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라 그리하면 줄 것이니
누가복음 6:37-38
37과 38절의 짧은 두절에서 ‘그리하면’이라는 말이 네 번이나 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며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평범한 진리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콩을 심어놓고 팥을 기다리거나 팥을 심어놓고 콩을 기다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자연의 법칙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행함에 대한 결과요 나아가서 하나의 심판입니다. 친절을 심었으면 친절을 거둘 것이고, 강포를 심었으면 강포를 거둘 것이고, 자비를 심었으면 자비를 거둘 것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는 미래적인 약속입니다. 심은 즉시 거둘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오늘 심고 내일 거두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먼 훗날에 거둡니다. 대개 곡식은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둡니다. 그러나 어떤 것은 5년 또는 10년, 때로는 아주 더 먼 훗날에 거두는 것도 있습니다. 살아서 거두지 못하고 죽어서 거두는 것도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 진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심어놓고 무던히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하면’이라는 말씀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먼저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 채 남의 눈에 티를 보는 자들을 향한 교훈입니다. 자신도 판단을 받을 것이 있으면서 남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죄인이면서 남을 판단하고 자기는 의인처럼 외식하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은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대한 월권이요 교만한 죄악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네가 너를 정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을 비판하는 자에게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롬2:3).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14:1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비판을 받아야 할 존재이면서 남을 비판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비판하는 것은 형제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비판 받는 것은 무서운 심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정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정죄’란 개인적인 비판을 넘어서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짓는 재판관의 위치에 올라가는 교만한 행위가 됩니다. ‘정죄’하는 것은 음밀하게 말하면 죄를 정죄하는 심판입니다. 정죄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남을 정죄하는 것은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며 어찌하여 네 형제를 정죄하느냐’(롬2:1)말했습니다. 남을 정죄하는 것은 자신을 신격화하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범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을 심판하여 죄인으로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리고 사람들은 삭개오를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셔서 음식을 잡수실 뿐 아니라 유하시기까지 했습니다. 여리고 사람들은 삭개오를 정죄하여 죄인 취급 하였지만 예수님은 삭개오와 그 집을 구원하셨습니다.
‘너희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에서, ‘너희는’ 제자들과 모여든 무리들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입니다.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정죄를 받을 만한 죄가 없어서 정죄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정죄를 받을 만한 죄가 있지만 정죄를 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남을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 날에 정죄함을 받지 않기 위해서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용서’는 성도의 최대의 미덕이요 마땅한 도리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게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의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의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용서하는 것은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용서할 줄 모르는 한 사람의 예를 들었습니다. 어떤 임금이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갚을 능력이 없음을 보고 불쌍히 여겨 그 빚을 모두 탕감해 주었는데도 그러나 그 종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 종에게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해 주었거늘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고 하며 그 종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고 말씀을 하시고,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리라”(눅18:3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갚을 수 없는 빚진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다른 사람을 용서해 주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용서가 아닌 복수를 합니다.
지난 달 21일자 조선일보 일면에 ‘미국 전직 대통령 네 분의 대통령과 부인들, 그리고 현직 대통령 부인이 함께 어개동무를 하고 찍은 사진을 계시했습니다. 정치 일선에서는 경쟁자로서 서로 대결하고 싸웠지만 이미 그 모든 것 다 용서하고 서로 만나서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웃을 수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존경스러운 분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용서를 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용서했습니다. 용서했을 뿐 아니라 죽은 두 아들을 대신하여 그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살인자는 안재선이는 손목사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상당한 세월을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가 죽기 전에 손양원 목사님과 두 아들의 묘소를 찾아가서 그동안의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말하는 것을 조선일보에서 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의 죄를 다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용서 받았으니 남을 용서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진정한 용서 받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너희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 받은 자로서 용서할 때 최후의 심판대에서 용서 받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죄와 관계가 있는 말씀으로 비판하지 말라, 정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그리하면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7).
이제 마지막으로 물질적인 가르침으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38). 곡물시장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일반 시장에서는 되를 깎거나 저울 눈금을 속이면서 분량을 줄이는 것이 시장의 상거래 관습입니다.
요즘은 대부분 저울에 달아서 주고 받으니 이런 광경은 볼 수 없습니다만 옛날에는 곡식을 말이나 되로 되어서 팔고 샀습니다. 어떤 집에는 쌀을 되에 담아서는 굴래로 살짝 굴려 끝에 약간 남겨 줍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다시 되어보면 쑥 내려가곤 했습니다. 그 집은 기술적으로 쌀을 되어 줍니다. 그러나 어떤 집은 흔들어 눌러 후히 줍니다. 그리고 한 줌 더 줍니다. 쌀 한 되를 팔고 사는 데서도 인색함과 후함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라’는 말씀은 베품을 상징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필요한 사람에게 주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다 보시고 후히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가 요구하는 떡 한 조각을 주었음으로 하나님께서 후히 흔들어 주셨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 움큼의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주었습니다. 그 결과 가뭄이 다하는 날까지 그 집에는 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왕상17:16). 많이 가졌다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많이 가진 자들은 더 인색합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르밧의 과부에게로 가라 그가 네게 음식을 주어 먹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많이 가진 자에게 보내시지 않으시고 한 번 구워먹고 죽을 수밖에 없는 가난한 과부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과부와 그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엘리야를 보내신 것입니다. 과부는 엘리야에게 먹을 떡과 물을 주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과부는 아들과 함께 가뭄이 끝날 때까지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축복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르밧 과부에게 후히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웃에게 베풀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긍휼을 베풀고, 자비를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후히 누르고 흔들어 주실 것입니다.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는 말씀은 빼앗기지 않게 우리 품에 안전하게 안겨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면 하나님께서 후히 주실 것입니다. 흔들어 주신다는 말씀의 성격은 세상 물질적인 축복을 의미하는 것처럼 마치 곡상들이 말이나 되로 곡식을 담아 줄 때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주는 것처럼 물질적인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부족함이 없는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38)고 말씀하셨습니다. ‘헤아림’이란 주고 베푼 것을 하나도 잊지 않고 낱낱이 다 기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고 베푼 정도에 따라 하늘의 상급이 정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후히 베풀었다면 상급도 후히 받을 것이고 인색하게 베풀었다면 인색하게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입니다.
35절에도 ‘그리하면’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푼 것에 대한 상이 클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상급은 영광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무한한 축복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꾸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주라는 말씀입니다. 베품에 있어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받기를 바라지 말고 주라’는 것입니다. 받기를 바라고 주는 것은 칭찬이 없을 뿐 아니라 상급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면서 받기를 바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면서 바라는 것은 누구가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죄인들이 주면서 받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34).
그런데 예수님은 “오직 너희는 ...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예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제자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무리들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성도된 자로서 죄인처럼 받기를 바라고 주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답게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주어야 합니다. 받기를 바라고 주는 것은 공양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따라 삽시다. 비판하지 맙시다. 정죄하지 맙시다. 용서합시다. 그리고 줍시다. 그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빼앗기기 않게 내 품에 안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 주시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