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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S] ‘나는 400승 투수 김경홍이다.’기사입력 2011-09-16 13:54 |최종수정 2011-09-16 17:31
“일본 프로야구사에서 영원히 깨지기 어려운 대기록은 두 개뿐이다.” 지난 6월 16일이었다. 일본 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 오치아이 히로미쓰 감독은 팀의 마무리 투수 이와세 히토끼가 일본 개인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인 287세이브를 거두자 그같이 말했다. 그가 말한 ‘영원히 깨지기 어려운 두 개뿐인 대기록’ 가운데 하나는 오 사다하루(중국명 : 왕정치)의 개인통산 868홈런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무엇이었을까. 바로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 김경홍)의 개인통산 400승이었다. 과장이 아니다. 평생 868개의 홈런을 치려면 20년간 40홈런 이상씩을 해마다 때려야 한다. 같은 의미로 400승을 거두려면 20년 동안 해마다 20승을 기록해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두 기록 가운데 무엇이 더 달성하기 어려울까. 대부분의 일본 야구 관계자들은 후자를 꼽는다. 이유가 있다. 오의 홈런은 당시 요미우리의 홈구장이었던 고라쿠엔 구장의 덕을 자주 봤다. 홈플레이트에서 우측 펜스까지의 거리가 90m에 불과했다. 왼손 타자였던 오는 대부분의 홈런을 당겨쳐 우측 펜스 뒤로 넘겼다. 여기다 오는 현역 시절 보통의 배트보다 반발력이 뛰어난 압축배트를 즐겨 사용했다. 물론 오는 구장과 압축배트 덕을 보지 않았어도 훌륭한 타자였다. 그러나 미 메이저리그는 오의 개인통산 홈런을 세계기록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앞에서 지적한 이유 때문이다. 반면 미 메이저리그는 가네다의 400승 기록은 기꺼이 인정한다. 펜스의 거리는 앞으로 당길 수 있어도 홈플레이트와 마운드까지의 거리 18.44m는 좁힐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네다는 오와는 다르게 주변의 모든 상황이 불리한 가운데서도 400승을 달성했다. 가네다가 데뷔 이후 15년 동안 뛰었던 고쿠테쓰 스왈로스(야쿠르트의 전신)는 약체 가운데 약체였다. 가네다가 입단한 1950년부터 요미우리로 이적하기 전인 1964년까지 고쿠테쓰는 일본시리즈 우승은 고사하고, 리그 우승도 경험하지 못했다. 리그 3위가 최고 성적이었고, 대부분 4위 이하였다. 가네다가 있었기에 그나마 리그 꼴찌를 3번만 경험했을 뿐이었다. 고쿠테쓰 타선의 위압감은 센트럴리그 바닥이었고, 수비 역시 시원치 않았다. 가네다의 기록이 그것을 증명한다. 가네다는 고쿠테쓰 시절 한 시즌 20패 이상을 6번이나 했다. 고쿠테쓰에서 14년 연속 20승을 거뒀지만, 데뷔 이후 15년 연속 두자릿수 패배를 경험한 것도 고쿠테쓰 시절이었다. 1대 0 경기에서 23번이나 완봉승을 거뒀으나, 0대 1 완투 패전이 21번에 달했던 것도 고쿠테쓰 유니폼을 입었을 때였다. 하지만, 홈구장의 짧은 펜스 거리와 타자들의 압축 배트 그리고 약팀의 숙명을 떠안은 가운데서도 가네다는 14년 연속 20승을 돌파했다. 더 놀라운 건 15년 동안 평균자책이 3점대였던 적이 단 한 시즌뿐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가네다가 4년 연속 330이닝 이상 투구, 20승 이상, 1점대 평균자책, 300탈삼진, 0점대 WHIP(이닝당 출루허용률) 달성했다는 점이다.
가네다는 1965년 일본 최고 인기구단 요미우리로 이적해서야 일본시리즈 우승을 맛봤다. 그가 없었다면 요미우리의 9년 연속 일본시리즈 우승은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가 입단하고 나서 요미우리 선수들이 자신들의 인기가 거품임을 알아차리고, 프로 선수다운 몸 관리와 정신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가네다는 1969년 400승을 따내고서 화려하게 은퇴했다. 그는 마운드 위에서 내려왔지만, 그의 대기록은 여전히 일본 야구계를 관통하고 있다. 그가 세운 통산 400승과 4천490탈삼진은 일본 프로야구 역대 1위이자 메이저리그와 비교해도 역대 다승은 사이 영과 월터 존슨에 이어 3위, 탈삼진도 놀란 라이언, 랜디 존슨, 로저 클레멘스에 이어 4위다. 이 밖에도 그는 최다 완투 365회, 64 1/3이닝 연속 무실점 행진, 노히트노런과 퍼팩트 경기를 한 차례씩 달성했다. 그가 은퇴하고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오른 건 그래서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가네다는 감독으로도 성과를 냈다. 1974년 롯데 오리온즈(지바롯데의 전신) 감독으로 퍼시픽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일궈냈고, 1990년부터 1991년 사이 다시 롯데 감독을 맡아 재능 넘치는 많은 투수를 배출했다. 거짓말 같은 성적과 호방한 인품으로 일본 야구팬의 사랑을 받은 가네다는 현역 시절 ‘가네다 천황’으로 불렸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네다가 구장에 나타나면 선수들은 멀리서, 감독들은 앞까지 조심스럽게 걸어와 머리를 숙인다. 젊은 감독들은 아예 근처에도 오지 못한다. 가네다는 일본에선 일왕보다 사랑받는다는 '미스터 베이스볼' 나가시마 시게오 전 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이 유일하게 머리를 숙이는 선배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 가네다는 한국인이다. 부모가 한국인이고, 자신의 몸속에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그는 귀.화.한 한국인이다. 일본으로 국적을 바꿨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에 올 때마다 어깨를 펴지 못했고, 쏟아지는 비난에 침묵해야 했다. 사실 그는 한 번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공표하지 않았다. 변명도 삼갔다. 그런 그가 최초로 자신이 한국인임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스포츠춘추>는 일본 도쿄에서 가네다를 만나 그의 속내에 귀를 기울였다. 대기록의 사나이였으나, 78년 동안 한국과 일본에서 경계인으로 살았던 한 사내의 이야기를 장시간 들었다. 야구와 인생을 아우르는 그의 이야기는 지금서부터 시작된다.
가네다는 78살의 고령임에도 여전히 정력적이다. 인기 강사인데다 CF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유소년 야구팀을 찾아가 야구 지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빡빡한 일정 탓도 있지만, 그는 여간해선 사람과 만나지 않는다. 특히나 언론 인터뷰는 사절한다. 정직하게 말하면 피하는 게 아니라 언론이 알아서 인터뷰를 요청하지 않는다. 원체 대스타이고,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이인데다 인터뷰 잡기가 어려워 웬만한 방송이나 신문은 가네다 인터뷰를 포기한 지 오래다. 그런 와중에 <스포츠춘추>가 가네다를 인터뷰할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가네다 측은 “여태껏 한국 기자와 정식으로 인터뷰한 적이 없다”고 했다. 일본 기자와도 몇 년째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 인터뷰도 무산될 게 자명했다. 그러나 장문의 편지를 보낸 이후 가네다 측의 반응이 바뀌었다. 인터뷰를 받아들였고, 인터뷰 장소도 도쿄 시부야의 가네다 사무실로 잡혔다. 이 소식을 안면이 있는 일본 기자에게 전했을 때 그는 깜짝 놀라며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가네다 씨가 갑자기 변한 것 같다”며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가네다와의 인터뷰는 도쿄가 가장 뜨거웠던 8월 말에 시작됐다.
서울에서 왔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더울 텐데 시원한 음료수 한잔하세요. 땀을 식히는 게 우선이오(웃음). 자자, 어서 들어요. 고맙습니다. (음료수를 마시고서) 이런 말씀 드리면 예의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만, 선생님은 사진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정정하십니다. 고맙소. (혼잣말을 하듯) 이제 나도 늙은이지, 늙은이.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래야 인터뷰도 부드러워집니다. 그래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소. (비워진 잔을 보며)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보지요. 참고로 이방에 들어온 기자는 지금껏 아무도 없었소. 천천히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묻도록 해요. “내 원적은 경북 상주” 대투수 가네다 마사이치(한국명 : 김경홍)(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선생님은 일본에서 태어나신 걸로 압니다. 하지만, 선생님 부모님은 한국인으로 압니다만. 아버지? 아니면 어머니? 내 원적은 (한국말로) 경상북도 삼주, 삼주. 경상북도 삼주요? 혹시 상주를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요? (한국말을 최대한 정확하게 발음하려고 노력하며) 그래, 상주. 경상북도 상주. 어머니는 경상북도 대구분이요. 몇 년간 일본 프로야구계를 취재하면서 많은 이를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선생님이 자이니치(재일한국인)라는 걸 아는 이도 있었지만, 순수 일본인으로 아는 이도 적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직접 자이니치임을 공표하신 적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압니다. (눈을 감으며) 과거만 해도 일본에선 한국 출신이라는 게 터부시 돼 왔네. 그래서 내가 자이니치라는 것이 일본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 그래도 지금은 시대가 많이 좋아져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도 괜찮아졌지. 장훈(일본명 : 하리모토 이사오) 선생님을 비롯해 원로 재일교포분들을 뵈면 하나같이 “과거 일본사회에서 자이니치로 산다는 건 외로움과 생존이 위협받는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하더군요. 선생님께서 1933년생이시니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하셨으리라 봅니다. (조용한 어조로) 인종차별, 우린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네. (차 한잔을 마시고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국에서 태어나셔서 한국이 고향이시지만, 나와 형제들은 여기에서 태어났으니까 일본이 고향인 셈이네. 자식들도 다 일본에서 태어나 여기서 결혼해 아기도 낳았으니 일본인이라 볼 수 있지. 하지만, 역시 아버지·어머니의 고향을 중요시해야 하는 것이니까. 선생님 부모님께서 경북 상주를 떠나 일본으로 오신 게 언제인가요. 아마 다이쇼 시대(주 : 大正時代, 일본 연호의 하나로 다이쇼 일왕의 재임기간을 뜻함) 끝날 무렵과 쇼와 시대(昭和時代)가 시작할 무렵이었으니까, 1925년이나 1926년쯤에 일본으로 이주하셨을 걸세. 상주는 곶감을 비롯해 농업으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당시 부모님께서 상주에 사실 때 농사를 짓지 않으셨을까 싶은데요. (한국어로) ‘양반’, 양반이었다고 들었네. 양반 출신이 일본에선 어떤 일을 하셨을까 궁금합니다. 힘든 일을 하셨네. 말하자면 노동일이지. 땅 파고, 강가에서 일하고. 어디 우리 부모님만 그랬겠나. 옛날 분들은 다 그렇게 고생하며 자식들을 키웠어. 선생님의 유년시절도 그리 유복하진 않으셨을 듯합니다. (고개를 흔들며) 힘든 건 없었네. 부모님이 열심히 일하셨거든. 그래서 먹을 것이 없었다거나 입을 게 없었거나 그런 일은 없었네. (부모님이) 매우 좋은 분들이어서 이웃들도 우릴 잘 대해줬어. 운 좋게도 일본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났던 거지. 선생님의 동생 3명도 야구선수로 뛰었다고 들었습니다. 프로야구 A급 정도의 레벨은 아니었고.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자네 지금 호적 조사 나왔나?(웃음). 가족사만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이 많이 지나가니까, 이제 슬슬 야구 이야기로 넘어감세. 고교 2년 중퇴생. 일본 프로야구를 지배하다. 고쿠테쓰 스왈로스 입단 당시의 가네다 야구와는 언제 인연을 맺으셨습니까. 음, 옛날 일본에선 야구를 좋아해도 야구를 하기 어려웠네. 태평양 전쟁 때 그랬지. 왜였는지 아나? 야구가 미국 스포츠였기 때문이야. 일본에선 그 때문에 한동안 야구를 금지했었네. 그래서 소학교(주 : 한국의 초등학교) 때부터 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어. 실제로 야구공을 잡고 선수가 된 건 고교에 입학하고 나서네. 고교 때 야구를 시작한 계기라도 있으셨습니까. 야구선수는 발이 빠르든가, 어깨가 강하다든가, 어쨌든 기본적인 능력이 없으면 안 된다네. 키가 작아도 센스만 있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게 야구야. 나는 센스가 있어서 고 1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네. 사실 고교에 입학하고 야구를 시작했다면 상당히 늦은 나이입니다. 대개는 초교 때나 늦어도 중학교 2학년 이전에 야구선수를 시작하는데요. 고교 2학년을 중퇴하고 프로로 갔으니, 야구한 지 2년 만에 프로 무대를 밟은 셈이군(웃음). 선생님은 남보다 늦게 선수생활을 시작했지만, 실력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셨습니다. 전국고등학교 야구선수권대회(여름 고시엔)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셨고요. 1949년이었을 거야. 그때 여름 고시엔에 출전한 적이 있다네. 하지만, 당시 난 팀의 에이스는 아니었어. 두 번째 투수였지. 성적은 어땠습니까. 1학년 땐 준준결승인가까지 올라갔을 거야. 하지만, 2학년 땐 예선에서 떨어졌네. (회한이 가득한 목소리로) 지금은 전부 추억으로 남아있지. 고 1때부터 포지션이 투수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그랬지. 고 2때 여름 고시엔에서 학교가 예선 탈락하자 바로 프로팀인 고쿠테쓰 스왈로스에 입단하셨습니다. 그즈음 대학에서도 선생님을 영입하려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이었네. 모든 구단이 나를 스카우트하려고 학교로 찾아올 때 대학에서도 날 데려가겠다고 난리였어. 와세다대학교는 “등록금도 낼 필요 없으니까 자네가 꼭 우리 학교에 와줬으면 좋겠네”라고 했다네. 와세다대라면 차후 야구선수로 실패해도 일본 사회에서 “엘리트” 소릴 들으며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는 명문대입니다. 그래서 당시 와세다대는 많은 고교야구선수가 꿈꾸는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어째서 와세다대에 입학하지 않고 고교 중퇴 후 프로팀 고쿠데쓰 스왈로스에 입단하신 겁니까. 이유야 간단했어. 돈 벌려고 갔네(웃음). 농담 같나?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일세. 고교 중퇴하고 프로로 간 건 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서였어. 빨리 돈을 벌어 아버지, 어머니를 편하게 해 드리고 싶었거든. (차 한잔을 마시고서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가네다 야구는 곧 돈 벌기 위한 야구였네(웃음). 계약금은 두둑이 받으셨습니까. 많이 받은 편이야. 당시로선 신인 계약금으로선 최고대우였으니까. 당시 고쿠테쓰는 그리 강한 팀이 아니었습니다. 재정이 풍부한 회사도 아니었고요. 요미우리 자이언츠, 한신 타이거스 등 명문 인기구단에 입단하지 않고, 고쿠테쓰를 선택한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손으로 기자를 가리키며) 인간관계, 다시 말해 인연 때문이었네. 오늘 다른 사람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겠지만, 자네와 내가 이 자리에서 만나는 것도 인연이기 때문이네. 우리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누구도 들어오지 못한 이 방에 자네가 들어온 걸세. 인연이란 그만큼 소중하고 중요한 거야. 가네다의 현역 시절과 감독 시절의 진솔한 면모를 보여주는 동영상 긴장이라, 글쎄. 나는 프로에 들어가면서 그렇게 마음먹었네. ‘야구는 이기면 되는 것’이라고. 야구는 이론적으로나 논리론 설명할 수 없는 대상이야. 나이가 많든 적든, 아마추어든 프로든 이기면 그만인 거야. 그래서 부담 같은 건 별로 느끼지 못했네. 혹시 데뷔전 기억나십니까. (잠시 생각에 잠기며) 하도 오래전이라 잘 기억이 나질 않네. 확실한 건 데뷔 경기에서 패전투수가 됐다는 걸세. 맞습니다. 1950년 8월 23일 히로시마 카프전에 구원투수로 등판해 밀어내기 볼넷으로 끝내기 패배를 당하셨습니다. 그렇지. 사요나라 게임으로 졌어. 당시 기분이 어떠하셨을까 궁금합니다. 그거야 물어보나 마나 아니겠어?(웃음). 그래도 야구에서 이기고 지는 건 매일 있는 일이니까. 내가 데뷔할 때 원체 시끄럽고, 말하자면 각광을 받은 상태에서 프로에 입문했었기에 내 데뷔전 패배가 꽤 화제가 됐었네. 하지만, 두 번째 등판 경기에선 승리투수가 되셨습니다. 그것도 완투승으로 데뷔 첫승을 장식했습니다. 당시 일본 프로야구 역대 2번째에 해당하는 최연소(17살) 데뷔 완투승이었습니다. 그래, 이겼어. 참,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군.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던졌던 기억이 나네.
더 놀라운 건 데뷔 2년째였습니다. 1951년 9월 5일 한신과의 경기에서 노히트노런 기록을 세우셨습니다. 18살 35일 만의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연소 노히트노런 기록이었습니다. 게다가 이해 처음으로 20승 고지(22승)에 오르셨습니다. (손으로 옆에 있는 장식장을 가리키며) 저기에 당시 노히트노런을 달성하고 받은 트로피가 있네. (장식장으로 다가서 트로피를 발견하곤) 아, 이겁니까. 괜찮아. 가져와 봐도 되네. 정확히 60년 전의 트로피구먼. 트로피를 잘 보면 알겠지만, 여기 투수상(像)이 오른손 투수네. 왼손 투수가 처음으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다 보니 왼손 투수용 트로피를 준비하지 못한 게지. 당시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라, 물자도 태부족했어. 그래 왼손투수용 트로피를 받아야 하는데 오른손 투수용 트로피를 받은 걸세. 그로부터 6년 뒤인 1957년 8월 21일엔 주니치 드래건스를 상대로 퍼팩트게임을 달성하셨습니다. (노히트노런 트로피를 흔들며) 그래, 이거 받고 6년 뒤에 달성했어. 투수에게 퍼팩트게임처럼 경이로운 대기록이 있을까 싶습니다. 한국 프로야구에선 아직 퍼팩트게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는데요. 참, 어려운 일이야. 정말 힘든 대기록일세. 퍼팩트게임을 달성하셨을 때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퍼팩트게임은 말 그대로 ‘퍼팩트’니까 할 이야기가 없네(웃음). 그렇군요. 일본 야구팬들이야, 잘 아는 이야기니까 흥미있어하겠지. 하지만, 한국분들은 낯선 이야기니까. 그리고 퍼팩트게임을 글로 써서 하는 건 재미가 없을 거야. 술 마시면서 사람들을 상대로 하나의 스토리로 이야기해줘야 말하는 사람도 흥이 나고, 듣는 사람도 재밌을 걸세. 퍼팩트게임 달성 직전에 큰 소동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9회 1사에서 체크 스윙 판정을 두고 주니치 측에서 심판진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바람에 경기가 40분간 중단되지 않았습니까. 정확히 45분이었다네. 보통 사람 같았으면 45분이나 쉬고 던지라고 했으면 못 던졌겠지. 나니까 던진 거야(웃음). 어떤 마음가짐으로 다시 마운드에 오르신 겁니까. 간단하네. 우리는 어떤 상황이라도 해야겠다 싶으면 꼭 하고 마네. 45분을 쉬고 마운드에 섰으니 어깨가 식었겠지. 그러나 (손으로 가슴을 누르며) 여기에서 뛰는 투쟁심만은 절대 식지 않았어. 항의가 끝나고 경기가 재개됐을 때 나머지 2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처리했네. 14년 연속 45경기 이상 등판, 300이닝 이상 투구, 20승 이상 가네다는 일본 야구계에서 '가네다 천왕'이라 불렸다. 마운드 위에선 일왕보다 더 막강한 힘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1951년부터 1964년까지 14년 연속 20승 이상을 거두셨습니다. 여기다 14년 연속 45경기 이상 등판과 300이닝 이상 투구 그리고 14완투승을 기록하셨는데요. 내가 세계기록 많이 갖고 있지(웃음). 외람된 말입니다만, 과연 사람이 달성할 수 있는 기록인가 싶습니다. 비즈니스지. 비즈니스요? 그렇다네. 잘 들어보게. 난 “20승 했으니까 얼마 주시오”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네. 프로야구는 비즈니스기 때문에 구단에 “20승 할 테니까 얼마 주시오. 못하면 깎고”하는 거야. 지금 일본 프로선수들은 “20승 했으니까 얼마 주시오”하더군. 만약 당시 내가 30승 달성을 전제로 계약했다면 난 정말 30승을 했을 걸세. 그래선지 계약 때 구단과 싸운 적이 없어. (한국말로) 신용, 전부 신용이었지. 정말이야. 구단과 내가 연봉을 깎거나 얼굴을 붉힌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번 말한 것에 대해 신용을 지켜서 달성하면 받는 것이고, 못 하면 못 받는 게 바로 프로일세. 14년 연속 20승 이상을 거두셨으니 연봉이 꽤 높았을 듯합니다. 그때 당시에 억(億)을 돌파했으니까. 지금으로 따지면 얼만지는 모르겠군. 그런데 그때 받은 돈은 지금 다 써버렸어(웃음). 선생님의 야구인생을 돌아보면 참 극적인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1958년 4월 5일 센트럴리그 개막전에서 거물 신인이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나가시마 시게오와의 맞대결은 지금도 일본 야구계에 회자하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당시 ‘나가시마가 가네다를 누를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반면에 선생님은 “나가시마를 4번 모두 삼진으로 처리하겠다”고 공언하셨습니다. 결과는 후자였습니다. 선생님께서 당대 최고의 스타 나가시마를 4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웠습니다. 당연한 게 아닌가. 나가시마가 프로에 입문했을 때 난 벌써 180승을 올리고 있었다네. (한쪽 벽면에 걸린 당시 사진을 가리키며) 저기 사진 있구먼. 당시 현장에 있었던 일본 야구인들은 “가네다가 강속구로만 나가시마를 상대했다”고 하더군요. 그때 공이 빨랐어. 왠지 아나? 원래 공이 빠르지 않으셨습니까. 나가시마와 상대할 땐 더 빨랐어. 바로 마음으로 던졌기 때문이네. 마음으로요?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까. 그건 이론이 아니야. (목소리에 힘을 주며) 무조건 이겨야 하는 거야. 전력투구, ‘어디로 던질까’가 아니라 정면으로 붙어서 ‘반드시 너를 잡겠다’는 일념으로 내가 가진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던지는 거야. 만약 내가 그때 나가시마한테 두들겨 맞았다면 14년 연속 20승은 없었을 걸세. 이겼으니까 여기까지 온걸세.
나가시마의 대결 영상 스피드는 제법 나온 것 같은데, 시속 160km 혹은 170km를 던지면 몸이 망가진다네. 뚱뚱하면 공을 제대로 던질 수 없어. 체중을 가볍게 해서 공을 ‘팍’하고 던져야지. 벽에 걸려 있는 사진들을 보라고. 봐서 알겠지만, 내가 살쪘었던 사진을 찾을 수 없을 걸세. 선생님의 속구만큼이나 변화구도 일품이었다고 하더군요. 난 주로 속구와 커브만 던졌네. 전성기 때 구종은 두 가지였지만, 같은 커브라도 다양하게 던졌지. (벽에 걸린 사진을 훑어보다가 문득 생각나서) 당대 최고의 메이저리거들과 기념사진을 찍으셨습니다. 미키 맨틀, 윌리 메이스, 스탠 뮤지얼 등 정말 최고의 스타들인데요. 메이저리그에 가면 다들 날 알지. 저 친구 중에 나한테 3연속 삼진을 당한 이도 있어(웃음)(주 : 1955년 뉴욕 양키스가 일본에 친선경기를 위해 왔을 때 가네다는 맨틀을 상대로 3연타석 삼진을 잡았다. 맨틀은 "저런 투수가 왜 일본에 있는지 모르겠다"며 구단에 "당장 미국으로 데려왔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때까지 가네다의 국적은 한국이었고, 최전성기를 그는 한국인으로 살았다. 훗날 맨틀과 가네다는 절친한 사이가 된다) 말이 나온 김에 여쭤보려고 합니다. 혹시 메이저리그팀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은 적은 없으신가요. 꼬셨지. 게네들(메이저리그 구단들)이. 하지만, 요즘 같은 때가 아니었어. 전쟁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과 일본의 국교 문제도 걸려 있었고, 내가 영어를 아는 것도 아니었네. 그래서 메이저리그 진출을 포기하셨습니까. 솔직히 ‘뭐 하러 가나?’ 싶기도 했다네. 물론 가고 싶으면 가면 됐겠지. 그러나 일본 프로야구에서 계속 뛰면 아무도 흉내 내기 어려운 대기록을 세울 수 있지만, 미국에 가면 ‘아, 일본 선수가 왔구나’ 하는 정도로만 끝날 수도 있는 일이었네. 저 트로피와 사진들을 보라고. 저것들은 내가 죽어도 다 남는 것들일세. 만약 요즘 같은 시대에 야구를 하셨다면 메이저리그에 도전장을 내셨을까 궁금합니다. 요즘 같으면…글쎄, 어디에 가도 야구는 강한 사람이 이기는 법일세.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일본에 남나 미국에 가나 다 똑같다고 보네. 물론 미국에 가도 성공을 못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봐. 어차피 아시아인이나 미국인이나 같은 인간일 뿐 다른 건 없으니까. ‘요미우리 킬러’, 요미우리로 이적하다. 가네다 마사이치처럼 당찬 자신감으로 정면승부를 펼쳤던 최동원. 최동원과 김시진의 양자 제의설은 과장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가네다는 최동원은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 야구계에도 선생님처럼 배짱과 자신감으로 ‘칠 테면 치라’는 식으로 타자를 상대했던 투수가 있습니다. 혹여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최동원’이란 투수가 있었는데요.(주 : 인터뷰 당시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은 작고하기 전이었다) 1970년대 후반 선생님께서 최동원과 김시진(넥센 감독)의 뛰어난 기량에 탄복해 ‘양자로 입적해서라도 꼭 키워보고 싶다’는 뜻을 내비치신 걸로 압니다. (고개를 갸웃하며) 양자?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모르겠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나 싶군. 안경 쓴 선수는 기억이 나네만, 내가 양자 입적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은 없네. 물론 지금도 한국의 유망주들이 내게 온다면 노하우를 알려줄 용의와 진정은 있네. 투구폼만 봐도 한눈에 ‘좋아질까, 아닐까’ 정도는 알 수 있으니까. 만약 노하우를 전수하신다면 어떤 말씀을 들려주실 건가요. 한가지 얘기하자면, 요즘 젊은이들은 꼭 알아둘 게 있어. 그건 시속 150km의 강속구를 던지려면 몸에 150km를 던지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걸세. 마쓰자카 다이스케(보스턴)가 전형적인 예야. 그 친구는 공은 빠르게 던지지만, 점점 뚱뚱해져 버렸어. 뚱뚱한 몸으로 이전과 같은 구속의 강속구를 던지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 타박상을 입게 되지. 던지는 순간, 몸이 타박상을 입게 돼. 왜냐? 무리를 하게 되니까. 무리하니까 부상도 당하고, 골절도 되는 거야. 몸 관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네. 고쿠테쓰에 뛰실 때 ‘요미우리 킬러’로 유명하셨습니다. 그도 그럴 게 1964년까지 고쿠테쓰에서 기록한 353승 가운데 요미우리를 상대로 무려 65승을 거두셨습니다. 그랬지. 자네 조사 많이 했구먼(웃음). 특별히 요미우리에 강하셨던 이유가 있습니까. 이유? 요미우리가 TV에 가장 많이 나왔잖나(웃음). 요미우리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각별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1965년 바로 그 요미우리로 이적하셨습니다. 당시 일부에선 “가네다가 약체 고쿠테쓰가 싫어 강팀 요미우리로 갔다”고 평하기도 했는데요. 사실 내가 고쿠테쓰를 떠나 1965년 요미우리로 간 건 고쿠테쓰가 싫어서가 아니었어. 반대였다네. 고쿠테쓰가 돈이 없어 다른 회사로 넘어가면서 요미우리로 갈 수밖에 없던 걸세.
요미우미로 이적했을 때 당시 자이언츠 사령탑이던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이 누구보다 선생님을 반겼다고 합니다. “젊은 선수들이 대투수 가네다를 보고 배우길 원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그건 전부 맞는 말이야. 내가 요미우리에 입단하고, 하나씩 하나씩 시스템이 다 바뀌어 나갔네. 선수들 전부가 잘 먹고, 잘 쉬면서 몸이 중요하다는 걸 자각하게 됐네. 그래 선수들 스스로 몸을 절제하게 됐지. 자네와 난 유교 정신의 한국사람들이니까 다 알겠지만, 우리 몸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일세. 그래서 운동을 할 수 있는 거야. 자기가 잘나서 야구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일세. ‘가네다의 야구’란 부모로부터 좋은 몸을 물려받아서 그걸 잠시 내가 맡고, 그 몸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운동을 하는 것이었네. 생각해보게. 부모들이 우릴 키울 때 목숨을 걸지 않나. 목숨 걸고 우릴 먹어주고 재워주지 않느냐고. 보라고. 항상 한국 부모들은 자식 얼굴만 보면 “밥 먹었니”하고 묻지 않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경기에 나가서도 이길 수 있는 걸세. 요미우리 선수들에게 그런 식으로 ‘몸 관리’를 강조하신 겁니까. 그랬지. 자기들이 똑똑해서 야구 잘한다고 생각하는 애들은 오래 못 가. 부모에게서 몸을 빌렸다고 생각하고, 잘 먹고, 잘 쉬고, 몸을 절제하고, 죽을 정도로 러닝을 해야 성공할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요미우리가 변한 거네. 선생님의 몸 관리에 대해선 유명한 일화들이 많더군요. 벤치 크리어닝 때도 왼팔을 보호하려고 수건을 왼팔에 ‘둘둘’ 만 채로 뛰쳐나갔다고 하더군요. 그뿐이 아니야. 뭐든지 왼팔은 쓰지 않았어. 아들을 안을 때도 오른팔로만 안았다네. 감독일 때 난투극이 벌어지면 “와!”하고 뛰어나갔지, 선수 때는 그러질 않았어. 화가 나도 손이 아니라 발로 찼지(웃음). 현역 시절 “식사도 훈련의 일환”이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만큼 식습관을 중요하게 생각하신 듯합니다. 프로 선수는 잘 먹는 것에 그쳐선 안 돼. 좋은 음식을 가려 먹을 줄 알아야 하네. 삼계탕을 무척 좋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국말로) 삼계탕? 좋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면 맛난 걸 많이 먹을 수 있네(웃음). (아련한 눈빛으로) 우리 어머니가 만드신 삼계탕은 서울 시내서 파는 삼계탕과는 비교가 안 됐네. 우리 엄마가 만든 삼계탕이 최고였지. 몸 관리에 철저하셨고, 한 끼 식사도 허투루 드시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가네다식의 강훈’이 가능했던 게 아닌가 싶군요. 현역 시절 ‘연습 기계’, ‘연습 벌레’로 통하셨던데요. 프로 선수가 혹독하게 연습하는 건 당연한 걸세. 좀 깊은 이야기인데, 요즘 선수들도 연습의 중요성은 잘 알고 있네. 하지만, 운동 마치고 해야 하는 ‘애프터 케어(사후 관리, After-Care)’엔 서툴러. (혀를 차며) 애프터 케어를 마사지 받는 걸로 착각하는 선수도 있네. 하지만, 진정한 애프터 케어는 식사부터 휴식 등 생활습관 전반을 관리하는 걸 말하네. 자기가 힘쓴 것에 비해 몇십 배의 공을 들여 몸을 관리해야 하네. 왜 그래야 하는지 아나? 알려주십시오. 연습은 최고의 컨디션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야. 그토록 철저히 자신의 몸을 관리하는 선수가 과연 얼마나 될까 의문스럽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선생님의 몸 관리를 따라 하던 많은 선수가 중도에 포기한 게 아닌가 싶군요. 다들 그랬어. 처음엔 의욕을 갖고 따라 하다가 다 포기했네. 그런 의미에서 모국의 젊은 야구선수들에게 들려줄 조언이 있으시리라 봅니다. 말로 표현하긴 어렵데…. 예를 들어 같은 거리를 달려도 특급 선수와 B급 선수는 달리는 내용 자체가 다르네. 톱 레벨의 선수가 되려면 다른 선수들과 같은 훈련을 해선 안 되네. 정말 죽을 각오로 연습하지 않으면, 그러면서도 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단호한 어조로) 톱 레벨의 선수가 될 수 없어. 한국인은 분명히 저력이 있으니까, 그 저력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키워나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네. 최초로 밝히는 '일본 프로야구의 사이 영' 가네다가 귀화한 이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강타자 스탠 뮤지얼과 함께 찍은 사진. 뮤지얼은 가네다에게 "미국에 와도 15승 이상은 할 수 있을 것"이라며 빅리그행을 강권했다. 미국에선 가네다를 '일본의 사이 영'이라고 부른다. 과거 한국에 자주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요즘은 어떠신가요. 두달 전 한국에 왔었네. 롯데 회장님과 식사를 함께했어. 선생님께 한국은 모국이자 낯선 나라고, 애착이 가는 반면 상처로도 기억되는 나라가 아닐까 싶습니다. 재미난 이야기 하나 들려줌세. 옛날이야기네만, 야구 때문에 한국에 온 적이 있네. 방한 인원 가운데 일본으로 귀화한 이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었다네. 그런데 내겐 일본으로 귀화했다는 이유로 다 주는 흔한 꽃다발 하나 주지 않더군. 나는 엄연히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신문엔 일본인으로 소개까지 됐었네. 내게 모국, 한국은 한때 그런 나라였네. 어느 원로 야구인이 그러시더군요. “그때 이후로 가네다 씨가 한국 야구계를 찾지 않는다”고요. (손을 가로 저으며) 그건 아닐세. 이 이야기를 한 건 하나의 추억거리로 한 것뿐일세. 나는 일본인의 프라이드가 뭔지 아네. 같은 의미로 아버지·어머니의 프라이드도 잘 아네. 왜 “악! 악!”하는 게 있지 않나.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나도 한·일전이 열리면 성격이 있기 때문에 “악!”해서 이겼으면 하는 마음이 있네. 음. 부모님 고향이 경상북도 상주와 대구이고, 내 몸엔 그 피가 흐르고 있네. 가족, 유교문화, 한국의 친절하고 부드러움은 언제나 내 눈엔 반갑고 고마운 것들일세. 그래서 한국에 올 때마다 정을 느끼네. 일본에 살면서 몇 가지 한국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면. 네. 한국은 예의를 중시하는 나라일세. 그런 장점을 성장시켜야 하네. 그런데 요즘 한국을 보면 돈 좀 벌었다고 거만해지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아. 사람은 아무리 훌륭해도, 다른 사람과 다 똑같은 거야. 옛날에 말일세. 지금은 삼성 오너가 된 이건희 회장이 와세다대에 다닐 때였네.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왔었네. 그럼 난 늘 “건짱”하고 불렀네. 하지만, 주위에 있는 삼성 관계자들이 “그렇게 부르시면 안 됩니다”하지 뭔가. 나이가 들든, 적든 아니면 돈이 많든, 적든 사람은 다 똑같아. 그걸 보고 한국 시스템에 매우 실망했었다네. 물론 이 회장은 인격적으로 훌륭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어. 롯데 신격호 명예회장 같으신 분을 보게. 절대 그런 법이 없어. 늘 누가 됐든 존중해주고, 예를 지킨다고. 지금이야 달라졌겠지만, 돈 있는 사람과 돈 없는 사람끼리 나뉘고, 그 부류의 사람들끼리만 뭉쳐선 절대 안 되네. 전부 하나가 돼야 나라도 부강하고, 야구도 마찬가지로 더 성장할 수 있다네. 그래서 더 하는 말인데. 네, 계속 말씀하시지요. 내 몸에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한국 선수들은 군대도 다녀오고 무엇보다 엄청난 파워를 갖고 있네. 세계야구를 제패할 능력이 있다는 뜻일세. 체력도 좋고, 하기만 하면 되는데 간혹 게으름을 피우는 게 문제네. 조금 아프면 아프다고 빠지고, 뭐가 무섭다고 가버리고. 기본적으로 몸이 좋으니까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올 텐데, 물론 좋은 선수들도 많지만 말이야. 그런데 (가슴을 치며) 마음은 아니야. 그런 패턴을 계속 유지하면 일본에 와서도 성공할 수 없네. 그저 ‘양반’이 돼버리는 거야. 그걸 고치지 않으면 일본 프로야구에서 성공하기 어렵네. (혼잣말을 하듯) 더 좋은 선수들이 나와야 기쁘고 그럴 텐데…. 귀화는 언제 하셨습니까. 프로 선수가 되고도 한참 있다 했네. (담담한 목소리로) 나는 자의가 아니었네…. 일본 정부에서 귀화를 시킨 걸세. 일본 법무성에서 찾아와 “귀화를 하라”고 재촉했지. 심사 없이 바로 귀화를 진행하더군. “야구는 보물, 그 보물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다.” 일본 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가네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1969년 10월 10일.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고 개인통산 400승을 달성하셨습니다. 공교롭게도 상대는 퍼팩트게임의 희생양이었던 주니치였습니다. 롯데 오리온스(지바롯데의 전신) 감독 시절 처음으로 일본시리즈 우승을 맛봤을 때도 상대는 주니치였는데요. 수많은 대기록을 세우고 그해 은퇴를 선언하셨습니다. 비교적 이른 나이, 34살에 그만뒀지. 19년 2개월간 마운드 위에 있었네. 더 현역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연봉이 비싸다 보니 그만둘 수밖에 없었어. 조금 몸값을 내리더라도 더 현역으로 뛰셨다면 어땠을까요. 바보인가. 프라이드가 있지(웃음). 19년 2개월간의 현역 생활 동안 가장 보람 있던 순간 있다면 언제였을까요. 한 번도 연봉이 내려간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일본 야구계에선 그런 일이 없을 걸세. 나와 나가시마 시게오를 제외하곤 말이야. 선수와 현역 시절 포함 8번의 퇴장 명령을 받았습니다. 역동적인 야구인생만큼이나 풍파도 심했는데요. 퇴장, 많았지. 하지만, 그것도 다 돈벌이야(웃음). 한국 야구계를 다시 방문하시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장훈이 있잖은가. 재일교포 가운데 타자는 장훈, 투수는 선생님 아닙니까. (눈을 가늘게 뜨며) 다시 한국에 찾아갈 날이 있으면 오겠지. 오늘같이 기념적인 날이 다시 올거네. 한국 야구는 직접 보신 적이 있으세요? 한국에서 야구를 본 적이 있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선수를 본 것이었어. 난 야구 센스를 가진 선수들을 보면 희열을 느낀다네. (강한 어조로) 한국인은 무한한 파워가 있다네. 한국의 젊은 선수들은 그걸 잘 몰라. 과연 그런 선수들이 가네다식 연습을 견딜 수 있겠는가. 아마 괴로울 거야. 그래도 한국엔 뛰어난 선수들이 많아. 중국 야구도 급성장하고 있으니, 한국이 더 분발해줬으면 싶네.
한국과 일본 야구의 미래, 어떻게 보십니까. 일본은 고교야구팀이 매우 많아. 기반이 안정돼 있어 쉽게 내려가진 않을 거야. 한국은 고교야구팀이 얼마나 되나? 53개교입니다. 53개라, 그럼 젊은 친구들이 살아갈 수 있게끔 더 정성껏 지도하여야 하네. 언제 기회가 된다면 그 젊은 친구들에게 선생님께서 직접 조언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전엔 나한테 그런 요청이 안 왔었네. 지금은 시대가 변했겠지. 만약 기회가 온다면 조언을 들려주고 싶네. 내가 어드바이스를 하면 꼭 클 거야. 암, 그렇고 말고(웃음). 한국의 젊은 야구팬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말은 필요 없고, 내 좌우명을 들려주고 싶네. ‘절대 포기하지 마라. 끝나지 않으면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다시 말해 ‘네버 기브업(Never Give up)!’이야. 경기 중엔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싸워야 해. 자신의 스타일로, 자신의 길로 싸우는 것이고, 자신을 믿는 거야.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누군가에게 기대지 말고, 1회부터 9회까지 ‘쭉’ 가는 거야. 야구를 보라고. 9회까지 130구 정도만 던지면 끝나는 걸세. 인생도 똑같아. 자신을 믿게나. 자신을!
보물일세. 보물이요? 보물은 계속 닦지 않으면 안 되네. 그래서 난 ‘보물’이라는 야구를 지금도 갈고 닦으면서 야구를 아이들에게 전달하고 있네. 시대가 지나면 그 보물이 결국, 아이들의 것이 될 테니까. (기자를 바라보며) 아, 자네. 네. 상주는 좋은 곳인가? 아주 좋은 곳입니다. 공기도 맑고, 인심도 후한 곳이지요. 상주에 한번 갈 테니까 그때 자네가 안내 좀 해주게. 상주를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한국 TV 역사물에 배경으로 자주 나오더군. (고갤 돌려 창문을 바라보며) 상주는 한번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20시즌 동안 944경기 등판, 5526 2/3이닝, 400승 298패 승률 5할7푼3리, 4천490탈삼진, 평균자책 2.34, whip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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