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9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히브리서 5:11-6:3
초보에서 교사로
한국의 기독교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 “이승훈”이라는 분이 두 분 있습니다. 한 분은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1864-1930) 선생인데,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장로교 장로인 분입니다. 다른 한분 만천(蔓川)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은 가톨릭 신자로 평택 현감을 지내면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기초를 세운 분입니다. 하지만 이 분은 1791년 신해박해(辛亥迫害, 정조 15년) 때에 배교를 선언하고 목숨을 건졌고, 다시 가톨릭신앙으로 돌아갔다가, 1801년 신유(辛酉)박해(순조1년) 때에 정약종과 함께 참수당한 분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후 조상제사 문제 때문에 수차례박해를 받았고, 이들의 신앙은 언제나 당쟁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가톨릭 이승훈을 연구하는 분들은 언제나 이승훈의 배교와 순교를 두고 어려움을 겪습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전래 초기에 영세를 받은 그는 이후에 조선 안에서 자칭하여 가성직(假聖職)제도를 만들었다가 베이징 주교가 이를 금지할 때도 배교하였고, 여러 차례 가톨릭 추적과 체포 때에 배교를 선언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신유박해 때 순교한 것을 두고 다양한 견해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종교가 발생지를 떠나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어 신자가 생기면, 종교전파와 동시에 신자들의 배교 현상이 동반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새로운 것을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려는 사람과, 반대로 새로운 것을 절대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조선에 들어온 가톨릭이 그런 대접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초기의 기독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는 전도자들의 수고로 로마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유대인에게도 전해지고, 이방인에게도 전파되었습니다. 누구나 아는 대로 그 전파력은 대단하였습니다. 왜냐하면 AD. 64년경부터 시작된 로마의 기독교 박해는 그만큼 기독교가 성장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인 히브리서도 같은 배경에서 읽어야 합니다. 히브리서가 정확히 기록된 연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박해가 시작되기 전이든, 아니면 후이던지 간에 기독교 전파의 속도가 늦어지고, 동시에 기독교에서부터 이탈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과거에 유대교를 믿던 유대인들에게서 이런 현상은 더 심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기록되었고, 로마에 살고 있는 히브리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기록되어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라는 성경은 읽기에 쉬운 성경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앙의 초보자에게는 어려운 성경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초보적인 신앙에서 탈피하는 길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오랜 세월 신앙의 길을 걸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처음에 믿던 것만을 붙들고 있는 신자에게 성장하고 성숙할 것을 권하는 성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구약성경의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는 과정을 가르치는데 중심을 두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옛 약속인 “구약”(舊約)을 아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새로운 약속(新約)인 예수 그리스도의 심오한 교훈을 받들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분별하는 삶을 살라고 말입니다.
초기의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의 유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유대인 출신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의 기초는 알고 있는데, 과거 유대교의 관습이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들입니다. 즉, 전에 매우 익숙하던 신앙적 관습을 버리려고 하니 무언가 아쉽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한 경우입니다. 그래서 유대교 율법규정과 완전히 이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할례나, 정결법이나, 제사에 대한 미련이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혼합적인 신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교 안에 머물러 있지만, 그의 신앙이 아주 기초적인 차원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야 그 믿음이 순수하고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처음 믿음이란 믿음의 명제인데 그 명제만 붙잡고 되 뇌이며 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는 나의 구주”라는 믿음이 처음 믿음인데, 이것만 붙잡고 살면, 겉보기에는 매우 확고한 신앙으로 보이겠지만, 신앙의 세월이 쌓여가면서 성숙해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기도”입니다. 그 사람의 기도를 보면 그의 신앙이 <정체상태>인지 <성장상태>인지 보입니다. 기도는 자기 소원을 이루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변화하는데 그 목표가 있습니다. “저 사람이 변하게 해 달라.”고 아무리 기도해도 “그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바라보는 자기 자신이 변하게 되는 기도가 바로 참된 의미의 기도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와 (2)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3)세례에 대한 가르침과 (4)안수 하는 것과 (5)죽은 사람의 부활과 (6)영원한 심판과 관련해서 또 다시 기초를 놓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히6:1-2)
제가 속으로 참 갑갑하게 여기는 것이,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항상 똑같이 “회개와 부활과 심판” 이야기만 해 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 문제입니다. 매일 그 같은 기초만 반복해서 놓는 것이지요. 기초가 다 되었으면 그 위에 신앙의 집을 지어 나가야 하는데, 왜 그렇게 기초만 다질까요? 혹시라도 교인들이 아직도 기초가 없어서 그럴까요?
1925년생이니까 올 해로 만 97세이신 노 신학자가 있습니다. John B. Cobb(존 캅)이라는 분인데, 이분이 2015년 그러니까 만 90세에 출판한 책이 있습니다. Jesus’ Abba: The God who has not failed(예수의 아바 하나님: 실패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고 번역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서문에서 뜻밖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어릴 때에는 내가 하나님에 대해 믿고 있던 내용이 다른 사람들이 믿고 있는 내용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중략) 오늘날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하나님은 여전히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이제 우리의 문화적 맥락과 잘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서 지난 2000년 동안 변화된 믿음의 양식들을 열거하고,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한 수많은 잘못들, 즉 유대인 박해와 학살, 해외 식민지 정복과 노예장사, 동서 기독교국가간의 냉전, 타종교와의 갈등과 전쟁에 대하여 자신이 90년 살아오는 동안 깨닫게 된 변화를 잔잔하게 서술하였습니다.
오늘 히브리서 성경말씀에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물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젖을 먹고 사는 이는 아직 어린아이 이므로, 올바른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합니다.”(히5:12-13)라는 말씀이 생각나게 되지 않습니까? 예수 믿고 죄를 용서 받아 구원을 얻으며 천국에 가는 것이 믿음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2000년 전 세상이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의 세상이나 신앙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단지 “말세”라는 생각만 들겠지요.
기독교 종주국을 자처하는 나라들 마다 위기에 처한 것은 사실입니다. 유럽이나 미국의 예배당이 팔려서 일반 영업장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 운영이 어려워질 정도로 헌금 또는 종교세가 감소하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입학생도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독일의 경우에도 제가 공부하던 때보다 신학교수의 수가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그때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유럽의 교회가 신앙이 부족해서 망해간다고 보았습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4반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한국교회도 그런 지경에 처하게 될 것은 아무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교회에 젊은 사람이 적습니다. 출생률이 낮아지면서 어린이도 거의 없습니다. 경쟁사회는 자녀들이 신앙생활 하는 것보다는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방향으로 내 몰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세상이 더 좋아지든 아니면 더 나빠지든 세상이 변화하는 문제에 대하여 신앙적인 답변을 즉각 내어 놓는 예언자의 역할을 교회가 상실하고, 2000년 전 세운 신앙의 기초적 명제만 붙들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 개인도 자신의 신앙적 인생을 돌아 보아야합니다. 지난 세월 처음 믿은 신앙에서 나는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생각해 보는 일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여전히 나에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때와 지금은 세상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달라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시는지,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서 나는 어떤 변화를 경험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시산업화의 붐을 타고 성장한 교회는 일거에 개척교회를 중견교회, 대형교회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가르치고 배운 것 역시 “번영신학”과 “기복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교인은 줄고 있고, 개척교회는 자립하기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아직도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저 자기 교회만 잘 버티면 된다는 개(個)교회주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6장에서 로마의 히브리인들에게 권고합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욕되게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초보 신앙에만 머물다가 하나님의 뜻과 세상의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고 타락하면 주님을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신앙의 교사가 다 되었을 만한 시간이 지났다고 말입니다. 복음을 접한 지 어림잡아 30년 정도 지났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초보적인 신앙에 머물러 아직도 남에게 다시 배워야할 처지에 놓여있다고 히브리서는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생각해 보아야하겠습니다. 우리도 개인적인 신앙의 연수가 꽤 되지 않았습니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피조세계가 신음하는 소리를 충분히 듣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응답을 신앙의 토대위에 쌓아가야 할까요?
그러니 이제는 그리스도를 전하는 교사로서 도움이 필요한 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의미를 전해주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6월 2째 주일은 평화목교회 창립 10주년입니다. 저도 우리 교회의 지난 10년간 신앙의 성장이 어떤 모습인지 다시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평화목교우 여러분들은 우리가 함께 동행한 지난 10년의 세월 동안에 우리의 신앙이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여 왔는지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