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Phnom Penh Post 2011-11-23 (번역) 크메르의 세계
누온 찌어, "우리는 베트남의 침략에 대응했다"
Nuon Chea’s outbu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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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Mark Peters/ECCC) '브라더 넘버 투' 누온 찌어 피고인이 화요일(11.22) '제002호' 사건 본심재판 이틀째를 맞아 ECCC 법정에 출두해있다. |
기사작성 : Bridget Di Certo
(프놈펜) ---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의 '브라더 넘버 투'(Brother No 2)로 불렸던 누온 찌어(Nuon Chea) 전 부서기장은 어제(11.22) 열린 '캄보디아 크메르루즈 국제법정'(ECCC) 공판에서 진술하면서, 자신을 캄보디아 국가의 수호자로 묘사하면서 2시간 동안 횡설수설의 역사 강의를 펼쳤다. 그는 자신과 여타 지도자들이 한 행동들은 베트남에 의해 소멸해가려는 캄보디아를 보호하기 위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누온 찌어 피고인은 법정에서 "나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왔다"면서, 자신은 "무슨일이 일어났는지에 관해 사랑하는 캄보디아 국민들에게 사실을 알려주고자" 한다고 말했다. 반-인도주의 범죄 및 학살 혐의로 기소된 그는 준비한 진술원고를 2시간 동안 읽어내려 갔다. 그는 '제002호' 사건에서 다룰 여러 차례의 소규모 재판들 중 첫번째 주제인 도시 주민들의 강제이주와 관련된 검사측의 고발들을 교묘히 빠져나갔다.
이례적인 변론
누온 찌어 피고인은 진술을 통해, 베트남은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결성된 이후 80년에 걸쳐 캄보디아를 장악하고 '크메르 민족'을 말살시키려 해왔다면서, 자신의 입장을 변론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트남은 크메르 민족을 파괴하기 위해, 처음부터 이용가능한 모든 속임수들을 채택했다. 베트남의 생각은 침략, 팽창, 토지수탈, 민족 말살이다." |
그는 베트남이 오늘날에도 캄보디아로의 이주민 이식 정책을 계속하고 있다고 덧붙이면서, 베트남은 이웃국가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고, "보아 뱀이 사슴을 조이듯이 질식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러한 베트남인들의 움직임이 1975~1979년 사이의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크메르루주 정권의 국가명)에서 발생한 혼란의 주요 동인이었다." |
'캄보디아 기록보존센터'(DC-Cam)의 법률자문인 안네 하인델(Anne Heindel) 변호사는 이번 재판이 전통적인 방식과는 다른 방법으로 재판과정을 시작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온 찌어 피고인의 진술은] 역사에 대한 흥미로운 관점이다. 하지만 많은 대중들은 그가 하는 이야기들을 단순하게 이해하지도 못했고, 기억하지도 못한다." |
책임규명
'재판법정'(Trial Chamber: 2심, 본심)은 '제002호' 사건을 주제별로 나눠 몇 개의 소규모 재판들로 분리했다. 따라서 이번 첫번째 소 재판은 1975년에 발생한 도시 인구의 농촌으로의 강제이주와 '캄푸치아 공산당'(CPK), 즉 '크메르루주'와 관련된 일부 조직 및 정치적 사안들을 다루고 있다.
안네 하인델 변호사는 본지(프놈펜포스트)와의 회견에서, '제002호' 사건이 이런 방식으로 분리됨에 따라 앞으로 다루게 될 '강제결혼 문제'나 '심문센터의 처형사건들'에 관한 재판보다는 이번 사안이 훨씬 더 방대한 양의 역사적, 정치적 검토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마도 모든 잘못은 하급 차원에서 발생한 것이며 '우리가 통제한 일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듣게 될 것 같다"면서, 누온 찌어 피고인이 크메르루주 당원들 중 많은 수가 음주, 도박, 정처없는 '부랑자'와 같은 나쁜 요소들에 영향을 받았었다고 주장한 내용을 언급했다.
누온 찌어 피고인은 인도차이나에서의 공산당 활동 및 크메르루주가 베트남의 '침략'에 대한 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 상세한 진술은, 그가 크메르루주 정권의 잔학한 정책에 대해 많은 양의 설명을 한 것과 타협점을 이룰 것 같다.
그는 캄보디아의 공산당 내에서 및 그들의 베트남 상대자들 사이에서 있었던 정치적 회의들의 일부에 대해 매우 친밀한 느낌으로 상세히 진술했다. 그리고 캄보디아, 베트남, 미국 사이의 정치적 긴장이 결과적으로 크메르루주의 고위 지도부들이 압력을 느끼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1979년 1월에 있었던 베트남의 캄보디아에 대한 '불법 침공'을 이야기하면서 발언을 마무리했다. 당시의 침공으로 크메르루주 정권은 붕괴했다. 누온 찌어 피고인은 베트남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캄보디아를 '정복'하려 한다면서 최근의 사례들도 지적했다.
재판절차의 복잡성
누온 찌어 피고인 및 그의 공범들인 이엥 사리(Ieng Sary) 및 키우 삼판(Khieu Samphan) 피고인은 첫번째 소 재판에서는 제한된 혐의들만 적용받아 그에 대해서만 답변하게 된다. 여기에는 처형, 강제노동, 강제결혼, 학살 등 여타 범죄 혐의들은 포함되지 않는다.
누온 찌어 피고인의 미키엘 페스트만(Michiel Pestman) 변호사는 법원의 이러한 결정으로 피해자들이나 언론에는 가뜩이나 복잡해보이는 재판절차를 더욱 당황스러운 것으로 만들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중들은 이번 재판에서 모든 혐의들이 논의될 것 같은 인상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첫번째 소 재판은 매우 제한된 주제만 다룬다." |
첫번째 소 재판이 제한된 혐의만을 다루긴 하지만, '공동검사들'은 하루와 반나절을 할애하여 크메르루주 정권의 작학성과 공포에 관해 그 개요를 설명하는 개정연설을 했다.
영국인인 앤드류 케일리(Andrew Cayley) 국제 공동검사는 자신의 결론을 통해, 이제든 나이가 든 이들 세 피고인들이 제네바에서 평양에 이르기까지 수백만명의 유혈 도륙을 자랑하면서 국제사회에 자신들의 행동을 변호했었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다.
"[피고인들은] 캄보디아의 한 세대 전체를에 대한 공동 살인자들이다. 그들은 수십년간의 발전과 번영을 강도질했고, 모든 가정마다 깊은 간극의 구멍을 남겼다. 이들 노인 3인이 행한 일로 하여 상처받지 않고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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