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하늘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
돌아가는 삼각지, 빠삭한 삶의 길
권순진(시인)
안용태 시인과 알고 지낸지 십수년이다. 나 자신 시를 쓸 의사도 능력도 없이 우연한 계기로 어찌어찌하여 <詩하늘>이란 문학운동모임에 가담한 게 인연의 고리였고 시작이었다. 그때 안용태 시인은 막 등단이란 관문을 통과하여 시를 향한 부푼 설렘이 그의 가슴 밖으로도 삐져나오는 게 보일 정도였고, 나는 뭣도 모르고 그런 시인이 마냥 부럽고 우러러 보이기만 했던 시기였다. 그러니까 안용태의 시 이력은 그 무렵을 기산점으로 쳐도 14년은 거뜬히 넘는다는 계산이다.
그리고서 이번이 첫 시집이다. 그만큼 곰삭고 충분히 숙성된 시집이라고 입에 침을 바르고 말하고 싶으나 솔직히 많이 게을렀다. 하지만 그 게으름은 전적으로 시인의 삶의 태도와 방식에 기인한다. 일이년에 시집 한 권씩 뚝딱 묶어내는 시인들의 재바름이나 걸쩍거림을 그는 하나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시보다 존재로서의 삶 자체가 더 소중하므로 그 삶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얼핏 삶을 돈벌이로만 바꿔 인식할 수도 있겠는데 그게 삶의 전부가 아님은 내 옆집에 사는 여섯 살 미영이도 안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은 생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경제활동은 안하고 시만 끌어안고도 살 수 있다면 오죽이야 좋을까만, 현실은 그걸로 밥을 벌어먹겠다는 똥배짱을 내밀 처지가 전혀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 꿈과 현실 사이의 가랑이가 찢어지는 건 지당한 노릇이다. 호락호락하지 않는 세상에서 혼신을 다해 밥을 구한다 해도 시원찮은데, 엉거주춤 양다리를 걸치고서야 시가 제대로 되겠냐는 게 안용태 시인의 평소 생각이다. 원칙적으로 시와 돈은 적대관계에 놓여있어 시에 돈이 간섭해서는 곤란하고, 돈에 시가 끼어들어도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봤자 그러한 소신들은 그동안 시에 몰입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변명이자, 나로선 이제야 시집을 묶는 이유를 그럴듯하게 둘러대려는 핑계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 세월 그의 생활 동선을 조금은 아는지라 구차하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분명 그는 시를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고 경배하지만 그렇다고 가족들과 삼시세끼 밥 먹고 사람 도리해가면서 살아가는 생활이 시보다 덜 숭고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생활을 외면하고서 좋은 시가 나올 수 없다는 신념 또한 갖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시와의 처음 맺은 신의를 도무지 저버릴 수 없음이다.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시가 들어앉아 있음을 알기에 마음이 내키면 그들 가운데서 하나씩 건져 올려 툭툭 물기를 털어내곤 했다. 시는 그렇게 삶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에게는 생활이 곧 시이기도 한 것이고, 그것이 시의 도움받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안용태의 시는 자기 삶의 경험에서 양성된 정서를 압축하여 표현한 글이라 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드러내려고 하진 않지만 거기엔 당연히 직업에 따른 독특한 분위기도 배어 있을 것이고 가족에 대한 생각, 우정이나 연애관도 깃들어있다. 그리고 많은 그의 작품이 시를 방해했던 적군인 ‘생활’이 아군으로 전향된 상황에서 나온 소출들이다.
생활의 달인까지는 몰라도 매사에 용의주도하고 빠삭한 그가 시에서는 좀 어수룩하고 유순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결코 튀지 않는 생활 속 시의 질료를 자신의 몸에다 바짝 갖다 대고 쓴 시이기에 솔직하고 투명하다. 그 자신 시를 통해 현실의 팍팍한 삶을 일차적으로 위로받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개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착한 시’ 속에는 시인 자신이 있고, 시인을 위로해주는 감정이 있고 그의 현실이 있다. 그리고 그가 받은 위로는 읽는 이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되고 공감으로 확산된다.
안용태의 시를 읽고 있으면 때로는 신경림 시인의 친근함이 연상되고, 또 때로는 배호의 구성진 노래를 듣는 듯하다. 뭐랄까, 대중적 감성의 대책 없는 젖은 물기가 우리의 마음을 매만지며 파고든다고나 할까. 마음이 모래처럼 서걱거리고 가슴 한 편에 바람이 스치는 날 썼을법한 시인의 시에 내 마음을 포개고 가슴을 맞댄다. 그리고 내 심사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곡조에 잠시나마 무거운 삶의 무게를 내려놓으며 함께 위로 받는다. 그것이 안용태 시를 읽는 유익이고 그의 시가 갖고 있는 미덕이자 매력이다.
내 깜냥으로는 시편을 일일이 예를 들어 평을 하고 해설할 능력이 없기도 하거니와 안용태 시편의 대다수는 친절한 해설이 필요치 않을 만큼 감상에 별 어려움이 없어 얼마든지 독자와의 직거래 소통이 가능한 작품들이다. 따라서 별도의 요식적인 해설을 붙이기가 여간 쑥스럽고 주저되는바 아니지만, 그랬다가는 모처럼의 부탁에 성의가 없다며 가재미눈으로 노려볼까 무서워 남들이 하는 반만큼이나마 그 시늉은 내고자 한다.
시집에는 유년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삶이 정직하게 투영되어 있다. 시인에게 각인된 기억들은 한 편의 시로서는 단편적이고 서정적인 것들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연대기적이고 서사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족사가 드러나 있고 학창시절 친구들이 등장하며 고향 산천의 풍경과 여행의 기억 등 삶을 아우르는 다채로운 소재들이 녹아 있다. 모든 시인들의 공통적인 정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엔 경험 안에 내재된 정신적인 번민과 그늘이 도사리고 있고, 치유의 방식도 함께 제시되어 있다.
“아부지 학급비요”
밥상머리 찔끔거리며 돈 달라는 아이를
묵묵히 바라만 보던 애비 맘 네가 알랑가,
어미는 이고지고 행상 나가고
마른 콩꼬투리 같은 육남매
저들끼리 다독이며 꾸려 가는데
유독 그놈만
눈물콧물 범벅으로 끝내
애비 속 있는 대로 다 뒤집어놓고
밥숟가락 동댕이치고 달아나던 그놈,
회초리로 뒤쫓으면 뛰다 서고 뛰다 서고
못이긴 듯 돌아서면 따라와서 발 구르던 그놈,
아버지,
오늘 그놈이 망아지 같던 그놈이 말이지요,
당신 손자에게 카네이션을 받았지 뭡니까
이 꽃을 저는, 가슴에 달도 못하는 이 꽃을
저는 어쩌란 말입니까
- 「그 놈」전문
체험된 정서와 결합된 언어는 대개가 구체적이다. 체험되지 않은 것은 상상되지 않듯이 구체어의 내면화 없이는 어떤 추상어도 자기의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체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망아지 같던 그놈’은 물론 안용태 시인자신을 일컫는다. ‘그 놈’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준 ‘당신 손자’는 애비 속을 지지리도 썩였던 시인의 어린 시절과는 달리 반듯하게 자라 이제 장가를 들 나이다.
가족제도의 변화에 따른 가정 파괴 및 가족 해체는 이 시대의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다. 우리 문학의 화두가 된 것도 한참 되었고 지금도 끊임없이 현대소설과 시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물론 시인 자신의 집을 내적 소재로 삼은 작품이지만 그런 선상에서의 인식은 아니고 집으로부터 시작해 그의 둘레에 있는 모든 이들과의 관계회복과 소통을 염두에 두고 쓴 시다. 사실 관계복원이라면 가장 으뜸순서에 두어야할 게 가족구성원 간의 도란도란한 의사소통 아니겠는가.
아내가 집을 나갔다
아이가 집을 나갔다
나도 집을 나왔다
이윽고
아무도 없는 빈집에
혼자 집을 보던 집마저
더는 외로워 못 살겠다고 집을 나오자
머물 곳 잃은 해가 눈을 감아 버렸다
온 세상이 깜깜해졌다
- 「가출」전문
여러 부분에서 전통적인 가족문화가 바뀌었고 지금도 그 변화는 빠르게 진행 중이다. 가족이라는 한 울타리에 묶여 있지 않고 각자가 개별화 되어 자기 팔 자기가 흔드는 모습들이다. 가족은 함께 모여 사는 단순한 동거의 개념일 뿐, 구성원 각자가 서로들 제 삶의 페달만 열심히 밟으며 살아간다. 때로는 서로에게 서로는 성가시고 부대끼는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더 이상 순종이나 희생은 없고(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사랑의 불꽃이 꺼지지는 않았다는 사실) 아버지의 위상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과거엔 독립운동에 나선 아버지, 이념과 신념을 위해 가족을 내팽개친 아버지, 가난한 글쟁이 아버지, 농사를 짓거나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에게도 존경의 염을 가졌거나 최소한 연민의 대상이었지만 지금은 어림없다. 아무리 서로 바쁘게 살아가기로서니 아버지가 생각하는 가정은 이런 게 아니었다. 시인은 ‘빈집의 적막강산’을 통해 ‘가족의 풍비박산’을 경고하고 나섰다.
가족문화만 바뀐 게 아니라 놀이문화도 많이 변했다. 시대가 변하면 모든 게 변하기 마련이지만 놀이만큼 크게 변한 것도 없을 것이다. 요즘은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찾으래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공부에 쫓기고, 시간이 난들 PC게임과 스마트폰을 이용해 나 홀로 노는 게 대세다. 그 옛날 밖에 나가 동무들과 뛰어놀던 때와는 판이 완전히 바뀐 전혀 새로운 놀이문화다. 이런 소비 지향적 현대의 놀이문화가 아이들의 사고와 행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는 우려는 오래전부터 제기되어왔다. 그 옛날의 땅따먹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비석치기 등의 놀이는 이제 무형문화재로나 지정되어야할 판이다.
고무줄놀이에 정신 팔려
나팔꽃무늬 나일론치마 속
부끄러움 들켜 버린 아이,
그 아이 나팔꽃으로 주저앉아
닫아 버린 작은 창문은
내가 아무리 까치발을 한다 해도
끝끝내 그 맘 열지 못 하네
바람둥이 나는 언제나
그 아이 중심으로 회오리 쳐 보지만
치솟고 보면 정작
치맛자락 한 번 들춰 보지 못 하고
저 혼자 허공을 떠돌며
보았다보았다 헛소문만 날리네
- 「헛소문」전문
학교 쉬는 시간이면 운동장으로 쪼르르 달려 나가 고무줄놀이에 열중했던 그때 그 계집아이들, 지금은 다들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다리를 쩍쩍 벌려가며 고무줄을 폴짝폴짝 뛰어넘던 그 아이 중에 순이도 있었고 영자도 있었겠다. 그들이 한창 정신 팔려있을 때 연필깎이 칼을 들고 나타나 놀이하는 고무줄을 싹둑 자르고 도망치거나 ‘나팔꽃무늬 나일론치마 속’을 히뜩 들추고 달아난 갑수와 영철이 같은 악동도 반드시 등장했다. 그 가운데 용태가 끼어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바람둥이의 싹수가 그때서부터 무럭무럭 자랐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뭘 보았는지 보지 않았는지 내막은 잘 모르지만 헛소문이라고 하니 그런 줄 알겠다.
무릇 시는 어떠한 경험이나 애착에 의해 생긴 시인의 정서를 다룬다. 그래서 흔히 정조(情操, sentiment)와 강렬한 감정이 동반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절한 그리움 또한 그렇다. 어쩌면 모든 시는 그리움의 정서를 서정의 기축으로 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물에 반응하거나 사물을 집적대거나 마음 안의 갈증을 풀어내거나 간에 시는 그리움이라는 정서적 진자의 움직임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다. 그리고 시인의 경험은 그것이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건 아니면 심리적이며 간접적이건 간에, 독자는 그것을 읽고 시인과 경험을 연대하게 된다.
그 겨울의 황량한 들녘은
바람 부는 쪽으로 해가 기울고
마른 꿀밤잎 서걱이는 날은
끝 모를 무명실에 연을 달아 날렸지
멀어지던 연줄에 편지를 띄우면
답장의 설렘으로 팽팽해지던 연줄,
겨울해는 짧아 어둠은 이내
눈시울을 덥히고
그대모습 연줄 어디쯤에서 끊어졌는지
물레에 감겨오는 연줄은
풀어지는 저녁연기 한 자락인 듯,
돌아오지 않는 답장인 줄 알면서
오늘밤 다시 나는 편지를 쓴다
소식 몰라 미어지던 가슴마저도
겨우내 연 만들어 날리다보면
갈피 속 묻어둔 꽃잎처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바래어가겠지
- 「겨울나기」전문
먼 그리움의 아득한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혀보고자 겨우내 만든 연을 띄운다. ‘돌아오지 않는 답장’인줄 빤히 알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쓸쓸하기 그지없는 겨울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순수하고 애틋한 그리움의 대상이 사랑했던 사람일 수도 있겠고 지금은 소식 끊긴 어릴 적 동무일 수도 있겠다. ‘갈피 속 묻어둔 꽃잎’은 가슴 속 밀실이다. 시인들은 외롭고 쓸쓸하지만 그들이 짓는 시의 집들은 그래도 다 살만한 것들이어야 마땅하다. 비록 그것이 무념무상 달관의 집이거나 허무의 집일지언정 말이다.
시에서는 길을 잃어도 좋다. 시인에게 시와 시적 대상의 완전한 일치란 존재할 수 없다. 기억의 재구성 과정에서 상상력이 개입되고 작동하기도 한다. 그래서 시에는 상상력이 넘쳐흐른다. 하지만 안용태 시의 대부분은 그 경험의 명징한 구체화로 진정성이 두드러지고 서정성이 더욱 빛을 발한다. 특히 ‘보리깜부기’는 개성 있는 언어로 농축된 미적 표현과 음률의 흐트러짐 없는 경쾌함이 전통적 서정시의 아주 좋은 예문을 보는 듯하다. 읽는 이에게 대뇌는 물론 시각, 청각, 촉각 등의 여러 감각에 일제히 자극을 가한다. 시는 그러한 감각이 인지한 세계에 귀의하는 것임을 이 시는 잘 보여주고 있다.
풀잎마저 시름겨운 밭두렁에 누워
짓궂은 형들 장난에 번번이 속아
아스라이 눈 감고 깜부기 입에 물면
보인다는 별은 한 입 먹물로 목 메이고 ,
야윈 등에 질러 맨 헤진 책보 속에
달그락달그락 북받치는 울음,
뻐꾸기는 진종일 하릴없이 울어도
사내는 태어나 세 번만 운단다
이 일은 이, 이 이는 사...
그래도 울컥울컥 목 메이던 시오리
투덜투덜 따라오던 그림자 지우고
어느 듯 산그늘 치마끈 풀어지면
동구밖 도랑가에 쭈그려 앉아
행여 누가 볼세라 눈물자국 닦았지
- 「보리깜부기」전문
시인의 고향은 성주군 벽진면이다. 안태본에 대한 향수, 무한한 자연과 유한한 인생을 대비시켜 유린된 추억을 못내 그리워하고 있다. 고향에 대한 밝고 맑은 감촉보다는 가난의 서러운 아픔이 깊게 배인 회상이다. 하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가난을 이토록 아름답게 회억한다는 의미는 깊게 패인 상처를 들쑤시는 고통의 되새김질이 아니라, 저 동구 밖 도랑가에 나가 ‘저문 강에 삽을 씻는’ 심경으로 지난날의 짓궂은 형들과 흘러간 세월들을 모두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하겠다는 씻김굿의 몸짓이다.
‘효는 인의 근본’이라는 공자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은 부모형제라는 혈연에 뿌리를 둔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이런 감정을 아무런 인연이 없는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넓혀가는 것을 ‘인仁’이라고 한다. 맹자는 사람을 가엽게 여기는 측은지심에서 사랑이 생긴다고 했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慈’는 진정한 우정이며, ‘비悲’는 연민과 상냥함을 뜻한다. 이처럼 동양에서 사랑은 타인을 자신처럼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최초 로 배양된 곳이자 발원지는 역시 어머니라 하겠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연민이 있는 한 ‘인’의 희망도 존재하는 것이다.
지팡이 걸음으로 배꼽마당 까지 배웅 나와
문안인사 올리고 돌아가는 막내아들 손에
무명고쟁이 속주머니 뒤 집어
꼬깃꼬깃 말아 쥔 쌈짓돈을 감추듯 쥐어 주시며
“너 형수 볼라”
살아생전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며
문안인사 따라 온 내 친구 효정이 애비가
이 광경 무심코 바라보고
왈칵, 봇물 같은 울음 내려놓고 말았지요
아들딸 손자손녀 문안 올 때 받은 아껴 모은 용돈
이승에서의 전 재산,
쉰이 넘은 자식을 아직도 막내라서
널 두고 우째 눈 감을꼬,
널 두고 우째, 우째 하시드니
섣달 초이레,
그리 무거운 짐 아직 벗지 못하셨는지
날도 저물기 전 낮달로 와서
메마른 감나무가지 어루만지고 있네요
- 「낮달」전문
어머니를 생각하면 누구나 까닭 없이 목젖이 잠긴다. 까닭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나 명백한 사랑의 시원이고 호흡기이기에 공기처럼 잘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어머니란 존재는 다른 이것저것 재고 생각할 겨를 없이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본디 한 몸이었다가 서로 갈라져 다른 몸이 되었으니 왜 아니 그렇겠는가. 시에서 보듯 시인의 의식 속에는 그 어머니의 동작에서부터 말투 하나까지 모든 것이 각인되어 있다. 이미 타계한지 여러 해가 된 어머니가 낮달로 떠서 마치 살아 현존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한없이 자애로웠던 손길과 나이 쉰을 넘은 막내에 대한 막무가내의 사랑이 사무친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 가장 강열한 기억으로 남는 대목은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라는 말이다. 시는 바로 이 독심술을 가르치는 교재이기도 하다. 문학은 선과 악, 그리고 진실과 거짓을 알게 하는 그릇이며 자신의 삶을 인간답게 고양시킬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인간이 창조한 가장 차원 높은 문화가 예술이라면, 이 예술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갈래가 문학이며, 그 중에서도 시를 문학의 으뜸 자리에 두는 게 통념이다. 시적 사유가 인간이 생각하는 동물임을 극명하게 일깨워주고 있다.
나는 알아
네가 무었을 숨기려 했는지,
네가 내 살 깊은 곳 천연두 흉터를 알듯
나는 네 머리카락 속에 감춰둔 기계충
흔적을 알고 있지, 그래 알아
우린 서로가 무엇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너는 그림을 그리고
나는 시를 쓴다,
순수치 않으면 한 줄도 긋지 못할 일을 하면서
네가 그린 그림에 확대경을 들이 댄다
바늘 같은 솔잎이 대파 굵기로 확대될 때 아!
지난여름 송충이가 스쳐간 솔잎의 상처까지
너는 그려놓았구나
너의 완벽한 그림에 숨은 그림 찾기란
부질없는 일인 줄 알지만 나는 너를 찾고 있다
그래 알아
애당초 너에겐 숨길 그림이 없었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너의 숨은 그림에 집착하고 있다
그 봐, 너의 소나무둥치 속에 숨겨놓은 나이테를,
그건 너도 몰랐을 것이다.
그래 알아, 분별없는 아이가 억지를 부리듯
내가 네 그림을 헤집어 투정하고 있다는 것을
-「숨은 그림 찾기」전문
살다보면 부부사이건 친구관계이든, 또는 직업상 거래로 만나는 경우든 사람과 갈등으로 얽히고 부딪힐 때가 있다. 그럴 때 서로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일단 탐색전부터 벌인다.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리기 보다는 확대경을 들이대며 상대의 단점이나 약점을 먼저 찾아 들추어내기 일쑤다. 서로가 너그러운 마음과 배려하는 마음을 갖는 게 쉽지 않으며, 끝내 평행선으로 갈 데까지 가는 경우도 많다. 마음으로 보지 않고 본능적인 자기 방어 혹은 상대를 욕망의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아내와 자식 등 가족은 안용태 시의 현저한 주요 캐릭터다. 그만큼 그에게 가족은 시를 써온 이래 지속적으로 애환을 함께 해온 시적 공동체가 아닐 수 없다. ‘아내와의 전쟁’등은 아내와의 심상찮은 갈등이 앞모습으로 깔린다. 이 숨은 그림 속의 ‘너’도 어쩌면 아내를 지칭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안용태의 시에 유독 높은 빈도로 등장하는 시어가 ‘부질없음’이나 그와 유사한 단어이다. 그것은 분명히 일보 후퇴를 의미한다. 그저 후퇴가 아니라 사유를 통해 번뇌를 끊겠다는 전언이고, 나아가 제행무상(諸行無常) 즉 생명의 덧없음을 깨닫는 경지를 뜻한다. 그럼에도 이 ‘숨은 그림 찾기’에서는 ‘부질없는 일인 줄 알지만 나는 너를 찾고 있다’고 한다. 멈추지 못하고 포기할 수 없는 집착이 단 하나 있다면 그것은 아마 사랑이리라.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인연과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한다. 불교의 인연설에 의하면 연이 닿는 것을 인연이라 하고 모든 존재는 인연에 의해 생겼다가 인연에 의해 멸한다고 한다. 우리네 인연이란 것도 도무지 예측불허이기에 너무 자신만의 생각을 고집하다 보면 애써 다가온 좋은 인연도 멀어지게 된다. 좋은 인연으로 만났는데 그 인연을 살리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멀게 느껴질 때는 다 그만한 연유가 있게 마련이다. 인연 또한 흐르는 물과 같아서 한 인연 흐르고 나면 또 다른 인연이 다가와 채운다지만 인연의 소멸에 어디 물처럼 무심하기만 하랴.
지금까지 안용태 시인의 시를 듬성듬성 들여다보았다. 인용된 시는 랜덤으로 손에 잡히는 순서에 의한 것이기에 시인의 시세계를 밀도 있게 정리하여 보여주진 못했다. 이밖에도 우리들 눈에는 그저 심드렁하게 보이는 것들을 시인의 혜안으로 건져 올린 수작들이 여러 편 눈이 띄었는데 다 언급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시에서 안용태 시인은 인간적인 소탈함과 넉넉한 품을 가진 사나이라는 느낌을 준다. 드문드문 남성적 호연지기와 끼도 엿보이지만 무엇보다 원칙과 의리를 중히 여기는듯하다. 영판 빠삭한 생활인의 모습이다.
시인들이 펴내는 첫 시집은 자신이 겪어온 삶의 내력을 충실하게 담아내는 이른바 '성장 서사'의 속성을 띄는 경우가 많다. 그 점에서 대개의 첫 시집은 내밀한 서정이 자전적 서사를 아늑하게 감싸는 일종의 서정적 '서사 시집'이다. 하지만 비교적 느지막이 시단에 나온 이들의 경우에는 성장통에 대한 충실한 재현보다는 구체적 경험들로부터 비롯된 인생론적 깨달음이나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반성적 사유를 드러내는 쪽이 더 많다. 안용태 시인의 첫 시집 또한 그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자신이 살아온 삶의 무게와 둘레의 사람들에 대한 일정한 사랑과 그리움을 진중하게 담아내면서, 동시에 삶의 깨달음을 통해 인간적 완성을 갈망하는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나이 든다는 것은 적당한 빈틈을 허용하고 한결 여유로워진다는 것이다. 삶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져 분노하기보다 이해와 관용이 먼저 작동되어야 하는 것이다. 더러 폐기하는 일에 망설임이 없고 적당히 녹슬도록 유기하는 것도 늘그막 삶의 한 방법이다. 시인은 이미 삶에서는 그런 집착과 욕망이 과부하인 것을 눈치 챘다. 물론 지금껏 냅다 달려왔던 속도의 관성이 그에게서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첫 시집 <몽돌>을 내기 전과 그 이후의 삶과 시는 분명히 달라질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생활의 자장 안에만 갇히지 않고 ‘돌아가는 삼각지’처럼 꺾어지는 시의 길을 자주 걷게 될 것이다. <몽돌>은 그 아득한 길을 역동적으로 달려온 시인에게 주어진 보상이자 동시에 시인이 앞으로 보여줄 시세계가 더욱 경쾌하고 활력이 넘치리라는 신표이기도 하다. 이 시집이 많은 독자들과 함께 오래하길 바라며 시인 안용태의 시적 변모를 행복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