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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세례요한의 죽음의 역설적인 교훈 (최한나)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19.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20.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21.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 할 새 22.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23.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4.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25.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6.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27.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28.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29.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마가복음 6:17-29 아멘!}
마가복음 6장에서 주의를 끄는 것은 내용전개에서 한 단계씩 점점 더 과거로 내려가다가 다시 한 단계식 현재로 돌아오는 방식을 취한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전에 헤롯이 …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며, 여기서부터 침례 요한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14-16절은 이 이야기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침례 요한을 헤롯이 직접 목을 베었다는 언급과 침례 요한의 부활이라는 생각으로 두려워하는 헤롯의 모습은 그 이유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한다. 그 의문을 여기서 밝히고 있다. 이제 이야기는 14-16절의 시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가는 “전에”라는 시간부사를 사용하고 있다. 침례 요한이 헤롯에게 죽임을 당한 이유는 헤롯의 부도덕성에 대한 비판 때문이었다. 헤롯이 자기의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를 들은 것이 비판의 이유이다. 그 행위는 출 20:14, 17의 간음 금지와 동생의 아내와 결혼하는 근친상간(레 20:21) 금지를 범한 것이다. 사실 헤롯 가문의 가계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살인과 치정이 뒤엉킨 참으로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이뤄져 있다.
특히 본문에 언급된 헤로디아는 헤롯 대제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인 아리스토볼로스(Aristobolos)의 딸로서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빌립 1세(Herod Philip)의 아내 였으나 그 남편을 버리고 남편의 형제이자 자신의 이복 삼촌인 헤롯 안티파스와 재혼하였다. 따라서 침례 요한은 지도자의 범죄로 보고 과거의 예언자들처럼 단호하게 비판하였다. 즉 다윗 왕의 간음에 대해 나단이 비판하였던 것처럼(삼하 12:1-15) 또 지도자들의 죄악을 무섭게 비판했던 엘리야처럼(왕상 18:1-15, 21:17-29, 왕하 1:1-16, 대하 21:12-15) 침례 요한 역시 그렇게 했다. 특히 18절의 “말하되”(엘레겐)는 미완료 시상으로 침례 요한이 거듭해서 헤롯의 불의를 직고했음을 보여준다. 실로 침례 요한은 불의에 대해서는 권력의 힘도 개의치 않고 직언과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소명 의식에서 발동된 것이라고 본다(1:3). 이러한 침례 요한의 행동에 대한 헤롯의 첫 반응은 침례 요한을 옥에 가두는 것이었다.
마가는 침례 요한의 투옥처를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유대 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요한이 베레아 지방에 속하며, 사해 동쪽에 위치한 요새 마케루스(Machaerus) 산성의 감옥에 투옥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마가는 요한의 투옥 이유가 “그 여자”를 위한 것이었다고 전한다. 즉 헤롯이 헤로디아를 위해 침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이다. 이것은 아마도 헤로디아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24절에서 헤로디아가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아 그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19절에서는 헤로디아가 죽이고자 마음먹었음을 밝히고 있고 20절에서는 역시 요한을 죽이는 것에 헤롯이 반대하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헤로디아의 요구에 의해 요한이 옥에 갇혔음이 분명하다. 한편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요한의 투옥 이유 가운데 또 다른 이유는 그가 민중들에게 상당한 호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헤롯이 정적을 이찌감치 제거할 목적으로 투옥시켰다고 전한다. 어찌되었든 요한은 경건하고 의로운 메시아의 선구자이자 그 시대정신으로서 끝내 불의한 정치 집단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본문의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는 문자적으로 “헤로디아가 요한에게 원한을 계속(미완료 시제) 품고 있었다.” 더 나아가서 “헤로디아가 반드시 그를 처벌받게 할 것이다” 등의 뜻으로 헤로디아의 깊디깊은 적의를 소개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더 깊은 죄악(살인)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본장 20절 헤롯이,,,,두려워하여 보호하며,,,,달게 들음이러라. 19절에서는 헤로디아가 요한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반면에 20절에서는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 곧 아무런 범죄를 저지른 일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요한을 “보호하려는”(미완료 시제로 계속적인 헤로디아의 간청에 대해 헤롯이 거듭하여 요한의 신변을 보호해왔음을 암시) 사람으로 묘사되어 두 사람이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따라서 마가는 헤로디아를 상대적으로 매우 악한 여자로 부각시킨다. 이러한 묘사가 평행 구절인 마 14:5에서는 없고 다만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했다고만 밝힌다. 그러나 여기서는 오히려 헤롯이 침례 요한의 말을 듣고 요한의 비판을 긍정하면서(”달게 들음이라”) 내적으로 몹시 괴로워하는 매우 심약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마가는 이와 같이 헤로디아와 헤롯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헤로디아의 악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며 또한 헤롯의 선함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요한의 의로움과 거룩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즉, 요한으로부터 공격받은 헤롯이 직접 요한을 가리켜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요한의 의로움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이 단락은 헤롯의 생일잔치 (21절), 헤로디아의 딸의 무희 (22a절l, 헤롯의 요청(22b-23절), 헤로디아의 조언(24절l, 헤로디아의 딸의 요구(25절l, 헤롯의 사형허락(26-28절), 요한 제자들의 장사(29절)로 이어 진다. 결국 요한은 헤롯과 헤로디아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이 단락은 요한이 죽임 당한 것에 관하여 다른 복음서보다도 자세하게 서술한다. 이와 같은 자세한 설명은 요한을 죽이기 위하여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이 다. 즉 일시(헤롯의 생일 21절), 증인(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 21절), 동기(헤로디아의 딸의 춤에 대한 보답.22-25절) 정치적 제스처(요한 처형에 대한 근심과 허락 26-28절) 등이 준비되었다.
여기서 본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의인이 얼마나 허무하게 죽임을 당히는가를 알려 주는 것이다. 의인은 악인들에 의하여 장난거리로 죽임을 당한다. 헤롯은 소녀의 춤 때문에 요한을 죽인다.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귀인들은 요한의 죽음에 대해 침묵한다. 헤로디아는 딸의 춤의 대가로 요한의 목숨을 요구한다. 많은 경우 의인은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다. 도리어 의인은 보통 사람보다도 못하게 죽는다. 하지만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은 의인이 이렇게 장난거리처럼 죽는다 해도 그는 악인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두려움으로 살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헤롯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을 들었을 때 자신이 목베어 죽인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46. 바다야 잔잔해 져라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마태복음 8:23-27 아멘!!
23-27절의 본문은 호수에 돌발적으로 일어난 풍랑을 잠잠하게 하심으로 자연에 대한 예수 자신의 권세를 나타내 보인 사건이다. 예수는 하찮은 짐승이나 새조차 갖고 있는 보금자리 하나 없었지만(20절), 그는 대자연의 질서를 다스리시는 참 주인이셨다. 이 사건은 마가복음 4장 35~41절과 누가복음 8장 22~25절에 기록된 사건과 동일하다. 특히 마태복음에서 이 기록은 이들 복음서와는 다른 각도에 서 기록되었다. 첫째, 이 사건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제자도의 교훈과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에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8:18- 22). 이것은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사건을 제자도의 각도에서 이해할 필요성을 제공한다. 둘째 마태는 다른 복음서와는 다르게 풍랑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큰 지진에이스모스 메가스)이 바다에 있었다고 기록한다(24절). 셋째, 마태는 큰 지진으로 인하여 바다에 큰 파도가 일어나 제자들이 탄 배 가 위태롭게 되었을 때 제자들이 한 행동을 믿음의 각도에서 기록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배에 탄 것은 예수께서 배척한 두 제자의 모습과 반대되는 이름다운 모습이다. 또한 그들이 큰 지진으로 인해 격렬한 풍랑을 맞을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구원해 달라고 외친 것도 역시 제자들이 가져야 할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앙적인 모습에 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도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는 아니다. 그들에게 믿음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믿음은 불안과 걱정을 극복하지 못하는 적은 믿음이다. 더욱이 풍랑이 예수님의 한 마디 책망으로 잠잠해졌을 때 제자 들이 예수님께 보인 반응은 그들이 아직도 예수님의 정체에 대하여 마땅히 알아야 할 만큼 알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는 제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아직도 주님의 정체에 대하여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여전히 성숙해야 할 적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마가와 누가에 의하면 본문의 ‘그 사람들’은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이다(Meyer, Jerome, Nosger). 그러나 다른 배들도 함께 출발했기 때문에(막 4:36) 제자들 이외에 다른 배에 승선했던 사람들도 ‘그 사람들’ 속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다(Weiss). 놀랍게 여겨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그들이 예수의 기적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이는 자신들의 간구가 실제적이고도 완전하게 응답됨으로 말미암아 당황하고 놀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9:33, 14:33).
어떠한 사람이기에게와 같은 능력을 소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감탄의 말이다. 배를 침몰시키려는 파도와 폭풍우를 말씀으로 잔잔하게 하신 예수 앞에서 그들은 놀라고 놀라 그가 하나님 그 자신이심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제자 자신들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그분의 인격에 관한 지식이 참으로 보잘 것 없었음을 실토한 것인 동시에, 하나님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거센 파도와 폭풍우를 잠재울 수 없다는 고백이었다. 그리고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의 ‘순종하는가’란 말은 헬라어 원문에 의하면 ‘그에게 순종하는가’(아우토 휘파쿠우신)이다. 즉 ‘그에게’를 강조한 것이다. 이는 예수의 절대적 권위를 보이는 동시에, 창조주에 대한 자연계의 능동적이고 즉각적인 순종이 강조되어 있다. 이와 같이 자연계를 지배하는 것은 구약적 배경에서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시89:9, 107:25-30).
또한 마태는 풍랑이란 단어 대신 큰 지진이란 단어를 본 기록에서 사용한 것 은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의미심장하다. 마태복음에서 '지진' 이란 단어는 풍 랑 사건(8:24),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27:54)과 그의 부활(28:2)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첫 번째 지진은 예수님께서 배에서 주무시고 있을 때, 두 번째 지진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직후에, 세 번째 지진은 예수님의 부활 직전에 있었다. 즉, 큰 지진이 있기 전에 배에서 잠을 자고 계시던 예 수님이 잠에서 일어나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후에 이방 땅으로 성공적으로 가는 모습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이방 땅으로 건너가게 될 것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바로 예수께서 잠에서 깨어나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후에 가다라 지방에서 두 청년들에게서 군대귀신을 축출한 사건은 이러한 모습과 무관하지 않다.
47. 왕보다 앞서서 달려가자
41.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 소리가 있나이다 42.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엘리야가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43. 그의 사환에게 이르되 올라가 바다쪽을 바라보라 그가 올라가 바라보고 말하되 아무것도 없나이다 이르되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 44.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그가 말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 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이르되 올라가 아합에게 말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46.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그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열왕기상 18:41-46 아멘!!
17장 1절에 이미 약속된 바와 같이 18장 1절에서 다시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아합 앞에 나타날 것을 명하신다. 여호와의 말씀에 아합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그의 운명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그의 반응을 다루기 전 18장에 나타난 아합의 성격에 대해서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첫째, 아합은 비록 18:17에 서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라고 부르고 있지만 엘리야에게 적극적으로 적대적인 모습을 취하지는 않는다. 17:1에서도 그랬듯이 18~19장에서도 역시 별다른 위해를 가하려 틀지 않는다. 18:7~14에서 오바다가 걱정하는 바도 아합이 자기를 죽이려 들면 어떻게 하나 히는 것이지 결코 아합이 엘리야를 죽이려 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18~19장 어디에서도 아합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려 했다는 말은 없다.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언제나 이세벨이다(18:4, 13:19:2).
여호와의 선지자인 엘리야에 대한 아합의 이런 태도를 배경적으로 이해한 다음에 18:20~46의 갈멜산에서의 종교전쟁 및 그 이후의 진행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아합은 주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여호와 종교대신 바알종교를 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란 자신의 세속 적 목적들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만약 여호와 종교가 자신의 성공을 보장해준다면 그것을 택하고, 바알종교가자신의 성공을 보장해준다면 그것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아합은 자신의 세속적 목적, 즉 시돈과의 관계를 위해 결혼한 아내 이세벨의 강력한 바알종교 지지 및 여호와종교 박해를 수동적으로 방조한 것뿐이지 주동적으로 전면에 나서서 여호와종교에 반기를 들고 바알종교를 조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아훗이 방조 혹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으면 갈벨산에서의 여호와와 바알의 대결은 불가능했을 수가 있다. 첫째, 아합이 정말 엘리야를 죽이고자 했다면 엘리야는 아합과의 첫 대면부터 결코 안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둘째,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아세라 선지자들, 혹은 450명의 바알 선지자들을 홀로 상대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아합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면 대결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셋째, 대결 후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는 것도 아합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아합의 방조 속에서 행해진 야웨와 바알의 대결 속에서 엘리야는 승리를 거두고 바알 선지자들을 다 죽인다. 그리고 나서 엘리야는 아합에게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왕상18:41)라고 말하고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 기도를 한다. 곧 비가 내리자 그는 여호와의 능력이 임함을 받고 나서 아합의 마차 앞에서 줄곧 이스라엘까지 달려서 간다. 열왕기상 18:41~46의 이야기는 출애굽기 19~24장의 시내산 언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엘리야가 갈벨산 꼭대기에 가서 기도한 것과 아합에게 먹고 마시라고 말한 것 등은 전부 시내산 언약의 장면 곧 모세가 산꼭대기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과 장로들이 산 중턱에서 언약의 식사를 한 것(출 24:9-11)과 상응한다. 결국 엘리야가 아합에게 먹고 마시기를 권한 것은 여호와와의 언약의 식시를 상징적으로 권한 것이다. 이 초대에 응하는 행위는 아뺨1 바알을 버리고 여 호와를 돼함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아합이 이 초대를 받아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열왕기상 18:42은 아합이 올라가서 먹고 마셨다고 말하지 않고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하고 다소 모호한 표현을 쓴다. 아합이 정말 그 식사를 받아들인 것인지는 막연하게 남아 있다.
사실 18장의 모든 사건을 목도하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 진 것을 목도한 아합은 엘리야가 앞의 종교대결에서 기도한 바대로 해야 했다. 그는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 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리는 기도 및 그가 목도한 여러 가지 기적들 앞에서 사르맛 과부와 같이 반응했어야 했다. 아합은 사르맛 과부처럼 엘리야가 기도한 바를 자신의 입으로 고백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18장 마지막 부분의 아합의 반응은 막연하기 짝이 없다. 그는 단지 자신이 지금까지 목도한 바를 19:1에서 자기 아내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고 무대에서 사라진다. 다시금 엘리야를 위협하는 악역은 이세벨이 떠맡는다. 따라서 우리는 아합과 여호와의 말씀의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기 위해 나머지 20~22장을 마저 살펴보아야 한다.
결국 불로 응답받은 엘리야의 제단이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킨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이 쌓은 제단 위에 불로 응답되는 역사현장을 볼 때 백성들의 마음은 기경되고 갱신된다. 그리스도인들의 몸이 불의 제단에 바쳐진 향기로운 번제물이 될 때 일반 백성들은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 을 인정하게 된다. 바알과 야웨 하나님 사이에서 방황하던 백성들은 야웨가 참 하나님을 인정하고 엘리야에게 가까이 다가왔을 뿐만 아니라 바알 선지자 850명을 심판하는 엘리야를 도왔다. 백성들의 회개는 이내 갑자기 큰 빗소리로 이어지고 3년간의 가뭄과 기근이 끝났다. 회개하는 제단에 기도의 응답이 임했고 영적으로 황폐한 땅(심령)에 비가 내린 것이다t왕상 18:41~46). 온 백성들이 회개했을 때 많은 구름과 바람을 동반한 큰 비가 쏟아졌다. 엘리야는 손바닥 만한 구름조각이 수명선에 나타날 때까지 두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고 기도한다. 마침내 작은 조각구름을 보면서 큰 빗소리를 듣는다. 즉시 엘리야는 아합왕에게 큰 비 소식을 전달한다. 그때 야웨의 능력에 사로잡힌 엘리야는 허리를 동이고 갈멜산에서 이스라엘까지 약 50km의 거리를 왕의 수레를 호위하며 내달렸다.
엘리야의 부흥운동은 방황하던 백성들과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운동이었고 야웨 하나님께 다시금 굴복하도록 초청하는 강력한 영의 시위였다. 엘리야가 지속했던 3년 동안의 경건한 자기연마와 영적집중의 삶이 엘리야를 제단의 불꽃으로 태웠던 것이다. 영적지도자가 하나님의 제단 앞에 바쳐진 번제물이 되고 그 번제물 위에 하나님께로부터 불의 응답이 내려올 때 백성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급진적인 전향을 경험한다. 제물을 태우는 불꽃 속에서 장대비 같은 은총의 역사가 예기된다.
온 백성이 회개하여 자기 삶을 쪼개서 맛보는 장대비 부흥은 어떤 부흥사도 가져다 줄 수 없는 부흥이요, 어떤 영적 지도자도 열매를 독점할 수 없는 진정한 하나님으로부터의 부흥이다. 한국 교회는 이런 영적 부흥운동을 목마르게 기다린다. 하나님의 종들이 먼저 하나님의 번제단 위에 불꽃처럼 타올라서 향기로운 제물이 될 때(롬 12:1~2)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자복케 할 수 있을 것이다.
48. 라마나욧과 같은 교회
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사무엘상 19:19-24 아멘!
라마나욧은 “라마의 선지자 학교”란 뜻이다. 라마는 다윗의 출발지인 ‘기브아’(10:26)에서 북쪽으로 약 3.2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선지자 사무엘의 고향이자 그의 활동 중심지였다(1:1, 7:17).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에서는 사무엘보다 다윗을 앞서 언급하는 본 어구는 다윗이 이미 역사의 주역이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여기서 ‘나욧’은 ‘거처, 거주지, 초원지대’ 등의 의미를 가지는 아카디아어 ‘나움’에서 온 단어로서, 마치 오늘날의 기숙사와 같은 숙소 시설을 가리킨다. 이 같은 추정은 이 단어가 항상 특정 지명과 함께 언급된다는 사실로써 보다 분명해 진다. 즉 ‘나욧’은 사무엘이 자신의 주변에 모여드는 제자들을 수용키 위해 세운 기숙 시설을 가리키는 특수한 명칭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나욧’은 단순한 기숙 시설 이상의 ‘교육의 집’ 또는 ‘선지자 학교’란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리고 ‘나욧’이 ‘초원 지대’를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라는 사실은 이 교육을 위한 기숙사가 목자들이 거주하는 초원 지대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삼하 7:9, 렘 33:12). 아울러 ‘나욧’이 복수로 표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것이 여러 동으로 구성된 교육용 숙소 시설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라마나욧은 말씀이 충만한 교회였고, 위로가 충만한 교회였다. 다윗은 미갈의 도움으로 인해 사울을 피하여 도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영토 내에 있는 한 그의 목숨은 사울의 처분에 달려 있음이 분명하다. 사울은 그 당시에 온 이스라엘을 움직이는 절대 권력자였고 3,000명 군사들을 거느리고 다윗을 찾아 죽이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이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을 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 부은 하나님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삼상16:13). 다윗은 사무엘의 도움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라마 나욧은 하나님의 신실한 종 사무엘이 잇고, 말씀과 안식과 위로가 있는 곳이다.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안전한 곳이 없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라마 나욧처럼 믿고 위로 받을 수 있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또한 본장 23절과 24절은 보면 나욧은 은혜가 충만한 교회였다. 사울은 라마 나욧에 다윗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보내었는데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임하매 그들이 예언을 하게 되었다. 사울 왕은 3번이나 전령들을 보내었으나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신에 사로 잡혀 예언을 하게 되었고 다윗을 체포하기를 포기하게 되었다. 죽으면 죽으리라고 왕의 명령에 거역하였다. 다윗은 더 이상 피할 곳도 없는 절제절명의 위기 속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해 완벽하게 구원을 받게 되었다. 이제는 사울이 직접 라마 나욧으로 갔으나 사울 왕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걸어가며 예언을 하게 되었다. 그는 사무엘 앞에서 옷을 벗고 예언을 하며 벗은 몸으로 누워 잇게 되었다. 성령의 역사는 강팍하고 살인적인 사울의 심령 상태를 완전히 녹이고 불태워 버렸던 것이다. 라마 나욧에서 사울 왕 같은 사람까지도 은혜 받고 변화되는 역사가 이러났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사무엘 같은 사람들도 있고, 다윗과 같은 사람들도 있고, 사울과 같은 사람들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다 진리의 말씀과 교회를 통해서 변화되어야 한다. 사울의 전령들과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예언을 한 것처럼, 교회에서도 이런 은혜와 변화가 있어야 한다. 특별히 사울 같은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야 하고, 그리고 각 교회들이 변화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가야 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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