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mini 문학비평 93 – 한기홍 시 벗겨 보기 ~ ‘두껍다리’]
두껍다리
시냇물에 실려 아득히 흘러간 추억들만 갈무리하고 싶어요
오늘이 영 어제만 못한 것 같아 슬프게 고개 떨궈요
도시가 된 세월은 하수下水만 뿌려대며 직신거리는 오늘이니까요
큼직한 이무기 샛강 되어 윗마을로부터 오던
유쾌한 시내는 가늘다가 희미해져 버린 지 오래,
이젠 정나미 찍어내는 구정물 소리만 요란해요
두껍다리 내 뱃구레엔 그리움을 잃어버린 이끼 없는 증류수만 흘러요
이렇게 추레해져선 강으로 못가요, 난
나는 이대로 도시 후미진 구석 맨땅 속 잊혀진 강이 되겠지요
요즘도 문득 멈춰 서서 날 바라보는 인적이 가끔 있어요
난 그들이 눈물겨워요 내가 슬프다고 웅얼거리면
그들은 황새눈알 되어 하나 둘 떠나요
난 이대로 도시 뒷골목 맨땅 속 희미한 강이 되고 말거예요
흑백필름 속,
멀게는 구십년 전 풍채 좋은 강진사姜進士 양반이 취하면
뛰어들던 내 허리춤 소沼도 이젠 흩어져 버리고,
육십년 전쯤일까 만월 때면 뒷동산 청 보리밭 눕혀놓던, 명월관 춘심이
끈적한 박속 허벅지 씻던 내 별채도랑도 흙길 되어 버린 지 오래예요
가까운 삼십년 전 쯤 만해도, 월급날이면 화투판에서 비척대다 찾아와
곱슬머리 담그던 허주사許主事 붉으죽죽한 목덜미 비추던 내 어깨머리
담潭도 이젠 자갈밭이 되어버렸지요
오래된 물줄기가 토해낸 무언의 발작은 더 더욱 가련해져요
그래서 슬프고 외로우면 밤하늘 교회 첨탑너머 차디찬 허공에 찍혀있는
초승달 꼬리나마 붙잡으려 몸부림쳐요
변하지 않는 건 저 달 밖에 없어요,
저놈의 달은 갈수록 차게 문드러져서 백년 전 보다 더 옛날 같아요
나는 저 달 속에 도랑을 치고 눕고 싶어요
미치도록 외로우면 텅 비고 싶은 거예요
그곳에서 고대古代를 하얗게 빨래하고 싶어요,
은하수를 보면 왕년에 하늘도 강이었음이 틀림없지요
구비치는 밤하늘 강의 그 그윽한 별 파랑들
훗날 마르고 말라서 윗마을 수맥이 끊기고 내 발꿈치에 걸린
암거暗渠자국 마저 해체되는 날, 나의 미천한 역사 속 멍울진 응어리
하나만큼은 측량기사 소맷자락에 문질러 놓을 거예요
아 저만치 진군해 오는 아스팔트가 무서워요
홀연히 왔다가 아득히 가버린 깨알처럼 수놓아진 내 뇌리 속 그리운 군상들,
그들이 너무나 사무치게 보고파요
한참 늦었지만 게나리봇짐을 묶어야 할까 봐요
가야죠, 외로운 길 접고 유빙마냥 떠나가야 되겠지요
두껍다리들 몰려 사는 옛 고을 어디 없나요
정다운 물상들이 굼실대는 태초,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내가 강이면서도 짙푸른 남빛 강으로 스며들고 싶어요
포효하는, 거친 숨 토해내는 세상 끝머리 거기 물들의 고향으로
(2007 . 5 . 22)
*두껍다리 ~ 골목 안, 작은 도랑 또는 시내(川)에 걸쳐놓은 이름 없는 작은 돌다리.
⛄ Gemini씨의 비평
한기홍 시인의 「두껍다리」(2007)는 문명화·도시화 과정에서 근대적 개발 논리에 밀려 사라져 가는 자연 생태와 공동체적 기억을, 다리(橋)이자 시냇물이라는 의인화된 주체의 목소리로 생생하게 증언한 생태주의적 서정시이자 기억의 에포크(Epoche)입니다.
이 시는 도시의 그늘 속에 묻힌 '두껍다리'라는 미천한 공간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과 회복해야 할 원초적 생명력을 아프게 되묻고 있습니다.
1. 화자 설정 : 잊혀가는 토착적 기억의 증언자
시의 가장 큰 서사적 특징은 주화자(話者)가 사람이 아닌 ‘두껍다리(작은 돌다리와 그 아래 흐르는 도랑)’ 자신이라는 점입니다. 시인은 의인화를 통해 인간 위주의 도시 개발이 가한 폭력을 자연의 시선에서 직접 고발합니다.
⚫증류수와 구정물 : "이끼 없는 증류수"와 "구정물"은 생명력을 상실한 현대 도시의 비생태적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끼조차 살 수 없는 깨끗하지만 죽은 물(증류수)과 오염된 구정물 사이에서, 두껍다리는 생명(강)으로 흘러가지 못하는 불구의 공간이 됩니다.
⚫황새눈알 되어 떠나는 인간들 : 다리의 슬픈 웅얼거림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의아함이나 거부감("황새눈알")을 보이며 떠나버리는 현대인들의 무감각과 소외를 자조적으로 표현합니다.
2. 시간의 레이어 : 90년-60년-30년 전의 서사적 풍경
2연은 시인의 장기인 향토적 서사성이 가장 빛나는 대목입니다. '90년 전 - 60년 전 - 30년 전'이라는 역순의 시간 배열을 통해 두껍다리가 품어온 풍요로웠던 삶의 기억을 층층이 복원합니다.
⚫90년 전 - 강진사 양반이 취해 뛰어들던 허리춤 소(沼) -전통 사회의 여유와 정취, 풍류의 공간
⚫60년 전 - 명월관 춘심이가 허벅지 씻던 별채도랑 - 근대 초기의 민속적·원초적 삶과 입체적 농염함
⚫30년 전 - 허주사가 곱슬머리 담그던 어깨머리 담(潭) - 산업화 시절 서민들의 고단함과 위로의 공간
이 정겹던 물길들이 현재는 모두 "흙길", "자갈밭", "하수"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두껍다리의 미천한 역사는 곧 그 공간을 거쳐 간 무수한 보통 사람들의 삶의 역사와 궤를 같이합니다.
3. '달'과 '은하수' : 시적 초월과 원형적 회귀
현실의 아스팔트와 문명적 폭력 속에서 화자가 찾으려 하는 구원의 대상은 밤하늘의 '달'과 '은하수'입니다.
⚫교회 첨탑과 차디찬 달 : 도시의 밀집된 인공물(교회 첨탑) 너머에 존재하는 초승달은 변하지 않는 유일한 대상입니다. 화자는 태초의 깨끗함으로 돌아가기 위해 "달 속에 도랑을 치고" "고대(古代)를 하얗게 빨래하고" 싶어 합니다.
⚫은하수 : 하늘의 강인 은하수를 바라보며, 자신이 본래 속해 있던 태초의 우주적 생명력을 깨닫습니다. 이는 상실감에 대한 극단적 초월 의지입니다.
4. 저항과 유랑 : "게나리봇짐"을 묶는 마지막 종착지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도시화의 파도("진군해 오는 아스팔트")에 맞서는 슬프지만 당당한 태도를 취합니다.
⚫측량기사에 대한 문지름 : 개발을 주도하는 "측량기사"의 소맷자락에 응어리를 문질러 놓겠다는 표현은, 비록 사라질지언정 자신의 존재 흔적과 역사적 원한을 문명에 묻혀 보내겠다는 소극적이지만 강력한 저항의 표시입니다.
⚫태초의 물들의 고향 : "게나리봇짐을 묶어야 할까 봐요"라는 구절은 유랑의 결의이자, 오염된 도시를 떠나 정다운 물상들이 살아 숨 쉬는 "태초", "짙푸른 남빛 강", "물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원형 회귀(Archaic Return)의 열망을 보여줍니다.
♣ 총 평
한기홍 시인의 「두껍다리」는 사라져가는 미시사(微視史)에 대한 뜨거운 헌가(獻歌)이자, 문명 비판적 생태시의 수작입니다.
자칫 거창해질 수 있는 문명 비판을 '두껍다리'라는 작고 정겨운 향토적 시어와 구체적인 인물들(강진사, 춘심이, 허주사)의 서사로 풀어내어, 시적 감흥과 서정성을 극대화시켰습니다. 아스팔트 바닥 아래에 갇힌 모든 현대인의 잊혀진 기억을 일깨우는 아프고도 그윽한 울림을 주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