을 안간힘을 다해 숨기려고 했지만,
이미 수사관들까지 알게 된 마당에 비밀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명예회장인 김복자까지 죽는 바람에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 걷잡을 수 없게 밖으로 퍼져 나갔다.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몰려와 한바탕 북새통을 이루었는데,
회사측에서 아무리 부인을 해도 그들은 믿으려 들지를 않았다.
그들의 취재 결과는 다음 날 아침에 나타났다.
각 조간 신문에는 오백억 원의 증발과 김복자의 죽음이
그야말로 충격적으로 다루어져 있었다.
‘네다바이 당한 오백억 원…… 사상 최고액…… 명예회장 김복자 씨 쇼크로 사망…….’
각 신문들은 대개 이와 같은 제목을 달고 그 사건을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었다.
50,000,000,000원……그 천문학적인 액수에 사람들은 입을 딱 벌렸고,
김복자 회장이 쇼크로 죽은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오백억 원을 챙겨서 달아난 자가
바로 다름 아닌 변태수를 납치한 국화와 칼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와 같은 사실은 국화와 칼이 신문사와 경찰에 알려 옴으로써 밝혀진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납치해 간 변태수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오천만 달러를 요구했던 것인데,
그것을 한화로 바꾸어, 그것도 요구액보다 백억이 더 많은 오백억을
폭력 한 번 쓰지 않고 교묘하게 쓸어 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교묘함에 치를 떠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W측의 어리석음을 욕하고 비웃었다. 장안은 온통 그 화제뿐이었다.
W측은 부도가 나 회사가 망하기나 한 것처럼 휘청거렸고,
실제로 각 계열 회사의 매상액은 눈에 띄게 격감했다.
그러나저러나 남은 것은 변태수 문제였다.
국화와 칼은 오백억을 가져 갔으면 약속대로 변태수를 돌려보내야 옳았다.
그런데도 그쪽에서는 변태수에 대해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도 못 찾고 거액만 잃은 것이 아니냐는 비웃음이 일었다.
수사팀 본부장은 상부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았다.
오백억이 범인들의 손에 고스란히 넘어가는 동안
수사진은 도대체 뭘 했느냐는 질책에 본부장은 할 말이 없었다.
그 즉시 본부장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었고, 신임 본부장은 수사진을 더 보강하고,
경찰의 명예를 걸고 범인들을 체포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여봉우는 지 형사와 한조가 되어 이틀째 B아파트의 S동과 K동 사이를 집중적으로 수색하고 있었다.
수색에 참가한 인원은 모두 해서 삼십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야말로 드넓은 바다에서 헤엄치는 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수색을 계속했다.
오전 열한 시경 여봉우와 지 형사는 K여자 중고등학교 앞을 지나치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 앞에서 걸음을 멈춘 것은 그 학교가 바로 일 년 전 장미 양이 다니던 학교였기 때문이었다.
작년 여름 유괴되던 당시 장미는 K여중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장미가 그대로 학교에 다녔다면 지금은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방학중인데도 학교 운동장에는 많은 학생들이 나와 있었다.
아마 오늘은 임시 등교일인 것 같았다.
학생들은 운동장에 흩어져 휴지를 줍거나 잡초를 뽑는 등 청소를 하고 있었다.
" 바로 여기가 장미가 다니던 학교 아닙니까? "
" 음, 그래. "
여봉우는 무거운 음성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장미 친구들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
여봉우는 아무 대꾸 없이 멍하니 학생들의 움직임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저 학생들한테 부탁해 보면 어떨까요? "
" 뭘 말이야? "
" 장미 찾는 것 말입니다. "
" 어떻게 그런 일을 부탁할 수가 있어? "
여봉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니 전혀 불가능한 일만도 아닌 것 같았다.
" 아, 저기……강 선생이 보이는데요. 작년에 장미 담임선생 말입니다.
강 선생한테 부탁해 보면 어쩌면 들어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여우는 학교 안으로 들어섰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데 강 선생이 그들을 알아보고 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강 선생은 그들이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장미를 찾고 있다는 데 대해 사뭇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 신문을 보고 장미 소식을 대강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장미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뭔가 잘못된 것일 겁니다. "
강 선생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연민과 분노가 교차된 표정으로 말했다.
" 우리도 강 선생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정은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군요. "
여봉우는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강 선생은 눈을 빛내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 얼마든지 협조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장미 친구들은 지금 모두 고등학생입니다.
저는 여전히 중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협조를 구하면 가능할 겁니다.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고등학교 교사들을 만나 보고 오겠습니다. "
십 분쯤 지나 여봉우는 K여자 고등학교와 중학교를 대표하는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었다.
한 사람은 교감이었고 또 한 사람은 교무주임이었다.
그들은 장미 양을 찾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와 줄 수 있다고 말했다.
" 학생들을 집합시켜 놓았으니까 장미 양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한마디 안내 말씀을 해주십시오. "
학교측에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데 이쪽에서 싫다고 할 수도 없었다.
여봉우는 난생 처음으로 수백 명의 여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입을 떼려니
마치 소년이 된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 진땀을 빼야 했다.
" ……여러분들, 김장미 양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까? "
" 네, 잘 알아요! "
학생들은 일제히 대답했다. 여학생들의 일부는 장미의 동기생들이었고,
나머지는 선후배 사이의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장미가 워낙 유명해지는 바람에 그들은 모두 그녀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 ……나는 지난 일 년 동안 여러분의 친구인 김장미 양을 찾아다닌 경찰관입니다.
나는 여러분들 곁으로 장미 양을 돌려보내기 위해 애를 썼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저와 마찬가지 생각일 겁니다.
장미 양 자신도 여러분들 곁으로 돌아오고 싶어할 겁니다.
장미 양은……. "
그의 시야에 문득 눈에 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저만치 떨어진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은 틀림없는 장미 양의 아버지 김종화였다.
여 형사는 더듬거리며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 ……장미 양은 이 일대 어딘가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역이 넓어서 우리 경찰 인력만으로는 찾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부탁하려고 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한테 담당 구역을 맡겨 줄 테니까 2
인 1조가 되어 장미 양을 찾아보기 바랍니다.
여기에 장미 양을 찾는 포스터가 있으니까 한 장씩 나누어 갖기 바랍니다."
"전지역을 삼십 개의 구역으로 나누겠습니다.
그리고 각 구역에는 경찰관 한 명과 학생 두 명으로 하고
로터리 근처에 있는 파출소에 연락처를 두겠습니다."
"모든 연락은 그쪽으로 하면 됩니다.
장미 양에 관한 것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놓치지 말고 연락해 주기 바랍니다……. "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썰물처럼 학교를 빠져 나간 뒤
여봉우는 김종화가 서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종화는 그때까지 나무 밑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몹시 초라해 보였고, 얼마쯤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그 동안 너무 고통을 겪고 시달리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악수를 나누었다. 종화의 손은 뜨겁고 축축한 느낌이었다.
그의 몸에 비정상적으로 높은 열이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 장미가 이 근처에 있는 게 분명합니까? "
그렇게 묻는 종화의 두 눈은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 아직 모르겠습니다.
전화의 발신지가 이 부근이기 때문에 이 일대 어딘가에 숨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아직은 뭐라고 단정을 내리기가 어렵군요. "
여 형사는 상대방의 모습을 바라보기가 괴로웠다.
그들은 학교에서 나와 얼마쯤 걸어가다가 로터리 부근에 있는 파출소로 들어갔다.
그곳은 임시 본부로 지정된 곳이었다.
그곳에 대기하고 있으면 장미에 대한 모든 보고를 접할 수가 있겠지만
여봉우는 여학생들한테 별로 기대를 걸지 않았다. 김종화의 존재는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여봉우는 그가 나가 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는 한번 의자에 주저앉더니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렇다고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모습은 마치 침묵의 깊은 늪 속으로 빠져 든 석고상 같았다.
그 모습에서 여봉우는 그가 장미가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숨이 막히는 것 같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괴롭기만 했다.
여학생들에게 오후 내내 수색에 참가해 달라고 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였다.
그래서 오후 두 시까지만 수색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점심도 굶은 채 돌아가지 않고 수색을 계속했다.
학생들 가운데 제일 열성인 사람은 장미의 절친한 친구인 마동희였다.
지난 해 여름 장미가 유괴되던 날 현장에 함께 있었던 그녀는 지난 일 년 사이에 많이 변해 있었다.
웃으면 볼우물이 생기던 귀여운 얼굴은 사라지고 그 대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성숙하고 신중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말수도 적어지고 학교 성적도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
같은 변화는 장미가 유괴된 데서 온 충격 때문이었다.
해가 떨어지자 그 동안 땀을 흘리며 수색에 참가했던 학생들은 거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동희만은 돌아가지 않고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
녀의 짝도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어느 큰 아파트 단지 안에까지 들어와 있었다.
거리에 세워져 있는 가로등에는 어느새 불이 들어와 있었다.
동희가 길가에 서 있는 벚나무에 힘없이 기대 서 있을 때
택시 한 대가 저쪽에서 굴러 와 멎더니 안에서 젊은 여자 한 사람이 내렸다. 그
녀는 아래위 흰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고, 머리는 자연스러운 생머리 타입이었는데,
얼른 보기에도 세련된 모습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그녀는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그녀와의 거리는 오십 미터쯤 됐는데 그녀가 돌아서서 아파트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순간
동희의 두 눈이 빛났다. 선글라스 여인의 걸어가는 뒷모습은
동희가 그렇게도 애타게 찾던 눈에 많이 익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동희는 앞뒤 생각 없이 달음질로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쫓아가면서,
" 장미야! "
하고 불렀다. 아파트 안으로 막 사라지려던 여인이 주춤하더니 뒤를 돌아다 보았다.
" 장미야! "
동희는 손을 흔들며 숨이 턱에 차서 뛰어갔다.
그러나 상대방 여인은 얼굴을 홱 돌리더니 안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여봉우 일행이 B아파트 105동 앞에 도착한 것은 동희가 장미를 발견하고 나서 이십 분쯤 지나서였다.
B아파트는 십오 층 높이의 고층이었다.
각동마다 경비실이 없기 때문에 입주자에 대한 신상 파악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여봉우는 눈물을 글썽이는 동희를 붙잡고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니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 선글라스를 써서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뒷모습이랑 얼굴 윤곽이 장미가 틀림없었어요. "
" 혹시 나가는 것 보지 못했나? "
" 보지 못했어요.
계속 출입구를 보고 있었는데 나오는 것은 보지 못했어요.
아직 안에 있을 거예요. "
경찰은 105동 주위를 완전히 포위했다. 그러고 나서 탐문 수사를 벌였는데
1509호에 문제의 여인이 살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반장을 맡고 있는 여인의 말에 따르면 그 젊은 여인이 언제부터 그곳에 거주하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일 주일 전쯤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일 주일 전쯤부터 눈에 띄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고 있는데,
그전에는 그 아파트가 두어 달 정도 비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입주자 신고서도 작성하지 않았고,
주민등록 신고도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
런저런 이유로 정체 불명의 여인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가끔씩 잘 차려 입은 남자들이
들락거리는 것이 보이기도 했다고 그녀는 수상쩍다는 듯 말끝을 맺었다.
경찰의 일부는 1509호의 출입문을 지키고 또 다른 일부는 옥상으로 올라가
앞 베란다를 통해 아파트로 침투할 준비를 갖추었다.
베란다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고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불이 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1
509호의 전화 번호는 반장도 모르고 있었다.
틀림없이 전화가 설치되어 있을 것으로 보고 전화국에 1509호의 전화 번호를 문의하는 동안
여봉우는 반장을 앞세우고 1509호 앞으로 접근했다.
경찰의 부탁을 받아 반장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여러 번 누르고 나자 비로소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 누구세요? "
그것은 젊은 여인의 목소리였다. 젊은 여인의 목소리치고는 무척 앳된 목소리라고 여봉우는 생각했다.
" 안녕하세요? 여기 반장인데요. 인사 좀 하려고 왔습니다. "
반장 여인이 상냥하게 말하자마자 안에서 날카로운 반응이 튀어 나왔다.
" 웃기지 말아요! 경찰이 밖에 있다는 거 알아요. 만일 경찰이 안에 들어오면 뛰어내려 죽을 거야! "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깨고 여우가 나섰다.
" 장미, 그러지 말고 문을 열어요. 이젠 모든 게 끝났으니까 안심하고 문을 열어.
부모님이 기다리고 있어. 경찰이 안전하게 집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문을 열어요. "
" 거짓말하지 말아요! 들어오기만 하면 뛰어내릴 거야! 난 뛰어내릴 준비가 다 되어 있어! "
그녀의 말은 정말이었다. 앞 베란다 쪽을 올려다보고 있던 경찰의 연락을 받고 달려가 보니
거기에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미가 베란다에 서서 옷을 하나씩 벗어 던지고 있었다.
브래지어와 팬티만 남자 그녀는 몰려든 구경꾼들을 향해 마치 미인 선발대회에 나온 아가씨처럼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구경꾼들 가운데서 손뼉을 치며 환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장미는 브래지어를 먼저 벗어 던졌다.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팬티를 벗어 흔들었다.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오다가 갑자기 뚝 멎었다.
그녀가 갑자기 난간에 한쪽 다리를 걸쳐 놓았기 때문이다.
옥상 쪽에서는 특공요원 두 명이 줄을 타고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여봉우는 워키토키로 급히 지시를 내렸다.
" 움직이지 마라! 내려가면 안 돼!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절대 내려가면 안 돼! "
집 안에 불을 환히 켜놓았기 때문에 베란다에 서 있는 육체는
역광을 받아 흡사 쇼걸이 무대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듯하던 그녀가 갑자기 집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한참 지난 후 다시 나타난 그녀는 시뻘건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피를 뒤집어쓴 것 같기도 하고 붉은 페인트를 칠한 것 같기도 했다.
얼굴까지 시뻘겋게 칠해 놓았기 때문에 무시무시해 보였다.
그리고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었다.
집 안에서는 디스코 음악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괴이하기 짝이 없는 광란의 춤을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 히히히…… 히히히…… 난 악마다…… 난 악마야…… 히히히……. "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밤하늘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 미쳤군, 완전히 미쳤어. "
여봉우는 중얼거리면서 옆에 서 있는 종화를 돌아보았다. 그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 전화 번호를 알아냈습니다. "
지 형사가 숨이 턱에 차서 말했다.
그들은 1509호 옆집으로 들어가 양해를 구하고 전화통에 매달렸다.
이번에는 김종화가 장미를 설득시켜 보기로 하고 1509호에다 전화를 걸었다.
한참 벨이 울린 뒤에야 신호가 떨어졌다. 요란스러운 음악소리가 먼저 들려 왔다.
" 장미야! 나 아빠다! 나하고 이야기 좀 하자.
나 옆집에 있으니까 금방 갈 수 있어.
넌 나올 수 없을 테니까 내가 안으로 들어가마.
물론 경찰은 데리고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 안심해도 좋아. "
종화는 울면서 말했다. 잠시 아무 반응도 없더니 장미가 말했다.
" 아빠라고? 좋아. 아빠만 들어와.
만일 경찰을 데리고 들어오면 난 떨어져 죽어 버릴 거야."
" 절대 그러지는 않을 거야. 혼자 들어갈 테니까 문을 열어 줘. "
종화의 이야기를 듣고 난 여봉우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조심하십시오. 장미는 칼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제 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다. "
종화는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채 이미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1509호 앞으로 다가선 종화는 문을 당겨 보았다. 철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멈칫하더니 서 버렸다. 장미는 거실 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여전히 칼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 피를 그녀는 온몸에 바르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한 남자가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미 죽은 것 같았다.
" 문을 잠궈요! "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종화는 출입문을 잠그고 거실로 올라섰다.
장미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섬뜩하도록 무서운 웃음이었다.
그녀는 뒷걸음질을 치더니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위에 올라가 다리를 벌리며 누웠다.
" 아빠, 이리 올라와요. 올라와서 나를 사랑해 줘요.
아빠도 옷을 벗어요. 빨리 올라와요. "
종화는 그녀를 노려보다가 침대 위로 올라가 그녀를 가만히 안았다.
그의 몸이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면서 두 손으로 장미의 가는 목을 누르기 시작했다.
밑에 깔린 장미는 바둥거리면서 칼끝을 종화의 옆구리에다 갖다댔다.
종화는 옆구리로 깊숙이 통증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지만 장미의 목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옆구리로 들어오는 통증은 다른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 시간 후 경찰 특공요원들이 베란다를 통해 먼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뒤이어 집 안으로 들어선 여봉우는 김종화와 장미의 시체를 확인한 후
또 한 사람의 낯선 시체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 이건 변태수 아니야? "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시체를 많이 보아 온 그도 이번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피비린내를 피해 베란다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상체를 웅크리면서 토하기 시작했다.
< 끝 >
첫댓글 비참한 결말이네요..그동안 글 올려주시느라고 고생많으셨어요..복 마니마니 받으세요
잘보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결말이 너무 슬프네요...
불쌍해요.. 올려주셔서 잘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결국을 비참한 결말이 나고 말았네요!! 감사히 잘봤읍니다!! 올해도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그동안 감사히 잘보았습니다 항상 좋은나날 이어가세요
그동안 잘보았습니다~~~~매일 매일 행복하세요~~~~~~~~^^*
물망초님 끝까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김성종소설가님!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정말 속상하고 허탈하네요!... 많이 안타까운 일이 되더라도, 이왕이면...마지막 장 만큼은 조금이나마...독자들의 위로가 될 수 있는 내용이었으면 했었는데... 실화였다면 몰라도 소설이기에 그쯤은 가능할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딸 가진 엄마로써 맘이 넘 아픕니다ㅠ_ㅠ;;
소름이끼치네요 정말 있을 수없는 일이겠죠 몇개월을걸처 다읽고갑니다. 글 올리시너라 수고하셨습니다
슬픈 이야기이군요. 어이없이 눈물만 나오네요 . 잘 보았습니다.
참 소설 이지만 눈물나게 하네요 잘보았습니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
감사
ㅈㄷ
슬픈 결말이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