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열 동지에게
책이랑 편지, 영치금 잘 받았습니다. 3종 선물 세트 받으니 무한한 기쁨이 몰려옵니다. 죄수에게 필요한 바로 그 3가지 잖아요. 면회 올 생각은 마세요! 멀리와서 잠깐 보는건데 괜히 미안한 마음만 커져서 심란하기만 해요. 출소한 다음에 제가 찾아 뵈야죠!
영익이 출소한건 아시죠?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는데 없으니 많이 허전하네요. 또 일 생겼을때 함께할 수 있는 동지가 없어지니까 전투력도 없어진 기분이에요. 지난번 이광열 동지 편지 수신금지 되었을때 영익이랑 함께 사회복귀 과장 공동면담 했거든요. 공동면담은 전례가 없다고 안된다고 하길래 공동면담이 안되면 우리도 강하게 나갈 수밖에 없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엄포도 놓고 재밌었어요. 이제 그런걸 못하니까 아쉽죠.
구속노동자후원회 약칭이 ‘구노회’란걸 제가 모를거라 생각하시고 친절하게 괄호로 설명을 해 주신거에요? 하하! 저를 너무 무시하는거 아니에요? 하하! 지난번 편지 검열 때문에 저에게 미안하실거 없어요. 그런 일들이 생겨야 활력이 생기는 거죠. 그런 편지 자주 보내셔도 돼요. 그래야 저도 할말이 생기고 요구 사항이 생기고 그러죠. 그런 일이 있어야 시간도 잘가고 양심수로서의 자각도 되고 그러니까요.
화성에는 공안사범이 없어서 문제 제기하는 죄수가 제가 거의 유일하거든요. 그래서 교도관 사이에서는 금방 유명해졌어요. 그런 것도 나쁘지 않아요. 제 말을 쉽게 무시하거나 또 저나 다른 수용자들한테 함부로 못하게 되는 긍정적인 영향도 있어요. 또 5월부터 기결수 면회시간이 2분 늘어나서 총 12분이 되었는데 제가 계속 문제 제기한 부분이어서 나름 성취감도 있었어요.
책 보내 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할 따름이지만 읽고 싶은 책 목록을 보내는건 염치상 못하겠어요. 책을 얼마마다 보내 주시는 건가요?(한달에 한번?) 출판사에서 지원해 주는건가요? 보내 주시는 책이 양질의 책이라 ‘나중에 한번 읽어 봐야지’ 하는 생각은 들거든요. 또 새로운 관심사를 소개받는다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고 또 그냥 돈으로 받는 것보다는 더 반가운 느낌도 들어요(책을 고른 성의가 첨가된 거니까요). 음음음.
어떡하죠? 또 요새 거실에서 보유할 수 있는 책 권수를 30권으로 제한해서 꼭 볼 책만 가지고 있게 된 점도 고려해 봐야 해요. 아마 다른 양심수분들도 저랑 비슷한 심정일 거에요. 책 대신 돈으로 넣어 달라고 하긴 좀 뭐하고. 만약 출판사와 연계가 된 거라면 주시는데로 받아 보는 것도 상관없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책을 사서 넣어 주시는 것보다는 ‘도서구입비용’으로 그냥 돈을 영치시켜 주시는게 낳을듯 해요. 저도 9월 말쯤 가석방으로 나갈 것 같아서 몇 달 안 남았어요. 제가 말씀 드리는건 모든 양심수들에게 책을 넣어 주는 문제에 있어서 저의 견해에요. 한번 검토해 보세요.
브레히트 詩는 저도 좋아해요. 외워서 애인에게 들려 주기도 했는데 오랜만에 읽으니까 좋네요. 저도 방에서 화장실 창틀에 거미를 키워요. 정확하게 말해서 키우는게 아니라 관찰한다고 해야겠지만 - 거미를 길들일 수가 없으니까 - 하루살이 같은걸 잡아서 거미줄에 던져 주니까 어느 정도 ‘기른다’고 있을테죠. 거미가 행복해 보여요. 친구도 가족도 없이 혼자 사는데 외로워 보이지도 않고 말도 안하고 사는데 심심해 보이지 않아요. 멋진 생명체에요. 가장 ‘철학자’스런 생명체가 아닐까 싶어요. 또 자기만의 확고한 세계가 있는 것 같잖아요. 마치 왕좌에 앉은듯 거미줄 한 가운데 버티고 있어요. 먹이감을 기다리면서요.
다들 자기 처지에 그렇게 느끼는건지 모르지만 저는 여기 화성교도소에서 출역하고 지내는게 징역 잘 풀린 거 같아요. 애로사항도 없고 관도 말이 통하고 과장들도 젊고 의욕적(좋은 의미에서)이에요. 성동구치소에 있을때 조폭들하고 방을 같이 써서 그때가 힘들었죠. 수감 초반이라서 어리버리 하기도 했고.
참! 박종만씨에게 편지 썼었는데 주소 부정확으로 반송되어 왔어요. 구노회로 보내니 알아서 보내줘요. 중요한 편지는 아니에요.
관심과 애정을 굳건히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병역거부라... 어떤 대의와 공공성을 가지고도 있겠지만 또 제 life style 과 개성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에 ‘운동적 차원’에서 저를 지지해주시는 분들께 왠지 모르게 미안시러운게 있어요. 물론 이 ‘개성’이 보호 받아야 하고 격려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 틀린말은 아니겠지요. 그래도 왠지 병역거부라라 하면 ‘사적인 문제’로 느껴지는게 커요. 이걸 사회운동의 차원으로 생각하면 제 자신이 소외되는거 같고 ‘사적인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사회적 의미를 빼 놓을 수가 없고 이 두가지 측면에서 헷갈릴 때가 많아요. 노동자들이나 철거민 양심수분들도 그런 느낌이 있을려나?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저도 시 한 수 보내 드릴께요. 그럼 안녕히! 몸 건강하시고 즐겁게 지내세요.
2010.5.31 은국
혁명
송경동
나는 자꾸 뭔가를 잃어 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묵은 전화번호를 뒤적거려 봐도
진보단체 사이트를 이리저리 뒤져 봐도
나는 왠지 무언가 크게 잃어버린 느낌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공단거리를 걸어 봐도
촛불을 켜 봐도, 전경들 방패 앞에 다시 서 봐도
며칠째 배탈 설사인 아이의 뜨거운 머리를 만져 봐도
밤새 토론을 하고 논쟁을 해 봐도
나는 왜 자꾸 뭔가를 잃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까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분명히 내가 잃어버린 게 한 가지 있는 듯한데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첫댓글 스물 한 살 때인가 우연히 봤던 은국 님. 이 분은 저를 기억 못하시겠지만 ㅎ 이 분 사진과 이름이 구노회 소식지에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참 발랄하셔서 양심적 병역거부자, 라는 이름이 무거워 보일 정도였는데... 성을 안 쓰고 은국, 이란 이름만 써서 기억하고 있었어요.( 제가 스무살 때 사람들이 이름 물어보면 그렇게 말하구 다녔거든요... 성 빼고.. 지금은 귀찮아서 다 쓰지만-_- 반성)/ 제가 잊어 버린 동안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구노회 소식지가 새삼 일깨워줬어요>< / 징병제와 전쟁을 반대하지만,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득하고 알려나갈 것인가 하는 고민을 다시 한번 하게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